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는 말 : 탈종교화와 탈제도종교화
‘탈종교화’는 매우 복합적인 개념이다. 탈종교화를 종교의 소멸과 동일시하는 근대 계몽주의적 관점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사회가 종교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세속화’를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속화된 사회에서도 종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와는 다른 방식과 양상으로 존재한다. 그런 세속화로서 탈종교화의 대표적 현상은 종교에서 공동체적, 사회적 차원이 약화되고 개인주의적 신앙과 삶이 심화되는 종교의 ‘사사화(私事化)’다.
다른 한편으로 탈종교화는 전통적 제도종교에서 오랫동안 중시하며 준수해왔던 교리나 의례나 조직 같은 외적 요소들이 상대화되는 ‘탈제도종교화’를 의미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가치중립적 현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지향적 운동이기도 하다. 전자는 사회학자나 종교학자가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지위와 역할이 변화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인 반면, 후자는 종교의 비본질적인 요소들로부터 벗어나[脫] 본래적, 근원적 종교성으로 나아가려는[向] 탈-향의 목적의식적 운동이다.
종교인들은 세속화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이거나 우려하는 반응을 보이지만 탈제도종교화에 대해서는 양가적 입장을 보인다. 제도종교에 대한 관점과 태도에 따라 탈제도종교화를 달리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제도종교를 고수하려는 이들에게 탈제도종교화는 종교의 근간을 흔드는 위기이지만, 제도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에게는 진정한 종교성으로 향하게 하는 기회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복합성 때문에 탈종교화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지가 중요하다. 이 글의 기본 관점은 탈종교화를 탈제도종교화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이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제도종교가 망각하거나 억압해온 종교의 내적 차원-예를 들면,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가 말하는 ‘인격적 신앙(personal faith)’, 오강남이 말하는 ‘심층(深層) 종교’, 길희성이 말하는 ‘초종교적 영성’과 같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회복하려는 가치지향적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
이러한 관점과 목적의 이 글은 우선 첫째, 한국 제도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로서의 탈제도종교화’를 더 이상 교회에 ‘안 나가’는 그리스도인을 뜻하는 ‘가나안’ 신자의 급증 현상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둘째, 탈종교, 탈교회 시대에도 성장하는 대형교회 현상의 위력과 위기를 들여다본다. 셋째,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사회가 교회에 대해 무관심 또는 반감을 갖게 하는 근본 원인인 한국교회의 시대정신 상실을 고찰한다. 마지막으로, 넷째, 종교의 자기쇄신을 위한 기회로서의 탈제도종교화 운동을 한국 그리스도교의 탈-향 운동인 ‘작은교회’를 통해 내다본다.
‘가나안 신자’와 탈교회 현상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전체 인구 중 종교인 비율(44%)과 무종교인 비율(56%)이 처음으로 역전되었다. 이는 한국의 종교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사회의 탈종교화 또는 세속화 현상임이 분명하다. 또한 10년 전의 같은 조사 결과에 비해 불교와 가톨릭 신자 수가 크게 감소했다. 그런데 유독 개신교 신자 수만 2005년의 844만 6천 명(18.2%)에서 2015년의 967만 6천 명(19.7%)으로 증가하면서 가톨릭을 제외한 개신교 단독만으로도 최대종교가 되었다. 그러니 최소한 통계상으로는 탈종교화로 인한 위기를 말할 상황은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하면서도 흥미로운 사실은,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대해 정작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의아해하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성장주의, 성공주의 신앙을 가진 보수적 그리스도인들도 ‘종교 1위 등극’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실제 교회 현장에서의 각 교단별 자체 조사 및 통계에 따르면 오히려 교인 수가 해마다 크게 줄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계상의 차이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해석이 있는데,2) 그중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것은 여전히 그리스도인 신자의 정체성은 갖고 있지만 기존 교회는 더 이상 ‘안 나가’는 소위 ‘가나안 신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주장이다.
전국적 조사에 따른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학자들은 가나안 신자 수를 적게는 약 100만에서 많게는 약 300만으로 추산한다. 정재영은 2015년에 출판한 《교회 안 나가는 그리스도인 가나안 성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서는 교인의 약 10.5%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2012년 조사 결과를 토대로 가나안 신자를 약 100만 명 정도로 추산했다. 그런데 같은 단체의 2017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나안 신자 수는 전체 교인의 23.3%로 늘어났다. 이를 근거로 정재영은 가나안 신자를 200만 명 이상으로 수정하여 추정한다. 이러한 통계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불과 몇 년 만에 가나안 신자 비율이 두 배 이상 늘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다. 통계만이 아니다. 교회 현장에서는 교인이 급격히 빠져나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탈교회 현상이 심각하다.
