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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배 60배 100배의 기적
지난 주말에는 예배 봉사자들과 함께 ‘감사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푸르메재단이 경기도 여주에서 운영하는 발달장애인의 일터를 돌아봤습니다. 1200평에 달하는 방울토마토 스마트팜이 있었고, 무이숲 카페도 있었습니다. ‘다름이 없다(無異)’는 의미를 지닌 무이숲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다를 바 없고, 사람과 자연이 다를 바 없다는 뜻도 지녔다고 합니다.
일터에는 50여명의 발달장애인이 4시간씩 근무하고 있는데, 그들 모두 최저임금보다 많은 급여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이곳의 활동이 사회적 존재를 위한 선구적 움직임으로 보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엄청난 일이 발달장애인 아들을 둔 한 지역 주민의 기부로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그 기부자는 발달장애인 아들에게 물려줄 생각으로 농장을 조성하려고 했답니다. 그러나 너무 어려워서 포기할 무렵 푸르메재단을 소개받고, 발달장애인을 위한 일터 조성을 조건으로 토지 4000평을 쾌척했다고 합니다. 아들을 위한 농장이 발달장애인 50명의 직장이 된 것입니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이룬 기적을 보았기에 가슴 벅찬 하루였습니다.
김종구 목사(세신교회)
망대를 지으려면
어떤 사람이 망대를 지으려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자기에게 비용이 있는지 계산해봐야 합니다. 무턱대고 대들었다가는 완성하지 못하고 낭패를 보겠지요. 전쟁에 나가는 임금에게는 뭐가 필요할까요. 먼저 2만명의 적을 1만명으로 이길 수 있을지 헤아려야 합니다. 당해 낼 수 없겠다 싶으면 얼른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해야 하지요. 모름지기 무슨 일을 하기 전에는 먼저 잘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망대를 짓거나 전쟁을 치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일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곧 십자가를 지는 일이지요. 그것은 죽기를 다짐하는 일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할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33, 새번역)
먼저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나를 버리지 않고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느새 산과 들의 나무들은 곱게 물든 단풍을 다 버리고 다시 새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재경 목사(수원 한민교회)
흔들리지 않는 나라
고려말 개혁세력이었던 이방원은 끝까지 충신으로 남고자 했던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하여가’라는 시를 써서 보냈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시대가 바뀌고 있으니 함께 새 나라를 건국해서 잘살아보자는 의미였습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정몽주는 ‘단심가’를 써서 보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방원은 결국 정몽주의 마음을 흔들 수 없음을 알고 선죽교에서 그를 살해합니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확신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히 12:28)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영원합니다. 그 나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불같은 믿음과 열정으로 충성하십시오. 모든 믿음의 경주에서 끝까지 완주하시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안광복 목사(청주 상당교회)
욕망 잠재우고 감사를 선택하세요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모든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욕망하는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도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폭력과 질투가 일어났습니다. 르네 지라르는 십계명의 말씀들도 인간의 행위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다스리라는 계명이라고 정의합니다.
모든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욕망을 잠재우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침묵 훈련’입니다. 기도를 통해 자신 안에 있는 욕망을 발견하고 다스릴 때 더욱 선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욕망을 잠재울 때 비로소 일상의 의미가 새로워지고 작은 일에도 감사와 경외가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내 안에 욕망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욕망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 안에 결핍의 문제를 채우려고 노력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까.
고상섭 목사(그사랑교회)
임계점
물에 열을 가해 100도가 되면 기체로 변합니다. 액체에서 기체로 바뀌는 순간을 임계점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선교사님이 한 청년 자매에게 ‘특송(특별찬송)’을 부탁했습니다. 그 자매는 ‘광야’라는 찬양을 불렀습니다. 찬양을 듣는데 제 마음에 감동과 감화가 임했습니다. 그건 저 자매에게 곡을 만들어서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매의 어머니는 딸의 찬양 사역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자매를 1년 정도 훈련시켰습니다. 힘들어도 묵묵히 기도하면서 임계점을 넘어가는 모습을 봤습니다.
주님께서는 귀한 이 자매에게 아름다운 소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귀하게 사용하시는 작곡가 선생님이 곡을 붙이시고, 전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가사를 붙여줬습니다. 많은 목사님께서 그 찬양을 듣고 은혜를 많이 받는 모습을 봤습니다.
성경에서 임계점을 넘어간 요셉을 봅니다. 그는 자신 앞에 놓인 담을 넘고, 애굽의 담을 넘어 근동 지역을 7년의 기근에서 구해냅니다. 우리도 믿음의 임계점을 넘겨서 주님께 영광을 드렸으면 합니다.
