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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느헤미야서 연구의 난제들과 그 해법들
1. 서론
바빌론 포로 이후 페르시아 시대 유다 공동체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구약성서의 책으로 에스라-느헤미야서가 독보적이다. 에스라-느헤미야서를 통해 귀환한 ‘골라’(גולה) 공동체의 삶 의 양태와 성전 중심, 율법 중심의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에스라와 그 의 지지자들인 ‘하레딤’(חרדים; 스 9:4; 10:3)은 공동체 정화와 공동체 정체성 확립을 위해 혼합 결혼한 가정 해체라는 파격적인 개혁을 통해 엄격하고, 과격한 율법주의자의 면모를 보여 주었으며(스 9-10장), 느헤미야를 필두로 한 견고한 언약(느 9:38-10:39)은 고전적 신명기 언 약과 다메섹 분파 사람들의 언약 사이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가 되어 정치에 제의적 민족성을 적용한 느헤미야가 훗날 마카비 사람들의 롤모델이 되기도 했다.4)
이처럼 에스라-느헤미야서 는 포로기와 포로 이후를 거치면서 야훼신앙이 유대교로 나아가는 중요한 다리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고대 이스라엘 역사의 불연속성의 갈등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다. 그 동 안 에스라-느헤미야서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활발한 연구가 있어 왔다.5)
본 논문이 의도하는 바는 에스라-느헤미야서의 기존 연구 결과물들을 기초하여 아직까지 국내 학자들이 다루지 않 았던 에스라-느헤미야서의 난제들을 구약성서 본문들과 페르시아 국제정세를 바탕으로 해결해 보고자 한다. 이미 앞서 다루었던 에스라-느헤미야서의 주요 주제들(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귀 환연대 논쟁, 에스라의 임무와 업적에 대한 논쟁, 느헤미야의 행적에 대한 논쟁)6)은 이미 다 루었기에 본 논문에서는 피하도록 할 것이다.
4) 조셉 블렌킨소프, 『유대교의 기원: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소형근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 회, 2014), 316.
5) 이에 대해서는 김래용의 연구사 논문을 참고하라. 김래용, “에스라-느헤미야서의 연구사: 1990년부터 현재까지”, 「구약논단」 54집 (2014년 12월), 337-369.
6)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 민경진이 충분한 설명을 해 주었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다루지 않도록 할 것 이다. 참고. 민경진, “페르시아 제국시대의 유대역사 재구성: 기원전 458년에서 430년까지 에스라-느 헤미야를 중심으로”, 「구약논단」 27집 (2008년 3월), 113-137; 김선종, “에스라-느헤미야 연구 서 설”, 「구약논단」 73집 (2019년 9월), 49-73.
2. 난제들
1) 이방인 포비아?
기원전 586년에 유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강제 이주자들은 어떤 생활을 영위했을까? 혹시 이들은 바빌론인들의 감시 아래 강제 노역에 끌려 다니며 원치 않은 비참한 삶을 살거나, 혹은 군대 용병으로 차출되어 전쟁에 동원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 까? 또는 제한된 구역 안에 거주하면서 제국의 허락을 받아야지만 외부와 접촉할 수 있었던 주거의 제한은 없었던 것일까? 우리는 포로민들에 대한 정경상의 제한된 정보로 인해 바빌론 에 강제 이주된 유다 사람들의 삶의 양태에 대해 갖가지 예측만을 해보게 된다.
하지만 앞선 상상과는 달리 바빌론에 강제 이주된 유다 사람들은 비록 바빌론 제국의 감시 아래에 있기는 했지만, 그들만의 고유한 구획을 불하받아서 농사를 지을 수도 있었고, 자유롭게 결혼도 할 수 있었으며(렘 (29:5), 또한 여러 포로민들과 상업적 목적을 위한 조직(ḫatru)을 만들어 상거 래를 통해 제국의 왕실에 부과금이나 세금을 납부하면서 자유민의 신분으로 생활을 이어나갔 다.7)
또한 강제 이주된 자들은 바빌론 지역에서도 신앙공동체의 삶을 이어가기는 했지만,8) 이 들의 삶은 과거 유다 지역과 달리 국제환경에 적응한 자유분방한 신앙인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위치한 우룩(Uruk), 우르(Ur), 시파르(Sippar) 등지에서 발견된 수 천 개의 쐐기문자 점토판들 중에 특히, 1893년에 니푸르(Nippur) 지역에서 발견된 무라슈 문 서(Murašû texts)에는 히브리 이름9)을 가진 사람들이 다양한 사회분야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예를 들면 단체의 대표, 재산가, 감독, 전령, 관리, 교사, 서기관 등과 같은 일을 이스라엘 후손들이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10)
이러한 예들은 바빌론 시대와 페르시아 시대를 거치면서 강제 이주당한 이스라엘 후손들이 바빌론 지역의 사회적, 경제적 활동에 비 교적 잘 적응했으며, 또한 그 사회에 잘 동화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은 여러 민족들과 상생을 위한 목적으로 이들이 처한 국제 환경에서 이방인과 혼인했던 ‘혼합결혼’은 매우 일반적이었던 것이 분명했다.11)
고레스 칙령으로 바빌론 지역에 강제이주 되었던 유다의 후손들 42,360명이 유다 예루살 렘으로 귀환하게 되었다(스 6:64). 이 ‘귀환자 공동체’를 흔히 히브리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 여 ‘골라(גולה) 공동체’라 부른다. 이 골라 중에는 바빌론 지역에서 상당한 부(富)를 축적했던 자들도 있었고,12) 또한 상당한 권력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13) 그러나 이제는 환경이 바뀌었다. 바빌론 지역에서는 국제적 환경이었고, 자유분방한 신앙생활을 했어도 누군가 지적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나, 바빌론 지역에서 돌아온 자들이 다리오 1세 제6년 아달월에 제2성전을 건 축하면서(주전 516/5년) 이제 골라 공동체는 성전 중심의 신앙공동체로 다시 무장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골라 공동체의 정화를 위한 개혁조치 중 가장 으뜸으로 대두되는 주제가 ‘혼 합결혼’에 대한 문제였다.14)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는 골라 공동체의 지도자들인 에스라 와 느헤미야는 한결같이 이 ‘혼합결혼’의 문제를 개혁주제로 삼았다(스 9-10장; 느 13:23-31). 혼합결혼 금지에 대한 성서적 기원은 신명기 7장 1-4절이다. 신명기 7장 1-4절은 가나안 땅 에 들어가게 될 출애굽 공동체에게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딸들을 가나안의 이방족속들에게 주 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신명기 7장 1-4절은 이스라엘에게 이방 인들과 혼인을 금하는 규정이지, 이방인들과 결혼한 이스라엘 기혼자들의 가정을 해체시키라 는 내용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은 신명기의 혼합결혼 금지조항에 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방여인과 결혼한 유다 남성들의 가정을 해체시키라고 말한다(스 10:3; 느 13:30). 따라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신명기를 넘어서는 매우 엄격하고, 과격한 율법 주의자들이면서,15) 신명기 규정을 뛰어넘는 율법의 재해석자로 자리하게 된 셈이다.