탈교회 현상의 특징 중 하나는 청년세대의 이탈이다. ‘21세기교회연구소’와 ‘한국교회탐구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20대 응답자 중 교회를 떠날 의향이 있는 청년의 비율은 42.1%에 달하고, ‘학원복음화협의회’의 2017년 조사에 의하면 대학생 그리스도인 중 28.3%가 가나안 신자다. 실제로 대학에서 종교 교양과목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종교적 배경을 물어보면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집안은 그리스도교인데 나는 신앙이 없다”라거나 “그리스도인이지만 교회에 안 나간다”고 대답하는 학생들이 많다. ‘주일성수(主日聖守)’라는 교회 용어가 있을 정도로 예배 출석을 강조하던 과거의 한국 그리스도교 문화를 생각하면 매우 큰 변화다. 또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연령별 무종교인 비율에서 20대가 64.9%로 가장 많고, 종교인 세대 비율에서도 개신교 인구 중 20대는 10.8%로 40대 17%보다 현저히 낮다. 오늘의 20대가 내일의 30대, 40대가 될 것을 생각하면 ‘최대종교’ 개신교의 앞날도 그리 밝지 않아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2017년 현재 한국사회의 합계 출산율이 1.05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인구절벽이 가져올 자연적 교인 감소까지 예상된다.
여기서 ‘가나안 신자’의 삶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자. ‘가나안 신자’라는 표현 자체가 말해주는 이 현상의 특징은 그들이 교회는 ‘안 나가’지만 여전히 ‘신자’라는 것이다. 즉 공동체적 교회 생활은 포기하지만, 개인적 신자로서의 정체성은 간직하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넓은 의미에서의 탈종교화 양태 중 하나인 종교의 사사화에 해당할 것이다.
실제로 가나안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주요 이유는 ‘꼭 교회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31.2%), ‘개인적 이유’(18.8%), ‘자유로운 신앙생활’(13.9%) 등이다. 이에 대해 정재영은 전체적으로 “개인주의적인 신앙 성향이 강해졌기 때문”에 가나안 신자가 늘어났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개인주의에 사로잡힌 신자들만 교회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교회 현장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꽤 많다. 청년단체 ‘배움품앗이’ 대표 전세훈은 자신의 탈교회 경험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분명 나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예수가 보이는 신념을 따라 살고자 한다. (……) 그런 나는 교회를 떠났다. 교회에서 여러 봉사도 했고, 수련회도 참석했었다. 또한 대학에서도 기독교 동아리에 잠시 몸을 담았었다. 그랬던 내가 현재는 가나안 성도가 됐다.
그가 교회를 떠난 직접적 이유는 청년 소그룹 리더였던 그에게 그의 교회 목회자가 요구한 다음 세 가지 때문이었다. 첫째, 토론을 하지 말 것, 둘째, 교회를 비판하지 말 것, 셋째, 목회자의 말에 절대 순종할 것. 그는 반발했고, 그로 인해 목회자와 교회 임원들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다. ‘건강한 교회’로 언론에 보도된 적도 있던 교회를 떠난 그는 비판과 비애를 담아 말한다. “잔인했던 교회는 내 인생에서 교회를 지울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개인주의적 신앙에 물들거나 교회 활동에 소극적인 신자들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삶에 적극적인 신자들도 교회를 떠난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교회 활동 전반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일요일 하루 예배에만 참석하는 ‘선데이 크리스천’들은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교회 내부의 문제를 보고 알게 되고, 그래서 비판과 개혁의 목소리를 내다가 목회자나 교권세력의 미움을 사 교회를 떠나거나 쫓겨나는 것이다.
신앙의 양태에서 보면 가나안 신자의 종교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양에서 등장한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사람들, ‘소속 없는 믿음(believing without belonging)’의 사람들, ‘특정 종교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들(nones)’의 탈제도종교적 종교성과 비슷하다. 대학에서 이런 탈제도종교적 종교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자기도 그런 이들 중 하나인 것 같다고 말하는 학생들이 꽤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탈종교화나 탈제도종교화가 종교의 포기나 폐기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근본적으로 보면, 오늘의 과학기술혁명 시대에도 고통과 악, 죽음의 한계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종교는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 또한 종교를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에드워드 버넷 타일러), “절대 의존 감정”(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 “궁극적 관심”(폴 틸리히) 등으로 이해하면 탈종교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양의 탈제도종교적 종교인 또는 무종교인과 비교할 때 한국의 가나안 신자가 보이는 특징적 차이가 있다. 가나안 신자는 탈종교화 또는 탈제도종교화를 경험하면서도 자신들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그리스도교 문화의 서양에서는 탈종교화의 선택 자체가 ‘탈그리스도교화’를 함의하는 것과 달리 한국의 가나안 신자들은 탈교회를 선택해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탈그리스도교화로까지 나아가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실제로 정재영의 연구에 따르면 가나안 신자의 90.1%는 교회에 다시 출석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하고 싶다고 응답했다. 이러한 정황은 가나안 신자들이 교회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한다. 하지만 이미 개인주의적 신앙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지배적이게 된 상황에서 가나안 신자를 교회로 돌아오게 할 만한 결정적 동기와 계기를 만들 능력이 오늘의 제도교회에는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늘의 탈제도종교화, 탈교회화는 한국교회의 위기를 가리키는 징후가 맞다.
