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차수(叉手)
남전(南泉)이 앉았는데,
어떤 스님이 차수(叉手)하고 섰거늘 선사가 말하였다.
“지나치게 속(俗)스럽구나”
스님이 얼른 합장을 하거늘 선사가 말하였다.
“지나치게 중스럽구나”
이에 스님이 말이 없으니, 선사는 그만두었다.
정엄수(淨嚴遂)가 송했다.
합장하면 중이요, 차수하면 속인이니
손을 털고 문을 나서면
산은 푸르고 물도 푸르다
걸음을 옮기고 몸을 움직여 옛 풍조를 떨치니
나무 장승 모여서 무생곡(無生曲)을 합창한다.
불안원(佛眼遠)이 송했다.
동서남북에 이롭지 않는 이 없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남전을 사랑케 하네
눈썹을 마주 겨룬 것, 비슷하다면
콧구멍이 하늘에 받쳐도 꿰일 수 없으리.
보녕수(保寧秀)가 염 하였다.
“말해 보라,
남전이 그 스님을 보기나 했던다?
그 스님이 남전을 보기나 했던가?
그렇다면 왕노사는 원래 남을 위하기 어렵다.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는 꼴을 면할 길 없다.
그 스님은 비록 잘 수순(隨順)했으나
주인이 손님 노릇 하는 법을 몰라서
주인을 걱정케 한 꼴이니 어찌하랴?
나 장로(長蘆)는 여기서 감히 여러분에게
차수나 합장하기를 바라지 않거니와
손을 털면서 산문 밖을 나가지 않기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산승의 이런 이야기에 불법의 도리가 있는가?
한번 가려내 보라.”
운문고(雲門杲)가 시중(示衆)할 때 이 이야기를 들어 말 하였다.
“합장하면 중이요,
차수하면 또 속(俗)인 냄새로다.
이 모두가 아닐 때엔 거룩한 몸 둘 곳이 없도다
둘 곳이 없음이여,
코끝은 있으니,
옴소로소로시리시리[唵蘇嚕蘇嚕悉唎悉唎]로다.
그리고 할을 한 번 하고는 말 하였다.
“이것이 무엇인가?
요즈음 왕의 법령이 약간 엄중하니,
점포를 뒤지거나 시장에서 수탈하는 일을 허용치 않느니라”
※ 생멸없는 진리를 아는 지혜에 의해 얻어지는 기쁨을 읊는 노래이다.
說話
“지나치게 속스럽구나[大俗生]”라고 함은
차수가 세속의 예법이기 때문이요,
“지나치게 중스럽구나[大僧生]”라고 함은
합장이 승가(僧家)의 예법이기 때문이니,
이렇게 말하는 뜻은 양쪽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만두었다[休去]” 한 데에는 그대로가 무한한 뜻이 있다.
정엄(淨嚴)의 송에서
“손을 털고 문을 나섰다[撤手出門]”함은
앞의 차수와 뒤의 합장이 모두가 문 안의 일이요,
문 밖에는 전혀 그런 일이 없으니,
다만 산도 푸르고 물도 푸른 드넓은 세계일 뿐이라는 뜻이다.
“걸음을 옮기도[換步]……”라 함은
문 안에서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이
곧 걸음을 옮기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니,
이는 앞의 차수나 뒤의 합장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옛 풍조를 떨치니[振古風]……”라고 했고,
또 “나무 장승[木人]……”이라고 하였다.
보녕(保寧)의 염에서
“남전이 그 스님을 보기나 했던가?[南泉還見]”라고 함은
그 스님에게도 허물이 없다는 뜻이요,
“그렇다면 왕노사는[然則王老師]……”이라 함은
문 밖의 일만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 스님은 비록
잘[這僧雖善]……주인(主人)을 걱정케 한 꼴이다.”라고 한 것은
그 스님이 다만 문 안의 일뿐이기 때문이요,
“나 장로는 여기서[長蘆這裡]……”라 함은
다시 차수하고 합장하기를 요하는 뜻이며,
“……에 불법의 도리가 있는가?[還有佛法]……”라고 함은
불법이란 도리가 없는 듯하다는 뜻이나
불법이란 도리가 없는 곳이 더 좋을 듯하다.
운문(雲門)의 시중(示衆)에서
“합장하면[合掌]”에서부터 “둘 곳이 없도다[無頓處]”까지는
방언(方言)이니,
말하자면 이 모두가 아닐 때에도
여전히 존귀한 몸[尊體]이 있다는 뜻이요,
“둘 곳이 없음이여, 코끝은 있다[無頓處有巴鼻]”함은
너무 중스럽다 너무 속스럽다 함이
바로 코끝이란 뜻이다.
“옴(唵)”은 외마디의 진언이요,
“소로소로시리시리(唵蘇嚕蘇嚕悉唎悉唎)”는 두 마디의 진언이다.
“할을 한 번 하고는[喝一喝]……”이라 함은
다시 또 하나의 할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요,
“왕의 법령이[王令]……”라 함은
할을 당한 이를 붙들어 일으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