혹자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대상으로 ‘이방인’을 선택한 것이 골라 공동체 정화를 위 한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말 ‘이방인’은 히브리어 용례상 통일된 한 단어가 아니라, 다양한 용어들로 되어 있으며, 또한 다양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예를 들 면, 구약성서에서 ‘이방인’은 ‘게르’(ger), ‘자르’(zar), ‘토샤브’(toshab), ‘노크리’(nokri) 혹은 ‘네카르’(nekar)로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개혁대상으로 삼았던 이방인은 위의 네 부류 모든 이방인을 포함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들 중에 어느 특정 그룹을 대상으로 삼았던 것인지? 에스라-느헤미야서에 대한 세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에스라와 느헤 미야가 개혁대상으로 삼았던 ‘이방인들’ 중에는 ‘이방인 남자’가 아닌, ‘이방인 여자’에게만 한 정시키고 있는데, 왜 이방인 남성은 개혁대상이 되지 않았고, 골라 남성과 결혼한 이방인 여 성만이 개혁대상에 포함되었던 것인지.16) 이에 대한 신학적 검토 또한 필요할 것이다.
우선 에스라-느헤미야서에는 히브리어 ‘이방인’에 대한 용어가 ‘노크리’(נכרי; 스 10:2, 10, 11, 14, 17, 18, 44; 느 13:26, 27)와 ‘네카르’(נכר; 느 9:2; 13:30)만 사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노크리’와 ‘네카르’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대상으로 등장하고 있다. ‘노크리’와 ‘네카르’ 는 ‘솔로몬의 봉헌기도’(왕상 8:41, 43; 대하 6:32, 33)와 이사야서에서 야훼의 종말론적 제의 공동체의 새로운 구성원(사 56:3, 6)17)으로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구약성서 내에서 '노크리’와 ‘네카르’는 전적으로 부정적 관점 일색이었다. 그렇다면 ‘노크리’와 ‘네카르’가 어떤 ‘이 방인’이길래 이렇게 부정적일까? 랑(B. Lang)은 ‘노크리’(혹은 ‘네카르’)가 ‘비이스라엘인’(삿 19:12; 왕상 8:41)이면서 ‘타국인’(신 17:15)이자 ‘이방 여인’(왕상 11:1, 8)을 가리킬 때 사용 하는 용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노크리’(혹은 ‘네카르’)는 이스라엘 안에서 법률적인 보장과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었다.18)
포로 이후 골라 공동체가 새롭게 정화 된 공동체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이방인 ‘노크리’와 ‘네카르’는 배척 대상이 되어야 했음이 분 명했다. 그렇다면 이방인 ‘게르’(גר)는 어떠한가? 미크(T. J. Meek)는 ‘게르’를 야웨 종교로 개 종한 자라고 규정하고 있으며,19) 신명기에서는 이 ‘게르’를 사회적 약자로 규정하고 도와야 할 대상으로 판단하고 있다(신 14:28-29; 26:11-12). 그렇다면 에스라-느헤미야서에서 ‘게르’에 대한 입장은 어떠한가? 일단 에스라-느헤미야서에는 ‘게르’라는 히브리어 용어를 사용하지 않 고 있다. 하지만 ‘게르’라 인정할만한 표현들은 암시되고 있다. 그것도 에스라 본문과 느헤미 야 본문에서 각각 한 번씩 등장한다. 예를 들면, 제2성전건축 후 봉헌식(스 6:16-18)이 진행 되고, 이후 유월절 기념행사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בני־הגולה)”인 ‘베네 학골라’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스 6:19).
그런데 이때 유월절 행사에 참여했던 또 다른 그룹을 에스라 6장 21절 에서 장황하게 소개하고 있다.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 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 또한 유월절 행사에 참여하여 먹고 즐거워했다고 알려준다(스 6:21-22). 윌리암슨(H. G. M. Williamson)은 이들을 가리켜 “개종자들”(proselytes)이라고 규정하고 있고,20) 블렌킨소프(J. Blenkinsopp)에 따르면 비록 이들이 히브리어 ‘게림(גרים)’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포로 이후 유다 공동체에 서 내부자들(insiders)이 되고 싶어 하는 외부자들(outsiders)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규정하고 있다.21)
즉, 포로 이후 유다 공동체의 유월절 기념행사에는 바빌론에서 돌아온 자들 외에도 유다 땅에 거주하던 ‘게르’가 함께 동참했던 것이다. 이들은 ‘게림’, 곧 야훼 신앙을 가진 ‘개 종자들’이었다. 또한 느헤미야 10장 1-27절까지는 언약에 인봉한 자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이 명단에 누락된 사람들을 요약적으로 소개한 본문이 느헤미야 10장 28절이다. 28절에는 가장 먼저 “그 남은 백성(שאר העם)”이 나오는데, “그 남은 백성”은 뒤이어 나오는 그룹들을 대표하 는 표현이다. 즉, “그 남은 백성”에는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문지기들”, “노래하는 자 들”, “느디님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성전에서 활동하는 그룹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כל־הנבדל מעמי הארצות)가 나오는데, 히브리어 표현을 직역하면 ‘그 땅의 백성들과 구별된 모든 자’로 번역할 수 있다.
28절의 ‘그 땅의 백성’은 에스라-느헤미야서에는 부정적으로 인식된 자들로 이들은 제2성전건축을 방해하 던 자들이었으며(스 4:4),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던 자들이었고(스 9:11), 골라 공동체가 끊 어버려야 할 대상이었으며(스 10:
11), 안식일 법을 어기던 자들이었다(느 10:31). 그리고 느헤 미야 10장 28절의 ‘그 땅의 백성들과 구별된 모든 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느 10:29)22)이기 때문에 광의적인 의미로 본다면 ‘게르’를 포함한 야훼신앙 숭배자들을 의미하는 셈이다.
따라서 기원전 5세기 중반 포로 이후 유다 공동체의 지도자로 활동했던 에스라와 느헤미 야는 공동체 정화라는 관점에서 혼합결혼한 가정을 배척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방인을 혐오 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아니라, ‘노크리’(혹은 ‘네카르’) 여성과 결혼한 가정에 대한 제한적 인 정화작업을 시행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모든 이방인들을 개혁의 대 상으로 삼았다는 섣부른 선입견은 에스라-느헤미야서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가져다줄 것이다.
7) 조셉 블렌킨소프, 윗글, 170.
