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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Milano
밀라노 도시정보
이탈리아 북부 최대의 산업도시 밀라노는 예술과 학문에 많은 역정을 두었던 피렌체나 볼로냐와는 다르게 예전부터 산업이 발달했다. 롬바르디아 지방 밀라노 주의 도시이자 주도이다. 이곳은 부유하고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도시이다. 파리를 제치고 세계적인 패션 도시로 인정받은 밀라노의 사람들은 다른 도시 사람들에 비해 부지런하고 꼼꼼하며 말수도 적다. 프랑스와 스위스 등 다른 나라와 가깝고, 이탈리아 남부와도 교통이 원활하게 연결되어 일찍부터 다양한 산업이 발달하였다.
1870년 이탈리아가 통일된 이후 밀라노 시민들은 여러 역사적인 이유로 밀라노가 수도로 되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실현되지는 못했다.
밀라노는 현재 이탈리아에서 가장 공업화된 경제 중심도시이다.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통일국가 성립 이후 경제, 문화, 사상의 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밀라노 시민들은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지역주의에 근거하여, 또한 전통과 현대가 잘 조화된 특성을 들어 밀라노가 이탈리아의 정신적 수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밀라노가 로마에 밀려 제2의 도시로 된 데에는 로마의 역사적, 신화적 상징적,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문예부흥의 흡수, 통합, 고전적 도시경관을 선호하는 경향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3:50분 롬바르디아 평야에 있는 밀라노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곳에는 멜라피오라는 슈퍼오렌지로 유명하고 두오모와 스칼라좌극장이 유명합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단어로
아모레(사랑),
만자레(먹고자하는 마음:식생활),
깐따레(노래하는마음)을 들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탈리아는 사랑과 식생활, 노래에 대한 습관적 문화가 베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롬바르디아 평야를 지나면서 나타난 마을이나 도시에는 어김없이 성당이 보인다.
한국에서 보는 교회의 “ † ” 탑의 숫자만큼 많지는 않지만 군데군데 높은 종탑은 과거 중학교시절 크리스마스 (X-MAS)카드에 그렸던 전형적인 성당과 종탑, 세례당의 구조였다.
그 풍경이 넓은 평야와 구름의 마을들과 어울려서 얼마나 한가하고 평화로워 보이는지 마음의 평안함을 주었다. 여행의 피곤함이나 이국적인 낯설음의 긴장도 모두 녹여주는 아름다운 경치였다.
■역사
유럽의 동서남북을 잇는 요충지에 있으며 롬바르디아라는 비옥한 평원의 중심에 위치한 밀라노는 지리적으로 상업 ․ 경제 도시로서 발전할 요소를 겸비하고 있다.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었지만 밀라노는 한때 제국의 수도로서 서방 그리스도교의 중심으로 번영했다. 이후 고트족 ․ 랑고바르드족의 이동 등으로 혼란스러웠으나 12세기경에는 사회의식이 싹트면서 일어난 코뮌 시대의 밀라노는 다시 그 중심 도시로서 번영했다. 도시의 중심 두오모에서 방사상으로 뻗은 도로는 이 시대에 지어진 성벽의 성문과 통한다. 북이탈리아에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온 것은 십자군의 동방 원정이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도시들은 저마다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른 도시를 정복하려는 싸움이 일어났다. 밀라노도 예외는 아니어서 1395년 이래 밀라노 공화국으로서 비스콘티가(家)와 스포르차가(家)의 지배를 받았다. 이러한 도시의 발달이 부유한 시민을 낳고 그들에 의해서 학예가 보호 ․ 장려되어 르네상스 문화가 개화했던 것이다. 신대륙의 발견 등으로 15세기 말에 무역체계가 크게 변하자 밀라노 등 이탈리아 각 도시는 침체하기 시작했다. 소국할거의 상황인 이탈리아 반도는 독일 ․ 프랑스 ․ 스페인 등의 침략과 공격을 받게 되며 1870년 이탈리아로 통일되기까지 긴 불행의 시대를 맞게 된다.
고딕 건축의 최고 걸작 두오모 Duomo로부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에 이르기까지 숱한 역사적 유산이 유럽에서의 그리스도교 역사의 한 부분을 말해주고 있다. 그 규모의 방대함에 놀라 사람들은 감동의 전율을 느낀다. 또 하나는 ‘밀라노 패션’이란 말까지 만들어낸 세계 최첨단 유행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예술인 패션이다. 세계 유행의 발신기지가 밀라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시내 곳곳에서는 패션 잡지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사람들이 이탈리아인 특유의 활달한 태도로 걷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두오모 성당
시내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는 화려한 밀라노 대성당은 중,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고딕 양식의 걸작이고 밀라노의 상징이다. 1386년에 당시 밀라노 공국을 지배한 Gian Galeazzo Visconti의 명으로 건축을 시작하였으나 이후 400 년이 지난 1809년 나폴레옹에 의해 길이 157m, 폭 92m, 높이 108.5m의 성당으로 완공되었다. 이것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 이어 세계 2번째의 규모를 자랑한다. 마치 숲을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고딕 양식에 135개나 되는 탑 하나 하나 마다 성자 조각품을 올려놓아 그 수가 무려 2~3천 정도에 이른다.
성당 내부는 대단히 높아 설렁하고 어둑어둑한 분위기를 내며 100m 높이의 유리 첨탑은 하늘로 치솟아 있다. 천장은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인상적이고 오른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나 계단을 옥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맑은 날은 알프스 산맥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성당의 지하는 벽돌 쌓은 길이가 4~8m의 공간으로 되어 있다.
