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라 성당
수녀 성녀 글라라 사후 4년인 1257년에 건축이 시작되었으며,
그 3년 후에 글라라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인상적인 것은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말씀하신 독특한 모습의 십자고상,
프란치스코와 글라라 두분 성인이 입던옷, 그리고
글라라 성녀의 시신이라 할 것이다. 대리석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성녀 글라라의 무덤이 있는데, 창살 사이로 보이는 글라라
성녀의 얼굴은 새까맣게 화석이 되어 있다. 700여 년 전의
모습 을 그대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산다미아성당. 성녀 글라라께서 입회하여 선종할 때까지 42년간 봉쇄의 생활을 하셨던 곳이다.
성 다미아노 성당
성 다미아노 성당은 의사로서 순교한 동방의 두 성인 고스마와 다미아노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9세기 또는 10세기 초에 처음으로 건축되었을 것으로 본다.
성 루피노 성당에 보관된 한 사료에 따르면 이 성당은 처음에 베네딕토회 소유였다.
13세기 초에는 아시시 교구에 속했으며, 아시시 주교의 관리 아래 있었다.
1213년 초에 클라라와 아녜스 몇몇 동료 자매들이 판쏘의 성 안젤로 수녀원에서
귀도 주교로부터 양도받아 이 성당으로 옮겨왔다.
산 다미아노는 아시시 성 외곽 움브리아 평야로 내려가는 언덕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1205년 이 허물어져가는 교회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였고,
그로부터 "가서 나의 집을 고치라"는 메세지를 받았다.
1206년경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동료들은 이 황폐한 성당을 재건하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직접 벽돌을 나르고 쌓아 올린 곳이어서
성인의 손길을 더욱 느낄 수 있는 곳이며, 1224년 질병으로 이곳에 머무르셨을 때
"태양의 찬가"를 지으신 곳이기도 하다.
성당 전면은 매혹적인 작은 광장 주변의 수도원 외부와 전체로 하나를 이루 있다.
입구 현관은 아랫부분에 성당의 채광창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정겨운 분위기를 창출하고 있으며,
아직도 12세기 말 확장 이전의 원래 건물의 흔적을 관찰할 수 있다. 성당 안은 좁은 편이고,
아기 예수와 동정 마리아, 성 다미아노, 성 루피노의 그림이 있다.
내부에는 식당이 있는데 긴 의자와 식탁은 그 당시에 사용했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228년 글라라가 그레고리오 9세의 권유로 빵을 축복하자
모든 빵에 십자가가 새겨진 빵의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위층으로 올라가면 글라라의 작은 정원과 작은 경당이 있다.
글라라와 자매들의 침실이 있는데 돌바닥과 돌벽에 나무 십자가만 걸려 있다.
1983년 9웍 22일 이 성당과 수도원이 "기도와 피정의 장소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작은 형제회에 넘겨졌다.
현재는 작은형제회의 움브리아 관구 수련소가 있다.
까르첼리 은둔소의 모습
이 은둔소의 수련원장이셨다고 한다
성녀 클라라(Chiara di Favarone "빛나는 이"라는 뜻)는 1194년 이태리 아씨시의
상류귀한가문에서 태어났다. 귀족이며 부자인
아버지 파바로네(Favarone)와 고귀한 신분과 재산과 애덕과 자비심을
겸비한 어머니 오르똘라나Ortolana)사이의 맏딸(4녀 1남 중)인
성녀는, 그녀 어머니가 성루피노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여인이여 겁내지 말라. 그대는 온 세상의 빛이될 아이를 낳게 되리라”
그녀는 이 음성을 듣고 아기의 이름을 글라라로 지었다. 예언된 밝은 빛이
거룩한 뜻에 따라 성취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에 의해
“글라라“라는 이름을 갖게된다.
글라라는 아주 정직하고 착한 생활을 하였으며,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좋아하며 실천한 바(시성 조사 제1증언), 어릴 적부터 거의 천사와도
같은 삶이었으니, 동정이었고 늘 동정녀로 머물렀기 때문이며
성녀는 거룩한 선업들에 늘 열심이어서, 그녀에 대한 좋은 명성이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예쁘고 과년해진 글라라는 성녀의 생애 시초부터
그녀가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화된 것인 양, 거룩한 행동들을 주의깊게
지켜보던 많은 친척인 신랑감들로 부터 청혼을 받을 때 전혀 들은 바 아니하고,
오히려 청혼한 이에게 세상을 경멸하도록 설교를 하였으며 단식과 기도에
열중하고 항상 하느님에 관한 것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원했다.
