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아름답게; 개역개정) 연주할지어다. (시 33:3)”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시 96:9)“
“너희(제사장)의 받은 모든 예물 중에서 너희는 그 아름다운 것
곧 거룩하게 한 부분을 취하여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 (민 18:29)“
만약 누군가 찬양에 어느 정도까지의 음악적 시도와 완성도를 갖추어야 하는지 물어보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는 모든 음악적 시도는 찬양에 합당하지 않다.
하나님이 들으시기에도, 사람들이 듣기에도 아름답기만 하다면
그 어떤 악기나 편곡이나 장르도 가능하다."
새롭게 작곡된 곡은 마치 사람이 태어나는 것과도 같아서 ‘맨몸’이나 마찬가지이다.
과거 클래식 시대의 작곡가들은 작곡과 편곡을 분리하지 않았으며, 분리할 수도 없었던 것은
당시의 음악은 대부분 가사가 없는 연주곡이어서 악기 편성이 매우 중요했기에
작곡을 할 때 단지 멜로디 라인이나 코드만 붙이는 것이 아니라,
각 악기의 연주법까지 구체적으로 편곡을 해서 악보에 그려야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클래식 곡들은 이미 악기 편성과 장르가 정해진 채 작곡되었으며,
그 원래의 편곡을 따라 초연(初演) 되었다.
현대에는 많은 작곡가들이 멜로디 라인에 코드만 붙이거나,
심지어는 악보를 그리지 못해서 코드만 그리는 식의 작곡도 많으며,
더 나아가 아예 코드도 없이 직접 연주나 컴퓨터 입력을 해서 소리로만 작곡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현대의 작곡은 어떤 편곡을 추후에 입히느냐에 따라 상당히 달라지게 되었고,
그래서 어떤 장르를 도입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8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에 새로운 찬양들이 등장하기 전에도 국내 창작 찬양들은 존재했다.
하지만, 장르적으로 클래식이나 포크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코드나 리듬, 그리고 사용되는
악기들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최 덕신은 주찬양 선교단 음반들에 상당히 파격적이고 화려한 코드들과 멜로디 라인들을
채용했으며, 채 한성, 김 지형 등이 중심이 된 새롬 중창단(또는 새롬 선교단)은 보사 노바, 락, 블루스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으며, 최 인혁은 빛과 소금 멤버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퓨전 재즈 장르를 찬양에
도입했다.
정 종원은 임마누엘 선교단 음반들을 통해 아주 쉽고 대중적이고 전통적인 스타일부터 좀 더 복잡하고
스케일이 크고 예언적인 곡들까지 시도했다.
이 성국을 중심으로 한 기쁨의 집에서는 훨씬 더 파격적인 음악들인 랩, 힙합, 댄스까지 선보였다.
외국에서는 ‘60년대 말부터 포크, 재즈, 블루스, 락, 클래식, 뮤지컬 등이 적절히 배합된 예배곡들이
등장하면서 어느 정도 ‘온건한 스타일’의 예배 음반들이 스크립처 인 송(Scripture In Song)과
마라나타 뮤직(Maranatha! Music)을 통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호산나 뮤직(Hosanna! Music) 시리즈를 통해 오케스트라로 모든 장르를 다 표현하는
‘팝스 오케스트라’ 스타일이 새롭게 시도되기 시작했으며,
‘90년대를 넘어가면서부터는 라틴, 아프리카, 레게, 켈틱 등 각 나라 고유의 장르들이 접목되었다.
찬양의 장르들이 다양하게 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각 나라와 각 시대와 각 연령에 맞는 장르들은 수백년 동안 고여 있던 찬양에 새로운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찬양 자체의 본질인 하나님 중심적이고 말씀 중심적이고 영 중심적인 것을 떠나서
사람들에게 더 호응을 얻거나 아티스트 자신의 만족을 위해 장르 자체에 지나치게 몰입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원곡과는 어울리지 않는 편곡(예를 들어 작곡가가 금식을 하면서 쓴 곡인 “목마른 사슴
(As The Deer)"를 힙합이나 댄스 장르로 함부로 한다든지...)의 무분별한 시도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과도하거나 불필요한 사운드의 활용은 새 노래와 새 장르로 찬양하는 순수한 기쁨의 불꽃을
꺼져가게 만들었다.
위에 인용한 말씀들은 찬양의 두 가지 측면을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거룩함이며, 다른 하나는 아름다움이다.
진정한 거룩함은 아름다움을 동반하기 때문이며,
거룩함은 아름다움의 영혼이며, 아름다움은 거룩함의 얼굴이다.
이 두 가지는 늘 함께 충족되어야 하며, 거룩하다면서 아름답지 않은 찬양도,
아름답지만 거룩하지 않은 찬양도 모두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질 수 없는 하자 있는 예물처럼
되어버린다.
언젠가부터 찬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만족과 필요를 위한 것,
즉, 목회자의 설교를 돕거나 회중들의 마음을 열게 하거나, 교회 분위기를 신나고 화목하게 만드는
배경 음악이나 광고 음악처럼 되어 버렸다.
하나님께 공의와 은혜가 원래 하나인 것처럼, 거룩함과 아름다움도 원래 하나인데,
거룩함을 강조하는 자들은 아름답지 않은 음악으로 대충 찬양하고 있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들은 장르와 사운드에 집착하느라 거룩한 영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요즘은 랩이나 EDM(Electronic Dance Music)이나 트롯이나 어번(urban) 가스펠 등을 시도하는 찬양들이
지나치게 많아지고 있는데, 이런 시도들이 필요한 부분도 있지만 거룩함과 성숙함이 없이 흥미 위주로
유행을 따르는 식의 마구잡이 식의 시도는 찬양을 오염시킬 뿐이다.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시도들이 다시 교회 예배 가운데 많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대신에 음악을 좀 더 공교하고 섬세하게 다루면서 절제할 수 있는 거룩한 사역자들이 교회에 발견되고
등용되어야 한다.
공교하게 음악을 하는 자들은 대부분 절제하지 못하고,
절제할 수 있는 자들은 음악을 소홀히 여기고 있기에 지금 교회의 현실이 안타깝다.
과거의 클래식 찬양만 거룩하다고 고집하는 것도,
반대로 랩이나 트롯 찬양이 현대 교회를 부흥시키는 만능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모두 잘못이다.
진정한 예배 사역자는 거룩하면서도 온전한 음악으로 만들어진 찬양을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물로
드릴 수 있는 자다.
교회들은 과거 다윗이 아삽, 헤만, 여두둔 등 영적으로 거룩하면서 음악적으로 아름다운 자들을
찾아내서 세워주고 지원해 주어야 한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