그림 밀라노 두오모 성당
그림 성당내부
●두오모 Duomo
시내 중심에 위치한 두오모는 시내의 상징이며 밀라노의 배꼽에 해당한다. 두오모를 중심으로 3개의 환상선(環狀線)이 뻗어 있고 이 사이로 몇 개의 도로가 연결 되어 있다.
고딕 건축의 대걸작인 두오모는 수백 개의 청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뻗쳐 있다. 14세기 후반에 착공괴어 정면이 완성된 것은 19세기 초 나폴레옹에 의해서였다. 내부는 대단히 높아 썰렁하고 어둑어둑한 이 공간에 있으면 이곳이 일대 비즈니스 도시의 한가운데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이다. 천장 높이 장식된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는 보는 사람의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교회의 지하는 벽돌 쌓은 깊이가 4~8m의 공간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현재 두오모를 기초로 한 산타 레클라 교회의 자취를 볼 수 있다. 또 정면 안쪽 가까이의 입구에서는 옥상으로 갈 수 있다. 이곳에는 계단만 있으므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고 싶은 사람은 둘러싸인 옥상에서는 날씨가 좋은 날 기분 좋게 도시를 조망하기에도 적당하다. 두오모 정면 오른쪽의 Palazzo Reale 에는 두오모 박물관 Meseo del Duomo이 있는데 대성당을 장식한 조각 등의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갤러리아 Galleria V. EmanueleⅡ
두오모를 뒤로 해서 오른쪽은 높고 아름다운 아치형 유리 천장의 아케이트가 스칼라 극장과 통하고 있다. 1877년에 환성된 이 아케이트는 천장에 붙인 그림이라든가 보도의 모자이크 모양이 훌륭한 것이므로 빠뜨리지 말자. 길 양쪽에는 카페 ․ 레스토랑 ․ 서점과 햄버거 가게까지 있어 휴식을 취하는 시민과 관광객으로 항상 붐비고 있다. 거리를 벗어난 스칼라 극장 Piazza della Scala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상이 있다.
그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갤러리아 Galleria V. EmanueleⅡ
이 바닥에는 태양의 이동경로에 위치한 별자리 12궁도가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었다. 황소(Taurus)는 그 별자리 중 일부였다. 그것은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별자리 이름이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황소의 성기 부분만 유독 움푹 패여 구멍까지 뚫려 있었다. 언젠가 책에서 이 황소자리에 대해서 읽었던 기억이 났다. 이곳은 사람들이 모여서 별점을 치듯이 소원을 비는 곳이었다. 황소의 성기 부분을 신발의 뒤꿈치로 찍고 돌면 자신이 바라는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면 몸이 건강해지고 왼쪽으로 돌면 자신이나 가족이 바라는 시험에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1바퀴를 돌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3 바퀴를 돌아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어서 몇 바퀴를 돌아야 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많은 관광객들이 구멍에 발을 넣고 돌리고 돌리고 계속 돌렸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돌고 돌아서 이 구멍은 일 년에 3차례 정도 보수공사를 한다고 한다. 이 갤러리아에 모인 관광객들의 행동을 보니 보수 후에도 황소의 성기는 바로 구멍이 나버릴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상에 유래가 없는 기복신앙이었다. 태양이 지나는 길의 별자리들은 사람의 운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의 점성술일 뿐이다.
●스칼라 극장 Teatro alla Scala
그림 스칼라 극장 Teatro alla Scala
레오나르도 상이 있는 정면 건물이 오페라의 전당인 스칼라 극장이다. 1778년에 산타마리가 델라 스칼라 교회의 터에 세워진 건물인데 1943년의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46년에 재건된 것이다. 기회가 있다면 오페라 감상도 해보기 바란다. 또 내부에는 스칼라 극장 박물관 Museo Teatrale alla Scala이 있고 악보 ․ 의상 등의 전시와 극장 내부를 볼 수 있으므로 공연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브레라 미술관 Pinacoteca di Brera
밀라노를 대표하는 회화관으로 특히 15~18세기의 롬바르디아파나 베네치아파의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북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라파엘로 Rapahaello의 <성모 마리아의 결혼>이나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의 <피에타> 등이 있다.
그림 라파엘로 Rapahaello의 <성모 마리아의 결혼>(좌)
그림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의 <피에타>(중)
그림 만테냐Mantegna의 <죽은 그리스도 Cristo morto>(우)
북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만테냐Mantegna의 <죽은 그리스도 Cristo morto>에서는 중부 이탈리아 르네상스와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은 원근법을 이용하여 누워 있는 그리스도 눈의 높이를 고정 시킨 뒤 발에서부터 그린 독특한 것이다. 이밖에도 틴토레토Tintoretto ․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 ․ 베로네세 Veronese 등의 작품이 중요하다.
●폴디 페촐리 미술관 Museo Poldi Pezzoli
폴라이우올로 A. Pollaiuolo작의<여성의 초상>, 크라나흐의 <마르틴 루터 부처의 초상>, 만테냐 등의 작품을 비롯하여 15~19세기의 회화 ․ 무기 ․ 태피스트리 ․ 가구 ․ 벽시계 ․ 브론즈상 ․ 보석 등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다. 저택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것이기 때문에 생활의 취미를 엿볼 수 있다. 밀라노 상류 계급의 생활도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미술관이다.
그림 폴디 페촐리 미술관 Museo Poldi Pezzoli 그림 크라나흐의 <마르틴 루터 부처의 초상>
그림 폴라이우올로의 작품<여성의 초상>
●암브로시아나 회화관 Pinacoteca Ambrosiana
롬바르디아파와 베네치아파의 회화가 중심을 이룬다. 그 중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의 <음악가 Musicista>. 라파엘로의 작품<아테네 학당>의 카르토네(밑그림용 데생)나 카라바조 등 거장들의 데생이 많다.
