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의 궁성 동쪽 문인 동화문에 불을 지른 후 척준경을 비롯한 이자겸 일파는 궁궐에 난입해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관료와 무장들을 보이는 대로 죽여 버렸다. 척준경은 각 성문에 부하들을 보내 “안에서 나오는 사람은 즉시 죽여라.” 하고 지시했다. 《고려사절요》는 ‘죽은 군사들이 이루 다 셀 수 없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배경
1108년 윤관이 여진을 격파하고 동북 9성을 개척하다.
1122년 예종의 뒤를 이어 인종이 즉위하나 이자겸의 외척 세력에 시달리다.
1124년 이자겸이 자신의 친인척을 정부 요직에 앉히다.
설명
인주 이씨인 이자겸은 인종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다. 인주 이씨는 개경 최고의 문벌귀족으로, 11대 문종(文宗, 재위 1046~1083)에서 17대 인종에 이르기까지 80여 년 동안 다섯 명의 왕에게 아홉 명의 왕비를 들였다. 이들은 외척으로서 정치에 개입해 왕권과 대립하며 부와 권력을 독점했다. 그 정점에 이른 것이 이자겸이었다.
《고려사》는 이자겸이 매관매직을 일삼아 뇌물로 받은 고기 수만근이 집에서 썩고 있었으며, 백성들의 토지까지 강탈했다고 전한다. 예종(睿宗, 재위 1105~1122)이 죽음 직전에 이자겸의 주장을 받아들여 14세인 태자(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그때부터 이자겸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그는 인종 즉위 직후,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 예종의 동생에게 선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한안인(韓安仁) 등 지방 출신 신진 세력과 예종의 동생 대방공(帶方公) 왕보(王俌) 등 정적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과 결혼시켰다.
이자겸의 위세가 날로 커지자 인종과 그 측근들은 이자겸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자겸을 제거하라는 인종(仁宗, 재위 1122~1146)의 명령을 받은 내시지후(內侍祗侯) 김찬(金粲)과 내시녹사(內侍錄事) 안보린(安甫麟),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智祿延) 등은 상장군 최탁(崔卓),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장군 고석(高碩) 등과 모의해 이자겸 일당을 잡아들여 먼 곳으로 유배시키기로 했다. 평장사(平章事) 이수(李壽)와 전임 평장사 김인존(金仁存)이 “이자겸 무리가 조정에 가득하니 때를 기다리는 게 좋다.” 하고 충고했지만, 인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
고려 인종 4년인 1126년 2월, 이들은 초저녁에 군사를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가 척준경의 동생인 병부상서 척준신(拓俊臣)과 척준경의 아들 내시 척순(拓純), 지후 김정분(金鼎芬), 녹사 전기상(田其上) 등을 죽여 시체를 궁성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를 알게 된 이자겸과 척준경 등은 두려워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그 일당들을 이자겸의 집으로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척준경은 “일이 급박하다.” 하고는 수십 명을 거느리고 궁성을 넘어가 신봉문(神鳳門) 밖에 이르러 소리를 지르며 기세를 올렸다. 이에 지녹연과 최탁 등은 이자겸 일당이 집결한 것이라고 여기고, 두려워서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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