지성호 목사(서울이태원교회)
그 정도여도 괜찮아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제목의 책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차가운 세상 속에서 칭찬하는 분위기가 좋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때로는 과하거나 불필요한 칭찬이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급기야 칭찬의 본래 의미가 퇴색되고 참기 힘든 가벼움이 나타나곤 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왜곡입니다. 칭찬받을 일도 아닌데 칭찬을 받으면 ‘정말 칭찬받을 일이었나’라 착각하는 때도 있죠. 칭찬의 장점은 건강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칭찬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돕는 겁니다. 자신이든, 자기 일이든 존재와 일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들려줬던 말이 생각납니다. 성적이 너무 안 나와 실망하고 있을 때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냥 그 점수가 너의 바닥이라고 받아들여. 그래야 올라가지.” 칭찬은 분명 아니었지만 마음을 다잡게 했습니다. 칭찬보다 중요한 건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용기입니다. “그 정도여도 괜찮아”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게 때로는 칭찬보다 훌륭할지도 모릅니다.
조주희 목사(성암교회)
영혼의 집밥
책 ‘당신이 옳다’(정혜신 지음)는 정신과 의사의 저서입니다. 저자는 현대사회는 온통 전문가로 넘치는데, 과연 우리의 삶이 자격증 가진 전문가에게만 의존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며 ‘집밥’을 예로 듭니다. 조리사 자격증 가진 사람이 훌륭한 요리를 만들지만 우리 식생활이 조리사들의 요리에만 의존할 수 없습니다. 조리사들의 요리보다 우리 삶에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집밥, 엄마가 해주는 밥입니다.
인생의 여러 문제도 전문가 손에만 맡겨둘 수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일례로 흔히 앓게 되는 아픔들에 대해 정신과 의사들은 너무 쉽게 우울증 진단을 내리고 약물로 아픔의 증세를 없애려 한다고 비판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거대 제약회사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저자는 외칩니다. 부모와 사별하고 슬퍼하는 것이 어째서 우울증이며,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 말기 암을 선고받은 불안과 공포가 왜 우울증이냐고요. 우리 삶에 등장하는 모든 문제가 혼자서는 넘기 어려운 가파른 언덕이지만 그렇다고 과학과 의학으로만 풀 수는 없겠지요. 사랑이 듬뿍 담긴 ‘영혼의 집밥’, 궁극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이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풀 수 있습니다.
김종구 목사(세신교회)
불타는 믿음보다는
한 사람을 구하려고 땅과 바다를 누빈다면 정말 뜨거운 믿음이 아닙니까. 그런데 기껏 얻은 사람을 지옥의 자식으로 만든다면 얼마나 참담합니까.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 23:15, 새번역)
여기서 ‘지옥’이라고 번역한 말은 ‘게헨나’입니다. 게헨나는 아하스왕이 자기 아들을 불태워 제물로 바쳤던 ‘힌놈의 아들 골짜기’(대하 28:3)지요. 아하스는 도대체 어떤 믿음이기에 자기 아들을 바쳤을까요. 그는 믿음이 큰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의 제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역겨웠습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불타는 믿음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믿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제물이 아니라 그 마음과 행실을 보십니다.
오늘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다시 바르게 세우는 날입니다.
서재경 목사(수원 한민교회)
믿음의 시선
‘콘택트’(1997)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외계에서 온 존재가 어떤 메시지를 남겼는데 언어학자인 여주인공이 그들의 언어를 알아내려고 노력합니다. 주인공은 독특한 그림 모양의 표의문자를 해석해 가는 데 사피어-워프의 가설을 사용합니다. ‘언어가 사물을 보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는 이론입니다. 즉 새로운 언어를 익히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고 더 나아가 새롭게 사물을 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결국 주인공은 외계인들의 언어를 알아내면서 그들이 바라보는 미래 세상까지 보게 됩니다.
