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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7 강
47. 제물의 성질
1. 제물 드리는 자와 제물은 하나임
구약에서 제물과 제물 드리는 자가 분리된 것은 아직 완전한 제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제사장이 완전한 제물이었다면 따로 제물을 드리지 않을 텐데 제사장 자신이 율법에 따라 제물 드리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참 제물의 실제가 오기까지 그 제물의 모형을 따서 동물들이나 곡식을 드렸던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이 제물이 되었기 때문에 제사장과 제물이 하나가 된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 이 말은 결국 참 제물이 왔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원했던 것은 양 같은 인격, 송아지 같은 인격의 제물과 제사장을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옴으로써 다시는 제물과 제사장이 분리될 수 없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도 제물이 안 될 때는 제물과 제물 드리는 자가 분리될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이 제물이 되면 제물 드리는 자와 제물은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남을 위해 예배를 드려준다던가 미사를 드려준다던가 하는 문제는 모두 구약적인 관념이다. 이것은 제사의 형식일 뿐 참 제사가 될 수 없다. 참 제사는 제사 자체가 곧 그 사람 자신이어야 한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2).”라고 하였다. 산 제사란 자기 자신으로 드려지는 것을 말한다. 제물과 제물 드리는 자는 하나다. 이 하나를 지향하기 위해 제물과 제사장이 잠시 동안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2. 제물의 목표는 화목
제물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화목이다. 다섯 가지 기본적인 제물의 순서상으로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이지만 제물 드리는 규례로는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의 순서로 되어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제물의 순서는 제물의 경중에 따라 정해지지만 제물의 규례는 제물의 목표를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 어떤 물건이 더 비싸냐 하는 문제와 그 물건을 사는 목표는 다르다. 그래서 제물을 드릴 때는 모든 제물의 목표가 화목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이 화목제이다.
3. 제물을 드리는 규례
A. 번제
번제는 온전하게 불살라지고 재만 남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그리스도이므로 거기서 제사장의 몫은 전적으로 없다. 그런데 소제는 일부는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는다. 이것은 재료 자체가 곡식이기 때문에 인성을 의미하며 하나님과 사람이 공유하는 제물이다. 왜 나눠먹을 수 있는가? 번제로 인해서 친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첫 번째 길은 번제이다. 쓸모 있다고 생각한 그 모든 것이 불살라져서 나는 전혀 무익하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과 화목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더 가난해져야 된다 하는 말은 아직 기름이 남아 있다는 말이다. 완전히 타고 나면 재만 남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는 원래 흙이었다. 생기를 불어넣어 산 혼이 됐는데 자기가 생기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거두시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과 화목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이 꼭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그렇다면 하나님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인생은 그 자리를 발견할 때 비로소 행복하다. 하나님이 아니더라도 재로 발견된 그 자리에 행복이 있지 조금의 가능성이 남아있다면 불평과 불만이 나오게 된다. 주제가 온전히 파악된 사람은 행복하다. 모든 성현들은 이것을 가르치려고 노력해왔다. 부처님도 공(空)이니 허(虛)니 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했다. 그러나 스스로 깨닫는 것은 자기 수준에서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태울 불이 없는 상태에서 깨달은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비운다 해도 자기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또 깨달을수록 자기 자존심은 더욱 높아진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자기를 비운다(空)는 것은 언뜻 보면 비슷한데 아주 다르다. 십자가에 죽어도 없어지고, 부처가 되는 것도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나 스스로 무로 돌아가는 것과 내가 타의에 의해서 무로 발견된 것은 아주 다르다. 그러므로 오직 번제만이, 십자가만이 우리를 합당한 자리로 이끌게 된다. 그래서 번제는 모든 제사의 기본이다.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는다. 회개한다.’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래서 빚을 갚고 용서를 빌고 하면 다 깨끗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번제, 즉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태워진 것이 없으면 용서를 빌고 빚진 것을 갚았다 하더라도 죄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회개하면 다 된 것인가? 그렇지도 않다. 번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번제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불살라진 그리스도이다. 이 위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 기독교적인 관념으로 생각하면 속죄제부터, 죄부터 사함 받고 마지막에 하나님께 드려져야 될 것 같은데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이 번제이다. 죄와 죄들은 우리가 우리 위치를 이탈한데서, 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데서 나온 것이다. 아담이 왜 선악과를 먹었는가? 주제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호흡을 받고 살아야 될 사람으로 마땅히 알았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 분수를 알았어야 했다. 그런데 주제넘게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거기서부터 죄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이탈한 그 자리를 그냥 두고 아무리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봤자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 죄를 사함 받는다고 영원히 안 짓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에게 진 빚을 갚았다 하더라도 다시 가난해지면 또 빚질 수가 있는 것처럼 그것은 언제든 다시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불타버린 것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 번제가 되어버린 양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는가.
