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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이 읽어주시는 화엄경(2021.5.27.PM2시)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시방 보살들의 찬탄
반갑다. 화엄경 한 단락 공부하겠다. 수미정상게찬품, 십주품을 설하기 위해서 수미산정에 올라갔고, 산정에 올라가니까 게송으로 보살들이 찬탄을 하면서 그 속에서 부처님의 훌륭한 진리의 가르침을 많이 설하고 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은(16권 p.74)
일체법무생(一切法無生)이며 일체법무멸(一切法無滅)이니
약능여시해(若能如是解)하면 제불상현전(諸佛常現前)이로다
일체 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 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안다면
모든 부처님께서 항상 그 앞에 나타나리라.
이것은 불생불멸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존재가 무상하다, 없다, 공(空)하다, 무아(無我)다 라고 하는 안목이 물론 있고, 그 외 또 그것과 정반대인 입장의 견해도 있을 수가 있다. 그것이 ‘일체법무생 (一切法無生) 일체법무멸(一切法無滅) 약능여시해(若能如是解) 제불상현전(諸佛常現前)’이다.
일체 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 법이 없어지지도 않는다
반야심경에서도 불생불멸(不生不滅)이 나오고 법화경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있다. 역시 불생불멸에 대한 이치인데 법화경에서는 ‘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 세간의 현상이 항상 머문다, 시법(是法)이 주법위(住法位)하여 세간상(世間相) 상주(常住)라’ 라는 표현을 한다.
화엄경의 이 대목과 전부 똑같은 말씀이다.
모든 존재에 있어서 드러나는 현상은 무상하기 이를 데 없다. 금방 변하고, 있다가 없어지고, 없던 것이 또 생겨나고, 인연 따라서 생멸한다.
그런데 모든 존재의 본성은 불생불멸이다. 예를 들어서 물이 제일 허망한 물질인데, 물이 금방 있다가 햇볕에 증발한다. 그러면 물은 없어진 것 같다. 그러나 없어진 것이 아니다. 증발해서 수증기로 올라가고 구름이 되고 구름이 모여 다시 비가 된다. 비는 산천초목으로 떨어지고 그것이 또 우리에게 물로 돌아오고, 다시 또 증발되고 비가 되고 물이 된다. 끊임없이 돌고 돈다. 사실은 물 한 방울도 백퍼센트 다 없애지 못하는 것이다. 불생불멸이다. 그것은 현대 과학도 다 아는 이야기다.
또 예를 들어서 우리가 종이 한 장을 태운다 하더라도, 그 하찮은 종이 한 장도 불에 태우면 금방 없어진 것 같지만, 완전히 백 퍼센트 없애지 못한다.
다만 형태만 다르게 만들 뿐이다. 언젠가 어떤 인연을 만나면 다시 종이로 나타날 수도 있고, 나무로 나타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현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이 불생불멸의 이치고 ‘시법(是法)이 주법위(住法位),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항상 그대로 여여하게 있다’고 하는 이치다. 일체법불생, 일체법불멸이라고 하는 이치와도 역시 같은 말이다.
법성본공적(法性本空寂)하야 무취역무견(無取亦無見)이니
성공즉시불(性空卽是佛)이라 불가득사량(不可得思量)이로다
법의 성품은 본래 공적하여
취할 수도 없고 또한 볼 수도 없어
성품이 공한 것이 곧 부처라
생각으론 얻을 수 없도다.
법의 성품은 본래 공적하여
본성,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취할 수도 없고 또한 볼 수도 없어
성품이 공한 것이 곧 부처라
생각으론 얻을 수 없도다
법성은 원융하야 두 모양이 없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한다.
법의 성품은 본래 공적해서
취할 수도 없고 또한 볼 수도 없다
우리 눈에 이렇게 나타나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현상계라면 이것은 그 현상계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계 제행의 본질은 무상이고 제법무아다.
그런데 아무리 변화무상한 현상계가 있어도 그 현상계는 공적한 것이 본질이다. 공적하기 때문에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런 입장을 여기에서 이야기한다.
불교 교리에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다. 사람의 육신도 마찬가지고 마음도 마찬가지고 끊임없이 현상은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을 나타내지만 그 본질은 변함이 없다, 여여하다, 하는 내용이다.
약지일체법(若知一切法)이 체성개여시(體性皆如是)면
사인즉불위(斯人則不爲) 번뇌소염착(煩惱所染着)이로다
만약 일체 법이
자체의 성품이 모두 이런 줄 알면
이 사람은 곧
번뇌에 물들지 아니하리라.
