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는
시리즈 1, 2권이 다루지 못한 고대 이전의
지식을 다루는 책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안에 '길가메시 서사시,
인간에 대한 가장 오래된 보고서'라는
챕터가 있어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여러 지식 중
한 꼭지로 읽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책을 덮고도 제목의 한 줄이
계속 남았습니다.
인간에 대한 가장 오래된 보고서라니,
수천 년 전 사람들도 지금 우리와 같은 것을
고민했다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챕터 한 편이 아니라
이야기 전체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아래는 제가 읽으며 멈췄던 다섯 장면입니다.
길가메시는 도시 우루크를 다스리는 왕이며
삼분의 이는 신이고 삼분의 일은 인간이라고
전해집니다.
힘도 재능도 넘쳤지만 그 힘을
마음대로 쓰는 바람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
신들은 그에게 맞설 상대로 엔키두를 만들어
내려보냅니다.
이 대목에서 20년 영업 현장이 떠올랐습니다.
실적이 좋을 때는 누구나 한 번쯤
힘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저도 그랬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잘나갈 때의 저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숫자만 보았습니다.
엔키두는 들판에서 자란 사람이다.
둘은 도시 한복판에서 크게 맞붙지만
서로의 힘을 인정하고 친구가 된다.
저는 이 장면이 좋았습니다.
나를 꺾을 사람이 아니라 나를
멈춰 세울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두 친구는 이름을 남기겠다며
삼나무 숲의 수호자 훔바바를 찾아 떠나고.
위험한 모험이었지만 둘은 함께 해냈고
길가메시의 명성은 더 높아지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영웅담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 지점에서 방향을 틀어요.
제가 이 책에 꽂힌 건 바로 그다음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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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키두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길가메시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처음으로 자신도 죽는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왕의 자리를 두고
영원한 삶의 비밀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한참 책을 내려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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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메시는 먼 길 끝에서 홍수에서 살아남은
현자 우트나피시팀을 만나게 됩니다.
영생의 조건은 엿새 낮과 이레 밤 동안
깨어 있는 것이었지만 그는 잠들고 맙니다.
다시 젊어지는 풀을 얻어 돌아오던 길에는
목욕하는 사이 뱀이 그 풀을 가져가 버리고
결국 빈손으로 우루크에 돌아온 길가메시는
뱃사공에게 도시의 성벽을 보여 줍니다.
저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크게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영원히 사는 법은 끝내 얻지 못했는데
이야기는 허무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자기가 다스리고 쌓아 온
도시의 성벽이었어요.
사라지는 존재가 남길 수 있는 것은
결국 쌓아 올린 것이라는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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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성벽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하나는 작아 보여도 쌓이면 남습니다.
지대넓얕 제로가 문을 열어 주었고,
독서모임이 그 문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었습니다.
4천 년 가까이 된 이야기가
지금도 읽히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혹시 요즘 이유 없이 허무하거나 무언가를 잃은
기분이 드는 분이 있다면 길가메시를 한번
만나 보시길 권합니다.
도망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길가메시는 고대 도시 우루크를 다스린 왕이다.
신의 피를 이어받은 영웅이지만
처음에는 오만하고 백성을 억압했다.
신들은 그를 견제하려고
야생 인간 엔키두를 만들었다.
줄거리는 여섯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1)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싸우다 깊은 친구가 된다.
(2) 두 사람은 훔바바와 하늘의 황소를 물리친다.
(3) 신들의 분노로 엔키두가 죽는다.
(4) 길가메시는 죽음이 두려워 불멸을 찾아 떠난다.
(5) 대홍수의 생존자 우트나피시팀을 만난다.
(6) 불멸을 얻지 못한 채 우루크로 돌아온다.
이 작품에는 죽음, 우정, 문명, 권력, 여행,
사랑, 귀환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주제가 담겨 있다.
메소포타미아는 민족 이름이 아니라
지역 이름이다.
그리스어로 두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이고,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지역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이라크가 중심이다.
이곳에는 한 민족만 산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여러 민족과 왕국이 등장했다.
(1) 수메르인은 남부에 우루크,
우르 같은 도시국가를 세우고 설형문자를 썼다.
(2) 아카드인은 수메르 북쪽에 살았고,
사르곤 왕이 여러 지역을 통합했다.
(3) 바빌로니아인은 바빌론을 중심으로 발전했고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하다.
(4) 아시리아인은 북부에서 강력한 군사
제국을 세웠다.
그래서 길가메시가 메소포타미아
사람이라는 말은, 그가 활동한 우루크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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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은 수메르인이었다.
다만 수메르인이 곧 상류층이라는 뜻은 아니다.
수메르인은 도시와 국가를 가장 먼저 발전시킨
문화의 중심 집단이었다.