8) 에스겔 11장 16절에는 하나님께서 포로민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어 주시겠
다고 말씀하고 있고, 제사장 에스겔의 집에 장로들이 찾아와 에스겔에게 임한 계시의 말씀을 듣게 된 다(겔 8:1; 14:1 등). 또한 에스라 2장과 느헤미야 7장의 귀환자 명단에는 ‘제사장’, ‘레위 사람’, ‘노 래하는 자’, ‘문지기’, ‘느디님’이라는 성전(소) 종사자들이 나열되고 있고, 레위 사람들은 가시뱌 지방 에 집단 거주하게 된다(스 8:17-20). 그리고 비록 바빌론 지역은 아니지만 이집트의 엘레판틴 지역에 서 ‘야후’(Yhw) 성전이 세워져 이스라엘 자손들이 야훼신앙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점들을 통해 추 측할 수 있는 것은 바빌론 지역에 강제 이주된 자들은 야훼신앙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9) 히브리 이름은 다음 글을 참고하라. M. W. Stolper, Entrepreneurs and Empire: The Murasu Firm, and Persian Rule in Babylonia (Istanbul: Nederlands Historisch-Archaeologisch Instituut, 1985), 70-85.
10) 조셉 블렌킨소프, 윗글, 171-172.
11) 이에 대해서는 에팔(E. Ephal)의 두 편의 글을 참고하라. E. Ephal, “The Western Minorities in Babylonia in the 6th-5th Centuries B.C.: Maintenance and Cohesion”, Or 47 (1978), 74-90; “On the Political and Social Organization of the Jews in Babylonian Exile”, in XXI Deutscher Orientalistentag Vorträge, ed. Fritz Steppart. ZDMGSup 5 (Wiesbaden: Steiner, 1983), 106-112. 에스라-느헤미야서에는 도비야가 아라 자손과 결혼했고(느 6:17-17), 산발랏이 대제 사장 가문과 결혼동맹을 맺었으며(느 13:28), 요세푸스의 글에는 산발랏의 딸 니카소와 예루살렘 대제 사장 므낫세의 결혼을 알려주고 있다(Ant. 11.312). 포로 이후 실세 가문들 간의 혼합결혼은 국가와 사회의 엘리트 지위를 더 견고히 하려는 등용문이 되었다.
12) 에스라 2장의 명단에 귀환자들과 함께 돌아온 말이 736, 노새가 245, 낙타가 435, 나귀가 6,720이‘노크나 되었고(66-67절), 성전건축 예물로 금 61,000다릭과 은 5,000마네와 제사장의 옷 100벌을 드렸던 것을 볼 때 귀환자들 중에는 상당한 재력을 가진 자들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13) 에스라 2장의 명단에 남종과 여종이 7,337명이었고, 노래하는 남녀가 200명이었다(65절). 이들 명단
은 귀환자들 중에 바빌론 지역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자들이 다수 포함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14) 소형근, “에스라-느헤미야에 나타난 신학적 기원들”, 「구약논단」 47집 (2013년 3월), 140.
15) 조셉 블렌킨소프, 윗글, 168.
16) 골라 여성이 이방인 남성과 결혼한 경우에 대해 골라 공동체는 상대적으로 덜 위협적으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민 36:1-12) 이스라엘 남성에게 기업이 이어졌기 때문 에 골라 여성의 혼합결혼의 경우는 세습적인 토지 소유권을 잃을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골라 공동체 는 골라 남성의 잡혼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17) 참고. 박경철, “이스라엘 포로기 이후 새로운 유대 제의 공동체 구성원에 관한 논쟁: 종말론적 구원 의 대상자로서의 이방인과 고자, 그들은 누구인가? 사 56장 1-8절을 중심으로”, 「구약논단」 38집 (2010년 12월), 114-136.
18) B. Lang, נכר (ThWAT V) (Stuttgart: Kohlhammer, 1986), 460.
19) T. J. Meek, “The Translation of Ger in the Hexateuch and its Bearing on the Documentary Hypothesis”, JBL 49 (1930), 172-180.
20) H. G. M. Williamson, Ezra, Nehemiah (WBC 16) (Waco: Word Books, 1985), 85.
21) J. Blenkinsopp, Ezra-Nehemiah (OTL)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8), 133.
22) 윗글, 314.
2) 스룹바벨의 사라짐
제1성전이 무너진 기원전 586년에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상실감으로 가득 찼었 다. 다윗계 왕족이었던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히고, 놋 사슬에 결박된 상태로 바빌론으로 끌려갔으며(왕하 25:7),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를 대신해서 유다 지역에 새로운 지도 자 그달리야를 임명했다(왕하 25:22). 열왕기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달리야의 정확한 직책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영어성서 일부 역본(NRSV)에서는 그를 ‘총독’(פחה)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런 그달리야를 다윗계 후손인 이스마엘이 암살하는데(왕하 25:25), 예레미야서는 이런 이스마 엘의 호칭을 “왕의 장관”(רבי־המלך)이라고 알려준다(렘 41:1). 이스마엘을 “왕의 장관”이라고 했다면 아마도 바빌론 왕이 그달리야를 ‘봉신왕’으로 세웠다는 것이고, 이스마엘은 그런 봉신 왕 그달리야의 ‘라브’(רב), 즉 ‘고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계의 후손인 왕족 이스마엘의 입장에서는 비다윗계인 그달리야를 유다의 봉신왕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에 암살을 도모하게 된다.23)
그러나 신명기 역사가는 바빌론의 봉신왕 그달리야의 죽음으로 끝내지 않고, 기원전 597년 바빌론에 끌려간 여호야긴의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있다. 열왕기하 25장 27절은 바빌론 감옥에 있던 여호야긴을 가리켜 “유다의 왕”이라고 진술하고 있고, 바빌론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에 여호야긴이 감옥에서 나와 죄수의 의복을 벗고, 평생 왕의 앞에서 음식을 먹으 며, 왕에게서 일정한 생계비(ארחה[새번역])를 받았음을 진술하고 있다(왕하 25:27-30).24) 이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긴 하지만 신명기 역사서의 마무리를 감옥에 갇혀 있던 왕이 자유의 몸이 되어 그의 지위가 상승되었다는 것은 희망적인 보도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미래적 희망의 보도는 고레스에게 와서 화룡점정이 되었다. 기원전 539년 바빌론에 무혈입성하면서25) 바빌론의 왕이 되었던 고레스가 칙령(기원전 538년)을 통해 바빌론에 있던 포로민들의 귀환과 신전(temple) 건축을 허락한다(스 1:2-4). 이런 고레스를 이사야는 ‘하나님 의 목자’(사 44:28)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사 45:1)인 ‘메시아’로 인정했고, 이런 예언자의 선포에 힘입어 바빌론에 있던 강제 이주민들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애타게 기다리던 자들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과 기대감 가운데 있었다.26) 또한 포로민들은 예 언자 예레미야의 예언(렘 25:12; 29:10)이 드디어 성취될 것이라는 희망에 한껏 부풀어 올랐다. 다윗계의 후손이었던 스룹바벨(대상 3:19)을 앞세워 무려 남자 장정 42,360명이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으며, 이런 스룹바벨의 주도아래 예루살렘 성전건축이 시작되었다(스 3:8). 그러나 막힘이 없을 것 같았던 성전공사가 대적들의 방해로 다리오 2년까지 중단되었다 (스 4:24). 회복에 대한 희망으로 한껏 부풀어 있던 이스라엘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런 데 성전건축의 중단이라는 위기를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으로(스 5:1) 돌파하게 된다. 학개와 스가랴의 권면과 질책과 예언으로 유다 지역의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가 일 어나 예언자들을 도와 중단된 성전건축을 재개하게 되었다(스 5:2).