대형교회, 한국 그리스도교의 거대한 어둠
탈교회 또는 가나안 신자 현상과 관련하여 늘 이야기되는 것 중 하나가 대형교회(mega-church) 현상이다. 대형교회란 미국 그리스도교 문화의 기준으로 일요일 예배 출석 교인 2천 명 이상인 교회를 가리킨다. 한국에는 그런 규모의 대형교회가 수두룩하고 몇만 명 단위의 초대형교회(super-mega-church)도 여럿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대형교회들은 위기는커녕 기존 교세를 유지하고 있거나 심지어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탈종교 시대의 위기를 교회 성장의 정체나 퇴보로 본다면 가장 강력한 대안은 대형교회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형교회의 존재는 한국교회의 빛이라기보다는 어둠이다. 가장 일차적인 문제는 대형교회의 성장이 한국교회의 전체적 성장이 아니라는 데 있다. 사실상 대부분의 대형교회, 특히 1990년대 이후 등장한 ‘후발 대형교회’의 급성장은 거의 전적으로 다른 교회에서 ‘수평이동’해 온 기성 신자들 덕분이다. 즉 비그리스도인이나 무종교인을 어렵게 전도하여 새 신자가 되게 함으로써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기성 신자들을 쉽게 흡수함으로써 덩치를 키워 대형교회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신자의 수평이동에 따른 교회 성장은 교회를 ‘시장화’한다. 마치 소비자가 상점을 돌아다니듯 교인들도 ‘종교 소비자’가 되어 교회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상품을 고르듯 자신의 구미에 맞는 예배와 설교와 영적, 문화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회를 선택하여 소비한다. 대형마트에 소비자가 몰리듯이 종교 소비자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 대형교회다. 그럴수록 대형교회들은 더 매혹적인 상품을 개발하거나 구비하기 위해 다른 대형교회들과 경쟁한다.
교회의 시장화와 신자의 소비자화, 그리고 신자의 수평이동 현상은 교회 프로그램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오늘의 대형교회는 ‘새신자 교육’에 주력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교인 대부분이 새로 신자가 된 이들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 이동해온 기성 신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형교회들은 1990년대부터는 ‘새신자 양육 프로그램’보다는 수평이동한 교인들을 위한 ‘가정 회복 프로그램’이나 ‘자기계발 프로그램’ 등에 집중하게 된다. 이처럼 대형교회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감성적 예배를 통해 다른 교회 교인들, 특히 중소형 교회의 교인들을 유인하고 붙잡는다. 마치 거대기업이 동네까지 들어가 문어발식 매장을 여는 것처럼 대형교회가 ‘종교적 골목상권’까지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리처드 핼버슨 목사는 교회가 미국에 와서 ‘기업’이 되었다고 탄식했는데, 대형교회를 비판한 영화 〈쿼바디스〉의 김재환 감독은 여기에 한국판을 추가한다. “교회는 한국으로 와서는 대기업이 되었다.”
대형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양정 성장을 성공의 기준으로 보게 하는 성장주의를 전체 교회에 주입하는 것이다. 성장의 욕망에서는 큰 교회와 작은 교회가 다르지 않다. 오랫동안 교회개혁을 위해 일해온 한 활동가는 교인 수가 몇백 명 정도 되는 중형교회들에서 크고 작은 문제들이 끊이지 않는 까닭 중 하나는 교회 성장을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것이라고 한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대형교회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중형교회는 더 맹렬하게 헌금 강요, 헌신 강요, 집회 강요를 하다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중형교회만이 아니라 작은 개척교회, 소형 교회들도 대형교회의 성장 욕망을 공유하고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성장주의에 물든 중형, 소형 교회들의 행태에서 부담감과 피로감을 느끼는 교인들이 부담 없이 편하고 서비스 좋은 대형교회로 가버리거나 교회를 떠나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대형교회만 성장하는 것이다.
어쩌면 1990년대에 후발 대형교회들이 등장했듯이 21세기에도 새로운 대형교회들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형교회가 제공하는 종교적 서비스에 만족하는 종교 소비자 집단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형교회의 지속적 등장과 성장을 탈종교화의 위기를 극복하는 성공사례로 볼 수 있을까?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기업 논리로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대형교회의 성공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체 교회의 실패다. 제도교회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대형교회는 위기의 대안일 수 없다. 재벌기업이 많다 해서 경제의 기초가 튼튼한 것이 아닌 것처럼 대형교회가 많다 해서 교회의 지반이 단단한 것은 아니다. 결국 대형교회의 성장은 개별적 성공 사례일 뿐 전체 교회와 그리스도교의 차원에서 보면 오히려 대형교회의 독과점에 따른 교회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부정적 현상이다.
