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년을 함께 살던 막내가 세상을 등진지 올해로 5년이 됐다. 이제 동기간이라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그녀의 죽음이 내게 던진 그림자는 의외로 컸다. 내가 여중을 다니던 때에 양부모를 여의고 동생 둘을 여린 어깨에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두 살 어린 남동생과 다섯 살 아래인 여동생이다. 그 여동생이 장성한 자식 둘을 내 품에 안기고 먼저 갔다. 아이들의 아빠는 그보다 10여 년 전에 저 세상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땐 동생이나 나나 참 억세게도 運 나쁘게 태어난 탓으로 받아들였다.
동생의 죽음은 늦게나마 나를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줬다. 세 아이를 키우느라 성한데 없이 망가진 몸을 돌아보게 됐고, 팔리다시피 결혼하느라 내 청춘을 육아하는데 다 바친 것이 억울해서 이것저것 배우는데 전념했다. 아이들은 모두 내로라는 명문대학을 나와 나름 출세 길을 걷고 있고 남편도 모진 풍파를 잘 견뎌낸 덕분에 여유로운 삶을 즐기니 유독 나만 손해라는 피해의식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더 나를 서럽게 만들었다. 무람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보니 예순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그래도 희망을 저버리진 않았다. 다들 백세 시대라고 하지 않는가.
동생의 그림자를 웬만큼 지우고 마을회관에서 진행하는 강좌를 살폈다. 노래교실, 요가교실, 글쓰기교실, 종이접기, 스마트폰 배우기, 하모니카 반, 포켓볼 반 등 10여 가지가 넘었다. 그 중에서 글쓰기 교실과 스마트폰 배우기를 신청했다. 그런데 신통방통한 것은 스마트폰을 배우고 메신저를 배운지 보름도 되지 않아서 그 동안 잊고 지내던 친구랑 카카오톡으로 연결이 됐다. 이게 웬 일인가. 그 친구는 벌써 100명도 넘는 카톡 친구가 형성되어 있었다.
"아, 나는 뭘 하고 윗입술이 쪼글거리도록 궁상을 떨며 살아왔단 말인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우째사노?"
"우째 살긴. 뭐 그럭저럭 살지."
"소문에 네는 팔자가 폈다고 하더구만."
"얘는 내 주제에 무슨 돈을 그렇게 별 수가 있다더냐?"
"한번 쏴라. 내 여고 동창들 한 열댓 불러 모우마!"
그렇게 이런저런 친구들 소식으로 수다를 늘어놓다가 카톡을 닫았다.
하루가 지났다. 나도 카친이 많이 늘었다. 게 중에는 중학교 3년 동안 친구인 듯, 애인인 듯 일요일이면 몸살 나게 그립기도 했던 훤칠한 키의 머스마와 카친이 됐다. 서둘 것도 없는데 궁금해서 한나절도 못 견디고 카톡을 날렸다.
"학이 맞는교?"
"맞구만!"
"그래, 요즘 우째 사는교?"
"가시나, 말 놔라!"
나는 오줌이 지릴 정도로 반가우면서도 그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우째 댓뜸 말을 놓겠심겨."
"그렇긴 하네. 미안쿠만. 그래도 친구끼리 뭔 존댓말인교?"
그가 말꼬리를 내렸다. 킥킥 웃음이 났지만 장난기가 슬며시 발동했다.
"그래, 그라문 말 놓자. 네는 나 보고 싶지도 않았냐?"
그가 한 동안 답이 없자 나는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물 한 잔을 들이킬 때쯤에
'카톡'하고 답이 왔다.
"나 혼자 산다. 네도 혼자라며?"
"혼자 됐다고? 언제?"
나는 괸시리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썼다. 통화를 했다면 아마 내 마음을 들키고 말았을 게 분명하다.
"좀 됐다."
"좀 이라카마 한 이태쯤 됐나?"
내가 너무 다그치는 듯했지만 그게 그렇게 빨리 알고 싶었다. 하기야 뭐 그딴 것이 그리 대수겠는가. 그래도 요 몇 년 전과 한 10여년 된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삼십 년쯤 된다."
그의 천연덕스런 대답에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가 사우디에서 돈 많이 번다고 소문이 파다하던 때가 아닌가?
결혼하고 바삐 살면서도 시나브로 그에 대해서만은 늘 귀를 열어두고 있었기에 간간히 소식을 듣고는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의 소식이 뚝 끊어지고 말았다. 친구들도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 보였다. 그렇게 벌써 몇 십 년을 살아왔다.
"삼십 년이라고?"
"그래, 뭐 그렇게 놀랄 것까진 없다 아이가."
"그렇담 지금까지 어디에서 살았는데?"
"나, 지금도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
"캐나다 어디에?"
"밴쿠버"
"세상에! 언제부터?"
"마누라 죽고 나서 딸 하나 달랑 데리고 건너왔다 아이가. "
"그럼 30년 동안 밴쿠버에서 살고 있다고?"
나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다. 내가 밴쿠버에 10여년을 살았지만 그의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런데 그 사실이 뭐 대단하다고 눈앞이 캄캄할 것까지야 없잖은가. 그런데도 그랬다. 그만큼 그가 내게 커다란 존재였다는 얘기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 군대 간다.”
“와? 대학생활 끝내고 가도 되잖아?”
“아이다. 다 싫어졌다.”
“뭣 땜에 그렇게 세상이 싫어졌는데?”