그런데 문제는 제2성전건축의 기초공사가 스룹바벨에 의해 시작되었고, 중단된 성전공사 역시 스룹바벨에 의해 재개되었지만, 성전공사의 마무리 보도(스 6:14)에는 스룹바벨이라는 이 름이 놀랍게도 빠져있다. 스가랴서에는 ‘싹’(27)צמח)이라 이름하는 사람, 스룹바벨이 성전을 건 축한다고 보도하고 있지만(슥 6:13), 예언자 스가랴가 다리오 통치 2년(슥 1:1, 7[기원전 520 년])부터 4년(슥 7:1[기원전 518년])까지 예언활동을 했기 때문에 스가랴의 예언활동은 성전공 사가 완공(기원전 516년)되지 못한 상태에서 끝났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블렌킨소 프는 스룹바벨이 성전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어느 시점에선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의 문을 제기한다.28) 블렌킨소프의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은 성전공사 재개 이후 총 독장 닷드내와 상대하는 유다 예루살렘의 대표는 “유다의 장로들”(스 5:5, 9)이었고, 다리오 왕과 상대했던 성전건축 위원장 역시 “유다 사람의 장로들”(스 6:8)이었다. 그렇다면 유다 총 독 스룹바벨은 성전건축 도중에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장춘식은 성전건축의 지도자였 던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이 빠지고 유다의 장로들로 대체된 이유가 성전건축의 주도권을 페르 시아 중앙정부가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며, 동시에 지방 정부에 대한 자치권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라고 말하고 있다.29)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스룹바벨의 사라짐에 대한 구체 적이고, 직접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혹시 스룹바벨의 사라짐이 포로 이후 골라 공동체와 페 르시아 정부 사이에 어떤 정치적인 변수로 작용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포로 이후 유다 공동체에게 스룹바벨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메시아와 같은 존재였다. 스 룹바벨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골라 공동체에게 과거 다윗과 솔로몬이 이루었던 명성을 다시 회 복해 주기를 바라던 인물이었다.30) 그도 그럴 것이 스룹바벨은 다윗계의 후손이었다(대상 3:19). 그래서 공동체 구성원들은 스룹바벨을 유다 지역의 ‘총독’이면서 ‘왕’적인 존재로 인정 했었다. 스룹바벨이 ‘총독’이었다는 증거는 학개서를 통해 알 수 있으며(학 1:1, 14; 2:2, 21), 스룹바벨이 ‘왕’적 신분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인정했다는 증거는 스가랴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스가랴 6장 13절에는 “그(=스룹바벨)가 주의 성전을 지을 것이며, 위엄을 갖추고, 왕좌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스룹바벨의 이런 왕적 신분은 페르시아 정부에서 인정한 것이 아니라, 골라 공동체가 인정한 신분이었다.31) 또한 스가랴는 스룹바벨과 성전을 중심으로 온 세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무리를 지어 몰려들어 발 디딜 틈이 없 는 거대한 도성이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슥 1:17; 2:4-5). 유다 예루살렘 지역의 이러한 움직 임은 페르시아 정부의 입장에서는 반가울 리 없었다. 다리오 1세의 통치 기간(기원전 522-486년) 중 지역의 반란과 소요사태가 19회나 반복되어서 다리오 왕은 쉴새없이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상황이었다.32) 느헤미야의 대적들이 느헤미야를 공격했던 방식들 중의 하나 가 악성루머였다. “예루살렘에서 당신을 왕으로 떠받들고서 ‘유다에 왕이 있다’고 선포하게 할 예언자들까지 이미 임명하였다는 말을 들었소. [...]”(느 6:7). 이처럼 대적들은 느헤미야를 ‘유 다의 왕’이라는 누명을 씌워 느헤미야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페르시 아 제국의 왕실 입장에서는 속주에 허락하지 않은 왕을 옹립하거나, 혹은 독립을 꾀하려는 시 도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33) 즉, 골라 공동체 내에서 스룹바벨을 왕적 존 재로 인정하는 분위기에서 성전건축을 주도하는 스룹바벨을 제국의 왕실에서는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펜샴(F. C. Fensham)은 스룹바벨이 성전건축 이전에 죽었다고 주장하 고,34) 에스케나지(T. C. Eskenazi)는 성전건축 본문이 지도자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집중했었 기 때문에 스룹바벨을 에스라 5장 2절 이후에 생략했다고 주장한다.35) 그러나 이 두 주장 또 한 스룹바벨의 사라짐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오히려 성전건축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스룹바벨이 도중에 사라진 이유는 위의 정황들을 고려할 때 페르시아 정부와 관련되었을 가능 성이 크다. 스룹바벨 이후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임명될 때까지 유다 지역에 총독이 파견되지 않은 이유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36) 만약 스룹바벨이 왕실로부터 소환되었 을 가능성이나, 암살되었을 가능성은 없었던 것일까?37) 만약 스룹바벨이 왕실로부터 소환당하 거나 암살당했다면 당시 예언자들이 이방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독설을 내뱉었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학개는 스룹바벨이 중단된 성전건축을 재개했다고 언급하고 있고(학 1:14), 스가랴는 스룹바벨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고, 성전공사를 마칠 것이라고 예언했다(슥 4:3; 6:13). 그러나 성서 내적증거로 볼 때 스룹바벨이 성전공사완공 이전에 골라 공동체에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만약 스룹바벨이 페르시아 왕실에 소환되었거나, 암살당했다면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활동이 그 전에 마쳐졌거나, 혹은 이 두 예언자들이 그 이전에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 라서 성전건축의 기초를 놓았던 총독 스룹바벨이 제2성전건축 도중 사라졌던 것과 그 자리에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대체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스룹바벨이 사라진 이유는 유다 공동체 내에서 불기 시작했던 메시아적 기대감과 왕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페르시아 제국의 왕실을 자극하고, 긴장하게 만들었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23) G. L. Keown 외, Jeremiah 26-52 (WBC 27) (Dallas: Word Books, 1995), 241.
24) 신명기 역사서의 마지막 부분인 열왕기하 25장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으나 본 논문에서는 논외로 하겠으며, 다음의 글들을 참고하라. 참고. M. Noth, Überlieferungsgeschichtliche Studien (Tübingen: Max Niemeyer, 1943); H. W. Wolff, “Das Kerygma des deuteronomistischen Geschichtswerkes”, ZAW 73 (1961), 171-186; H. Niehr, “Religio-Historical Aspects of the‘Early Post-Exilic’ Period”, Oudtestamentische Studiën 42 (1999), 228-244.
25) 이종근, “고레스 신탁과 고레스 실린더”, 「구약논단」 48집 (2013년 6월), 148; 제임스 B. 프리처드,『고대근동문학선집』 (강승일 외 5인 옮김) (서울: CLC, 2016), 551.