그림 암브로시아나 회화관 Pinacoteca Ambrosiana(좌)
그림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의 <음악가 Musicista>(우)
그림 라파엘로의 작품<아테네 학당>의 카르토네(밑그림용 데생)
●스포르체스코 성 Castello Sforzesco
노르도 역을 뒤로 한 왼쪽에는 스포르체스코 성이 있다. 스포르체스코 성(이탈리아어: Castello Sforzesco)은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있는 성채로, 지금은 도시 박물관과 예술품 전시장으로 쓰이고 있다. 14세기 부지 위에 최초의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본래 비스콘티 가의 성채를 1450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스포르체스코 성을 개축하였으며, 후세 사람들에 의해 한층 더 개축되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이 건축에 참가했다고 한다. 1466년에 환성하였으나 안에는 몇 개로 나눠진 시립 박물관 Civici Musei del Castello이 있고 미켈란젤로가 죽기 며칠 전 제작했다고 하는 <론다니니의 피에타>가 있는 미술관 Museo Artistico의 조각 부문(1층)이 있다. 그 외 2층에는 회화 ․ 악기 컬렉션과 지하의 이집트 유물을 전시한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19세기 이탈리아의 통일 이후, 밀라노를 점령한 군대가 도시의 권리를 양도 받고나서 성채의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 복구 작업은 루카 벨트라미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정문 입구 위에 있는 중앙의 필라레테 탑은 움베르토 1세 국왕을 기념하기 위한 건조물로서 1900년에서 1905년 사이에 재건하였다. 스포르체스코 성은 제2차 세계 대전 도중인 1943년에 연합국 측의 폭격을 받아 심하게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탈리아의 건축 모임 BBPR에 의해 박물관 용도의 건물로 개축되었다. 성에는 현재 5개의 박물관이 있다. 성 옆에는 여름철에 무료 야외 공연장으로 사용되는 피크닉 공원이 셈피오네 공원(Parco Sempione)도 있다. 공원에서는 이탈리아의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휴식할 수 있다. 녹색이 많은 공원이므로 수목 아래의 벤치를 확보하는 소풍 온 기분으로 점심을 먹는 것도 좋을지 모른다.
그림 스포르체스코 성
그림 스포르체스코 성 해자
그림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 피에타’ 상. 그림 셈피오네 공원(Parco Sempione)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 Santa Maria delle Grazie
노르도 역전을 달리는 보카치오 거리 Via Boccaccio를 200m 정도 가서 왼쪽으로 돌면 갈색의 큰 교회가 보인다. 교회는 밀라노 전성기의 그림자를 짙게 남기고 있는 마젠타 거리 Corso Magenta에 면해 있다.
그림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 Santa Maria delle Grazie와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 빈치 기념 국립 과학 기술 박물관
Museo Nazionale della Scienza e della Tecnica 'Leonardo da Vinci' 다 빈치에 관한 전시실 이외에 천문 ․ 농업 ․ 전기 ․ SL 차량 20대 등도 전시되어 있다. 16세기에 세워진 수도원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것으로 건물의 아치를 훼손시키지 않은 전시방법은 높이 살만하다.
그림 레오나르도 다 빈치 기념 국립 과학 기술 박물관Museo Nazionale della Scienza e della Tecnica 'Leonardo da Vinci'
■기타 관광 명소
밀라노에 있는 교회 중 꼭 보아야 할 것은 산타 암브로조 성당 S. Ambrogio으로 11세기 롬바르디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된 안뜰이 뛰어나다. 이 성당에서 주의해야 할 곳인 제단 오른쪽의 예배당은 비잔틴 영향을 느낄 수 있는 모자이크로 덮여 있다. 이 성당을 수호하는 성인 성 암브로조는 4세기의 사람으로 이때 모자이크가 전성기를 이루었다. 밀라노에 남아 있는 진기한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미술이다.
그림 산타 암브로조 성당 S. Ambrogio 성당
이외에 시내 남쪽에는 산테우스토르조 성당 S. Eustorgio이 있다. 이 성당은 도메니크파가 9세기에 창립했으며 이곳의 포르티나리 예배당 Cappella Portinari 은 반드시 보아야 할 곳이다. 그곳에는 포파 Foppa 의 프레스코화 <산 피에트로의 생애>가 그려져 있고 주위에는 <춤추는 천사들>의 그림이 화려해서 르네상스의 보석이라 할 만큼 뛰어나다. 산테우스토르조 성당의 바로 남쪽, 포르타 티치네세의 문 Porta Ticinese을 넘으면 항구Darsena과 운하 Naviglio가 보인다. 그 주변은 밀라노 변화가의 그림자가 지금도 남아 있는 곳으로 옛날에 세탁장이 있었는가 하면 젊은 예술인들의 작업장이 있기도 한 재미있는 곳이다. 6월 첫째 일요일에는 운하제가 거행되고 시끌벅적한 재즈 연주와 포장마차들이 거리에 나온다. 또 매월 한 번 골동품 시장이 열린다.