대형교회의 또 다른 문제는 대형교회가 일으키는 문제들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신뢰도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최근 종교계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교회 세습’은 주로 대형교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대형교회의 1세대 창립자 아버지 목사들이 자신의 아들-딸에게 세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목사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듯 교회를 대물림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 ‘사유화’에 대한 그리스도교 안팎의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기에 주요 교단에서는 교회 세습을 교단법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비슷한 교회들끼리 맞바꾸는 교차 세습, 다른 목사를 불러 잠시 있게 한 후 결국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는 징검다리 세습, 아들에게 교회를 차려주고 아버지 교회와 통합하는 합병 세습 등 변칙 세습을 계속하고 있다. 재벌들의 편법 증여와 다르지 않은 교회 세습은 그리스도인조차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형교회의 대표적 타락 현상이다.
이 외에도 대형교회가 일으키고 있는 온갖 문제는 이제 언론의 ‘종교 · 문화면’이 아닌 ‘사회면’을 채우고 있다. 결국 대형교회 때문에 그리스도교 전체의 사회적 신뢰도가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하여 전개한 ‘2017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시민이 가장 신뢰하는 기관은 시민단체, 언론기관, 종교기관 순이다. 여기서 종교가 ‘3위’라고 해서 자위할 일이 아니다. 종교의 신뢰도는 겨우 한 자릿수인 9.7%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종교들 중에서는 가톨릭 32.9%, 불교 22.1%, 개신교 18.9%로 개신교가 가장 낮은 신뢰도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교회가 세상의 빛이 아니라 어둠으로 인식되어가고 있는 것은 대형교회의 거대한 성채가 내뿜는 찬란한 광채 때문이다. 빛이 너무 밝으면 눈을 멀게 한다.
교회의 시대정신 상실
가나안 신자는 교회로 돌아올까? 그럴지도 모른다. 가나안 신자 중 교회에 다시 나가고 싶다는 이들이 67.1%로 상당히 높다. 하지만 그들의 귀환을 낙관할 수는 없다. 그들을 떠나게 한 구조적 문제들을 지금의 제도교회가 개혁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다. 특히 교회 안에서 개혁할 주체가 필요한데, 실은 가나안 신자들이 바로 그런 이들이기 때문이다. 즉 변화를 열망하는 이들은 이미 교회 밖으로 나와 있고 변화를 바라지 않는 이들만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교회의 내부적 개혁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결과적으로 가나안 신자는 교회로 돌아갈 이유도 돌아갈 교회도 찾기 어렵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가나안 신자가 교회를 떠나는 원인이 단순히 목회자나 동료 교인의 비도덕적 행태에 대한 반감이나 실망이 아니라는 데 있다. 정재영은 가나안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기존 교회의 문제에 대한 반발”보다는 “교회라는 틀 자체를 불편해하는” 것이라면서, 그것이 더 큰 문제라고 한다. 왜냐면 목회자나 교인의 도덕성 문제는 더디더라도 개선할 수 있지만 “교회라는 제도 자체를 거부”하는 데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보수적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가나안 신자들이 보수적 교회의 도덕적 타락이나 구조적 억압이 싫어 교회를 떠났다면 그렇지 않은 진보적 교회들은 급성장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보수적 교회만큼이나 진보적 교회도 고전하고 있다. 결국 200만 명의 가나안 신자들은 기존 교회에서도 진보적 교회에서도 의미와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탈종교, 탈교회 시대 그리스도교의 근본 문제는 ‘시대정신’ 상실이다. 아무리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주의가 심화되었다 해도 교회가 깨어 시대정신을 바르게 분별하고 응답했다면, 교인들은 교회에서 신앙과 삶의 의미와 목적을 얻고 교회와 사회의 변화를 위해 애써야 할 이유를 찾았을 것이다. 시대정신 없는 종교 상품 다양화, 맞춤형 영적 서비스 제공, 목회자의 개인윤리만으로는 교회에서의 탈교회 현상과 사회에서의 반(反)교회 현상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앞에서 시대정신의 ‘부재’가 아닌 ‘상실’을 말한 까닭은 한국교회에도 시대정신을 분별하고 응답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태동 자체가 그 첫 역사적 사건이다. 한국교회사 연구자들 사이에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초기 역사를 ‘선교사(宣敎史)’로 볼 것인가 ‘수용사(受容史)’로 볼 것인가 하는 논쟁이 있다. 전자의 관점은 서양 선교사가 한국인에게 신앙을 전해준 것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고, 후자의 관점은 한국인이 서양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다. 둘은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 큰 차이가 있다. 어느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한국 그리스도교 태동기의 주체 이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박정신은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를 ‘주체적 수용’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제시하는 논거 중 하나는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조선인들이 주체적으로 먼저 그리스도교를 수용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실제로 조선 말기의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열성적으로 새 문명과 새 지식에 대한 ‘강렬한 욕망과 대담한 행동’”을 시도했던 조선 청년들이 그리스도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했고,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 땅에 토착교회를 세웠다. 또한 19세기 말 박영효, 민영익 등과 함께 일본에 갔다가 미국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그리스도교를 접한 이수정이 개종하고 세례를 받은 것도 “자기 개인뿐만 아니라 향방을 알지 못하여 갈팡질팡하고 있던 당시의 조선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종교”가 그리스도교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혼란과 불안을 극복하려는 시대정신의 발로에서 그리스도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했던 이들이었다.