그 사회에는 왕, 사제, 관리, 상인, 장인, 농민,
노예가 함께 있었다.
당시 상류층은 민족이 아니라
직책과 재산으로 나뉘었다.
왕과 군사 지도자, 신전의 사제,
토지와 곡물 창고를 관리하는 관료, 군대 지휘관,
큰 무역을 맡은 상인이 여기에 속했다.
특히 수메르 도시에서는
신전이 토지와 노동력을 소유했기 때문에
사제와 신전 관리자의 힘이 컸다.
왕은 신의 대리자이자 최고 사제 같은
역할을 하며 도시를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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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이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어떻게 살고 무엇을 남길지는 선택할 수 있다.
친구 엔키두가 죽자 길가메시는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실감한다.
그는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불멸을 얻은
우트나피시팀을 찾아가 영생의 방법을 묻는다.
하지만 잠을 이기는 시험에 실패하고,
젊음을 되찾는 약초도 뱀에게 빼앗긴다.
결국 빈손으로 우루크에 돌아온다.
그가 얻은 것은 영생이 아니라 깨달음이었다.
왕이 할 일은 영생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지키고 도시를 잘 다스리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업적,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로 흔적을 남길 수 있다.
이 말은 유명한 업적을 남겨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죽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제대로 살 수 있다는 뜻에 가깝다.
우트나피시팀의 홍수 이야기는
성경의 노아 홍수와 매우 닮은
고대 근동의 홍수 전승이다. 닮은 점은 다음과 같다.
(1) 신이 홍수를 미리 알려 준다.
(2) 큰 배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는다.
(3) 가족과 여러 생물을 배에 태운다.
(4) 배가 산에 머문다.
(5) 새를 보내 물이 빠졌는지 확인하고,
내린 뒤 제사를 드린다.
다른 점도 분명하다.
첫째는 홍수가 일어난 이유다.
우트나피시팀 이야기에서는
여러 신의 판단과 갈등 속에서 홍수가 일어난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악과 폭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명한다.
둘째는 살아남은 뒤의 모습이다.
우트나피시팀은 신처럼 불멸의 존재가 되지만,
노아는 홍수 뒤에도 인간으로 산다.
셋째로 성경에는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무지개 언약이 나온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만 보면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전승이 창세기보다 오래되었다.
그렇다고 성경이 특정 문헌을 그대로 베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공통된 고대 근동의 홍수 전승을 각 문화와 종교가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고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
균형 잡힌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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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메시 서사시는 처음부터
한 권의 책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구전되고,
서로 다른 언어로 기록되고 편집되면서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1) 수메르의 독립된 노래들:
길가메시와 훔바바, 하늘의 황소, 키시의 왕 아가,
저승 이야기, 길가메시의 죽음 같은
짧은 이야기들이 따로 전해졌다.
(2) 아카드어 번역과 통합:
주요 언어가 수메르어에서 아카드어로 바뀌면서
이야기들이 번역되고, 하나의 큰 줄거리로 묶였다.
(3) 표준 바빌로니아 판본:
기원전 1300년에서 1000년 무렵 더 정리되었다.
편집자로 신레케운니니라는 이름이 전해진다.
보통 12개의 점토판에 기록되고, 제목은
"깊은 것을 본 사람"이라는 뜻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길가메시를 모험가를 넘어 죽음과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고 지혜를 얻은 사람으로 강조하는 제목이다.
(4) 점토판 필사:
종이가 없던 시대라 젖은 점토판에
갈대 펜으로 쐐기문자를 눌러 썼다.
말리거나 구운 점토판을 서기관 학교와
왕실 도서관에서 계속 베껴 썼다.
(5) 니네베에서의 발견:
가장 완전한 아카드어 판본은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 점토판이다.
이 도서관은 고대 도시 니네베에 있었고
19세기 중반 발굴로 발견되었다.
1870년대에 영국박물관의 학자 조지 스미스가
홍수 이야기가 적힌 점토판을 해독하면서
유럽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전체 순서는 이렇다.
구전, 수메르어 짧은 이야기, 아카드어 번역,
하나의 서사시로 통합,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서기관의 필사,
니네베에서의 발견이다.
오늘날 읽는 길가메시 서사시는 한 작가가
한 번에 쓴 소설이 아니라,
천 년 이상 이어진 이야기가 여러 민족과
서기관을 거치며 다듬어진 공동 창작물에 가깝다.
오늘의 판본도 하나의 원본이 아니라
깨진 점토판 조각들을 맞추어 복원한 것이다.
AI 활용
길가메시 서사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전승이
오랜 시간 기록되고 편집되어 만들어진 작품이며,
강력한 왕이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인간의
유한함을 받아들이고 공동체와 삶의 의미를
깨닫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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