그림 산테우스토르조 성당 S. Eustorgio 그림 운하 Naviglio
로마네스크 미술 Arte romanica
11세기의 도시가 발전함에 따라 로마네스크 미술도 개화한다. 그리스도교적 노동관, 즉 인간은 매일 매일의 노동으로 정신적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은 빈약한 소재를 인간의 노동에 의해 가치 있는 것으로 변화시킨다. 건축에서는 그때까지 대리석이 주 소재이던 것이 벽체로 바뀌고 조각에서의 대리석 역시 흔한 석재로, 회화에서는 값비싼 모자이크가 프레스코화로 바뀌었다. 자치도시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은 대성당이다. 대성당은 단순히 종교적 역할뿐만 아니라 로마 시대의 집회장이었던 바실리카처럼 시민이 시정을 논하고 때로는 장사도 하는 곳이었다. 밀라노의 산타 암브로조 성당Sant'Ambrogio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밖에 대표적인 성당은 베로나의 산 제노 성당Sanzeno, 피렌체의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성당San Miniato al Monte, 피사 대성당Duomo di Pisa, 루카의 산 마르티노 성당San Martino, 피스토이아의 산 조반니 포르치비타스 성당 San Giovanni fuorcivitas, 남이탈리아에서는 안코나의 산 치리아코 성당San Nicola, 시칠리아의 체파르 ․ 몬레아레 대성당을 들 수 있다. 롬바르디아 양식으로는 북이탈리아의 모데나 ․ 페랄라 대성당이 있다. 회화에서는 비잔틴의 영향을 받은 베네치아와 시칠리아의 모자이크화가 특기할 만하다.
아시시 Assisi
올리브 언덕 위, 주위에 펼쳐진 녹색 평야를 내려다보는 아시시는 12세기의 청빈한 성자 성 프란체스코의 고향이다. 이곳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방탕한 생활을 보내던 그를 경건한 종교의 세계로 이끈 것은 풍부한 자연이다. 올리브와 삼나무 빽빽한 녹음 속에서 개들은 지저귀도 사람들은 성자의 모습을 찾아서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모여들고 있다.
●산 프란체스코 성당 Basilica di San Francesco
2층으로 된 성당으로 1230년에 완성된 아래층은 천장이 낮아 장엄하며 시모네 마르니티의 <산 마르티오의 생애 La vita di San Martino>, 치마부에의 <성모자와 산 프란체스코 Madonna con Angeli w San Francesco>등 뛰어난 중세 회화가 있다. 계단을 더 내려가면 성 프란체스코의 묘가 있는 지하실이다. 이 성당 앞 광장에는 아치의 회랑이 몇 군데 있어 이 도시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1253년에 완성된 위의 성당은 밝고 취향이 다르다. 이곳은 조토의 프레스코화 미술관이다. <새들에게 설교하는 산 프란체스코>를 비롯하여 그의 생애를 담은 에피소드가 28장면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림 산 프란체스코 성당 Basilica di San Francesco과 새들에게 설교하는 산 프란체스코
●산타 키아라 성당 Basilica di Santa Chiara
흰색과 분홍의 대리석으로 된 자그마한 성당이다. 성프란체스코의 충실한 사도였던 산타 키아라에게 바쳐진 성당이다. 내부 지하실에는 그녀의 유체를 비롯해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산타 키아라의 유품을 설명해 주는 아름다운 수녀가 산타 키아라를 생각나게 한다.
그림 산타 키아라 성당 Basilica di Santa Chiara 그림 산 다미아노 수도원 Convento di San Damiano
●산 다미아노 수도원 Convento di San Damiano
성 프란체스코가 이곳에서 수도생활로 인도하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재생을 기도했던 장소하고 한다. 그의 사도였던 산타 키아라가 살며 신앙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서 있는 산 다미아노 성당은 검소한 건물이지만 아직도 그들의 정신은 살아 있다.
에트루리아 미술 Arte etrusca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문화와 거의 같은 시대에 중부 이탈리아 지방의 티레니아 해 연안에 에트루리아인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그들은 소아시아가 기원이라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고 다만 이미 BC 8세기부터 문화적으로 훌륭한 것을 남기고 있으며, BC 4~3세기에 호마의 세력 하에 들어가서 BC 1 세기경까지 로마 문화의 핵심을 이루었다. 돌 쌓는 법과 아치 구조는 로마 건축에 채용되었다 그 예로 볼테라 ․ 페루자의 성벽이 있다. 현상을 실제적인 것으로 여겼던 에트루리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극히 신비적이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사후의 세계에서도 현생과 똑같은 상태를 유지하려는 묘실 예술이 번창하여 벽에는 프레스코로 신화 ․ 경기 ․ 향연 ․ 무도 ․ 수렵 등 즐거운 장면을 그려 놓았다. 조각에서도 도관(陶棺)을 장식하는 대형의 초상 조각의 인물이 인상적이다. 그리스 예술의 영향을 받았지만 기본적으로는 반고전주의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어 로마 예술의 근원으로 남아 있다. 유적은 체르베테리ㆍ타루퀴니아를 비롯하여 아레초ㆍ코르토프ㆍ키와츠 등에 남아 있다.
그림 고딕 건축양식
‘가이드’는 밀라노의 역사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다. 이 지역에서 1395년 이래 밀라노 공화국으로써 비스콘신가(家)와 스포르차가(家)의 지배를 받았는데 스포르체스코 성의 성곽이 유명합니다. 퇴치노와 아다지오에서 흐른 강물은 포장을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에 밀라노가 위치합니다. 인구 130만의 상공업 도시로서 롬바르디아 평야를 낀 주의 주도입니다. 트리노의 피아트사본부를 제외하고 기업 본부 대부분이 위치하고 외국자본이 50%이상 차지하는 이탈리아의 거점도시. 전진기지입니다. 이 도시의 수호성인은 374년의 성 암부로시오주교로 정하였다. 밀라노와 만토바. 베르가모 등의 룸바르디아 주의 중심도시였고 5~6세기경 훈족, 고트족, 론고 바르드 족의 연속된 침입으로 도시가 파괴되기도 하였으나 샤르마니아 프랑스귀족, 11세기 롬바르드족, 12세기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프레드릭 황제, 그리고 최초의 르레상스 인물들이 도시를 발달시키고 학예를 보호 장려하여 르레상스 문화가 개화되었다. 이때 정신적인 선도를 이끌어간 두 명을 꼽는다면 프레드릭 황제 2세와 이지시가 고향인 성프란체스코를 들 수 있습니다.