B. 소제
번제가 드려졌기 때문에 소제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해 합당한 인성이 됐다는 말이다. 곡식이 됐다는 것은 합당한 인격이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합당한 인격은 일부는 하나님께, 일부는 우리에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일부는 하나님이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필요하고, 일부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소제는 둘이 서로 나눠먹는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소제물이었다. 그는 먼저 번제물이었기 때문에 소제물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 한쪽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며 한쪽은 우리의 만족을 위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화목제가 나오는데 이것은 소제의 결과가 화목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결국 번제의 목표는 소제에 있고 소제의 목표는 화목제에 있다.
C. 속죄제와 속건제
속죄제와 속건제는 어떤 원칙이 결정된 다음 후속조치를 하는 것과 같다. 어떤 잔재를 씻어버리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는 제사 드리는 규례의 순서가 바꿔져서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 그리고 마지막에 화목제를 드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규례는 내가 어떤 순서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느냐 하는 문제이다. 앞에서는 어느 제물이 중요한 제물이냐 하는 제물의 무게를 따라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순으로 설명하였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예에서 보더라도 ‘죄’가 ‘죄들’보다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죄는 근본적인 것, 원죄를 말하고 죄들은 자범죄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범죄에 비해서 원죄가 더 중요하다, 무게가 더 크다는 말이다.
D. 화목제
우리가 제물을 드릴 때는 어떤 목표를 향해서 제물을 드리는데 그 마지막이 화목제물이다. 화목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우주적인 화목이다. 즉 모든 것에 화목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다른 사람과 화목이 되지 않았다는 말은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과 내가 화목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화목 되지 않은 증거는 다른 사람과 화목이 되지 않은 것으로 입증된다. 그러니까 교회는 마지막 화목의 장소다. 왜냐하면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와서 하나님의 영원한 목표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천당에 간다고 하면 천당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화목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도 역시 화목이다. 새 예루살렘은 무엇인가? 그것의 내용도 화목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기를 오라 하는 도다. 와서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더라(계22:17).” 이는 성령과 신부가 화목이 되고 하나 되었다는 말이다. 또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있더라(계21:3).”하는 말씀도 하나님과 사람이 한 장막에 있는 화목을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이 말씀도 하나님과 우리가 한 장막에 거한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장막 생활은 둘이 함께 산다는 걸 의미한다.
이삭이 자기 아내 리브가를 데리고 올 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멀리서 리브가가 오는 것을 보고 그녀를 맞아서 자기 어머니의 장막으로 들어간다(창24:67). 다시 말하면 자기 어머니가 살았을 때 쓰던 그 장막 안으로 자기 아내를 인도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방을 꾸몄다는 말로 장막은 교제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장막을 친다.’는 말은 ‘둘이 완전하게 하나가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과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이 무엇을 위해 주어졌는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서, 화목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교파가 정통이고 어느 교파가 이단이냐? 하는 것은 어리석은 논쟁이다. 하나님과 화목하냐 안 하냐가 중요한데 어떤 교리를 믿으면 천당 가고, 어떤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간다는 말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이것은 사탄으로 말미암아 속아있기 때문이다. 먼저는 하나님과 화목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이지 기독교가 옳으냐, 불교가 옳으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 된다면 온 우주가 다 화목하게 될 것이다.
