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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서울에 들어선 주요 공공건축물들 중에서도 단연 관심거리는 셋이었다. 세 건물 모두 계획이 발표되자마자 한국과 서울을 대표할 건물이란 점에서 비상한 주목을 끌었고, 설계부터 시공에 이르는 진행 과정 또한 중요한 뉴스였으며, 완공된 이후에는 언론과 시민들의 지대한 관심이 쏟아졌다. 새 서울시청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다. 21세기 서울 시민들이 평생 마주치고 이용하게 될 건물이자, 서울을 찾아오는 외국인들이 모두 찾아가게 되는 국가대표 건축이란 막중한 임무를 맡고 태어난 건물들이기에 이런 관심은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건물이 탄생한 이후 반응은 각각 사뭇 달랐다.
서울시청은 등장과 동시에 폭격 당하듯 비판이 이어졌다. 역대 공공건축물들 중에서 새 서울시청처럼 초기에 부정적인 반응이 압도적이었던 경우는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새 시청 디자인이 발표되었을 때에는 별 반응이 없다가 실제 지어지고 난 뒤 논란이 활화산처럼 폭발했는데, 지난 세기와는 달리 건축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나온 현상이란 점에서 반가운 논란이기도 했다. 이 건물에 대한 주된 불만은 유리로만 지어 돌로 지은 옛 건물(현 서울도서관)과 어울리지 않는다, 건물의 형태가 파도를 연상시켜 거부감이 든다는 것이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발표 초기에 엄청난 비판이 쏟아져 나온 뒤, 건물이 선을 보인 뒤에는 찬반이 엇갈리는 가운데 괜찮다는 반응이 예상보다 많았던 경우다. 물론 역대 공공건축 중에서 단일 건물로는 아마도 가장 많은 예산(4800억 원)을 투입해 꼭 필요하지도 않은 과시용 건물을 지었다,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은 생뚱맞은 외계 비행접시 같은 모습이 부담스럽다는 비판은 여전히 이어지는 중이다. 동시에 서울 같은 대도시에는 이런 특별한 건물이 하나쯤 있는 것도 괜찮다, 이전엔 없었던 새로운 건축이란 점에서 반갑다는 호응도 적지 않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건립 과정 자체가 논란을 일으켰고, 공공건축을 추진하는 관의 의식 수준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에 지어지면서 정작 서울에는 시민들과 외국 관광객들이 쉽게 찾아갈 대형 미술 공간이 없었던 탓에 미술관 건립 자체는 대부분 반겼지만, 중요한 공공건축물을 대통령의 치적으로 삼기 위해 단기간에 무리하게 공사를 추진한 것에 비판이 집중됐다.
실제 시공 공사 도중 화재가 일어나 인명 사고가 나는 불상사가 터지고 말았다. 외국 같으면 몇 년에 걸쳐 지을 건물을 대통령 임기 내에 개관하기 위해 야간 공사까지 강행한데 따른 전형적인 문화 후진국형 공사 사고였다. 사고로 공사가 늦춰져 결국 다음 대통령 임기에 문을 열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크고 중요한 미래의 문화재 건물을 짓는 데에는 단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서울시청이나 DDP와는 달리 문을 열자마자 시민들에게 많은 환영을 받았다. 차분하고 개방적이어서 경복궁 바로 옆 오래된 문화 지역인 주변 맥락과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으며 방문객들이 이어지는 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다른 두 거대 공공건축물과 달리 일찌감치 서울 시민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
우선 커다란 건물 하나가 압도적으로 들어서지 않고 건물의 덩치를 의도적으로 줄인 설계 자체의 힘이 크다.
새로운 건물, 특히 거대한 새 건물들은 거의 대부분 완공 초기에는 사람들과 친해지는 데 상당한 기간이 걸린다. 디자인이 개성적일수록 이런 경향은 강해진다. 파격적인 새로움을 환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익숙하던 곳에 낯선 건물이 들어서면 시각적 충격이 크기 때문에 거부감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과감한 건물일수록 찬반은 엇갈리기 마련이고, 건축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건물들도 지은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평가가 상반되는 경우도 의외로 많은 편이다. 서울시청과 DDP는 형태가 독특해 이런 거부감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설계자 민현준 홍익대 교수는 서울관을 여러 개의 건물로 잘게 쪼개 다도해의 섬들처럼 여러 건물이 무리를 이루는 형태로 배치하고, 건물 사이에 넓은 야외 마당과 길이 이어지게 해 작은 마을 같은 느낌으로 공간을 구성했다. 존재감을 내뿜는 압도적인 랜드마크 미술관이 아니라 열린 미술관이자 낮은 미술관, 튀지 않고 겸손하게 자리 잡은 미술관으로 기획한 것이다. 그래서 완공되자마자 새 건물임에도 주변 풍경 속에 자연스럽고 조용하게 파고들었다. 건물들의 형태는 가장 정직한 네모상자꼴이고, 외피의 재료와 색상도 미색 계열의 타일이어서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유리를 씌운 부분도 반짝거림이 도드라지는 하이테크풍이 아니라 차분한 유리로 처리해 다른 유리 건물들보다 은은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현대미술에서 거대한 작품들이 점점 많아지고, 다양한 장르가 섞이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대형 미술관들은 규모가 더욱 커지는 추세다. 동시에 미술관은 건축의 여러 분야 중에서 가장 조형성을 과감하게 추구하는 장르로 손꼽힌다. 전시하는 미술품 못잖게 미술관 건물 자체가 작품 역할을 하는 것이 요즘 미술관 건축의 주된 흐름이었다.