일체법의 본성, 본질의 입장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한다면
자체의 성품이 모두 이런 줄 아는 것
본질을 제대로 알면
이 사람은 곧
번뇌에 물들지 아니하리라
여여한 경지, 여여부동한 경지를 알기 때문에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번뇌는 현상의 변화무상한 것을 쫓아가는 것이다.
현상의 무상한 것을 초월한 본질의 입장에 마음이 딱 머물러 있다면 그 어떤 번뇌도 일어날 수가 없고, 번뇌의 물듦이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런 내용이다.
(3) 모양으로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
범부견제법(凡夫見諸法)에 단수어상전(但隨於相轉)하고
불료법무상(不了法無相)일새 이시불견불(以是不見佛)이로다
범부가 모든 법을 보면
다만 모양을 따라 구르고
법의 모양이 없는 줄을 알지 못할새
이로써 부처님을 보지 못하도다.
범부가 모든 법을 보면
다만 모양을 따라 구르고
범부들은 모든 법을 보면 그 모양만 따라서 쫓아간다.
법의 모양이 없는 줄을 알지 못할새
그 모양은 허망하고 무상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로써 부처님을 보지 못하도다
부처님은 법신이니까, 법신은 어떤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진정한 법신으로서의 부처님은 보지 못한다.
(4) 부처님은 법과 하나다
모니이삼세(牟尼離三世)하사 제상실구족(諸相悉具足)하시며
주어무소주(住於無所住)하사 보변이부동(普遍而不動)이로다
모니께서 삼세를 여의시고
모든 모양 다 구족하시어
머무는 바 없이 머무시며
널리 두루 하셔도 움직이지 않으시네.
모니께서 삼세를 여의시고
석가모니께서 삼세를 초월해 계시고
모든 모양 다 구족하시어
삼세를 초월해서 모든 모양을 다 구족하고 계신다.
머무는 바 없이 머무시며
주어무소주(住於無所住), 머무는 바 없이 머무시며
널리 두루 하셔도 움직이지 않으시네
부처님은 머무는 바 없이 머무신다. 그래서 널리 두루하셔도 부동이다. 움직이지 않는 이치가 바로 부처님의 실상에 대한 이치다. 부처님은 우리가 머물 듯이 머무는 바가 있는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고, 머무는 바 없이 머문다. 그것이 진리성의 부처님, 진리로서의 부처님, 법신으로서의 부처님이다, 이런 내용이 되겠다.
(5) 법을 앎으로 부처님을 본다
아관일체법(我觀一切法)하고 개실득명료(皆悉得明了)하니
금견어여래(今見於如來)에 결정무유의(決定無有疑)로다
내가 모든 법을 관찰하고
모두 다 분명하게 요지하니
이제 여래의 친견함에
결정코 의심이 없도다.
내가 모든 법을 관찰하고
모두 다 분명하게 요지하니
법의 실상을 관찰하고 모두 다 분명하게 요지하니
이제 여래의 친견함에
결정코 의심이 없도다
그래서 우리가 여래의 진실한 경지를 보게 된다, 이것을 여래를 친견함에 결정코 의심이 없도다, 라고 했다.
금강경만 하더라도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라고 하였다.
상을 상이 아닌 줄로 봐야, 비로소 여래를 본다. 현상을 보는 것으로써 여래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치를 연관시켜서 생각해 보면 이런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6) 공덕을 법혜보살에게 미루다
법혜선이설(法慧先已說) 여래진실성(如來眞實性)일새
아종피요지(我從彼了知) 보리난사의(菩提難思議)로다
법혜보살이 이미 먼저
여래의 진실한 성품을 말씀하였으니
저는 그를 따라서
사의하기 어려운 보리를 알았습니다.
남방 일체혜(一切慧)보살은 법혜보살이 여래의 진실한 성품에 대하여 이미 먼저 말씀하셨으므로 공덕을 법혜보살에게 미루는 내용이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법혜보살의 설법보다 일체혜보살의 설법에서 여래의 진실한 성품에 대하여 더욱 잘 밝히고 있다.
보살들이 보살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으레 이렇게 말을 한다. 법혜보살이 이미 먼저 말했고, 여래의 진실한 성품을 말씀하셨으니 저는 그를 따라서 아주 불가사의한 어려운 보리, 깨달음의 이치를 알게 되었다, 라는 이야기다.