프레드릭 1세의 세금징수를 밀라노는 거부하게 되고 그 이유로 황제의 진압이 시작되었으며 그로 인한 <롬바르디아 동맹>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비스콘티 가문에서 스포르차 가문으로 그리고 스포르차의 전쟁영웅 아돌프 아펜젤로와 그릐 아들 프란치스코 스포르차까지 이어지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되고 다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며 통일 되기까지 스포르체스코성은 긴 불행의 시대를 갖게 됩니다. 밀라노는 90년역사의 오렌지색 전차로도 유명합니다. 시내 곳곳에는 전차의 레일이 깔려 있었고 수시로 오렌지색의 전차를 볼 수 있었다. 밀라노에 들어서면서 그 역사의 성곽과 동상들이 넓은 공원과 함께 차 창문을 통해 드러났다. 도시의 아름다움과 여유를 주는 녹지 공원은 우리의 여건을 생각하면 부러움의 대상이다.
약간 피곤함이 더하는 여정에서 우리 일행은 스포르체스코성에 도착하여 앞 광장의 분수대를 끼고 성의 역사와 예술적 분위기에 압도되고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고 예의 몇 분이 꾸어졌다. 아내와 나는 부지런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이성의 주 관전 ‘POINT'는 성곽과 ’미켈란젤로‘인 것 같았다. 성의 맞은편 끝 공원까지 갔다가 거대한 공원안을 구경하고 다시 성으로 돌아오면서 성곽 밑의 깊은 ’해자‘를 보면서 외침으로부터 성을 지키려는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성곽을 따라 내부 격실들에는 과거 그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그 가문들의 갑옷과 칼 등의 병장기를 유리창으로 통해 볼 수 있었고 오후 늦은 시각이었는지 ’미켈란젤로‘ 관련 행사가 있다는 것 같으나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성 내부를 구경하고 시간이 다 되어서 예의 약속장소에 나오니 이미 일행들이 모여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인들이라 15분전 모이는 것은 정확하기로 하거니와 별 구경거리가 안 되었던지 모두 일찌감치 모여서 아내에게 눈치한 모양이다. 그러다보니 시간에 늦지 않고도 괜히 미안해졌다.
앞의 ’단테거리‘에 가면 성곽을 배경으로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다는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우리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거리 중앙에서 ‘스포르체스코’ 성곽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과 개별사진을 찍고 바로 바삐 걸어서 ‘임마누엘레 2세’ 화랑을 지나서 ‘스칼라극장’ 유래와 공연,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동상’과 시청 건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에 대한 짧은 소개가 있었고 그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하여 설명했는데 어려웠다.
피곤해하는 아내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잠시 건물 계단에 앉아서 쉬었다. 우리는 다시 ‘임마누엘레2세’ 화랑을 걸어서 ‘두오모 식당’ 으로 나갔다. 화랑 ‘†’자로에는 소의 국부에 발굼치를 대고 정확히 한 바퀴 돌면 행운이 있다 해서 서로 번갈아 가면서 했다.
나도 순서를 기다려 보았다. 무엇보다도 기회이니까. 성당은 대리석의 때를 벗기느라 좌면 전면을 모두 가림판으로 덮어씌워졌다. 성당은 고딕건축의 대표이고 최첨탑에는 금빛 ‘성모 마리아상’이 있었다. 광장 또한 무슨 공연준비 중이었는지 의자가 깔려 있었고 많은 인파로 번잡했다. 설명을 듣고 ‘임마누엘레 2세’ 회랑, 두오모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비가 내렸으므로 아내와 나는 일찌감치 만나는 장소로 갔다. 사실 ‘가이드’가 아내에게 말했던 맞은편 3층 커피숍에 가면 ‘두오모 성당’의 첨탑을 내려다 볼 수 있다는 말에 잔뜩 기대한 아내가 은근히 그 시간을 기대했기에 그랬으나 시간적 여유가 없고 다른 일행은 ‘두오모 성당’에 대한 의미를 높게 두지 않았으므로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비가 오는 중에 기다리니 그곳 청소년들이 옆에서 줄을 이용한 ‘야광도르레’ 놀이를 거의 예술에 가깝게 잘한다. 잠시지만 그들의 놀이에 지루함 없이 시간을 보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쇼핑을 겸한 일행들이 모여서 우리는 광대하고 매우 충격적인 문화적 충격을 던져준 이탈리아 관광을 마치게 되었다.
다음 여정인 ‘스위스’로 가기위해 다음 숙소로 이동해야 했다. 차량은 우리가 보지 못했고, 접하지 못했던 성곽과 일부 남아있는 개선문, 두오모와 비슷한 규모의 성당들을 차창으로 보여주면서 시내를 벗어난다. 밀라노를 소개하면서 ‘가이드’는 ‘만토바’를 말했는데 이 두 도시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등장하고 인물들과 연관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여정과 시간에 쫒기듯 우리의 계획은 빠듯했고 시차적응이 아직 남아있어서 몹시도 피곤한 오후 늦은 시각에 밀라노 근교의 ‘리’호텔에 도착했다.