26) J. D. W. Watts, Isaiah 34-66 (WBC 25) (Waco: Word Books, 1987), 156.
27) 히브리어 ‘쩨마흐’(צמח)는 이스라엘의 ‘왕적 메시아’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포로 이후 골라 공동체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스룹바벨을 통해 성취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렘 23:5[“내가 다윗에게서 의 로운 가지(צמח)가 하나 돋아나게 할 그 날이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는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 치하면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28) J. Blenkinsopp, Judaism The First Phase: The Place of Ezra and Nehemiah in the Origins of Judaism (Grand Rapids: Eerdmans, 2009), 124.
29) 장춘식, 『에스라/느헤미야』 (성서주석 14)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130.
30)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3판) (박문재 옮김)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81), 507-511.
31) 소형근, “포로 이후 초기에 나타난 왕권과 제사장권,” 「구약논단」 36집 (2010년 6월), 142.
32) 에드윈 M. 야마우찌, 『페르시아와 성경』 (박응규, 이한영, 조용성 옮김) (서울: CLC, 2010), 179. 기 원전 518년 이집트 총독 아리안데스의 도발적 행동으로 다리오는 군대를 보내 아리안데스를 살해했 으며, 기원전 499-493년에는 이오니아 지방의 반란으로 페르시아 원정길에 나서기도 했다.
33) 존 브라이트는 이러한 루머를 페르시아 왕실에 제공했던 세력으로 ‘사마리아의 귀족들’을 지목하고 있다. 존 브라이트, 윗글, 510.
34) F. C. Fensham, The Books of Ezra and Nehemiah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82), 78-79.
35) T. C. Eskenazi, In an Age of Prose: a Literary approach to Ezra-Nehemiah (Atlanta: Scholars Press, 1988), 48-53.
36) 스룹바벨이 사라지고 난 후 유다 지방은 사마리아 지역의 일부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무명의 지방 관리들에 의해 통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37) 존 브라이트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스룹바벨이 페르시아 정부로부터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극히 높 다고 보고 있다. 존 브라이트, 윗글, 511.
3) 느헤미야의 총독임명 시기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 I, 기원전 465-424년) 통치 시기였다.38) 아하수에로(Xerxes I, 기원전 519-465년) 왕의 셋째 아들이었 던 아닥사스다 1세가 왕위에 오르는 상황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버지 아하수에로를 암 살했던 왕실 호위대장 아르타바누스(Artabanus)의 거짓 정보로 인해 형 다리오를 죽였던 아 닥사스다 1세는 아르타바누스마저 죽이고 페르시아 제국의 왕으로 등극한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통치 초기에 아닥사스다는 지역의 반란들과 그리스 연합군이 이집트를 지원하면서 골머 리를 앓게 된다. 아닥사스다는 기원전 463년 박트리아(Bactriana) 지역의 반란을 무력화시켰 지만, 기원전 460년 이집트와 리비아 반란군의 소요로 페르시아 군대가 멤피스 지역까지 퇴각 해야만 했다. 그러나 메가비주스(Megabyzos)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투입되어 이집트의 반란 군이 제압되었다(기원전 456/5년). 이집트의 반란은 거의 6년에 걸친 긴 항쟁이었다. 그러나 이후에 믿었던 시리아 지역 총독 메가비주스마저 아닥사스다에 반란을 일으킴으로(기원전 449-447년) 또 다시 제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혼돈의 시기에 바빌론 지역에서 유 다 예루살렘에 파견되었던 인물들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였다. 에스라는 이집트의 반란 이후에 유다 예루살렘에 왔고(기원전 458년),39) 느헤미야는 메가비주스의 반란이 진압된 직후에 유다 예루살렘에 왔다(기원전 445년).
느헤미야가 유다 예루살렘에 오게 된 배경에는 열조의 땅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지고, 성문 들이 불탔던 상황 때문이었다(느 1:3). 성벽이 파괴되고, 성문들이 전소된 사건이 언제 발생했 던 것일까? 이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있으나 기원전 586년 유다 멸망의 사건도, 기원전 485년40) 레반트 지역 연합군의 공격의 시점도 아닌, 느헤미야가 살던 시기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이면서 에스라 4장 23절41)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민경진의 주장처럼 에스라가 예 루살렘에 성벽건축 프로그램을 가지고 추진했던 계획이 좌절된 사건으로 짐작해 볼 수 있 다.42) 열조의 땅 예루살렘의 성벽건축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소식을 접한 느헤미야는 수일 동 안 슬퍼 울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다(느 1:4). 그리고는 기회를 엿보았다. 예루살렘 의 소식을 접한 후 4개월43)이 지난 시점에 왕을 알현할 기회가 찾아왔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요청한다.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 서”(느 2:5). 이에 대해 아닥사스다 왕은 ‘좋게 여겼다’(וייטב)고 반응한다(느 2:6). 그러자 느헤미야가 왕의 파송허락을 받은 후 ‘기한’(זמן; appointed time)을 정했다(느 2:6). 그런데 여기 서 주목할 것은 아닥사스다 왕 시대에 파괴된 성(城)을 아닥사스다 왕이 다시 건축하도록 허 락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민경진은 기원전 5세기 레반트 지역에 그리스 세력의 확장으로 인해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느헤미야를 파견하여 ‘요새’를 건축하게 했다고 주장한다.44) 하지 만 그리스의 델로스 동맹세력과 페르시아 사이의 오랜 전쟁이 ‘칼리아스 평화조약’(기원전 449년)을 통해 종전선언(디오도로스, XII 4)을 했기 때문에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재건 허 락이 그리스 세력의 레반트 지역 방어 목적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보다는 아닥 사스다 왕은 자신의 신복이자, 이집트 반란을 수습했던 시리아 지역 총독 메가비주스의 반란 (기원전 449-447년)45)으로 인해 제국의 속주를 더 견고히 하고자 이집트 접경지역인 유다 지 방에 친페르시아 관리였던 느헤미야를 파송하여 성벽을 건축하도록 했던 것이다.