사회적, 문화적으로 차별받고 억압받던 여성, 노비, 백정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그리스도교를 수용했던 것도 새로운 시대정신인 ‘평등’을 그리스도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박정신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운동의 전개와 그리스도교의 수용 두 사건은 당시의 상인, 평민, 천민이 새로운 이념, 새로운 종교, 새로운 사회를 고대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박정신에 따르면, 이러한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 초기의 주체적 수용사는 일제강점기의 ‘민족교회’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시대정신에 투철했던 주체적 그리스도교는 한국 역사 속에 화산맥처럼 이어져 일제강점기의 3 · 1독립운동, 1970년대의 인권운동,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 1990년대의 통일운동으로 분출해왔다. 특히 1970, 80년대의 한국교회는 민중의 고통과 해방이라는 시대정신을 붙들고 역사에 투신했다. 그 시대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인권운동의 현장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같은 밭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란다는 예수의 비유처럼(《마태복음》 13:24–30) 한국교회에는 시대정신에 투철했던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지만 시대정신을 저버렸던 부끄러운 역사도 있다. 사실 분단, 전쟁, 독재, 신자유주의로 이어져 온 고통의 한국 현대사에서 민중의 아픔을 함께하며 역사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소수였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교세 확장에 열중하거나 고통받는 민중의 신음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사적, 내적 평안에 몰두했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역사적 죄책을 짧은 지면에 다 담을 수는 없겠지만, 핵심적인 몇 가지만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반공주의’ ‘물질주의’ ‘성직주의’ ‘성차별’ ‘배타주의’ ‘소수자 혐오’가 그것이다.
첫째, 한국교회는 ‘48년 분단체제’와 한국전쟁으로 인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기보다는 정치적 반공이념을 종교적으로 신앙화하고 증오를 부추겨온 역사적 원죄가 있다. 한국교회가 급성장한 것은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반공 독재체제를 종교적, 정치적으로 지지한 대가로 얻은 특혜와 무관하지 않다. 다행히 2018년 남 · 북, 북 · 미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에 탈냉전의 봄기운이 찾아오고 있는데도 여전히 냉전의 겨울에 스스로를 가두고 평화를 열망하는 시대정신에 역행하며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우파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은 반공 그리스도교의 부끄러운 역사적 잔재다.
둘째, 한국교회는 물질적 부와 풍요를 신앙의 증거이며 목표로 믿게 하는 맘몬주의(Mammonism)의 영에 사로잡혀왔다. 예수는 “너희는 하느님과 맘몬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24b)고 가르쳤지만, 그를 따른다는 오늘의 교회는 하느님과 맘몬을 함께, 아니 하느님보다 맘몬을 더 섬기며 사랑한다. 물질주의적, 맘몬주의적 신앙에 물든 교회에서 가난한 사람은 믿음 없는 자 취급을 당한다. 특히 경제적 불평등이 극도로 심화된 신자유주의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는 ‘잉여인간’이고 종교적으로는 ‘죄인’이다. 앞에서 비판한 대형교회의 성장주의도 물질주의적 탐욕의 극단적 현상이다. 안타깝게도, 물질적 탐욕에서는 오늘의 교회는 세상보다 더 세상적이다.
셋째, 한국 ‘개신교’ 교회는 종교개혁의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사상이 무색하게 지독한 성직주의를 나타내왔다. 이는 가톨릭의 성직주의에 반대한 종교개혁에서 시작한 개신교 정신의 망각이며 배반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마치 계급처럼, 신분처럼 분리되어 있다. 심지어 ‘제왕적 목회자’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성직자의 권위와 권력은 막강하다. 성직자는 스스로를 하느님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실제로는 평신도에게 ‘왕’처럼 군림하는 것이다. 사회에서는 탈권위주의와 민주주의가 시대정신이 되었는데도, 교회에서는 여전히 성직주의가 위력을 떨치고 있는 데는 ‘만인사제’ 정신을 잊은 채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공모하는 평신도의 책임도 있다. 이러한 성직주의는 교회개혁을 가로막는 가장 높고 견고한 장벽이다.