만토바
북이탈리아 르네상스 중심지였던 만토바는 그 예술적 번성이 이웃나라 페라라에서 시집온 이사벨라데스테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녀는 교양 높은 만토바 후작부인으로서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의 궁정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교황도 그녀를 무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사벨라는 뛰어난 화가나 시인들을 모아 예술 살롱을 만들고 고아한 문화향기가 넘치는 여주인으로 군림했다. 만토바에서는 이사벨라가 예술에 끼쳤던 영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삼면이 호수로 둘러싸인 작으면서도 예술의 도시로서 번성했던 곳 만토바는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의 무대로서 이탈리아인·독일인 관광객이 많은 곳이다. 만토바는 역 앞의 왼쪽으로 나와 오른 쪽으로 꺾어 비교적 새로운 상점가로 가면 넓은 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거리Via Vittoro Emanuele Ⅱ가 나온다. 이곳 왼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에르베 광장Plazza delle Erbe이 나오고 그 끝에 두칼레 궁전과 두오모가 있는 소르델로 광장Piazza delle Sordello이 나온다. 시의 중심에서 에르베광장까지는 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린다. 만토바는 걸어서 돌아 볼 수 있는 도시이다. 붉은 기와, 황토색 벽, 차분한 중세의 거리, 로마시대 때부터 있던 둥근 자갈 길 등이 만토바 만의 개성을 물씬 풍기고 있다. 예전에는 본토와의 사이에 큰 운하가 있었다고 한다.
●에르베 광장 Piazza delle Erbe
에르베 광장은 매일 차임 활기에 넘친다. 야채 ․ 과일 등을 파는 시장이 큰 파라솔 밑에서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볼 만한 성당이 두 채 있다. 산타 안드레아 성당 Sant' Andrea는 크고 둥근 지붕에 높은 종루가 있는 고전적인 르네상스 건축으로 조화된 아름답고 큰 성당이다. 예배당에는 이 고장 태생의 만테냐Mantegna의 묘가 있다. 산 로렌초 성당 S. Lorenzo은 에르베 광장의 옆, 라조네 궁전의 옆에 위치해 있다. 작은 벽돌로 쌓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원당 내부는 놀랄 만큼 단순하며 신성한 분위기이며 몸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계단을 올라 2층으로도 갈 수 있다. 마음이 깨끗해지는 장소이다.
그림 에르베광장, 로렌초 성당, 안드레아 성당
소르델로 광장Plazza delle Sordello
●두칼레 궁전 Palazzo Ducale
자그마한 만토바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곤자가 집안의 궁전이다. 궁전 ․ 성 ․ 산타 바바라 교회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방이 총 500개에 이르는 초호화판 궁전이다. 모두 보자면 1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틴토레토 ․ 그레코 ․ 루벤스 등의 많은 명화가 있는 미술관 Galleria과 라파엘로가 디자인 했다는 훌륭한 태피스트리 방, 베르사유와 같은 거울의 방, 별자리가 그려진 우주의 방, 작게 만들어진 소인의 방 등이 있다. 유명한 만테냐의 벽화는 성의 ‘결혼의 방 La Camera degli Sposi’에 있다. 창에서 보이는 정원이 이 궁전의 복잡한 건축방식을 이야기해 준다. 이사벨라 데스테에게 어울리는 궁전이다. 미로여서 몇 명씩 안내인과 함께 돌아야 한다. 방에서 방으로 옮겨가는 복도에는 곤자가 집안 조상들의 인물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어 중세로의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다.
그림 소르델로광장, 두칼레 궁전, 두오모
●두오모 Duomo
두칼레에서 약간 비스듬하게 맞은편에 서 있다. 우아한 흰 대리석으로 된 정면은 16세기의 것이고 줄리오 로마노도 장식을 담당했던 내부는 주제단 주위에 12개의 제단이 있다. 주제단에는 12세기의 승려, 안셀모의 미라가 흰 제복에 싸여 누워 있으며 그 본이 뛰어나 기적이라고 불린다.
●리골레토의 집 Casa di Rigoletto
두오모의 뒤쪽에 있다. 벽에 격자로 들어앉은 창을 통해 정원의 리골레토 상을 볼 수 있다. 내부는 갤러리로 쓰인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로 유명한 오페라<리골레토>는 호색한 만토바 후작을 죽이려는 광대 리골레토가 자을 고용했으나 이것을 눈치챈 딸이 사랑하는 후작을 위해 대신 죽게 된다는 내용이다. 딸인 줄 모르고 시체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호수에 던져 넣는다는 리골레토의 내용은 비극적이다.
그림 리골레토와 테 궁
■테 별궁 Palazzo Te
줄리오 로마노가 설계했다. 이사벨라 데스테의 아들 페데리코가 다른 사람의 아내였던 애인 라 보스데타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여름의 궁전에 어울리는 널찍널찍한 정원과 화려한 내부는 장식 과다로 기괴할 정도이다. 화려한 연회홀, 속힘 회화적 수법이 재미있는 말의 방 ․ 거인의 방이 유명하다. 또 건물 한 모퉁이에서는 현대 미술과 고대 이집트 미술의 전시를 병행하고 있다. 이 밖에 볼만한 곳은 테 별궁의 북쪽 400m 정도에 있는 만테냐의 집과 곤자카가 미술관 등이다. <리골레토>의 자객, 스파리프칠레의 집은 성에서 호반으로 뻗은 산 조르주 다리를 건너면 있다. 이곳에서 보는 만토바 성의 조망이 인상적이다.