5. 완전한 번제만이 완전한 화목을 가져옴
우리가 인간적인 화목을 말할 때는 ‘둘이 서로 잘 지내자.’ 하는 협약을 의미한다. 서로 의논해서 손해 보지 말자는 말이다. 서로 양보하고 같이 협력해서 살자는 것인데 이것은 일종의 정치적인 흥정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화목은 번제가 없는 화목이다. 온전한 화목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날 가면 또 이혼하자고 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화목을 원하지 않고 번제를 통한 화목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이 완전한 화목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재 안에서 만난다면 완전한 화목이 될 것이다. 우리 개념 안에서의 화목은 기껏 해야 서로 타협하는 정도다. 이것이 정치다. 정치가 없으면 타협이 안 되어 서로 싸우게 된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어디든 양극이 대립돼 있어 이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가 요청된다. 그러나 정치로든 혁명으로든 진정한 화목은 이룰 수 없다. 번제가 없는데 어떻게 화목의 세계가 되겠는가? 그런데 하나님과의 화목은 정치적인 화목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번제를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은 정치적 화목이 아니라 번제적인 화목이다. 이것만이 완전한 화목이다. 부부간에도 완전한 번제가 드려지지 않고는 화목을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의 세계는 완전한 번제로 완전한 화목을 가져오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목표는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왜 이것을 요구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번제가 되고 재 조차도 없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재를 요구하신다. 자기는 번제가 안 되면서 다른 사람을 번제로 만들 수는 없다. 자기가 숯이면 상대방을 숯까지는 내려오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는 숯이면서 남은 재가 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자격 없는 사람이 제사장으로 불을 지피고 있다면 그 불길은 자기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다. 인화물질이 불 옆에 있으면 전이되어 화재가 발생한다. 그러나 내가 더 이상 탈 것이 없는 사람은 불이 얼마든지 와도 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기 주제를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요청 안에서 완전한 화목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 앞에 직면해서 타고 난 후에 비로소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우리는 누구든지 화목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며, 어디 섞여도 구별이 안 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제물의 목표다. 제물 드리는 자와 제물은 하나다. 이 제물의 목표가 화목에 있다.
하나님에게 만족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아간다는 말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거룩과 의로우심과 완전하심에 대하여 확인 받을 때에 그 자신이 영광스러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번제물이 되면 그분의 온전하심이 증거 되고 그때 하나님은 영광스러워진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
세상에서 지혜롭게 산다는 사람들의 생활은 모두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인생의 위치에서 100% 감사할 때 그분을 완전하게 영화롭게 할 수 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그 이름 외에, 즉 번제 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길은 없다. 화목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
창세기 2장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 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창2:1-3)” 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족하시면 그것이 곧 인생에게는 복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안식했다는 말은 모든 것이 완성 되어 영광을 받았다는 말이다. 만드신 이의 영광과 만들어진 자의 축복은 결국 같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족케 하면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완전하게 소모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필요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것이 곧 우리의 참 가치가 된다. 결국 인생이 하나님의 인정 안에 있다면 번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제 48 강 조소현,
48. 레위기 요약 1-27장. 94. 5. 11
레위기는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할 수 있다.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구약의 제사는 제물 자체는 완전했지만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제물을 원한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을 통해서 온전한 제물이 된 사람이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자라는 것이 밝혀졌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자가 하나인 복된 세계를 열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단번에 드리심(히10:10참)’으로써 다시는 송아지나 염소의 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하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물과 제물 드리는 자가 하나 되어 드려짐으로 다시는 제물과 제물 드리는 자가 분리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도 우리 자신과 제물이 분리되지 않는 세계로 갈 수 있다는 소망이 되었다. 나 자신이 곧 제물이 될 수 있다는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제물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제물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의 순서로 되어 있지만 실제적으로 제물을 드릴 때는 화목제가 마지막에 있다. 그 이유는 모든 제물을 드린 결과가 화목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든지 최종적인 목표는 하나님과의 화목에 있다.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과 사람의 완전한 화목은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왔다. 구약에서는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하도록 중보가 되었지만, 이제는 인격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완전하게 화목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창세기 3장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생긴 문제를 죄라고 말하고 있다. 왜 죄를 지으면 안 되는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이다. 만약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갈라지지 않는다면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죄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갈라지게 하고, 화목하지 못하게 한다. 제물과 제물 드리는 자가 하나일 수 없는 것이 비극이듯이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비극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적 목표는 교회이며 장차는 새 예루살렘이다. 교회와 새 예루살렘의 실체는 화목이다. 바울은 예수께서 오신 것은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서 둘로 하나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엡2:14) 흑인과 백인이 하나 되기 어려운 것처럼 이방인과 유대인은 종교적으로 영원히 하나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십자가 때문에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하나 되게 한다. 만일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은 십자가가 온전하게 적용되지 않은 결과다.