서울관은 이와는 반대로 갔다. 건물이 들어설 위치가 지닌 조건 때문이기도 했고, 건축가가 이런 조건을 제약으로 여기기보다 최대한 적극적으로 활용해 설계한 덕분이기도 했다.
서울관이 들어선 서울 소격동은 국가적 문화유산인 경복궁 바로 옆이어서 처음부터 건물을 높이 12미터 이상으로 지을 수 없었다. 이런 조건에 따라 서울관은 지상에선 건물이 작게 그리고 나뉜 모습으로 배치되고, 소장품을 전시하고 보관하는 미술관 핵심 공간은 지하로 들어갔다. 땅 위에서는 덩치가 크지 않은 낮은 건물들이 차분하고 만만하게 깔리고, 아래로는 깊게 파고들어가 거대하고 역동적인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런 구조에 따라 아래쪽에서는 거대 공간을 만끽할 수 있고, 위에서는 따로 떨어진 공간들을 정원을 거닐 듯 가로지르며 오가는 특별한 동선이 생겨났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만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실제 서울관의 전체 규모와 전시 공간들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 핵심 공간은 두 곳으로, 길이와 높이가 모두 33미터에 이르는 ‘서울박스’, 그리고 가로 세로 24미터 크기인 ‘전시마당’이다. 기존 한국의 주요 미술관에선 전시하지 못하는 초대형 작품들을 선보일 수 있는 공간들이다. 지하로 전시장들이 깊숙하게 들어가면서 가장 중요했던 요소는 빛, 곧 ‘채광’이었다. 기하학적 디자인의 빛 우물들이 자연광을 아래로 끌어들여 깊은 수직 공간 안에 부드러운 빛이 춤추는 장면이 펼쳐지면서 전시 공간이 지하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서울관이 처음부터 좋은 반응을 얻은 또 하나의 이유는 ‘회복’과 ‘조화’다. 새 건물만 있는게 아니라 서로 다른 세 시대, 세 유형의 건축물이 한 곳에 모여 생겨난 효과다.
미술관이 들어선 땅은 원래 국군기무사령부였고, 그 이전에는 조선시대 종친부가 있었다. 종친부 건물과 기무사 건물은 애초 보전과 복원의 대상은 아니었다. 종친부 건물은 다른 곳으로 옮겨진 상태였고, 기무사 건물도 철거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서울관 계획이 나온 뒤 문화재계와 건축계를 중심으로 종친부를 원래 위치인 이곳으로 다시 옮겨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종친부는 조선시대 왕실 가족들을 관리하는 관청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작지 않은 기관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아들 고종을 즉위시킨 뒤 사실상 조선의 지도자가 되면서 추진한 모든 정책의 목표는 외척들의 득세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강화하는 것이었다.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 기강을 바로 세워 쇠약해진 조선을 새 출발시키는데 대원군은 모든 것을 걸었다. 이 정책의 중심에 종친부가 있었다.
고종이 즉위하기 전 종친부에 근무한 적이 있었던 대원군은 집권 이후 종친부를 왕권 강화의 중추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 활용했다. 당시 권력을 휘두르던 외척을 억제하고 고종에게 힘이 몰리도록 왕실 종친의 뜻을 모아 그 힘을 등에 업고 개혁을 시도했던 것이다. 곧 종친부는 대원군과 고종이 조선의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던 역사적 장소였다.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종친부 건물은 조선시대 여러 관청 건물 중 하나 정도로만 여겨져 왔고, 조선이 사라진 이후 치욕적인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종친부 건물 바로 앞에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건물이 들어섰고, 광복 이후인 1971년부터 이 병원 건물이 국군 기무사령부(당시 국군 보안사령부) 건물이 되면서 종친부 건물은 대중들에게 완전히 잊혀졌다.
군사독재정권 시절 사령관이 대통령이 되었을 만큼 무소불위의 기관이었던 기무사는 1981년 종친부 건물을 갑자기 뜯어내 인근 정독도서관 구내로 강제 이전시켜버렸다. 군인들이 운동을 하기 좋게 하려고 테니스장을 짓기 위해서였다.
또한 종친부는 건축적으로도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다.