선재동자가 입법계품에서 선지식을 친견하러 가면 선지식들이 자신에 대한 법, 자기의 법을 이야기하고 ‘나는 이러이러한 이치만 알지 그 외 이보다 더 높은 이치는 모른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소개하는 선지식에게 가서 친견하라’라는 이야기를 으레 한다.
53 선지식은 늘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당신이 설한 법이 정말 질적으로 낮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다음 선지식을 소개할 때 으레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는 것이다.
그런 태도에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이 있다. 예를 들어서 누가 찾아와서 이러이러한 것을 물었다면 충분한 이야기를 하고도 또 다른 훌륭한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나는 이것밖에 모르니까 내가 소개해 주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찾아가서 보다 더 높은 법을 좀 배우십시오’라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가? 장사를 해도 ‘우리 집에는 이런 물건뿐인데 저기 어느 골목 어떤 가게에 가면 거기에는 여기보다 훨씬 더 좋은 물건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소개한다면 듣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가게 주인이 자기 가게의 물건을 두고도 다른 사람 가게의 물건을 소개해 준다고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자. 실질적으로 그 사람이 손해를 보겠는가? 이익을 보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늘 그 반대의 입장에서 산다.
별로 알지도 못하면서 ‘딴 사람은 모른다. 내 얘기가 최고다. 내가 아는 이야기만 최고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은 싹 무시한다. 또 ‘내 가게 물건이 최고고 다른 데 가봐야 다 가짜고 엉터리다’ 이렇게 말하는 경우들이 흔하다.
우리 딴에는 머리를 써서 잘한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망할 생각만 한다. 자기가 망할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다 내려놓고, 나와 남을 다 내려놓고 생각해 보면 길이 훤히 보이는데 내려놓지 못하니까 길이 안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한다는 일이 그저 전도망상, 전도몽상만 가지고 살아간다. 정말 다 내려놓으면 길이 보인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훨씬 뛰어나다’‘다른 사람의 물건이 훨씬 낫다’ 우리 일상에서는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지 않더라도 한 번쯤 생각해 보기 바란다.
자녀들도 그런 경우가 있을 것이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경우가 또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3) 서방 승혜(勝慧)보살의 찬탄
이시(爾時)에 승혜보살(勝慧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승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1) 여래의 지혜는 알 수 없다
여래대지혜(如來大智慧)가 희유무등륜(希有無等倫)하시니
일체제세간(一切諸世間)이 사유막능급(思惟莫能及)이로다
여래의 큰 지혜
희유하여 짝할 이 없어라.
일체 모든 세간들이
생각으로 능히 미칠 수 없도다.
여래의 큰 지혜
여기는 여래의 큰 지혜를
희유하여 짝할 이 없어라
일체 모든 세간들이
생각으로 능히 미칠 수 없도다
이렇게 칭찬했다.
(2) 범부들의 미혹
범부망관찰(凡夫妄觀察)하야 취상불여리(取相不如理)하나니
불리일체상(佛離一切相)이라 비피소능견(非彼所能見)이로다
범부는 망령되이 관찰하므로
모양만 취하여 이치와 같지 못하니
부처님은 일체 모양을 여의었기에
저들이 능히 보지 못하도다.
범부들은 일체 모양을 여읜 부처님의 경지를 능히 못 본다, 이런 내용이다.
범부는 망령되이 관찰하므로
저 앞에서 예를 든 경우하고 같다.
모양만 취하여 이치와 같지 못하니
이치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체 모양을 여의었기에
모양을 떠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떠난 것이다. 다 내려놓은 상태다.
저들이 능히 보지 못하도다
그런데 범부들은 그 내려놓은 경지, 그것을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딱 하나, 한꺼풀 차이인데 그렇게 안목이 다른 것이다.
미혹무지자(迷惑無知者)는 망취오온상(妄取五蘊相)하야
불료피진성(不了彼眞性)하나니 시인불견불(是人不見佛)이로다
미혹하여 앎이 없는 사람은
망령되이 오온(五蘊)의 모양만 취하여
저 참된 성품을 알지 못하니
이런 사람은 부처님을 보지 못하도다.
