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만, 십자가도, 십자가는(고전1:18, 2:1-2)
2021.1.31 김상수목사(안흥교회)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과 함께 지역과 세대를 초월하여 전 세계적으로 가장 애창되는 찬송가 중의 하나가 “예수 사랑하심을”이라는 찬송이다. 이 찬송의 작사가는 안나 워너(Anna B. Warner, 1824-1915)와 그녀의 언니인 수잔 워너(Susan B. Warner)이다. 이들 자매가 쓴 베스트셀러 중에 “말과 표적’(Say and Seal)“ 소설이 있는데,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몇 명의 주인공들 중에 팩스라는 어린이가 있다. 이 아이가 병상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자신의 주일학교 선생님인 린든에게 찬송을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그때 린든 선생님은 낮은 소리로 “예수 사랑하심을”이라는 찬송을 불러준다. 어린 팩스는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라는 찬송을 들으면서 평안하게 숨을 거둔다. 이 장면을 읽고 감동을 받은 작곡가 윌리엄 브래드버리(William B. Bradbury, 1816-1868)가 1861년에 이 가사에 곡을 붙여서 오늘에 이르렀다. 비록 소설 속에 이야기를 찬송 곡으로 썼지만, 십자가의 능력은 단지 소설 속에서만 나타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십자가 복음의 능력은 과거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 나타나 왔고, 앞으로도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다(고전1:18).
“십자가의 도(道, 복음)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여기서 사용된 “능력”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듀나미스(δυναμις)”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에서 폭발물을 뜻하는 영어단어 다이너마이트(Dynamite)가 파생되었다. 전북 익산시에 가면 황등(黃登)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품질 좋은 화강암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어린 시절에 이곳에서 거대한 화강석들을 채취하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거대하고 단단한 바위들도 다이너마이트가 폭파하면 여지없이 깨져나갔다.
그런데 십자가의 도(복음)도 단지 세상의 바위를 박살내는 정도의 폭발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다이너마이트이다. 십자가라는 다이너마이트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라는 장애물을 박살내는 능력이고, 죽은 영혼을 살려내는 능력이며, 마귀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고 능력이며, 믿는 자를 영원한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게 하는 능력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의 파이프라인이다.
이러한 복음의 은혜와 능력은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이 없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외모나 지역이나 지식의 유무와 상관없이 심지어 오늘 믿기 시작했다 할지라도,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주님의 능력과 생명이 그 심령 안에 들어와서 내 안에 죽었던 영혼을 살려낸다. 이것을 중생(重生, 거듭 태어남)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차별 없는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담대히 말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초대교회 성도들과 지금의 성도들 그리고 불신자(不信者)들의 차이점이 뭔지 아는가? 한 마디로 “십자가만”과 “십자가도” 그리고 “십자가는”의 차이다. 그들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았고, 이 시대의 많은 성도들은 십자가도 바라보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는 그들 삶의 전부였고, 가장 귀한 존재였고, 가장 우선순위였다. 그러나 이 시대 많은 성도들에게 예수는 단지 일부이고, 내 삶의 여러 가지 귀한 것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늘 계산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고, 지금은 적어졌다. 불신자들이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쉬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다른 것은 다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십자가는”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이런 분들은 속히 십자가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특히 어느 시대나 지역을 막론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람들을 마음을 사로잡고 심지어 성도들의 믿음까지 무너뜨리는 마귀 사단의 가장 강력한 “견고한 진”이었다. 생각해 보면, 재물(돈)이나 건강에 대한 염려나 코로나에 대한 걱정도 결국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연결되어 있다. 마귀는 죽음의 공포를 이용해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수님을 부인하게 하려고 미혹한다. 그러나 결코 흔들리면 안 된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 작품 중의 하나로 인정받는 존 번연(John Bunyan, 1628~ 1688)의 “천로역정”이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개봉이 된 바가 있다(2019년).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주인공인 ‘크리스천’이 ‘소망’과 함께 모든 혹독한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천국 앞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 천국을 막고 있는 거대한 죽음의 바다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잠시 거대한 죽음의 파도 앞에서 갈등했지만, 그때 나타난 전도자의 권면을 듣고 결국 믿음으로 죽음의 바다에 뛰어 들었다. 마귀 사단은 죽음의 바다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그 생명을 빼앗으려고 공격할 때, 크리스천은 “도와줘요!”라고 외치면서 피를 흘리면서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그가 깨어났을 때, 그의 앞에는 예수님이 계셨다. 크리스천이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라고 말하면서 어리둥절해 할 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한다.
“그 피는 너의 피가 아니라, 나의 피였단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죄와 죽음과 마귀의 미혹과 모든 공격으로부터 승리를 주시는 십자가의 능력이다. 믿음이 뭔가? 믿음은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십자가만 바라볼 때,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확신했던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은 벅찬 감격으로 이렇게 선언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1-2)
사도 바울의 강력한 작정과 결단이 이 시간 우리들의 작정, 나의 결단이 되어야 한다. 우리들도 바람과 파도 같은 상황에 시선을 뺏기면 안 된다. 바쁘다는 이유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은 미루면서 하루에도 TV와 스마트폰은 몇 시간씩 뚫어지게 바라보고, 코로나 때문에 예배를 못드린다고 하면서도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나고, 전도는 한 마디도 못하면서 자극적인 말로 돈벌이를 하려는 삼류 유투버들의 말이나 검증되지 않은 이상한 정보들은 부지런히 여기저기 퍼 나르고 있으면 안된다.
불신자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쉬고 있는 분들 중에는, 상황이 힘들고, 몸이 이상이 왔고, 마치 엉클어진 실타래처럼 삶이 꼬일대로 꼬여 있을 때, 다른 방법들은 다 하면서도(점쟁이, 무당, 사주팔자, 우상숭배, 상담, 이 병원 저 의사 등) “십자가는” 찾지 않는 분이들이 많다. 그러나 “십자가도”나 “십자가는”의 모습으로 계속 살아가면 안된다. 그러다가 어느날 죽음의 파도가 엄몰해 오는 순간을 만나면 정말 큰 일 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십자가만”, “십자가도” 그리고 “십자가는” 중에 지금 여러분의 영적상태는 어느 쪽인가? 사회가 혼란스럽고, 내 인생의 방향이 흔들릴수록 빨리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십자가가 바로 기본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 기도할 때, 온 맘을 다하여 십자가만 바라보자. 십자가를 붙잡으라.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이 이 시간 우리의 상함 마음을 치유하시고 병든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