넷째, 한국교회는 낡은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로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해왔다. 한국교회에서 여성은 가장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희생하며 교회를 성장시키고 유지해왔지만 가장 무시당한다. 앞에서 말한 성직주의와 관련해서 들여다보면 ‘여성 평신도’는 ‘비성직자’이자 ‘비남성’으로서 ‘이중’의 차별을 받는 ‘이등’ 교인이다. 여성에 대한 교회 내 억압과 차별의 형태는 다양하고 집요하다. 법적, 문화적으로 양성평등이 시대정신이 된 21세기에도 아직 여성의 성직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교단들이 있다. 남성 목회자들에 의한 성폭력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만큼 끔찍하다. 여성은 평신도들이 참여하는 교회 지도력에서도 배제되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다섯째, 한국교회는 이웃종교들의 진리와 구원하는 능력을 부정하는 종교적 배타주의를 고수해왔다. 오랜 역사 동안 종교적 다양성을 보여 온 한국의 종교문화에서 이웃종교와 공존하는 대신 아직도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현실은 한국교회의 부끄러움이다. 게다가 말로만 이웃종교를 부정하고 반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웃종교의 성지와 사원에까지 들어가 종교적 상징을 물리적으로 훼손하기까지 하는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심지어 같은 그리스도교 교회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가톨릭조차 ‘타 종교’ 또는 ‘이단’으로 배타할 정도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배타주의는 사회가 그리스도교를 배타하는 핵심 원인이다.
여섯째, 오늘의 한국교회는 고통받는 사회적 소수자, 약자를 혐오하는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있었을 때 유가족과 시민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 대형교회 목사들의 망언, 성 소수자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모욕하는 혐오 발언, 난민에 대한 적대는 한국교회가 인권 감수성과 고통의 감수성을 심각히 결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한국교회의 소수자 혐오는 종교의 영역을 넘어 정치 영역에서까지 나타난다. 한 예로, 지난 총선에 뛰어든 우파 개신교 정당들은 이슬람 반대를 정책으로 내걸며 무슬림 혐오를 부추겼다. 그리스도교의 정신은 사랑이며 그 절정은 ‘원수 사랑’인데, 원수 사랑은커녕 이웃도 사랑하지 않는 오늘의 교회를 보며 “이웃을 사랑하지는 못해도 미워하지는 말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져간다.
이처럼 시대정신을 분별하지도 따라가지도 못한 채 오히려 역행하는 한국교회는 사회의 탈종교화나 탈그리스도교화 때문이 아니라 ‘반그리스도교화’ 때문에 사회에서 배제되고 쇠퇴할지도 모른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비튼 ‘개독교’라는 조롱이 유행해도 사회가 걱정해주지도 편 들어주지도 않는 것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대정신을 잃어버린 교회는 교회 안 교인들의 마음도 사로잡지 못한다. 교인들에게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지 못하고 사회적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가나안 신자 현상, 탈교회 현상은 그 필연적 결과다.
세상으로 ‘나아간’ 사람들: ‘작은교회’의 모험
지난해 가을, 내가 참여하고 있는 교회에서 진보적 복음주의 지성인이며 활동가인 양희송 ‘청어람’ 대표를 예배 설교자로 초대해 교회의 의미에 대해 성찰하는 기회를 가진 적이 있다. 그때 마침 그는 《세속성자》라는 책을 냈기에 그 책의 부제 “성문 밖으로 나아간 그리스도인”을 설교 제목으로 정했다. 그런데 아직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SNS에 올린 책 표지 사진만 보았던 나는 ‘나아간’을 ‘나간’으로 잘못 읽고 설교 제목을 “성문 밖으로 나간 그리스도인”으로 표기하는 실수를 했다. 한 글자 차이지만 ‘나아간’과 ‘나간’의 어감은 무척 다르다. 영어로는 그 차이가 더 분명하다. ‘나가다’는 ‘go out’으로 무언가를 떠나는 의미가 강하고, ‘나아가다’는 ‘go forward’ 또는 ‘move forward’로 무언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감과 나아감은 연속적 운동의 두 과정이라는 것이다.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통찰을 빌려 말하면 ‘탈-향’의 연속적 운동이다. 이러한 탈-향 운동의 원형을 안병무는 새로운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과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 노예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탈출! 그것은 과거를 단절하는 행위이다. 탈출은 가진 것에서 해방되는 일이다. 탈출은 자신의 삶을 보장해준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향(向)은 무엇일까? “향(向)은 도상의 존재를 나타낸다. 목적을 가진 나그네의 길, 그것이 향의 행태이다. 이것은 탈과 마찬가지로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삶의 양태를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탈과 향 사이에 있는 것은 ‘이음선’이지 ‘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탈은 향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탈만 있고 향이 없으면 그 결과는 포기와 냉담뿐이다. ‘나감’에서 멈춘 그리스도인은 교회도 자신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렇지 않고 탈이 향으로 이어질 때, ‘나아감’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개혁과 대안이 따라온다. 교회 밖으로, 세상 속으로 나아간 그리스도인들의 탈-향의 공동체는 역사 속에서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아내며 항상 새롭게 나타내왔다. 일제강점기에 그것은 ‘민족교회’였고 독재 시기에는 ‘민중교회’였다. 그렇다면 탈종교 시대, 신자유주의 시대인 오늘의 탈-향 공동체는 무엇일까? ‘작은교회’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의 연대체인 ‘생명평화마당’에서 주최한 ‘작은교회 한마당’에 참여한 경험을 갖고 있다. 교회에 희망이 있을까 하는 의문과 회의가 깊어질 때, 희망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작은교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기쁨이며 위안이었다. 작은교회의 형태는 무척 다양하지만 작은교회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세 가지 가치가 있다. ‘탈성직’ ‘탈성장’ ‘탈성별’이다.
