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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어느 시골 성당에
사람 크기만 한 예수님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
동상 앞에서 기도를 하면
소원이 잘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이 찾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기도를 하고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문지기가
예수님이
서 있는 곳에
한번 서 있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소원을 말하며
여러 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짜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 네가 하도
소원을 말하니
딱 하루만
너와 자리를 바꾸겠다.
그런데 나와
한 가지
약속을 해야 된다.
너는 누가 와서
어떤 행동이나
기도를 하던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말하지 말거라.
알겠느냐?"
문지기는
절대 침묵하겠다고
굳건히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문지기는 예수님의
동상이 되었고
예수님은 문지기가
되었습니다.
문지기가
예수의 동상으로
서 있을 때
첫 번째
사람이 왔습니다.
그는 아주 부자였고
도박을 즐기는
자였습니다.
자기가
도박을 하러 가는데
돈을 잃지 않고
많이 딸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소원이었습니다.
한참을 기도한
부자는 갔습니다.
그런데
돈다발이
들어있는 가방을 깜박하고
놓고 나갔습니다.
문지기는
가방을 놓고 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예수님과의 약속 때문에
침묵했습니다.
두 번째로
아주 가난한 농부가
들어왔습니다.
자기 아내가
중병으로
누워 있는데
치료비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도와달라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농부가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려다가
돈 가방을
보았습니다.
그 농부는 그것이
하느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감사 기도를
드린 후
돈 가방을 들고
나갔습니다.
문지기는
그 돈 가방은 주인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예수님과의
약속 때문에 참았습니다.
세 번째로
기도를 하러 온 사람은,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는 청년이었는데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기도를 하러 온 것입니다.
청년이 기도를
막 시작하였는데
갑자기
예배당 문이
활짝 열리더니
돈 가방을 놓고 간
그 부자가 들어왔습니다.
돈 가방이 없는 것을 확인한 부자는
다짜고짜 기도하는 청년의
멱살을 잡고
돈 가방을
내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청년은
이게 무슨 행패냐고
하면서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였지만,
이미 분이 날 대로 난 부자는
청년을 이끌며
경찰서로 가자고 했습니다.
청년은
자기는 지금 바로
가지 않으면 배를
탈 수가 없다고 하면서
경찰서로 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며
다투는 것을 본 문지기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전 사정을 설명해 주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배를 타게 되었고
부자는 돈 가방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노하신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하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니 내려오너라."
그러자
문지기는 말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죄송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화를 내실 정도로 잘못은 하지
않은 줄 압니다.
저는 잘못된
상황을
바로 잡아서
평화를 이루었을
뿐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잘못이 큰 것이다.
그리고 네가 개입해서
해결한 것보다,
침묵했더라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이라는 걸 몰랐던 것이다.
부자는 어차피
그 돈을 도박장에서
다 날리게 된 것이었느니라.
그 돈이 농부에게
갔더라면 농부의 아내를
살릴 수 있었느니라.
더욱 잘못이 큰 것은,
청년의
문제이니라.
청년은
그냥 두었더라면
배를 타지 못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네가 개입해서
그 청년은
배를 타게 되었고,
그 배는 바다에서 침몰하여
죽게 되었느니라.
내가 침묵으로
일하는 이유를 이제
알겠느냐?"
인간들은 하느님의
침묵을
못 견뎌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흉내를 낼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이
판단을 내릴 일도
없습니다.
인간의 과도한 개입은
일을 그르칩니다.
원래 하느님은
침묵 중에
일 하십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을 내어버리실 때,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침묵하셨습니다.
하루살이 곤충에도,
들에 핀 잡초 하나에도,
하느님의 뜻이
있습니다.
서로 조화를 이루기에,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감옥에
갇힌
어떤 사람은
감옥의 먼지나
열악한 환경을
헤아리며 불평을 하고,
어떤 사람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꿈을 꾸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난 과거의 불행과 실패,
일어나지도 않은
염려를 붙잡고 있고,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쁨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인이란,
우리 삶의 먼지를
헤아리고
불평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새로운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역사가
찰스 베어드는,
꽃이 꿀벌에게 꿀을 빼앗기는
그 순간에도
하느님은
수정의 신비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하느님은 별을 더욱 빛나게 하십니다.
나는 특히
Mark Miller 교수가
작곡한
“I believe.
(나는 믿네)"
라는 노래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1945년
독일 유태인 수용소에서
발견된
다음과 같은
낙서였습니다.
그 글은
어느 무명의 유태인이
죽음을 앞두고 벽에 쓴
글이라고 합니다.
I believe in the sun,
even when it's not shining.
( 나는 태양이
비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는 것을
믿는다.)
I believe in love,
even when I don't feel it.
(나는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에도
사랑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I believe in God,
even when God is silent.
(나는 하느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도
하느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는다.)
우리는 너무
호들갑을 떱니다.
하느님의
침묵에 못 견뎌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은 절망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침묵이십니다.
하느님은
침묵 중에 계시지만
역사는 도도하게
흘러갑니다.
하느님이
돌리시는 역사의 맷돌은
비록 천천히 돌아가지만
정확하게 돌아갑니다.
하느님의
하시는 일은, 지금은
보이지 않고
들을 수 없지만,
지나고
뒤돌아 보면
세심하게 하나하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세상은 부조리하고
혼란합니다.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불의한 자들이
큰소리치고 활개를 치는
오늘이지만,
하느님은 여전히
침묵 중에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침묵 중에 섭리하시고,
침묵 중에 간섭하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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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불안하고 억울할까? / 이성주 기자
“마음은 물 위에 1/7만 노출한 채 떠 있는 빙하와도 같다.”