미혹하여 앎이 없는 사람은
망령되이 오온(五蘊)의 모양만 취한다
우리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온의 나만 나라고 안다. 우리의 앎의 경지는 딱 그것이다. 우리의 육신[色] 그리고 감수하는 것[受] 상(想) 생각하는 것, 생각이 지어가고 발전해 가는 것[行], 인식의 근본[識]이라고 하는 그 오온만을 가지고 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참나, 참성품, 부처자리, 참나자리가 있다. 여기서는
저 참된 성품을 알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참된 성품은 오온을 벗어난 상태다. 그것이 진짜 나이고 그것이 근거가 된다. 그것을 겉에서 둘러싸고 있는 것이 오온의 나다. 그런데 겉의 참나를 둘러싸고 있는 오온만을 가지고 나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
참나를 보지 못한다, 이런 말이다. 이런 이치는 우리가 확연히 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일단 외워만 두어도 큰 소득이 있다.
분명히 참나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가짜 나, 가아(假我) 거짓 나를 가지고만 나라고 늘 고집하고 산다.
그러다가 어느 날 눈을 딱 뜨게 되면 참나를 만나게 되고, 참나가 진짜 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고, 거짓 나, 가아는 내가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이야기를 이 게송에서 하고 있다.
(3) 법신불을 보는 길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이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니
여시해법성(如是解法性)하면 즉견노사나(則見盧舍那)로다
일체의 법을 깨달아 알면
자체의 성품이 없나니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을 이해하면
곧 노사나 부처님을 보게 되리라.
일체의 법을 깨달아 알면
모든 현상의 진실한 모습을 깨달아 알면
자체의 성품이 없다
현상은 자체의 성품이 없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을 이해하면
모든 존재를 제대로 알게 되면
곧 노사나 부처님을 보게 되리라
법신 부처님을 보게 되리라. 진짜 부처님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인전오온고(因前五蘊故)로 후온상속기(後蘊相續起)하나니
어차성요지(於此性了知)하면 견불난사의(見佛難思議)로다
앞의 오온을 인한 연고로
뒤의 온이 서로 이어 일어나나니
여기서 성품을 알면
생각하기 어려운 부처님을 보리라.
오온은 전부 인연으로써 생긴 나다. 참나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의 오온 때문에 또 뒤의 오온, 다음 생을 받으면 그다음 뒤에 또 오온이 일어난다. 계속 그렇게 일어나는 그 가운데 여기서 참성품을 알게 될 것 같으면, 생각하기 어려운 부처님을 보리라. 정말 불가사의한 경지인 나를 보게 된다. 참나를 보게 된다.
이런 것은 불교에서 아주 깊은 이치를 말하는 것이고, 대승불교에서는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일단 이러한 이치를 손에 사물을 잡듯이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일단은 알아야 된다.
(4) 비유로써 밝히다
비여암중보(譬如暗中寶)를 무등불가견(無燈不可見)인달하야
불법무인설(佛法無人說)이면 수혜막능료(雖慧莫能了)로다
비유컨대 어둠 속에 있는 보배를
등불 없이는 볼 수 없듯이
부처님의 법도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비록 지혜가 있더라도 능히 알지 못하네.
참 중요한 말이다.
어둠 속에 있는 보배를
등불이 없이는 볼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낮에 전기를 켜놓고 화엄경을 이렇게 보고 컴퓨터를 보고 핸드폰을 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다 불이 있어서 본다. 그와 같이
부처님의 법도 설명하는 사람이 없으면
앞에 참나와 오온의 가짜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오온이라고 하는 가짜 나에 그저 매달려서 살기는 사는데 그것보다 소중하고 그 저변에 참나가 있다고 하는 이런 사실들, 이것을 부처님의 법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것을 누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비록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도 능히 알지 못한다
이것은 불법을 공부한 사람만이 안다. 불법을 공부하는 책을 보거나 이런 강의를 듣거나, 스님의 설법을 듣거나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알 수가 있다.
참 중요한 내용이다.
그러한 이치가 분명히 있는데 그것을 깨달은 부처님의 설법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어둠 속에 있는 보배를
등불 없이는 볼 수 없듯이
부처님의 법도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이렇게 설법하는 사람이라든지, 아니면 경전의 말씀이라든지 이런 것이 없다면 비록 내가
지혜가 있더라도 능히 알지 못한다
아깝다. 우리가 지혜를 가지고 있고, 머리가 총명하고 무엇을 분별할 줄 알고 하는 능력이 다 있는데, 그런 능력을 다 가지고 왜 화엄경을 안 보는가? 왜 공부를 안 하는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놀리는 것이 하루라도 아깝고 한 시간이라도 아깝다.
