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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야스를 기리는 구노 산 도쇼구.
7. 구노 산 도쇼구
우리 탐방단은 세이켄지가 소장하고 있는 통신사 유물과 세이켄지의 모습을 너무나 진지하게 살펴보느라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는지 몰랐다. 아뿔싸, 우리는 다음 코스인 삿타 고개 답사 시간마저 까먹고 만 것이다. 참으로 아쉬웠지만 저녁 시간의 교류회 등 일정이 워낙 빡빡하여 삿타 고개는 건너뛰기로 했다. 우리 일행이 세이켄지를 나서서 찾은 곳은 니혼다이라日本平였다. 니혼다이라의 절경이라면 삿타 고개를 찾지 못한 서운함을 그런대로 메워줄 수 있을 법했다.
‘국가명승지’ 이자 현립縣立자연공원으로 지정된 니혼다이라는 미호노마쓰바라三保之松原에서 스루가 만, 이즈伊豆 반도, 후지산과 ‘미나미 알프스’까지 펼쳐진 웅대한 자연의 파노라마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아주 멋진 전망대이다. 1979년 ‘일본관광지 100선 콩쿠르’에서 1위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2007년 5월에는 이곳에서 조선통신사 4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세미나와 양국 교류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이 행사에 참가했던 필자는 니혼다이라에서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후지 산의 황홀경을 지켜보며 넋을 빼앗겼다.
니혼다이라의 매력은 일본이 자랑하는 녹색의 파노라마를 조망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로프웨이를 타고 남쪽의 구노 산으로 건너가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사인 도쇼구와 도쿠가와 박물관을 만날 수 있다. 시즈오카는 이에야스와 연고가 깊은데, 유소년 시절, 전국 다이묘 시대, 천하통일 후 등 세 차례에 걸쳐 그러하다. 이마가와今川 가문의 인질로 어린 시절을 슨푸에서 보냈던 이에야스는 1589년 슨푸 성을 짓고 은거했으며 그 후에도 태상왕으로서 정치를 관장했다.
1616년 4월 이에야스가 슨푸 성에서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자신을 이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묘소와 신사가 조성됐다. 그 묘소는 스루가 만이 바라보이는 해발 270m의 산정에 위치하는데, 니혼다이라에서 로프웨이를 이용하거나 구노 해안에서 1,159층의 돌계단을 걸어 올라갈 수 있다. 우리 탐방단은 천연의 요새이기도 한 이곳을 로프웨이를 타고 찾았다. 도쇼구 궁사宮司이자 도쇼구 박물관 오치아이 히데쿠니落合偉洲 관장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으며 일일이 안내해주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언에 의해 구노 산이 묘소가 되었습니다. 이에야스는 이곳에 묻혔지요. 아들인 제2대 쇼군 히데타다秀忠의 명령으로 불과 1년 7개월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신으로 제사 지내는 신사를 창건한 것이 이곳 도쇼구의 유래입니다.” 히데쿠니 관장은 폭염 속에서도 우리들에게 구노 산 도쇼구의 모든 것을 진지하게 설명했다. 신전은 모모야마桃山시대의 조각과 문양 기법을 사용했으며 곤겐權現양식의 건축에 옻칠한 지붕, 극채색의 누각 등이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도쇼구는 50년에 한 번씩 신전을 전부 다시 칠하는 행사가 있는데, 칠이 끝나면 매우 눈이 부신다고 한다. 신사 뒤쪽에는 애마와 함께 묻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이 있는데, 닛코로 옮겨가서 다시 조성한 무덤과 비슷한 모양이다. 구노 산 도쇼구 박물관은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 오쿠가와 가문 역대 쇼군의 갑옷과 투구, 고문서 등 약 2,000점을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 이에야스가 애용한 외제 안경과 멕시코 총독이 보내온 스페인제 서양 시계 등도 전시하고 있다.