또한 느헤미야가 자신의 사역을 위해 ‘기한’(느 2:6)을 정했다고 하는데 그 ‘기한’은 느헤미 야가 본래 계획했던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재건의 기한’을 말한다. 즉,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재건이 끝나면 다시 페르시아 왕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느헤미야 5장 14절에는 느 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제20년부터 제32년까지 12년 동안 유다 지방의 ‘총독’으로 활동했다고 알려준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처음부터 유다 지방의 총독으로 파송된 것인지? 아니면 유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에 총독이 된 것인지? 혹은 자신의 임무를 모두 마친 후 페르시아에 돌 아갔다가 총독으로 임명되어 다시 유다 지방에 온 것인지? 이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키드너(D. Kidner)는 느헤미야가 왕에게 약속한대로 예루살렘 성벽공사를 끝내고 페르시아 로 복귀한 후 다시 유다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고 주장한다.46) 그러나 느헤미야 본문에는 느헤 미야가 예루살렘 성벽공사를 마친 후 제국의 왕실로 돌아갔다는 언급이 없다. 이와는 달리, 블렌킨소프(J. Blenkinsopp)는 느헤미야가 유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총독 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래서 느헤미야는 자신의 총독임기를 파송 초기인 아닥사스다 통치 제20 년부터 총독직을 수행한 것으로 계산했다고(느 5:14) 주장한다.47) 슈미트(W. H. Schmidt) 또 한 블렌킨소프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느헤미야 본문의 전후맥락을 근거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 전권을 부여받은 후 성벽공사가 성공을 거둔 이후에 유다 지방의 총독이 되 면서 유다가 사마리아로부터 분리되고, 독립하게 되었다고 말한다.48) 윌리암슨 또한 느헤미야 2장 6절의 전체 장면은 최대한 경제적으로 서술된 본문으로 느헤미야가 유다 지방의 총독으 로 임명되었다는 암시가 전혀 없으며, 그보다는 자신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허락해 달 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그 임무가 그의 파견의 ‘기한’이 된다고 말한다.49) 그렇다면 그의 임무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었고, 그때까지가 그의 ‘기한’이었다. 그렇다. 느헤 미야의 초기 ‘기한’(느 2:6)은 유다 지방의 총독직 수행의 기한이 아닌, 예루살렘 성벽재건이 그의 임무의 기한이었다. 그래서 대적들인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이 느헤미야 보다 높은 신 분과 권위와 권한으로 느헤미야의 성벽재건을 방해했던 것이다(느 2:19; 4:1, 7; 6:2-14). 만 약 느헤미야가 성벽공사 중에 총독의 신분으로 전환되었다면 대적들의 방해 공작에 대등한 신 분으로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장면이 느헤미야 본문에서 묘사되어야 하는데, 그런 느헤미야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모두 마친 후에는 대적들의 느헤미야에 대한 공격이 중단된 것을 볼 때 이후 느헤미야의 신분이 바뀌어 유다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 었다고 볼 수 있다.50)
38)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유다 예루살렘 귀환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들이 있지만,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하길 바라며, 본 논문에서는 전통적인 견해를 따라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1세 7년(기원 전 458년)에,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1세 20년(기원전 445년)에 유다 예루살렘에 귀환한 것을 전제하 며 논증해 나갈 것이다. 민경진, 윗글, 113-137.
39) 에스라가 유다 예루살렘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에스라 7장에서 그의 미션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에스라는 야훼의 율법을 연구하여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려고 왔으며(10절),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유 다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 왔다(14절). 또한 바빌론 지역에서 가져온 예물들을 전달하는 역 할을 수행했으며(17절),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재판하게 하고, 가르칠 목 적으로 왔다(25-26절).
40) J. Morgenstern, “Jerusalem - 485 B.C.?,” HUCA 27 (1956), 101-179.
41) 에스라 4장 23절은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로 총독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들이 예루살렘으 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권력으로 억제하여 성 공사를 멈추게 했던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을 불타 예루살렘 성벽건축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42) 민경진, 윗글, 130.
43)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제20년 기슬르월에 유다 예루살렘의 소식을 접했고(느 1:1), 4개월 후인 아닥사스다 왕 제20년 니산월에 왕 앞에 나아갔다(느 2:1).
44) 민경진, 윗글, 131.
45) A. T. Olmstead, History of the Persian Empire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48), 332; H. L. Ginsberg, “Artaxerxes”, (Encyclopaedia Judaica 3) (Jerusalem: Keter Pub.
House, 1972), 646.
46) D. Kidner, Ezra & Nehemiah (Tyndale Old Testament Commentaries Book 12)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79), 81.
47) J. Blenkinsopp, Ezra-Nehemiah, 214; 슌크(K.-D. Schunck) 또한 느헤미야가 생각한 ‘기한’(느
2:6)과 총독직과는 별개이며, 느헤미야의 ‘기한’은 3년-5년 정도 생각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참고. K.-D. Schunck, Nehemia (BKAT XXIII/2)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2009), .37
48) 베르너 H. 슈미트, 『구약성서 입문 I』 (차준희, 채홍식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236. 49) H. G. M. 윌리암슨, 『에스라-느헤미야』 (WBC 16) (조호진 옮김) (서울: 솔로몬, 2008), 360.
50) 예루살렘 성벽재건 이후 느헤미야를 공격하는 산발랏의 언급이 전혀 없다가 느헤미야 13장에서 대 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다는 보도만 나올 뿐이다(28절).
3. 결론
이상과 같이 본 논문에서는 에스라-느헤미야서의 난제들 세 가지 주제를 다루었다.
첫째는 에스라-느헤미야서가 이방인과 결혼한 ‘혼합결혼’을 공동체 정화 차원에서 개혁의 대상으로 보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은 히브리어 ‘게르’가 아닌, ‘노크리’(혹은 ‘네카르’)가 개혁의 대상이었음을 밝혔다. 즉, ‘게르’는 유월절 기념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스 6:21), ‘게르’는 언약에 인봉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자들이었다(느 10:28). 따라서 이방인 ‘게르’는 에스라 와 느헤미야의 개혁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둘째는 스룹바벨이 제2성전건축 도중에 사라진 사건에 대해 다루었다. 에스라 5장 2절 이후에는 성전건축의 지도자가 스룹바벨이 아닌 ‘유다 사람의 장로들’로 대체되었고, 스룹바벨은 더 이상 골라 공동체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이 유는 포로 이후 골라 공동체 내에서 불기 시작했던 메시아적 기대감과 왕조 회복에 대한 기대 감이 페르시아 제국의 왕실을 자극하고, 긴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스룹바벨은 성전건축 도중 에 제국으로 소환되었거나,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는 느헤미야의 총독 임명 시기에 대한 논쟁이었다. 느헤미야의 본래 임무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 임 무가 마쳐지면 페르시아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통치 제20년부터 32년까지 총독직을 수행했다고 알려준다(느 5:14). 따라서 느헤미야는 성전건축을 마친 후에 유다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유다가 사마리아로부터 분리되면서 독립하게 되었다. 이후 느헤미야 대적들의 공격이 더 이상 느헤미야 본문에서 나타나지 않음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50) 예루살렘 성벽재건 이후 느헤미야를 공격하는 산발랏의 언급이 전혀 없다가 느헤미야 13장에서 대 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다는 보도만 나올 뿐이다(28절).
4. 참고문헌
김래용, “에스라-느헤미야서의 연구사: 1990년부터 현재까지”, 「구약논단」 54집 (2014년 12 월), 337-369.