참마음의 능력이고 우리가 본래로 가지고 있는 지혜의 능력인데, 그런 지혜의 능력을 우리가 다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놀려서는 안된다.
역여목유예(亦如目有瞖)에 불견정묘색(不見淨妙色)인달하야
여시부정심(如是不淨心)이면 불견제불법(不見諸佛法)이로다
마치 눈에 눈병이 생기면
청정하고 아름다운 빛을 보지 못하듯이
이와 같이 마음도 청정하지 못하면
모든 부처님 법을 보지 못하리라.
눈병이 있는 사람은 청정하고 아름다운 사물을 제대로 못 본다. 눈병이 나면 못 본다.
눈은 얼마나 고마운가? 우리가 비록 안경을 썼다손치더라도 이 정도라도 사물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이와 같이 마음도 청정하지 못하면
모든 부처님 법을 보지 못한다
마음이 청정할 때 우리가 부처님 법을 한 구절이라도 잘 공부하고 알아듣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속 읊조려야 된다.
우여명정일(又如明淨日)을 고자막능견(瞽者莫能見)인달하야
무유지혜심(無有智慧心)이면 종불견제불(終不見諸佛)이로다
또 밝고 깨끗한 해를
소경은 볼 수 없듯이
지혜의 마음이 없으면
마침내 모든 부처님을 보지 못하리라.
태양이 저렇게 떠서 환하게 세상을 비추고 있지만 눈 어두운 맹인은 못 보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지혜의 마음이 없으면
마침내 모든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
지혜의 마음이 중요하다. 끊임없이 지혜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참 중요한 비유다.
밝고 깨끗한 해를
저 밝은 태양을 눈 어두운
소경은 볼 수 없듯이
지혜의 마음이 없으면
지혜는 눈을 뜬 것과 같고 지혜가 없는 마음은 캄캄한 맹인과 같다, 이렇게 또 우리가 생각해야 된다. 지혜의 마음이 없으면
마침내 모든 부처님을 보지 못하리라
부처님을 못 본다. 부처님이 환하게 이렇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혜가 없어서 부처님을 못 본다. 이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생각하고 읊조리고 또 읽어보고 또 읽어봐야 할 대목이다.
약능제안예(若能除眼瞖)하고 사리어색상(捨離於色想)하야
불견어제법(不見於諸法)이면 즉득견여래(則得見如來)로다
만약 능히 눈병을 제하고
형색과 생각을 여의며
모든 법까지 보지 않으면
곧 여래를 보리라.
우리가 여래를 보는 것, 진리로서의 부처님을 보는 길을 여기에 제시하고 있다.
만약 능히 눈병을 제하고
눈병을 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형색과 생각을 여의며
사물에 우리가 눈 어두워 있고, 알량한 자기 생각에 그만 매여 있으면 여래를 못 본다. 어떤 사물이 부처님이다 하고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형상으로써 부처님을 보거나 부처님의 음성으로써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결코 부처님을 못 본다. 불능견여래,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다.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했지 않는가? 그것도 금강경에서 그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상견중생이고 견물생심을 가진 우리는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수많은 생을 거듭하면서 습관이 되었다.
많고 많은 생을 거듭하면서 그것을 보아왔고 그렇게 살아온 습관이 있어서 나 중심의 생각이 철옹성 같은 장벽으로 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온 습관이다.
그것에서 벗어나 버리면 시원하게 진정한 참나를 보게 된다. 진정한 참나는 곧 여래다.
만약 능히 눈병을 제하고
형색과 생각을 여의며
모든 법까지 보지 않으면
사물까지 보지 않으면
곧 여래를 보리라
그런 것을 다 초탈해야 여래를 보게 된다, 하는 내용이다.
(5) 공덕을 일체혜(一切慧)보살에게 미루다
수미정상게찬품에서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다.
일체혜선설(一切慧先說) 제불보리법(諸佛菩提法)일새
아종어피문(我從於彼聞)하고 득견노사나(得見盧舍那)로다
일체혜보살이 먼저
모든 부처님의 보리법을 말씀하시니
저는 그에게서 듣고
노사나 부처님을 뵈었습니다.
승혜보살이 앞에서 나왔던 일체혜보살의 설법을 찬탄하고 자신은 아무런 공덕이 없다고 겸손해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설사 당장에는 깊은 이치를 못 깨달았다 하더라도 이런 이치, 이런 내용은 알 수 있지 않은가?