제물의 성질
레위기에 나오는 제물들의 종류는 크게 동물성과 식물성으로 되어있다. 동물성에는 송아지, 양, 염소, 비둘기가 있고, 식물성에는 곡식이 있다. 그리고 향품들, 감람으로 짠 기름과 소금(광물질)이 있다. 제물들의 성질은 그리스도의 성질이므로 우리는 제물들에 대하여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제물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것을 말한다.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삼을 것이요(레1:14).” 레위기에는 제물을 예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물은 선물이라는 뜻과 같다. 선물은 상대방이 받아서 즐거운 것이다. 아무리 비싼 것이라도 상대방이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선물이 될 수 없고 싼 것이라도 상대방이 받고 즐거워한다면 선물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 무슨 선물을 드리면 가장 기뻐하실 것인가? 하나님은 무엇을 가장 좋아하시는가?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라고 했다. 자고로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보고, 어떤 일을 보고, 어떤 물건을 보고 이렇게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직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보고 가장 기뻐하셨던 것이다.
레위기에서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열납하시는 예물들에 대해서 아주 극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예물들이 송아지와 양과 염소와 비둘기이다. 우리는 레위기의 예물들이 없다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 줄을 분간해낼 수가 없다. 이 짐승들을 보면 다른 것에 대해서 악기(惡氣)가 없고 사납게 생기지 않았으며 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과 아주 밀접하고 사람에게 친근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사람이 끌고 가면 끌려가는 것들이다. 예물이 되는 짐승들은 사람과 친근하기 때문에 사람이 목을 매고 끌고 가도 따라간다. 아무리 순하게 생겼어도 사람이 끌고 갈 수 없는 것은 제물이 될 수 없다. 다람쥐는 예쁘게 생겼지만 사람만 가면 달아나 버리기 때문에 예물이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가장 중요한 형상은 하나님에게 이끌려 가는 분이다. 제단으로 가서 제물을 잡아야 되는데 제물이 끌려가지 않으면 제단에 갈 수 없고, 또 끌려가더라도 소리를 꽥꽥 지른다면 제물이 될 수 없다. 즉, 순종할 수 있는 것이어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열납될 수 있는 인격은 어떤 인격인가? 하나님에게 끌려갈 수 있는 인격이다. 이러한 성질이 예수 안에서 확실하게 드러났다. 예수를 보고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눅3:22)”,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모두 그에게서 풍겨오는 이미지가 비둘기 같고 양과 같다는 뜻이다. 사람은 사람인데 그런 이미지가 풍긴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에게 합당하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된다.