첫째, 탈성직의 가치는 높고 견고한 성직주의의 성채를 허물고 평신도의 주체적인 참여를 통해 민주적이고 평등한 교회 문화를 일궈가려는 것이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톨릭 성직주의에 맞서 종교개혁을 단행하며 생겨난 개신교 전통에서 ‘탈성직’을 말하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다. 그렇기에 작은교회는 탈성직 가치의 공유와 실천에 더욱 힘쓴다. 민주적 교회정관, 평신도 운영위원회, 목회자 · 장로 임기제 등 제도적 민주화와 함께 평신도의 주체적 신학 탐구, 설교 강단 개방, 공동체적 영성수련, 사회참여 등 지적, 영적, 윤리적 차원에서도 탈성직의 노력이 활발하다. 심지어 성직자가 따로 없는, 아니 ‘모두가 성직자’인 ‘평신도교회’도 존재한다.
둘째, 작은 상태로 있으려는, 의도적으로 작아지려는 탈성장의 가치는 ‘작은교회’의 가장 가시적인 특징이다. 하지만 이는 외적 구조의 변화를 위한 실천이기에 앞서 교회 안에 스며들어 있는 탐욕의 영을 분별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내적 투쟁이기도 하다. 탐욕의 영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 큰 교회와 작은 교회를 가리지 않고 유혹하며 지배하려 들기 때문이다. 큰 교회의 성장 욕망과 커지려는 작은교회의 성장 욕망은 크기와 무게가 같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작은교회는 ‘확대’가 아닌 ‘확산’, ‘성장’이 아닌 ‘성숙’, ‘더 많은 소유’가 아닌 ‘더 많은 존재’를 추구한다. 실천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인격적 친교가 가능한 공동체의 크기를 정하고 교회분립, 분가, 소공동체, 건물 없는 교회, 풀뿌리 마을 공동체, 사회적 기업 등을 다양하게 시도한다. 이러한 작은교회는 가난하지만, 아니 가난하기에 자유롭고 풍요롭다.
셋째, 탈성별은 교회 안의 오래된 가부장적 성차별 구조를 깨뜨리고 양성평등, 더 나아가 성평등으로 나아가려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작은교회의 탈성별 노력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협력한다. 왜냐면 여성 평신도만이 아니라 여성 성직자도 성차별적 교회 구조에 짓눌려 주변으로 밀려나고 침묵을 강요당해왔기 때문이다. 작은교회 운동에서는 여성 목회자, 여성 신학자, 여성 평신도의 목소리가 배제되지 않는다. 여성 목회자의 관계적, 공감적 리더십을 작은교회의 목회적 대안으로 배우고, 교회 내 성차별과 성폭력을 없애기 위해 열심이다. 탈성별의 노력은 제도와 문화의 변화를 넘어 신앙과 신학의 변화로까지 나아간다. 여성주의 신학은 작은교회 운동의 기본 신학 중 하나다.
이렇게 작은교회가 추구하는 탈성장, 탈성직, 탈성별의 가치는 교회적인 과제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과제라는 점에서 탈경계적이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를 괴롭히고 있는 탐욕적 물질주의, 위계적 권위주의, 가부장적 성차별주의에 저항하는 시대정신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은교회의 탈-향 운동은 교회의 경계를 넘어 고통의 세상으로 나아간다.