성녀는 1206년부터 드러나는 성 프란치스코의 회개과정을 목격하고
1210년 그의 사순절 설교에 감동되어 몇 차례 프란치스코를 만나면서 그와 같은
복음적 생활에로 강한 마음의 이끌림을 느껴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생활양식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것을 결심한다. 클라라가 18세이던 1212년 성지주일 밤 가족들이
잠든 사이에 저택 뒷문의 무거운 나무 빗장과 철창대를 제거한 후) 집을 떠나,
성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포르치운쿨라의 동정녀 마리아 성당으로
달려가 순종 생활을 서약하였다. 그리고 스승이요 영적 아버지인 성 프란치스코를
따라 세속을 완전히 떠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과 사랑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길은 세상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는 성 프란치스코와는
달리 봉쇄 수도원 안에서 가난과 보속의 삶을 살아가는 관상생활이었다.
우선 머물 곳이 없어 바스띠아의 성바오로에 있는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생활을 시작할 때 친척들이 습격하여 성녀를 밖으로 끌어내고자 하자
그녀는 제대포를 잡고 자기 머리를 벗겨 자른 머리를 보여 주며
자신의 굳센 의지를 보인다. 그 후에 성녀는 판조의 성 안젤로 성당에 잠시 머물다가
1212년 말~1213년 초 클라라의 뒤를 따라 복음적 생활을 함께 시작한
동생 아녜스와 동료 몇 명과 함께 성 프란치스코가 마련해 준
성 다미아노 성당을 "가난한 자매들의 회"의 못자리로 삼고
성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생활양식과 비슷한 복음적 권고로
작성하여 준 생활양식을 따르며 살아간다.
1215년 라떼라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기존의 인준된 수도회칙 베네딕또 회칙을 따를 수 밖에 없었던 클라라는
공동체의 책임을 지는 가운데 원장(abbatis)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우게 되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그리스도와 가난한 자매들의 여종, 시녀라고 불렀다.
1216년 글라라의 요청에 의해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을 수 있는 가난의 특전을 허락한다 . 1218년에 우고리노 회칙이 주어졌으며.
1224년 성녀는 28(29)년간 지속되는 병을 앓기 시작한다..
1226년 이태리에 24개의 글라라의 수도원이 생기고 스페인에도 진출한다.
1228년 가난 특전에 대한 관면을 거부한 글라라 의 요청에 의해
그레고리오 9세의 “가나안의 특전”이 재확인된다.
1230년 글라라는 친동생 아녜스를 피렌체에 있는 몬티첼리 수녀원의 원장으로 파견하고.
1234년 보헤미아 왕의 딸이며 프라하 수도원의 창설자인 아녜스에게
첫째 편지를, 1235년에 둘째 편지와 1237년에 셋째편지를 보낸다.
1238년 글라라는 프란치스코의 “생활양식”과 우고리노의 회칙을 기초로 하여
손수 작성한 회칙의 인준을 요청했으나,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거절당한다.
1240년 글라라는 프레데릭 2세와 동맹하여 아씨시를 습격한
사라센인들을 성체의 기적으로 쫓아내는 체험을 한다.
1241년 글라라는 자매들과의 기도로써 아씨시를 침약한
아르베사의 비탈리스 황제 군대를 퇴각시킨다.
1243년 클라라는 자신이 작성한 회칙의 인준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다시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1247년 새로운 회칙을 의무적으로 받게 되었다.
1252년 클라라는 인준받은 프란치스코의 회칙을 근본적으로 받아들여 관상과
봉쇄 생활에 적용하는 고유한 회칙을 쓴다.
교회 역사 안에서 여성수도자로써는 최초로 쓴 이 회칙을 보호자 라이날도(Rainaldo) 추기경이
교황의 이름으로 1252년 9월 16일자로 인준한다.
1253년 글라라는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넷째 편지를 보내고, 유언을 쓴다.
같은 해 8월 9일 글라라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자신이 쓴 회칙을
교령으로 재확인 받음으로써 성녀의 염원인 순수한
복음적 가난의 회칙을 교황 칙서 안에서 인정받게 된다.
1253년 8월11일 세상에서의 마지막 찬가를 부르면서 영원히 빛나는
영광의 하느님께로 영원한 천상의 삶을 시작하신다.
첫댓글 오늘이 글라라 언니 축일이군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축일을 축하축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