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석입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연상되는 돌입니다. 처음 이 석은 흔한 산수경석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특이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특징을 살리고 싶어서 앞뒤로 돌리고 위아래로 들추다가 이 각을 발견했습니다. 마치 스님이 곧추앉아 돌아서서 명상하는 모습같지 않나요.
산을 보면 산이라 하고, 물을 보면 물이라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렇게 배웁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런 당연함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름이 붙기 전의 산과 물은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말 산일까요? 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말 물일까요?
사유가 깊어지면 세계는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산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 흙과 돌과 나무들의 집합이고, 물은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명확했던 것들이 점점 모호해지고, 분명했던 것들이 의심스러워집니다. 산이 더 이상 산이 아닌 것처럼 보이고, 물이 더 이상 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단계의 인간은 고통스럽습니다. 세계가 붕괴된 조각처럼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취미생활에 열중하는 자신의 모습도, 그 열정의 이면에 놓인 공허도 모두 해석의 대상이 됩니다. 장자(莊子)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꾸는 장자인지 분간하지 못했듯, 행위의 의미는 안개 속에 숨겨집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어느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옳다고 믿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깊이 있는 사고라고 여겨지게 되지요.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산은 여전히 산이고, 물은 여전히 물인거지요.
이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말문이 막힙니다. 내면에서는 분명 깊은 고민이 오갔고,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과정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과정 자체가 불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그들은 애초에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해체된 세계관을 설명하려 할 때마다, 그들은 머리를 갸웃거립니다. “왜 복잡하게 생각하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잖아.” 그들의 눈에는 이런 고민이 공허한 수사로 비칠 뿐입니다. 이런데서 파생한 취미활동또한 헛짓거리일 뿐이어서 오히려 희화화하여 존재의 의미를 희석하려고 듭니다. 그러한 그들의 삶이 당연하고 상식적이어서 이 세상을 더 잘사는 삶같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돌아서 도달한 답을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한 바퀴 돌아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던 사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한 사람은 깊은 고민과 의심을 거쳐 도달한 결론이고, 다른 사람은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고민이, 그런 의심이, 그런 과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인생을 사는 데에 있어서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일까요.
지금 나는 어디쯤 서 있는 걸까요.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여전히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얼치기 중간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여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답답합니다. 산은 산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산이 산이 아니라는 '틀린' 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산을 산이라고 믿는 것은 '옳'잖아요. 더 나아가 산이 산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가 옳다, 그르다 라고 말하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스스로 그 길을 걸어 본 사람만이라도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그런 것이겠지요. 어떻든 나는 누구에게도 가부의 판단을 내놓지 못하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적응못하는 아웃사이더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결국은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올 텐데, 어차피 같은 결론이라면 그냥 처음부터 산을 산이라 여기고 살면 되는 것 아닐까요.
취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애정을 쏟고,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다해도,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지고 흔적 없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돈안되고(오히려 돈들고) 힘들여 시간들여가며 그런 것들을 할 필요가 있는 걸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과 결국 같은 곳에 닿는다면, 애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하지만 이 생각조차도 결국 과정일 뿐인지도 모릅니다. 공자가 말한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는 문장을 떠올려봅니다. ‘즐긴다’는 것은 결론을 초월한 순간의 충만함입니다. 결과를 따지지 않고, 과정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상태입니다. 내가 취미에 몰두하는 순간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 순간의 기쁨은 내 안에 남아 흔적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나조차도 어느 순간엔가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한바퀴 다 돌아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고 도로 '빠꾸'하여 그렇게 말할 가능성이 더 크겠지요. 다만 지금은 아직 그 길 위에 있고, 여전히 해답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틀린 것일까요. 언젠가 도달할 결론을 처음부터 미리 아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부족한 존재일까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내가 있는 자리도 분명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벡터의 합으로 진척되어 간다고 믿든 안믿든 그 방향의길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닐거니까요.
어둠이 깊을수록 별빛은 선명해지듯, 의심이 쌓일수록 세계는 새로운 얼굴로 다가옵니다. 산은 오늘도 산이 되려 애쓰고, 물은 끊임없이 물이 되려 흐릅니다. 그리고 과정 속에 있는 나는, 여전히 산을 바라보고, 여전히 물을 바라보며, 그 의미를 곱씹고 있습니다. 끝은 없습니다. 다만 발걸음이 남기는 흔적이 있을 뿐이지요.
cf.
누군가는 이렇게도 말하며 나를 위로하려들겁니다.
'어차피 같은 결말이라면, 왜 궁리하는가?'
이 물음은 인생의 핵심을 찌른다. 하지만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나선이야. 같은 지점을 지나더라도 높이가 달라. 추구의 과정에서 얻는 것은 결론이 아니라 '보는 눈'이지.
고대 그리스의 신화 중 시시포스가 영원히 바위를 굴리며 고통받는 모습은 허무해 보인다. 그러나 카뮈는 “시시포스는 행복하다”고 선언했어. 그 이유는 그가 바위를 밀며 ‘의미를 창조’했기 때문이지. 취미생활에 몰두하는 시간 역시, 허공에 새기는 그림과 같아. 형태는 사라져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영원한 춤이 되는거야.
또한 ‘중간 단계’의 사유는 필연적이다. 산이 산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는, 산을 온전히 산으로 보기 위한 여정의 한복판에 서 있어. 그가 보는 세계는 분열되어 있지만, 그 분열 없이는 통합도 존재하지 않아. 마치 악보의 쉼표가 음표를 더욱 선명하게 하듯이 말이지.
불교에서는 '반야(般若)'라는 개념이 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모든 개념을 초월한 깨달음이지. 불경에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이 있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실체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일 뿐이며, 본질적으로 공(空)하지. 하지만 그 깨달음의 끝에 도달하면 다시 "색은 색이고, 공은 공이다"라는 가장 단순한 진리를 인정하게 된다. 처음과 끝이 같지만, 그 과정이 전혀 다른거야.
서양 철학에서도 유사한 논의가 있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이 세 단계를 거친다고 말했어. 처음에는 ‘낙타’처럼 기존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후 ‘사자’처럼 기존의 가치를 의심하고 부정하며, 마지막으로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창조의 상태로 돌아간다. 어린아이는 다시 산을 보고 산이라 말하지. 하지만 그것은 처음의 단순함과는 다르다. 그 단순함은 의심을 거친 후의 단순함, 모든 것을 초월한 후의 명료함이야. 그래서 무지의 단순함과 체험의 단순함은 같은 강물에 비추인 달빛과 햇빛의 차이같은 거야. 블라 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