만토바 후작부인 이사벨라 데스테
'Nec spe nec metu 꿈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이 말은 만토바의 두칼레 궁전에 있는 그녀의 서재에 쓰여 있는 말이다. 그녀는 이 모토대로 살아갔다. 이사벨라는 페라라의 중급 에스태가(家)에서 태어나, 만토바의 중급 곤자카가(家)로 시집왔다. 1개월 차이로 대국 밀라노에서의 구혼을 동생에게 빼앗겨버린 것이다. 타고난 재능에 교양이 풍부한 야심가였던 그녀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녀는 동생에게는 없는 교양과 명성으로 이름을 날리겠다는 생각에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힘껏 예술을 비호하고 대담 ․ 냉정한 합리주의로 만토바와 페라라를 지켰다. 그리고 보르지아가의 형제들 중 체자레의 정략에는 경의를 표하고 남편과의 관계로 인해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에게는 경멸로 대하였다. 만년에는 유명한 사코 디 로마(로마 약탈)의 가해자 측에 가담한다.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영지를 지키며 65세의 일생을 정치에 바쳤다.
그림 다빈치의 이사벨라, 티치아노의 이사벨라 초상
파비아 Pavia
밀라노의 남쪽 35km 에 위치한 파비아는 농업과 경공업에 있어서 롬바르디아 주의 주심이며 활기찬 마을이다. 중세 초기에는 람고바르드 왕국,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로서 번영했으며 12~13세기의 자유도시 시대를 지나 14세기에는 밀라노의 비스콘티가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 문화와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파비아의 북쪽 9km 의 지점에는 비스콘티가의 존 갈레아초의 명에 의해 14세기 말에 시워진 화려한 파비아 수도원 Certosa di Pavia이 있다.
그림 파비아 수도원
중세 이래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유적이 거리에 산재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브라만테가 설계에 참가했던 두오모Duomo는 이탈리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이다. 15세기에 착공한 롬바르디아 르네상스 양식이지만 정면은 19세기 말에 완성 되었다.
그림 파비아 두오모
이밖에 대대로 람고바르드 왕국(6~8세기)의 대관식 때 이용되었던 산 미켈레 성당S. Michele은 바닥의 모자이크와 정면의 부조가 아름답다. 단테의 <신곡>에도 등장하는 산 피에트로인첼도로San Pietroin Ciel d'oro에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관Arca di Sant' Agostino이 있다. 도시 북쪽에는 비스콘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광대한 성 비스콘티 성Castello Visconteo이 남아 있고 성 안에는 시립박물관Museo Civico과 고고학 박물관이 마련되어 있다. 피에몬테 주는 스위스 ․ 프랑스의 국경과 알프스 ․ 아펜니노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포 강유역의 광대한 파다나 평야를 끼고 있다. 이 일대는 이탈리아 최대의 벼농사 지대이고 토리노 남쪽의 몬페라토 언덕은 와인과 치즈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주도 토리노는 피아트 자동차를 생산하는 공업도시인 동시에 세련된 기풍의 문화도시이다.
피에몬테 주의 요리
●피에몬테 주 요리
피에몬테 Piedi di Monti 란 산기슭을 의미한다. 프랑스와의 경계에는 알프스 산맥의 험준한 산들이 이어지고, 그 아래로는 이탈리아 굴지의 벼농사 지대인 광대한 평야가 펼쳐진다.
이곳의 요리는 자연식품이 많다. 특산물인 쌀을 비롯하여 산토끼 ․ 꿩 등과 버섯, 그리고 맑은 물에서 잡은 민물고기 등이 식탁에 오른다. 그리고 이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식탁의 다이아몬드’ 라 불리는 알바의 화이트 토리프Tartufo Bianco(하얀송로버섯)이다. 향기가 진하고 산출량이 많지 않아서 귀하며 가을부터 겨울에 걸친 특미라 할 수 있다. 알바에 있는 레스토랑에서는 모든 요리를 토리프로 만든 특별식으로 제공하는 곳도 있는데, 이곳은 이탈리아 각지에서 찾아드는 미식가들로 항상 붐빈다. 음식의 재료나 조리방법은 프랑스요리에 가깝지만 전반적으로 마늘의 향기가 강하고 전채의 종류가 풍부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명물 요리로는 우선 이탈리아판 퐁뒤 Fonduta를 꼽을 수 있다.
그림 타르투포가미한 파스타, 송로버섯, 오일 퐁뒤
오일 퐁뒤 Bagna Caὄda도 유명하다. 마늘ㆍ안초비ㆍ백 토리프ㆍ버터ㆍ올리브유로 만든 소스를 식탁에서 즉석으로 불에 얹어 끓이다가 걸쭉해지면 각종 생야채를 넣어 먹는 것이다. ‘왕의 와인, 와인의 왕’이라는 바롤로 Barolo를 비롯하여 바르바레스코 Barbaresco, 바르베라 Barbera 등 품질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이곳에서는 와인을 이용한 요리가 많이 개발되어 이 지방의 별미로 알려지고 있다.
관광4일차
06:30분 우리 일행은 일찍 서둘렀다. 우리 부부는 일찍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짐을 꾸려 현관에 나오니 일행들이 하나둘 모여서 아침식사용으로 마련한 빵봉지를 배급 받았다. 간단히 가면서 요기하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다음 목적지 스위스 샤모니 몽블랑을 관광하기 위해서 240km 약 3시간 30분을 차로 이동할 계획 이었다. 고속도로에 오르자 이정표에 ‘토리노’란 지명이 자주 등장했다. 도로는 ‘토리노’를 향하다가 ‘이오스타’계곡을 통하여 ‘몽블랑’으로 가기 때문이다. ‘토리노’는 이탈리아 북부 공업도시로써 ‘PIAT'자동차의 본산지이며 동계올림픽이 개최된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가이드’ 는 토리노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을 하였다.