‘예수를 좋아한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이천년 전 나사렛 땅에 온 그 사람을 좋아 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예수와 같은 성질을 가진 모든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예수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질이 있던 바울에게 눈이라도 빼서 주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왜 예수를 사랑하는데 바울에게 그런 말을 했는가? 예수의 성분이 바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좋아하는 인격도 바로 예수의 성분이다. 교회 안에서 이런 성분이 발견될 때 우리는 좋아한다. 이 성분을 좋아하는 것이 곧 예수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예수는 존경하지만 사람들(예수의 성분을 가진)은 존경하지 않아.” 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잘 모르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과의 맛을 가지고 있는 예수를, 사과 맛은 있지만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안 먹겠다고 한 사람과 같다. 이러한 사람들은 역사적인 예수는 알아도 예수의 실제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오늘날도 현재적으로 존재하는가? 그분은 그의 성분으로 존재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당신의 성분을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불어넣어서 그 성분을 유전시키려 세상에 오셨다. 세상이 예수의 성분으로 가득차서 김 아무개 예수, 박 아무개 예수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성분으로 모르면 역사적으로 단 일회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 예수밖에는 모르는 것이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분을 안다면 영원한 예수를 알게 되는 것이다.
소제
소제는 고운 가루(밀가루) 즉, 곡식으로 드리는 제물이다. 밀을 빻아서 곱게 친 고운 가루를 가지고 떡도 만들고 번철에 부치기도 하고 굽기도 하고 삶기도 하여 드렸다. 소제는 반드시 그 일부를 기념물로 불사른다. 이 말은 일부는 여호와를 위해서 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는다는 뜻이다. 소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나누기 위해서 드리는 제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하필 부서진 가루를 좋아했을까? 고운 가루일수록 많이 갈아지고 오래 갈아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곱게 갈아진 인격을 좋아하신다. 무뚝뚝해서 잘 안 씹히고 소화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곱게 갈아져서 내 몸에 흡수되기에 용이한 것을 좋아하시는 것이다.
야곱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따라 나온 사람이고, 아버지와 형을 속여서 장자의 명분을 가로챈 사람이며, 외삼촌을 속여서 재물을 모은 사람이다. 그는 탁월한 재능을 가졌지만 하나님이 그 탁월한 재능을 쓰실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 똑똑하고 모가 나서 어디에도 섞일 수 없는 부서지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꺾였다고 한 말은 야곱이 부서졌다는 뜻이다. 야곱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연단을 받아 곱게 갈아졌던 것이다. 야곱을 하나님께서 고운 가루로 만드신 것이다. 인류사에서 가장 곱게 갈아진 사람은 예수이다. 이 고운 가루를 하나님은 받으신다. 우리도 하나님에 의해서 곱게 갈아져야 우리 안에서 고운 것이 나오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완전하게 한 덩어리의 떡이 되고, 하나로 연합되는 나라다. 하나님 나라가 되려면 곱게 갈아져야 한다. 통밀에게 “완전하게 연합해라” 한다고 연합이 되지 않는다. 통밀의 성질 자체가 연합될 수 없는 것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통밀이 연합되기를 원하시지 않으신다. 통밀은 부서져서 곱게 갈아지면 저절로 하나가 된다. 갈아진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고, 또 사람과 하나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다. 그래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3).” 했다. 이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최초 교회의 원형이다. 교회는 둘이 합하여 하나가 된 것이다. 교회는 위대해도 소용없고, 놀라워도 소용없고, 능력이 있어도 소용없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연합이다.
향품
향품은 관유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관유는 몰약, 육계, 창포, 계피의 네 가지 가루에 감람유를 섞어서 만든 기름으로 제사장을 위임할 때 머리에 부어졌다. 몰약과 창포는 어떤 것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묘사 되는 몰약은 소나무의 송진 같은 것으로, 식물의 진액이 응고되어서 생긴 것이다. 송진에서 가장 강하게 솔의 향기가 나듯이 몰약에서 가장 짙은 향기가 난다. 죽음의 향기는 가장 짙은 향기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향기는 짙은 몰약의 향기이다. 창포는 다른 식물들이 살 수 없는 늪지대에서 살아있는 갈대 같은 것이다. 다른 식물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헤맬 때 거기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고난을 이기고 불가능을 이기고 서 있는 생명을 말한다. 창포는 십자가와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육계와 계피는 계수나무 나무에서 나온 두 가지의 껍데기이다. 육계는 두꺼운 껍데기로 무거운 향기가 나고, 계피는 얇은 껍데기로 가벼운 향기가 난다.
