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16장 6-14절
설교제목 : 나의 하갈
가을의 기도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장모님 떠나는 길에 위로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작별의 슬픔도 있었지만, 어머니께서 살아낸 삶의 흔적과 기도로 인하여 감사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무더운 여름의 열기도 서서히 자리를 내어주면서 조석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시간의 경과는 거스를 수 없는 법입니다. 9월의 첫날을 시작하며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가 떠오릅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게 하소서 //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 ... / 나의 영혼, /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시인은 가을을 가리켜 낙엽이 지는 때라고 노래합니다. 외형적 삶의 전개를 내려놓고 자신을 오롯이 겸손하게 벗어낼 수 있는 생의 후반기이자 자연적 순환에서 내향적으로, 중심으로 향해야 할 때임을 드러냅니다. 또한 모국어로, 즉 자신의 근원적 언어, 자신의 영혼의 소리로 자신을 채우길 기도합니다. 거친 막말과 가시 돋힌 비난과 온갖 거짓과 술수로 미화된 소리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이런 영혼의 소리로 우리의 가을을 채웠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시인은 아름다운 결실의 때를 위하여 시간을 가꾸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사랑을 위해 비옥한 시간을 가꾸길 소원합니다. 오직 한 사람은 참된 사랑의 대상이자 절대자인 하나님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시간을 가꾸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이유는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이 가을에 그런 사랑을 위해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림자 투사
하나님은 75세가 된 아브람을 부르시고, 익숙한 고향 땅을 떠나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길을 나섰습니다. 아브람을 새로운 삶의 길로 안내한 것은 미래에 대한 그림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이끄는 것 또한 미래이지 과거가 아닙니다. 과거가 삶을 이끄는 것은 신경증입니다. 아브람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고,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10년이 지나도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아브람의 관점으로 기술되기보다는 두 여인인 사래와 하갈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아브람에게 “주님께서 나에게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시니 나의 여종과 동침할 것(2)”을 제안합니다. 자신의 이집트 여종인 하갈을 통하여 아이를 낳아 대를 이어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태를 닫으셔서 생산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표현입니다. 사래는 생명과 미래를 잉태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으나, 당시의 전통적 관습을 따라 행동합니다. 고대 세계(함무라비 법전이나 누지 문헌)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몸종을 남편에게 소실로 줄 수 있었고,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본처의 친자식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미래를 열어가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신비한 방식으로 이루어감을 우리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사래의 제안에 아브람은 승낙하였습니다.
하갈은 곧 임신하게 되었고, 본문에 의하면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서, 자기의 여주인을 깔보았습니다. 여기에서 파탄이 일어납니다. 임신의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하갈에게는 자부심, 자만심으로 팽창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하갈은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특별한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하갈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팽창된 형태를 조성했고, 그런 모습이 주인인 사래의 눈에 거슬렸을 것입니다. 사래는 위축감과 열등감에 시달리며, 수치스러운 느낌마저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두 여인 안에서 심리적으로 그림자 투사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사래의 그림자는 보다 본능적이고 활력적인 하갈이고, 하갈의 그림자는 더 고상하고 늙은 사래일 것입니다. 자신의 열등함 또는 우월함을 서로에게 투사하여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파국으로 치달은 것입니다.
사래는 자신의 그림자를 외부로 투사하면서 문제의 원인을 하갈과 아브람에게 던집니다. 그림자 투사가 거두어지지 않으면 모든 문제의 원인은 밖의 대상으로 향해갑니다. 하갈을 아브람에게 줄 때는 응당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합니다. 비록 종이지만, 아이를 낳게 되면, 벌어질 수 있는 일은 불 보듯 뻔합니다. 주인이 종에 대한 처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래 마음대로 하갈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둘의 문제를 아브람에게 가지고 가서 해결을 요청합니다. 아브람을 곤란하게 하면서 아브람과 하갈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로도 보여집니다. (상징적으로 보면, 한 남성 안에서 일어나는 두 아니마의 갈등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밖으로 투사하는 순간, 온갖 갈등이 일어남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감정적으로 힘들게 하는 대상이나 사건이 있으신가요? 그것이 나의 콤플렉스임을 기억하시고 그 그림자를 거두어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천사의 질문
아브람은 사래의 교묘한 요청에 당신 종이니 좋을대로 하라고 대답합니다.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했고, 하갈은 사막으로 도망쳤습니다. 자신의 안전과 아이를 지키기 위해 광야 한복판으로 주인의 곁을 떠나 탈출합니다. 임신한 여인의 몸으로 사막으로의 도피는 위험을 무릅쓴 모험입니다. 사막에 있는 샘에 있을 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다른 성경에는 여호와의 사자라고 번역합니다. 사자, ‘말라크(מלאך)’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절명의 위기, 인간의 지독한 괴로움과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메신저를 보냅니다. 때로 우리의 꿈에서도 우리에게 대단히 단순한 질문을 던지는 낯선 존재들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자는 질문합니다.
“사래의 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갈로 하여금 자신의 근원과 출발지에 대한 물음임과 동시에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물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뿌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자신의 목표와 지향점이 어디인지를 물으며 어디로 향해 사는지는 우리 인생에 결정적이기 때문입니다. 하갈은 대답합니다.
“나의 여주인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하갈은 자신의 출발지가 여주인 사래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느지는 답하지 못합니다. 정처없이 배회했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말합니다. “너의 여주인에게 돌아가 복종하면서 살아라.” 하갈에게는 난감한 처방입니다. 도망쳐 나온 그곳으로 돌아가라는 주문은 주인과의 관계를 복원하며 자신의 신분과 한계를 잊지 않고 그곳에서 뿌리내려 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도망치거나 회피하는 방식으로는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거나 미래가 결코 열릴 수 없습니다. 하갈은 다시 갈등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낼 때 그의 미래에 대한 보증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인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회피나 도망이 아니라 직면해야 할 과제와 현실 앞에서 때로 순복하며 그 자리에게 다시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하갈, 우리 시대의 하갈
주님의 사자는 다시 여주인에게 돌아가 복종하라는 말씀과 함께 뜻밖의 미래를 약속합니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10).” 아브람에게 주셨던 약속을 주시면서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명명합니다. 그 이름은 “주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너의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똑똑히 일러주십니다. 하갈에게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확장되는 뜻밖의 시간입니다. 하갈은 이런 주님의 사자와의 만남과 메시지를 통하여 ‘보시는 하나님’, 엘 로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짓습니다. ‘브엘라해로이’, 나를 보시는 살아계시는 분의 샘이라고 명명합니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이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고통받는 이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갈에게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심을 알았으면 합니다. 외롭고 인생의 한계상황과 같은 사막 길에서 배회하고 있는 하갈이 누구일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정처없이 배회하는 영혼이기도 하며, 우리 밖에서 내몰린 도망자 신세가 된 고통받는 이들일 것입니다. 우리 안의 하갈, 우리의 밖의 하갈의 고통을 들으시고 보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고통받는 하갈을 돌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