스위스 국경지역으로 접어들자 험준한 산들과 깊은 계곡이 나타났고 조그만 땅이라도 있을라치면 어김없이 포도밭을 일구어 재배하고 있었다. 도로는 높은 산골을 따라 ‘지그재그’로 오르며 깊숙이 달렸고 차창 밖의 경치는 달력속의 한 폭의 풍경화 그대로였다. 산위의 성벽이 군데군데 형성되어 있었고 우거진 삼립과 함께 낭만적 풍경을 자아냈다. 낮은 지대의 마을 집들도 울타리를 돌로 쌓았으며 북쪽이어서 그런지 지붕의 경사가 급했고 면적이 컸다. 그것은 눈이 많이 오면 자연스레 미끄러져서 지붕의 하중을 줄이려는 것이고, 짧은 일출 일광에 많은 면적으로 채집함으로써 집안의 온기를 갖으려는 그곳만의 지혜의 산물인 것이지만 이국적인 정취와 주변은 산과계곡, 그리고 폭포들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냈다. 높은 산에서부터 떨어지는 폭포의 장관, 그리고 듬성듬성 산비탈의 가옥과 가옥 뜨락의 가지런한 나무땔감, 가파른 언덕을 연한 포도나무와 밭들의 오밀조밀한 구성, 그 밑으로 이어지는 계곡과 하천들은 흰 포말된 물결 흐름들은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좁은 계곡으로 협궤 열차레일이 깔려 있었으나 기차는 보이지 않았고 조그맣고 아담한 기차역이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을 연하여 그야말로 아름다운 빌라가 잘 지어져 있었다. 산 중턱쯤을 연하여 버스는 계속 달리다 앞에 보인 산의 정경이 산의 정상과 연하여 등선이 수평으로 수 km 일직선으로 나타나고,그 일직선 등선 7부 능선으로 마음들이 들어있어서 자연이 그토록 칼로 자른 듯이, 자를 대고 수평으로 그은 듯이 형성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과 함께, 무엇보다도 지금가지 인간이 이루어진 작품들에 감탄했던 그 마음에 우선하여 나에게 역시 ‘하느님의 작품’은 감히 인간들이 흉내 낼 수 없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적 풍경은 감탄을 자아냈다.
이제부터는 고도가 무척 높아졌고 산위에 지어졌던 가옥들도 대부분 산 아래 강가 중심으로 지어졌고 포도밭보다는 가축의 방목들이 눈에 띄었다. 산길을 따라 버스는 계속 진행하였다. 그러다 어느 정도 진행한 후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고 우리 부부는 커피를 한잔했다. 프런트에서 쿠폰을 구입하여 마셨는데 관광객들로 붐볐다. 아내는 ‘핫 초코’가 맛있다고 그것을 일부러 시켜서 어린소녀 처럼 좋아하며 맛있게 먹는다. 아주 만족하는 표정이 나를 기쁘게 했다. 이정표에 CHAMONIX라고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니 그곳에 가까워 오나보다 생각되었다. 도로 표지판이 재미있다. 도로와 교량에는 번호가 표시되어 있었고 응급상황 발생 시 위치식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계곡을 오르면서 한국의 겨울 산골 마을 분위기가 물씬 품겼다. 거의 우리의 정서와 비슷해 보였다. ‘가이드’는 이제 스위스에 대하여 설명 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샤모니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에 인접하여 있는 프랑스 남동부의 소도시로 몽블랑 기슭의 해발 1,038m에 위치한 도시이다. 1922년까지 공식적으로는 지명이 샤모니 이었으나 이 지역 사람들의 몽블랑에 대한 애착으로 지명을 ‘샤모니 몽블랑’으로 정식으로 변경하였다.
샤모니 몽블랑(Chamonix-Mont-Blanc)은 1924년 동계올림픽을 시초로 각종 국제경기가 개최 되었으며, 스케이트 등 동계 스포츠시설이 잘 되어 있는 도시이다. 이곳은 알프스 등산의 출발점이기도 하며 몽블랑 등의 전망을 즐길 수 있다. 한편 이곳 샤모니 몽블랑은 산악스포츠와 스키가 유명한 곳이어서 국립 스키학교와 등산 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몽블랑(MONT- BLANC)
4807m를 바라 볼 수 있는 에귀뒤미디(L' Aiguile du midi) 3842m를 케이블카를 타고 등정한다. 숲 위를 공중이동하면서 10분 동안 1030m에서 2317m까지 올라가고, 오른쪽으로 몽블랑의 산과 정상, 그리고 더 낮게는 보쏭(Bossons)의 빙하를 감상 할 수 있다. 쁠랑 드 에이귀(Plan de l'aiguille)에 도착하면 케이블카를 바꿔 타고, 10분 동안 3777m고도에 도달하게 된다. 오른쪽을 보면 꼴 뒤미디(Col du Midi)의 예전의 케이블카의 운행선을 볼 수 있는데, 정상 에귀디미디(L'Aiguile du midi)에 도착을 하게 되면, 출발역과 도착역, 식당과 스낵코너, 선물가게, 화장실, 샤모니 테라스가 있다. 승강기를 타고 정상(3842m)의 고원까지 간다.
출처: 이미지:구글 이미지, 글 일부; 해외여행 유럽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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