8. 슨푸 성의 3층식 이중 망루
우리 탐방단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적을 따라 슨푸 성으로 발길을 옮겼다. 유년 시절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 붙잡혀 슨푸에서 생활하게 된 이에야스는 훗날 스루가의 영토를 손에 넣은 뒤 1589년 이마가와 가문의 저택이 있던 장소에 슨푸 성을 축성했다. 그는 한동안 슨푸 성을 떠난 적도 있었지만 1607년 서쪽 지방 다이묘의 부담으로 성에 대궁전에 걸맞은 3중의 해자와 6층(또는 5층)7단의 천수각을 만들어 면모를 일신시켰다.
이에야스는 그 이후 슨푸 성에 살면서 태상왕으로서 쇼군 히데타다의 후견인 역할을 맡아 국내 통일과 외교 정책에 진력했다. 그가 외교력을 집중하여 공을 들인 것이 조선통신사였다. 1607년 제1회 통신사 일행은 슨푸 성에 기거하던 이에야스에게 선조宣祖가 쓴 국서를 전달하겠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나는 아들 히데타다에게 쇼군 직을 양위했으니 먼저 에도로 가서 그에게 국서를 전한 뒤 돌아오는 길에 들러달라” 라고 했다. 이에야스는 통신사 일행에게 자신의 유람선 5척을 내주고 스루가 만에서 주변 경승을 즐기며 뱃놀이를 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슨푸 성은 1635년 화재로 천수각이 소실된 뒤 재건되지 않았다. 그래도 니노마루(둘째 성곽)와 산노마루(첫째 성곽)의 해자垓字, 오테고몬은 아직 잘 보존되고 있다. 또한 히가시고몬東御門과 3층의 이중 망루인 다쓰미 망루撰櫓 등은 복원되어 있다. 현재 산노마루에는 시즈오카 현청 등 공공시설물이 들어서 있고, 혼마루와 니노마루는 슨푸 공원으로 시민에게 개방되어 있다. 혼마루의 한편에는 매 사냥을 좋아했다는 이에야스를 본떠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매를 손등에 앉힌 이에야스의 거대한 동상이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시즈오카 시 문화재와 야마코토 고지山本宏司 씨가 우리 탐방단을 다쓰미 망루와 히가시고몬 등을 안내해주었다. 다쓰미 망루는 슨푸 성 니노마루 건물의 동남쪽 모퉁이, 즉 12간지의 동남쪽 방향에 세워진 3층식 이중 망루로서 성내에서 가장 높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슨푸 성의 니노마루 동쪽에는 해자 위에 놓인 히가시고몬이 망루와 나란히 서 있고, 고라이몬高麗門, 야구라몬櫓門이 재현되어 있었다.
슨푸 성의 산노마루에는 지난날 금속활자 인쇄시설이 있던 곳이 빈터로 남아 있다. 우리나라는 고려 고종 21년(1234년)부터 금속활자를 쓰기 시작했으나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전까지는 목판인쇄만 사용했다. 그런데 우리의 귀중한 금속활자가 임진왜란 때 한양을 침공한 왜군에 의해 방대한 서적과 함께 몽땅 약탈되었다. 한양에서 약탈해온 금속활자는 이들이 처음 손에 넣어본 귀중한 새 기술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신성순과 이근성이 쓴 『조선통신사』(중앙일보사, 1994)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에야스는 만년에 슨푸 성에 은거하면서 이 성 안의 산노마루에 금속활자 인쇄 시설을 갖추어 놓고 『대장일람大藏一覽』, 『군서치요群書治要』라는 책을 출판하도록 했다. 이때 쓰인 활자가 서울에서 약탈해간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한반도에서 건너간 최신의 인쇄 기술에 이에야스가 직접 큰 관심을 기울인 것만은 틀림없다. 인쇄를 담당했던 기술자는 임오관林五官이라는 한국 사람이었다. 전쟁 때 금속활자와 함께 잡혀간 사람이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