어떤 죽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향기, 고난을 통해서 나타난 향기를 감람유에다 섞어서 만든 것이 관유이다. 제사장의 머리에 이 관유를 붓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제사장,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하나님을 대신하는 제사장의 신분과 모양은 어떤 것인가? 몰약을 통해서 나오는 육계의 향기이며, 창포를 통해서 나오는 계피의 향기이다.
감람유는 감람나무 열매에서 짠 기름이다. 감람나무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가장 흔히 있는 나무로, 오래 동안 자라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반드시 원 감람나무에 접을 붙여야 한다. 감람나무의 이러한 성질들은 그리스도의 성질을 묘사하고 있다. 감람나무의 열매를 기름으로 짠 것이 감람유이다. 기름은 비틀고 눌러서 압력을 가해야 나온다. 감람나무 열매를 그냥 두면 기름이 되지 않는다. 짜야 기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짜낸 기름은 향기가 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의미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여러 가지 과정 속에서 짜 가지고 기름이 되게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기름만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이 기름으로 성전의 등불을 켜고, 제사장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편안하고 살기 좋은 데서 기름이 나온 사람은 없다. 반드시 하나님의 압력에 의해서 짜져야만 기름이 나온다.
포도주(술)
전제로 모든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데, 전제는 모든 제물들의 성분을 북돋기 위한 것이다. 포도주를 부으면 50의 힘을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 50의 힘이 더 생기는 것이다. 즉, 용기가 없던 사람이 술을 먹고 나서 갑자기 용기가 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술이 깨면 사라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경우에 우리에게 전제와 같은 술이 되기도 한다. 사도행전을 보면 새 술에 취한 사람들이 나온다.(행2:13) 이 말은 그들을 보는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갈릴리 어부들이고 어제까지 빌빌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얘기할 때, 갑자기 술 먹은 사람처럼 흥분해서 나 자신도 있었는지 없었는지 몰랐던 그리스도의 향기가 막 품어져 나올 때가 있다. 이것은 전제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부어졌기 때문이다.
금기물
누룩, 꿀
제물들 속에는 두 가지 금기물이 있다. 소제물에는 절대로 누룩을 넣지 말고 누룩이나 꿀을 화제로 드려 사르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레2:11) 먼저 누룩은 변질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금기 시켰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세계는 원래 있는 그대로이어야지 가공을 해서 변질시키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단을 쌓을 때 돌을 다듬지 말고 그냥 생긴 대로 쌓으라고 하셨다. 우리 생각에는 돌을 매끈하게 잘 다듬어서 쌓으면 좋을 것 같지만 하나님은 인공적인 것을 아주 싫어하신다. 인공적인 것으로 이루어진 것은 세상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마저 여러 가지 문화적인 방법, 전통적인 방법으로 다듬어 놓고 있다. 의식과 형식, 제도를 아주 반듯반듯하게 다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사람이 볼 때는 좋겠지만 하나님은 변질시키는 것을 아주 싫어하신다.
다음으로 꿀을 넣지 말라고 했다. 꿀은 벌이 꽃에서 과당을 흡수해서 그것을 삼켜 자기 체액(침)을 섞어 발효시킨 식품이다. 발효가 된 것이기 때문에 오래 두어도 변질이 안 된다. 그러나 한번 발효가 되었다는 것은 한번 변질되었다는 뜻이다. 유월절 속에는 달콤한 것이 없고 쓴나물이 들어 있다. 우리의 문화와 문명을 조금이라도 하나님 나라에 섞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소금을 치라고 했다. 소금은 바닷물 속에서 염분을 농축시켜 놓은 것으로, 오히려 변질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에게는 누룩과 꿀이 없다. 오직 쓴나물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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