그의 맘을 알 것도 같았지만 그걸 드러내서 내색하고 싶지도 않았다.
“참, 너란 가시나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리고 횡하니 돌아서서 뚜벅뚜벅 걸어서 내 앞에서 사라졌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진지하게 고백을 하지 않았을뿐이었지만, 나 또한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도 않았다. 두 동생을 돌봐야하고 공부도 더 해야 했다.
“나 군대 간다.”
친구들한테 너무 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을 짖누르던 그가 군 입대를 앞두고 찾아왔을 때도 오히려 ‘그래 잘 가라!’라는 심정으로 외면했다.
“잘 갔다 오거래이”
그렇게 그를 군대로 떠다밀다시피 보냈다. 그리고 몇 개월 뒤에 나는 팔자를 고쳐보려는 듯이 지금의 남편한테 시집갔다. 번듯한 직업이 있고 외모 수수한 대기업 중간간부였다. 물론 나이는 나보다 열 살이 더 많은 홀아비이긴 했지만 생활에 지친 내 어깨를 가볍게 해 준다면 그 까짓 나이쯤은 문제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외제 물건을 다방이나 술집, 혹은 사무실로 다니며 팔던 작은 이모가 팔자라도 고치라며 중매했다.
“돈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돈이 없으면 아무리 인간답게 살고자 해도 그게 어려운거라. 나 봐라. 네 이모부가 제대로 벌지 못하지만 이 짓해서 집 한 채는 지니고 살고 있다 아이가. 그런데 내가 아는 대기업에 다니는 이가 얼마 전에 상처를 했는데 딱 너 같은 여자를 재취로 얻고 싶다는 구나.”
처음에는 작은 이모가 하는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런데 며칠 동안 곰곰이 요모조모를 따져봤다. 그 중에서 남동생을 생각하면 작은 이모의 말대로 결혼하는 게 탁월한 선택일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됐다. 남동생이 구두닦이로 일하면서 고학할 때, 노동자 기숙사에서 연탄가스로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 그때 작은 이모가 닦달을 했다.
“이러다가 아 쥑이겠다. 다 큰 누나라는 게 뭐 했노?”
“이모한테 신세지기 싫어서 언니가 지 피까지 팔았다 아이가.”
철없는 여동생이 작은 이모한테 대들었다. 큰 이모가 눈물을 찍어냈다. 작은 이모도 동생의 말에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것아, 그 고생해가면서 대학 나오면 뭐 하노? 시집부터 가거라.”
난리굿을 하면서도 작은 이모 덕에 동생을 살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남동생의 상태가 시원찮았다. 시도 때도 없이 병원을 들락거렸다. 그게 모두 돈이 있어야 했다. 작은 이모한테 손 벌리기에도 더는 낯이 서질 않았다. 간호보조사를 하면서 주경야독하기에도 버거운데 동생 병원비까지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모, 나 그 사람한테 시집가야겠다.”
내 말에 작은 이모가 한 동안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궁기가 철철 흐르는 것을 보고 말은 했지만 귀한 조카딸을 그렇게 시집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아이다. 큰 언니한테도 물어봐야지.”
큰 이모한테 슬쩍 미뤘다.
“물어보나 마나다. 나는 그 사람한테 시집가서 팔자 고칠란다.”
작은이모랑 나는 둘이 부여잡고 꺼이꺼이 울었다. 여동생도 그 말을 듣고 숟가락을 집어 던졌다.
“언니 너 미쳤나? 내가 학교고 지랄이고 다 때려치우고 돈 벌란다. 그렇게 시집가면 안 된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결심을 하고 있었다.
“너 미쳤구나!”
가장 가까운 친구한테 말했을 때 따귀라도 때릴 듯이 다그쳤지만 내 지친 마음을 몰라주는 야속한 년으로 치부해 버렸다.
“그래, 나 미쳤다. 네가 나를 얼마나 안다고!”
“제발 정신 차려 이것아!”
친구가 애원했지만 나는 그녀의 어깨를 밀치고 말았다.
“당분간 날 찾지도 말아라.”
친구가 울면서 말렸지만 나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돌아섰다.
“이것이, 어쩌려고 그러냐? 응, 네 엄마가 살았으면 어림도 없다”
큰 이모가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지만 나는 속으로 웨치고 있었다.
“큰 이모가 뭘 알아,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
그렇지만 그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살다가 정말 힘이 들면 이모들한테 기대기라도 한 덕분에 우리 삼남매가 이렇게라도 살아 있는 거니까. 사실 그때마다 당신 살기에도 어려우면서 나를 감싸 줬다. 그런 큰 이모지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다 알 수가 있었겠는가.
“큰 이모, 나는 이미 결정했어. 엎질러진 물이야. 그이가 무작정 내가 좋대. 그러니 말리지 마!”
울며불며 쫒아오는 큰 이모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차를 타고 그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가서 혼례를 올리고 말았다.
“그래, 네는 우째 사는데?”
“영감도 건재하고 아들 둘은 지들 할 도리는 하고 잘 산다. 그라고 딸 하나도 남편 잘 만나서 남부럽잖게 잘 살고 있다.”
“아이다, 내가 알기로는 네도 혼자 산다고 들었는데.”
첫댓글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내가 밴쿠버에 10여년을 살았지만 그의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 눈앞이 캄캄했는지 이유가 확실지 않아요
친구의 아이가 어찌 되었다는 건지 ...? 왜 혼자산다는건지? ... 뒤가 궁금해요?
궁금하시다면 참고
기다리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