김선종, “에스라-느헤미야 연구서설”, 「구약논단」 73집 (2019년 9월), 4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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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근박사(서울신대)/http://www.kots.or.kr
<패널 논찬문>
에스라-느헤미야서 연구의 난제들과 그 해법들/안성우목사(로고스교회)
본 발제문은 에스라-느헤미야서의 성서적 스토리와 역사적 사실 안에서 지금까지 논쟁이 이어졌던 난제들을 연구했고 새로운 시각과 해법을 제시한다. 크게 세 가지 난제를 다루는데, 설교자의 입장에서 난제와 해법을 바라보며 느낀 바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난제는 ‘이방인 포비아’에 대한 해석상 어려움을 다뤘는데,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이 방인을 철저히 배척한 ‘혼합결혼’ 가정의 해체를 주장했기에, 얼핏 보면 굉장히 편협하고 율법 주의적인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골라 공동체 안에 이방인이 분류 가능함을 설명하 며, 가정 해체와 개혁의 대상은 이방인 중 ‘노크리’(혹은 ‘네카르’)였음을 밝히며, 이것이 단순 한 민족의 분리가 아닌 신앙을 지키기 위한 개혁이었음을 밝힌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편협 하고 자민족주의라고 오해할 수 있는 시각을 바꿔주었다. 그들은 포로로 살며 자유주의 신앙 이 자리 잡은 골라 공동체를 다시금 성전 중심의 신앙공동체로 무장시키고자 했다. 그 방편으 로 시대 상황에 따라 믿지 않는 자들을 공동체 내에서 분리시키는 작업이 불가피했다. 이런 노력은 성경을 읽는 성도의 오해를 어느 정도 해소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설교자의 입장에 서 한 가지 바라는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이 이방 전도가 이뤄지지 않는 시점이었다 해도,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며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시는데, ‘노크리’를 철저히 배척한 이 개혁을 하나님의 사랑과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깊은 연구가 진행 되면 좋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
둘째 난제는 ‘스룹바벨의 사라짐’이라는 난제이다. 당시 스룹바벨이 골라 공동체에 메시아 에 대한 기대감, 왕조 회복에 대한 소망을 불러일으키던 장본인임을 밝히며, 그가 갑작스레 성경에서 사라져버린 것이 정치적인 공작이었다는 것은 신선한 해석이다. 페르시아가 당시 역 사적으로 많은 반란에 휩싸였고, 그 문제에 대해 어느 때보다 민감했음은 충분히 설득력 있 다. 그래서 또 다른 반란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스룹바벨이란 인물을 어떤 방법으로든 제거했 다는 의견은 신빙성 있고, 청중에게 난제의 해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 이 생긴다. “하나님은 왜 지도자 스룹바벨이 사라지는 것에 침묵하셨는가?” 유대의 지도자로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과 왕조 회복에 대한 소망을 불어넣었던 인물이 아무도 모르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데, 단순히 선지자들의 활동이 이 사건 전에 마쳤기에 기록이 없다는 것은 더 깊은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잘못된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버리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침묵은 아니었을까? 고민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셋째 난제는 ‘느헤미야의 총독임명 시기’에 대한 논쟁을 다뤘는데, 느헤미야의 총독 임명 이 성전 건축 후라는 주장은 신빙성 있다. 그의 파견은 ‘성벽 건축’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 다. 기한을 정함이 명시됐기에 총독으로 파견된 것이 아니라 건축 후 총독으로 임명했고, 이 후 독립했다는 것에 동의한다. 상식적으로 볼 때, 성전건축을 허락하며 귀환을 허락할 때 총 독의 직책과 권한을 함께 부여하면 공사 진행도 수월하고 땅을 다스리기 좋을 텐데,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은 사람의 생각과 달리 ‘느헤미야의 때’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실제로 ‘하나님의 때’에 유다의 독립까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역사적 흐름을 발견할 수 있는 해석이다.
에스라/느헤미야와 설교/안진섭목사(새누리2교회)
소형근 교수의 논문, ‘에스라-느헤미야서 연구의 난제들과 그 해법들’은 에스라-느헤미야서 에 존재하는 세 가지 난제들에 대해 해답을 찾으려고 시도하고 있다.
첫 번째 난제는 에스라 와 느헤미야가 개혁 대상으로 삼았던 혼합결혼에 대한 것이다. 소형근 교수는 에스라와 느헤 미야가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방인은 ‘게르’가 아닌 ‘노크리’라고 밝힌다. 개종하여 언약 에 참여했던 게르는 개혁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난제는 스룹바벨이 제2성전 건축 도중에 사라진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소형근 교수는 스룹바벨이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소환되었거나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포로기 이후 골라 공동체 내에서 불기 시작한 메시아적 기대감과 왕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페르시아 제국의 왕실을 자극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세 번째 난제는 느헤미야의 총독 임명 시기에 관한 논쟁이다. 본래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 공사만 마치면 페르시아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느 헤미야는 아닥사스다 통치 제20년부터 32년까지 총독직을 수행했다고 밝히고 있다(느 5:14). 소형근 교수는 여러 사실을 종합하여 느헤미야가 성벽공사를 모두 마친 후에 유대 지방의 총 독이 되면서 사마리아로부터 분리 독립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성경을 읽다가 만나는 난제들은 설교자들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것이기에 학자들의 이런 연 구는 설교자들에게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매우 반가운 일이다. 세 가지 난제에 대한 해답 가운데 논찬자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난제는 첫 번째 주제, ‘이방인 포비아?’였다. 포로지에서 돌아온 후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이방인과 결혼한 남편들에게 그들의 이방인 아내 와 그 소생들을 내보내게 하는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현대인들에게 이 조치는 종종 이 방인에 대한 혐오로 비친다. 소형근 교수는 히브리어 단어 연구를 통하여 당시 추방했던 자들 이 단순히 인종적 이방인이 아니라 야훼 신앙으로 개종하기를 거부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밝혀 냈다. 이런 사실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이 단순히 이방인에 대한 인종적 혐오가 아니라 야훼 신앙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임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시대에서는 이런 개혁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이스라엘과 달리 다종 교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우리 한국교회는 개종하지 않는 이방인들을 추방하여 야훼 신앙의 순 결성을 회복하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 운동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다종교사 회를 넘어서 다문화사회로 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한국교회는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 을 취하는 것이 옳을까? 문제의 범위를 교회 안으로 좁혀 교회의 영적 순결성을 지켜야 한다 는 것으로만 적용하면 될까? 아니면 다문화사회로 가고 있는 한국사회를 위한 어떤 대안을 제 시할 수 있을까? 만약 교회 내부의 문제로 적용해야 한다면 요즘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 해 벌이는 여러 개혁 운동에 대해서는 어떤 인싸이트를 제공할 수 있을까?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설교할 때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그들의 개혁 운동을 어떻게 적용하여 설교할 수 있을까? 비록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는 하지만 저자이신 소형근 교수께서 이런 문제에 대 해서도 고견을 들려주시기를 바란다.
“에스라–느헤미야서 연구의 난제들과 그 해법들” 목회적 논찬/최윤석목사(천안아산주님의교회)
본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에스라-느헤미야서 안에 등장하는 난제들에 대한 접근은 현장 목 회에 있어서 잘 다루지 않는 것들이기에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난제들에 대한 답변 이 성경과 다른 문헌들을 통하여 설득력있게 진행되어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가 있었다.