1939년 오늘 (9월 23일)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구강암의 고통으로 신음하다, 친구인 막스 슈어 박사에게 모르핀을 투여해 달라고 부탁해 고통의 의식도, 무의식도 없는 곳으로 떠난 날입니다.
프로이트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함께 20세기의 양대 과학자로 선정한 천재였습니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가 《열린 사회의 그 적들》에서 “프로이트의 통찰력과는 별개로 정신분석학은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했지만, 뇌 영상과학과 정신건강의학의 발달로 정신분석학의 상당 부분이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왔지요?
프로이트는 사람의 마음은 자아, 초자아(도덕적 감시자), 이드(원초적 본능의 파편들)로 이뤄지는데, 이들이 서로 조화롭기 힘들기 때문에 불안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람의 자아는 원초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도피기제에 의존하는데, 미숙한 인격은 아기 같은 도피기제를 따릅니다. 유아적 도피기제는 △자신과 남에 대한 태도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선과 악으로 구분해 마음의 짐을 더는 ‘분리’ △중요한 사람의 태도와 행동을 자기 것인 양 인식해서 지지하거나 닮으려고 하는 ‘동일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열등한 부분을 상대편에게 떠넘기고 비난하는 ‘투사’ △부정적 감각정보를 모르거나 없는 것처럼 부인하는 ‘부정’ 등이 있습니다.
어떤가요? 우리 사회가 부정적 도피기제로 가득 찼다고 느끼는 건 저만의 옥생각일까요?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극단적 몇몇을 제외하고) 사람의 본성은 대체로 비슷하고, 내가 지지하는 사람도 잘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두 편 중 하나를 선택해서 하나는 극단적으로 옹호하고, 상대편은 저주하는 유아적 도피기제에 따라 행동합니다. 나이가 들면 이런 점들을 깨닫는 혜안이 생겨 부드러워져야 할 건데, 대부분은 더욱더 옹고집이 됩니다.
프로이트는 1896년 《히스테리 연구》를 통해 히스테리를 무의식의 영역에서 설명했는데, 나중에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은 집단 히스테리의 개념으로 우중(愚衆)의 심리를 설명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집단은 결코 진실에 목마른 적이 없다. 집단은 환상을 요구하고, 환상 없이는 견디지 못한다”고 갈파했는데, 우리 사회는 갈수록 더 그렇지요? 부정적 도피기제의 집단의식에 묶인 우중들은 누군가 영화, 소설에서 만든 허상에 대해 진실을 말하면 벌떼같이 달려들어 공격하지요? 이런 개인은 군중 속에 있어도 외롭고 불안합니다. 마음의 무의식에서 억울함을 증폭시키며 살다가 누군가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집단적으로 이상행동을 보입니다.
프로이트는 승화 (Sublimation)를 이상적 도피기제로 제시했습니다. 부정적 충동이나, 욕구를 미술, 음악, 유머, 스포츠 등을 통해 풀면서 인격도 고양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사회에선 이들 활동을 배우거나 내재화하기 가장 좋은 시기에 오로지 경쟁만 강요받습니다. 학교에서 스포츠와 예술을 가르치려고 해도 정신적으로 병적인 학부모들이 격렬히 반대합니다. 우울증, 자살, 불안 등의 단어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무의식을 통제하며 사는 것은 힘들겠지요. 그러나 ‘승화’의 여러 활동을 통해 마음이 밝아지고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은 굳이 정신분석학의 어려운 이론을 통하지 않고도 명확하지 않나요? 오늘부터 운동, 예술활동, 유머 중 하나라도 가까이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미 하고 있다면, 마음 건강을 염두에 두고 좀 더 체계적으로 실천하면 더 좋겠지요?
이와 함께 자신의 도피기제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매사 선악으로 구분해 따지고,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용기에 발 딛은 비판인지, 유아적 도피기제에 불과한지에 대해서도···.
<제1357호 이성주의 건강편지 ‘프로이트가 지금 한국사회를 봤다면’ 참조>
1926년 오늘은 미국의 재즈 색소포니스트 존 콜트레인이 태어난 날. 조니 하트만의 목소리와 존 콜트레인의 연주로 ‘My One and Only Love(나의 유일한 사랑)’ 준비했습니다.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들으면 좋을 음악이지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세월이란 놈
앞에서 끄는이도 없고
뒤에서 미는이도 없건만
용케도 흘러가네
세월이란 놈이~
인생 고작
어제, 오늘, 내일이건만
어제는 어제 벌써 흘러갔고
내일은 내일대로 미지수요
눈 앞의 오늘만 오늘 일진대
잡든 놓든 용케도 흘러가네
지금 이시각에도
세월이란 괘씸한 놈은...
두월도 아니고
네월도 아니고
어제, 오늘, 내일 석삼일이라
세월이라 했을까
쥐고 볼새도 없이
안고 만질새도 없이
스님머리에 모신 콩알인양
동서남북 가닥없이
용케도 흘러가네
세월이란 미운 놈~
동녘에 떳던 해는
점심되니 정수리를 비추고
저녁수저 놓기 바쁘게
서산에 자취 감추며
용케도 흘러가네
세월이란 앙큼한 놈은
하루세끼 먹으면
흘러가는 하루
그 하루 365일 곱씹으면
한해가 속절없이 흘러가니
용케도 흘러가네
세월이란 무정한 놈~
https://youtu.be/dRh7M9zQiIc?si=aNFX0REpUJfCO9dN
첫댓글 읽어보니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입니다. 오홋....인간사는 개입하는 순간 혼란이 옵니다...
세월?
무정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