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로 공인 받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실제로 타인에 의한 죽음이어야 한다. 둘째는 그 죽음이 신앙을 미워하는 사람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셋째는 온전한 자유의사로 죽음에 임해야 한다.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 신자들은 서울, 경기 지역에 주로 살았다. 그러다 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할 곳을 찾아 강원, 충청, 전라지역으로 흩어진다. 이렇게 해서 신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중앙 신자들을 지방으로 이동시킨 것은 박해였던 셈이다.
경상도 지역엔 늦게 신자들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지리적으로 멀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마산교구 소속의 서부 경남지역엔 가장 늦게 신자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초창기에 일어났던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때는 이 지역에 교우촌이 없었으므로 박해도 없었고 순교자도 없었다.
마산교구에 피난 교우들이 들어온 경로는 다음의 두 가지로 추측하고 있다. 첫째는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지방에 숨어 있던 피난 교우들이 따뜻한 곳을 찾아 남쪽으로 계속 내려온 것이다. 그들은 낙동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교우촌을 형성하였다. 합천, 창녕, 의령, 밀양, 진영, 함안 등지에 있었던 교우촌이다. 지금도 이 지역엔 오래된 공소가 남아 있다.
둘째는 1827년 정해박해가 전남 지역에서 일어나자 지리산과 백운산을 넘어 서부 경남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함양을 본거지로 하여 단성을 거쳐 문산, 고성, 통영, 거제도로 흘러갔고 일부는 단성에서 북천을 거쳐 곤양, 서포 쪽으로 내려갔다.
이러한 교우촌들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교구 내에서 안정된 공동체로 뿌리 내리고 있었다. 특히 문산, 함안(대산), 고성, 통영(황리), 진영, 거제도에는 큰 규모의 교우촌이 있었다.
박대식(朴大植) 순교자는 1811년 김해시 진례면 시예리(詩禮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부유했으며 언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부친(박만혁)과 형제들은(대붕, 대홍, 대식)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병인박해를 만나게 된다.
병인박해 때는 가족 모두가 피신하여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1868년 무진박해 때 박대식은 조카인 박수연과 함께 붙잡힌다. 그들은 김해 관아에서 삼일간 문초를 받은 뒤 대구의 경상감영(監營)으로 이송되었다. 박대식은 이곳 대구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연일 배교를 강요당하며 고문을 받았다. 뼈가 부러지고 몸이 뒤틀렸다. 가족들이 면회 왔을 때 험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 웃옷으로 몸을 가렸다고 한다.
박대식은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 조카 박수연과 함께 참수 치명한다. 당시 박수연은 예비신자 신분이었다. 박대식의 가족들은 포졸들에게 돈을 주어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오게 하였다. 가족들은 시신을 확인하고는 염습(殮襲)한 뒤 선산에 모시려 하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의 외인들이 반대하였다. 하는 수 없어 그의 아들 삼형제(종립. 종반. 종철)와 친척들이 마을 뒷산인 유씨들의 문중 산에 평장(平葬)으로 매장하였다.
그후 120년이 지난 1956년 봄에 후손들이 무덤의 봉분을 크게 하고 순교자 부인의 묘(墓)도 이장하여 완전한 묘역으로 가꾸었다. 그리고 1966년 4월 15일에는 당시 진영 본당 주임이었던 유창호(토마스) 신부의 주선으로 비석을 세워 그의 순교를 기리게 하였다. 유창호 신부는 전해지지 않는 그의 세례명을 임시로 라우렌시오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 박대식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마백락(클레멘스) 선생과 순교자의 4대 손인 박영식(요아킴)의 노력으로 순교자의 세례명이 빅토리노임을 밝혀냈다(2001년 8월). 부산 쪽에서 남해고속도를 타고 오면 진영터널을 지나게 되는데 터널 위 좌측 편에 흰 십자가가 보인다. 그곳에 순교자 박대식 빅토리노와 부인의 무덤이 있다. [출처 : 마산교구 홈페이지]
[사진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
첫댓글 아직 가보지 못했어요~~ 성지순례를 자주 가야 하는데.........요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