내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앞의 부처님이, 앞의 분이 나보다 더 설명을 잘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늘 사람을 상대하면서 사는 일이다. 사람 상대하면서 사는 일이 인생살이다.
그럴 때마다 항상 ‘앞의 사람이 아주 설명을 잘해 주었습니다. 견해가 분명합니다. 다만 제가 한마디만 첨언을 한다면 나는 이렇게 이렇게 보는데 시원찮은 소견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져야 된다.
우리 정치인들이 여당 야당 싸우는 것을 보면 말끝마다 자기도 그렇게 온전치도 못하면서 상대방 말하는 것은 물고 늘어지고 그저 물어뜯고 본받을 점이 하나도 없다.
여기를 보라.
보살들이 당신이 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도 ‘사실은 앞의 보살이 훨씬 진정한 이치를 잘 표현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다.
일체혜보살이 먼저
모든 부처님의 보리법을 말씀하시니
저는 그에게서 듣고
노사나 부처님을 뵈었습니다
진정한 부처님, 법신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었다, 앞의 보살에게서 설법을 듣고서 보았다, ‘나는 별 내용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참고만 하십시오.’ 이런 겸손이다.
그렇게 겸손한 말씀을 하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눈을 한 번 버쩍 뜨고 현재 이 보살에 대해서 한 번 더 볼 것이 아니겠는가? 한 번 더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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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공부한 내용이 참 중요하고도 좋은 내용이 많다. 눈병이 생기면 어떻다? 밝고 깨끗한 해를 눈먼 사람은 못 보듯이 지혜가 없으면 부처님을 못 본다. 라는 내용도 나왔다.
인연에 의한 오온의 나와 오온을 벗어난 참나, 이것을 어떤 사람은 도너츠를 늘 그려서 설명한다. 도너츠는 어떤가? 둥그렇고 그 안에 또 하나 동그라미가 있다. 설법할 때마다 항상 그 도너츠를 그려놓고 안에 있는 동그라미는 참나라고 하고, 밖에 있는 것은 오온의 에고, 오온의 나다, 가짜 나다, 이렇게 설명을 해서 아주 이해하기 쉽도록 설법을 잘하는 거사분이 있다.
여기에도 오온으로 인한 연고로 앞의 오온 때문에 뒤의 오온이 서로 이어서 일어난다, 라는 내용이나 참성품을 알 것 같으면 생각하기 어려운 부처님을 보리라, 이런 내용 ‘일체법무생(一切法無生) 일체법무멸(一切法無滅) 약능여시해(若能如是解)제불상현전(諸佛常現前)’ 이런 가르침등 아주 중요한 뜻이 많이 나왔다.
스님들이 불교를 처음에 공부할 때 논강도 많이 하고, 토론도 많이 한다. 우리 스님들은 몇십 명씩 한 반이 되어서 그렇게 토론을 자주 하고 그야말로 음성이 높아지고 얼굴을 붉으락 푸르락 해가면서까지 ‘참나가 무엇이 참나냐, 오온이 진짜 내가 아니냐’ 하는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열렬하게 논쟁을 한다. 그런 과정에서 불교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깊어진다.
우리 불자님들도 또 스님들도 인연이 되면 이러한 것을 가지고 진지하게 토론도 하고 그렇게 해서 이해를 깊이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러분들은 티벳스님들이 큰 광장에서 수백 명씩 나와서 일대일로 이야기하고, 일대이 일대삼 일대사 일대오 이렇게 무더기 무더기 모여 앉아서 어떤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막 염주를 흔들기도 하고 주먹으로 자기 손바닥을 치기도 하는 모습을 많이 보는데 그런 것이 전부 토론을 하는 장면이다. 불법을 가지고 토론하는 장면이다.
그 이치가 자꾸 토론을 주고 받음으로써 걸러지고 다듬어지고 이해가 깊어진다.
그런 이야기까지 말씀드리고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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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성불하십시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_()()()_
혜명화님, 새해 큰 선물을 주시네요 저로서는 '어떻게 녹취를 하는 지!'
노력이 놀라울뿐입니다
베풀어 주시는 공덕
고맙습니다_()()()_
인연 따라서 생멸하는 모든 존재의 본성은 불생불멸이다.
모든 현상계 제행의 본질은 무상이고 제법무아다.변화무상한 현상계는 공적한 것이 본질이고, 공적하기 때문에 결코 변하지 않는다.
본질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번뇌도 일어날 수가 없다. 참된 성품은 오온을 벗어난 상태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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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나무대방광불화엄경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