작은교회 운동의 실천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시도해온 이정배는 “작은교회 운동은 하느님의 급진성을 실현시키려는 ‘체제 밖 사유’로서 자본주의에로의 잠식을 거부하는 우리 시대의 ‘복음의 정치학’이자 그 정신에 합당한 선교적 행위”라고 정의한다. 체제 밖으로 나아가고 탐욕의 세태를 거스르는 작은교회는 고통의 세상에서 공감과 연대의 삶을 살아간다. 그동안 작은교회 한마당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 노동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 이 시대의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해왔다. 2014년에는 작은교회 한마당을 함께 준비하던 방인성 목사가 세월호 가족과 연대하며 40일 동안 단식한 적도 있다. 단식 중에 그가 깨달은 진리는 “생명은 작고 평화는 낮다”는 것이었다. 그런 공감과 연대는 연례행사에서만 일회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작은교회 운동을 통해 만난 사람들은 안산에서, 광화문에서, 촛불혁명의 거리에서, 시대의 고통과 희망이 있는 곳에서 서로를 다시 만났다. 작은교회 사람들은 고통이 있는 곳 어디에나, 언제나 있다. 고통의 세상이 그들의 교회이고 고통받는 이웃이 그들의 몸이기 때문이다.
사는 것은 아파하는 것이다. 오직 죽은 자만이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가난하고 무력한 이웃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교회는 아무리 크고 강하더라도 죽은 교회다. 살아 있는 교회는 우는 이들과 함께 울고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아파한다. 작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몸으로 안다. 고통받는 이들과 그들이 한 몸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픈 곳이 몸의 중심”이듯 아파하는 이들이 교회와 세상의 중심이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고통받는 이들 가운데 함께 계시기에, 그들과 함께 울고 아파하고 행동하는 것이 작은교회가 드리는 가장 경건한 기도요 예배다.
맺는말: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어둠이 짙을수록 작은 빛이 더 밝게 빛난다. 위기가 깊은 곳에 기회가 보석처럼 숨어 있다. 한국교회에는 문제가 많은 만큼 대안을 찾는 노력도 많다. 교회와 사회의 위기에 대한 ‘우환의식’을 체현한 창조적 소수자들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일찍이 일제강점기 민족교회의 정신을 드높이다 강제로 폐간당한 《성서조선》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위기의 원인을 밖에서 찾지 않고 안에서 찾았다.
기독교의 적은 누군가? 유교인가? 아니다. 불교인가? 아니다. 천도교인가? 아니다. 무신론인가? 아니다. 유물사관인가? 아니다. 사회주의인가? 아니다. 허무주의인가? 아니다. 범신론인가? 아니다. 이도 아니요 저도 아니다. 그러면 누군가? 교회 그 자체다. 기독신자라 하는 자 그 자신이다. 이를 인도하는 성직자 그 자신이다. 이를 인도하는 교직들이다.
1927년, 김교신과 함석헌 등 깨어 있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의 사자후가 21세기 오늘의 우리에게 낡은 것으로 들리지 않고 당대적이며 미래적으로 들린다. 그것은 그들과 우리가 같은 우환의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한국의 종교개혁자들이다.
탈종교 시대 그리스도교의 탈-향 운동은 종교개혁 운동이다. 종교개혁은 16세기 서구에서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종교개혁의 역사였다. 최초의 종교개혁자는 사두개파의 성전권력과 바리새파의 회당권력에 맞서 사랑의 공동체, 하느님 나라의 작은 씨앗을 심은 예수였다. 사도 바울, 성 안토니, 성 베네딕트, 마르틴 루터 등은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시대정신을 읽고 탈-향을 단행한 종교개혁자들이다. 종교개혁은 개신교만의 유산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공동의 유산이다. 가톨릭도 종교개혁을 실천해왔다. 20세기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16세기 종교개혁만큼이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오늘날 한국의 종교들이 경쟁하듯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참담한 현실에서, 새로운 종교개혁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아니 이웃종교와 함께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현실을 미리 내다보았던 것일까.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개정판을 내면서 제목을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고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똑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게는 이제 믿는 자만이 뽑혀 의롭다 함을 얻어 천국 혹은 극락세계에 가서 한편 캄캄한 지옥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보다 많은 중생을 굽어보면서 즐거워하는 그런 따위 종교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 나는 적어도 예수나 석가의 종교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22)
탈종교 시대, 고통의 시대에 깨어서 시대정신을 분별하는 그리스도인이 개혁해야 할 대상은, 《성서조선》의 선배들과 함석헌이 외친 것처럼 탐욕과 분노와 무지의 독에 물들어 우리만의 천국을 욕망해온 교회 자체다, 세상보다 더 세상적인 교회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의 어둠을 보면서도 침묵하며 공모해온 그리스도인 자신이다. 그래서 작아지고 낮아지려는 오늘의 종교개혁자인 개신교 그리스도인(Protestant)은 커지려고 하고 높아지려고 하는 교회와 자기 자신에게 저항(protest)한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 기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
■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참여불교와 해방신학을 비교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학위 받음. 주요 논문으로 “Just-Peace: A Buddhist-Christian Path to Liberation” 〈사랑, 지혜를 만나다: 어느 그리스도인의 참여불교 탐구〉 〈램프는 다르지만 그 빛은 같다: 정의를 위한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의 협력〉 등이 있고, 주요 저술로 공저 Terrorism, Religion, and Global Peace, 《고통의 시대, 자비를 생각한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