먼저 저자는 첫 번째 난제로 이방인의 문제를 다루면서 특별히 “혼합결혼”의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는 점을 다루고 있다. 이방인들과의 결혼은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인 “골라 공동체” 자체에 위협을 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우리말에서 이해하는 ‘이방인’과 히브리어에서 말하는 ‘이방인’은 다 소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이방인은 다양한 용어로 쓰여질 수 있는데, ‘게르’, ‘자르’, ‘토샤브’, ‘노크리’, ‘네카르’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에스라-느헤미야서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이방인’은 ‘노크리’와 ‘네카르’ 인데, ‘노크리’와 ‘네카르’는 전적으로 부정적 관점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게 르’라고 표현할 때는 ‘사회적 약자’로 규정하면서 오히려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보는데(신 14:28-29; 26:11-12), 이들에 대하여서는 윌리암슨, 블렌킨소프 등의 근거 있는 주장들을 통 해서 볼 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로 ‘개종자’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공동체 정화라는 관점에서 혼합결혼한 가정은 배척했지만, 그 렇다고 모든 이방인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아니라 ‘노크리’혹은 ‘네카르’여성과 결혼 한 가정에 대한 제한적인 정화작업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두 번째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스룹바벨의 사라짐”이다. 고레스왕은 칙령(B.C. 538)를 통해 바빌론에 있던 포로민들이 귀환과 신전 건축을 허락한다(스 1:2-4). 다윗계의 후 손이었던 스룹바벨(대상 3:19)을 앞세워 무려 남자 장정 42,360명이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귀 환하였으며, 이런 스룹바벨의 주도아래 예루살렘 성전건축이 시작되었다(스 4:24).
하지만 성전공사는 대적들의 방해로 다리오 2년까지 중단되었다(스 4:24). 성전공사 중단의 위기에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으로(스 5:1) 돌파하게 된다. 학개와 스가랴의 권면과 질 책을 힘입어 유다 지역의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가 일어나 성전건축을 재개하게 되 었다(스 5:2).
그런데 문제는 저자에 의하면, 제2성전건축의 기초공사가 스룹바벨에 의해 시작되었고, 중 단된 성전공사 역시 스룹바벨에 의해 재개되었지만, 성전공사의 마무리 보도(스 6:14)에는 스 룹바벨이라는 이름이 놀랍게도 빠져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저자는 블렌킨소프는 스 룹바벨이 성전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어느 시점에선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는 의문을 제 기한 점에 유념하면서, 성전공사 재개 이후 총독장 닷드내와 상대하는 유다 예루살렘의 대표 는 “유다의 장로들”(스 5:5, 9)이었고, 다리오왕과 상대했던 성전건축 위원장 역시 “유다 사람 의 장로들”(스 6:8)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유다 총독 스룹바벨은 성전건축 사라진 점에 대하여, 저자의 설명은 스룹바벨은 다 윗계의 후손으로 왕적 신분에 대하여 페르시아 정부가 아닌, 골라 공동체를 통하여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다 예루살렘 지역의 이러한 움직임은 페르시아 정부의 입장에서는 반가울 리 없었기에,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스룹바벨이 갑자기 없어진 것은 페르시아 왕실로 부터 소환되었거나,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다루는 주제는 느헤미야의 총독임명 시기에 관한 것이다. 느헤미야가 처음부터 유다 지방의 총독으로 파송된 것인지? 아니면 유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에 총독에 된 것인 지? 혹은 자신의 임무를 모두 마친 후 페르시아에 돌아갔다가 총독으로 임명되어 다시 유다 지방에 온 것인지? 이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저자는 블렌킨소프와 슈미트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 전권을 부여받은 후 성벽공사가 성공을 거둔 이후에 유다 지방의 총독이 되 면서 유다가 사마리아로부터 분리되고 독립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느헤미야의 초기 ‘기 한’(느 2:6)은 유다 지방의 총독직 수행의 기한이 아닌,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그의 임무의 기 한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적들인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이 느헤미야 보다 높은 신분과 권위와 권한으로 느헤미야의 성벽재건을 방해했던 것이다(느 2:19: 4:1, 7: 6:2-14). 만약 느 헤미야가 성벽공사 중에 총독의 신분으로 전환되었다면 대적들의 방해 공작에 대등한 신분으 로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장면이 느헤미야 본문에서 묘사되어야 하는데, 그런 느헤미야의 모습 은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모두 마친 후에는 대적들의 느헤 미야에 대한 공격이 중단된 것을 볼 때 이후 느헤미야의 신분이 바뀌어 유다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흥미로운 접근은 많은 연구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특별히 이방인 에 대하여 히브리 원어를 다양하게 분류한 접근은 구약의 이방인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노크리’ 혹은 ‘네카르’들은 변화되어서 ‘게르’가 될 수 없었는지, 혹은 ‘게르’ 는 어떤 자들이 변화된 자들인지에 대한 연구가 조금 더 진행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왜 냐하면, 국내에도 이슬람권에 사는 자들을 포함한 다수의 이주민들이 들어오고 있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게르’로 변화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접근은 곧 어떻게 이방인들을 ‘그리 스도인으로 변화’시키는 것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주로 보내는 선교사들의 사역이 중요하였지만, 지금은 각 도시로 들어온 자들 곧 이주민들을 선교해야 하는 것이 선교학에서 도 중요한 주제가 된 것은 주지하는 바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 들어온 이방인들 을 구약 히브리어의 개념 ‘게르’로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 것인지에 대하여 함께 기도하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스룹바벨이 갑자기 사라진 것에 대한 것도 매우 흥미롭다. 성경을 세밀히 연구하는 학자들 이기에 잘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스룹바벨의 갑자기 사라짐이 단순히 “여러 정황 을 고려할 때”라는 주장만으로는 다소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찾을 수만 있다면, 좀 더 정 확한 근거들로 뒷받침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사실 교회의 성도들이 더 궁금해 하는 것은 에스라 초반에 나오는 세스바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가 누구였으며, 왜 갑자기 사라졌 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어쩌면 스룹바벨에 관한 것보다 더 클 것 같다.
성벽 공사가 완공된 후에는 느헤미야에 대한 대적들의 공격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가 총독으로 임명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 역시 좀 더 분명한 근거가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어차피 성벽이 지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훼방이 불필요하다고 대적들이 판단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카페지기가 너무힘듭니다 치료약도 못사고 통신료도 못내요,,
공과금.지병'치료비.먹거리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6번의 인슐린과 혈당체크 하루에 내몸을 10번을
찌르며 살다보니 많이 지치고 저혈당 쇼크등으로
머리도 이젠 예전같지 않고 어눌해지고 있어요...
카페운영을 계속하도록 도와주십시요
카페운영을 위해 작은 성금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카페에 후원을 하신분은 사랑회원(최우수)이 되십니다...
카페지기의 생활이 어렵습니다 매달 정기 후원으로
도와주시면 카페 운영에 큰힘이 됩니다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건강이 않좋아 병원을 다니며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어려우시더라도 회원님께서는
작은 사랑으로 카페지기에게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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