경복궁의 앞과 옆쪽인 지금의 세종로와 소격동, 삼청동 길 일대는 조선 시대 수많은 관청 건물, 곧 공공건축물이 즐비했던 거리였다. 그러나 그 많던 당시 건물들이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그리고 개발지상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다. 궁궐들을 제외하면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전통 한옥 공공건축물은 이 종친부를 비롯해 역시 원래 자리를 떠나 생뚱맞은 곳으로 옮겨진 삼군부 총무당과 청헌당, 그리고 조계사 옆 우정총국 등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만이 남았다. 서울에 현존하는 단 몇 채뿐인 전통 공공건축물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종친부 건물이 미술관의 건설과 함께 30여년 만에 비로소 제 자리로 돌아온 것은 서울이란 역사도시에서 문화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기무사 터에 짓기로 한 뒤 설계 공모 요강에 이 종친부 이전 복원은 언급되지 않았다. 공사 전 발굴에서 기단 자리가 그대로 다시 나왔고, 전문가들이 종친부를 옮겨와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민현준 건축가의 당선 설계안도 이 장소의 역사성을 중시해 종친부가 돌아올 것에 대비해 자리를 남겨놓은 것이어서 종친부는 힘들게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문화유산을 소홀히 하는 관의 인식, 더군다나 우리나라 문화를 대표하는 기관인 국립현대미술관 쪽이 이 건물의 복귀를 내심 반대했던 것은 과연 지금 우리나라의 문화 인식이 군사독재 시절보다 나아진 것이 있는지 되돌아보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또한 종친부의 여러 건물 중에서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세 건물 중 남아 있던 경근당과 옥첩당은 옮겨왔고, 일제 강점기 헐려 사라진 나머지 한 건물 자리는 역사적 장소임을 감안해 터를 비워놓고 미술관을 완공했다. 그러나 미술관 쪽은 최근 이 자리에 나무를 옮겨 심었다. 땅의 의미와 설계 의도를 스스로 훼손해버린 셈이다.
큰길에서 가장 먼저 보이면서 서울관의 얼굴 역할을 하는 옛 기무사 건물이자 이전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건물 역시 중요한 근현대 건축물이다. 20세기 초반 모더니즘 건축의 경향을 잘 보여주는 이 건물은 현재 남아있는 일제 강점기 병원 건축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또한 한국 현대사에서 기무사란 기관의 위치를 생각하면 곧 격동의 현대사를 상징하는 곳이라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미술관 쪽에선 이 건물을 보전하려는 계획이 없었고, 건축계에서 보전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건축가는 이 건물을 거의 그대로 남기면서 겉을 덮었던 두꺼운 페인트칠을 걷어내 원래 모습을 되살리는 한편 미술관 마당 쪽으로 긴 창을 내 주 출입구로 삼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건물들 사이에 있는 여러 마당들은 그냥 비워놓은 공간이 아니라 미술관 전체 디자인의 핵심이자, 야외 전시 공간이다. 민현준 건축가가 설계할 때 생각한 건축 개념은 ‘미술로 완성이 되는 미술관’이었다. 마당 역시 이런 개념과 이어지는 설계의 핵심 부분이었다.
입구 쪽 큰 마당은 대형 파빌리온 작품 등이 들어서면 순식간에 미술관의 주인공이 되어 사람들을 끌어모으며 진가를 발휘한다. 중심 마당 외에도 서울관에는 수많은 마당들이 산재하고 또 하나로 이어진다. 앞마당에서 한 층 높이로 더 위에 있는 종친부 앞마당에 오르면 마주 보이는 경복궁과 인왕산 풍경이 새삼 달라지고, 종친부 옆으로 또 옆길 앞으로 나있는 마당들로 걸어 보면 매번 다른 마당과 다른 경관이 나타난다. 미술관이 열려 있다는 느낌을 주면서 누구나 쉬워가는 공공 공동 마당으로 쓰이도록 처음부터 마당에 중점을 두고 배치한 것이다.
미술관의 중심인 서울박스 역시 실내에 있어도 개념은 마당이다. 외부의 마당엔 직광이, 내부 마당엔 흐린 빛이 비친다. 서울박스 주변의 영화관 등의 전시실들은 모두 창이 없는 공간들이어서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차이가 더욱 선명하게 대비되면서 마당으로 연결되고, 순환된다.
이처럼 여러 마당들 사이에 최신 현대 건물인 서울관, 20세기 초반 건물인 옛 기무사 건물, 그리고 조선시대의 역사적 건물인 종친부가 공존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우리나라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디자인의 이 세 건물들이 조화하면서도 대비를 이루고, 마당을 사이에 두고 한 장소로 합쳐지는 구성이야말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축이 보여주는 진정한 매력일 것이다. 조선의 중심이었던 이곳이 일제강점기와 군사정권기를 거치며 훼손되었다가 건축을 통해 조금이나마 되살아나고, 한국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방문하는 명소로 빠르게 사랑받게 된 것은 그래서 더욱 반가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