영화적 상상으로 가능한 이야기이지만 믿음의 세계에서도 적용해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경의 언어를 통해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 열리게 되고 이것이 바로 믿음의 시선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하나님 말씀을 통해 믿음의 시선을 갖게 되면 새로운 눈이 열리게 되고 보지 않고도 더 확실한 증거를 갖게 됩니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확장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시선입니다. 믿음의 시선을 통해 더 많이 감사하고 모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안광복 목사(청주 상당교회)
용기란 두렵지만 한걸음 내딛는 것
인내는 오랜 시간 고통을 참으면서 자랍니다. 용기는 두렵지만 한 걸음 내딛는 과정을 통해 자랍니다. 신앙이란 감정적 평안 가운데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렵지만 말씀의 기준 앞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저서 ‘떨림과 울림’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떨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주가 떨림이라면 인간은 울림이라고 표현하면서 모든 세상은 진동하는 중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바위 같은 인생을 꿈꾸지만 늘 흔들리고 진동하게 됩니다. 어쩌면 연약한 인간이 가지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신앙이란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두렵고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힘들지 않은 삶이 아니라 힘들지만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힘든 가정생활, 어려운 직장생활 등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며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신앙은 흔들리고 떨리지만 주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렵지만 그렇게 한 걸음 나아갈 때 우리는 더 용기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고상섭 목사(그사랑교회)
힘든 일이 생기면, ‘결국 이 또한 지나갈 일’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샬롬! 지난밤 편히 잘 쉬셨는지요? 10월 10일 화요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내내 건강하고 아름다운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오늘부터 ‘맨발걷기효능 7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수면의 질 향상’입니다. 자기 전에 발 마사지를 하면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랍니다. ‘맨발 걷기를 하면, 피로감이 해소되어 숙면을 유도한다.’고 하네요.(출처; 마음, 건강, 길)
누구나 살다 보면, 이런저런 힘들고 속상한 일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고민으로 며칠 밤잠을 설치면서 시간을 보내다보면, 처음으로 괴로움이 조금씩 줄어들어 ‘마음이 점점 가벼워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주어진 상황과 문제에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한참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면, ‘처음에 왜 그리 힘들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뇌과학에 따르면, 기쁨이든 슬픔이든 괴로움이든, 인간의 뇌가 느끼는 감정의 강도는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매일 먹으면 그 맛을 잃게 되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사무친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그 강도가 줄어듭니다. 로또1등에 당첨된 기쁨의 지속 기간도 기껏 ‘한두 해에 불과하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모든 감정의 강도(强度)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줄어듭니다. 익숙해진 과거는 잊고 새로운 미래에 대비하기 위하여, 우리 뇌가 진화를 통해서 찾아낸 현명한 전략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결국은 지나가고, 어쨌든 우리 삶은 일상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옵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이것도 마침내 지나갈 거다’라고 애써 되뇔 일입니다. 50대 중반에 이르니, 힘든 일에 대처하는 꼼수가 조금은 생겼습니다. 시간이 흐른 미래의 시점에서 ‘지금의 힘든 일’을 바라보는 방법입니다. 10년 후 돌이켜보면 힘든 일로 기억할 리가 없으니, 그 시점을 앞당겨 이 순간부터 ‘별일 아니라고 여긴다’고 해서 큰 착각은 아닙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결국 이 또한 지나갈 일’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힘든 일이 지나간 미래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사실 별일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힘들면 일어날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일어나지 않은 최악을 떠올려봅시다. 최악에 비하면, 어떤 힘든 일도 별일이 아닙니다.
뇌과학자 ‘데이비드 J.린든’은 치료 불가능한 암 진단을 받았는데, 그가 언젠가 한 매체에 기고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억울함, 분노의 감정과 함께, ‘그래도 가족과 공유할 얼마간의 시간이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결코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는 없습니다. 잃은 것이 많을 때에는, ‘그래도 남아있는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떠올릴 일입니다.(출처; 월간에세이, 김범준 /성균관대교수)
중2때, 영어선생님이 ‘러시아의 문호’로 일컬어지는 ‘푸쉬킨’의 시(詩)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소개해주셨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 슬픔의 날을 견디면 / 기쁨의 날이 찾아오리니. // 마음은 미래에 살고 / 현재는 늘 괴로운 법 / 모든 것은 순간이며 지나가는 것이나 / 지나간 것은 훗날 다시 그리워지리니”
위의 글이나 푸쉬킨의 시(詩)에서 말하는 내용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삶의 한 지혜’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에는 ‘신앙적으로는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우리에게 고난이 닥치면 그 ‘고난이 하루속히 물러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이라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올린 ‘주님의 기도’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마26:39,현대인)
요컨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회피하거나 물러서지 말아야 할 겁니다. 그러니까, 고난의 많고 적음, 또는 강도(强度)의 세기가 문제 아니라,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일이 하나님께서 우리(나)에게 맡겨주신 일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물맷돌)
[그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마16:24,표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어 죄인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빌2:8, 현대어, 현대인, 쉬운성경)]
쥐구멍이 열 개라도 딸 앞에서 숨을 곳은 없었습니다.
샬롬! 어제 주일 밤엔 편히 쉬셨는지요? 10월 9일 월요일, 한글날 아침입니다. 태극기는 게양하셨겠지요? 저는 컴퓨터로 타이핑할 때마다 ‘한글의 고마움’을 새삼 깨닫곤 합니다. 우리에게 이처럼 우수한 한글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우울증을 극복하게 해주는 영양과 그 음식’ 세 번째는 ‘비타민D’입니다. ‘우울증 발병률이 비타민D결핍증이 있는 자에겐 더 높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비타민D는, 신체가 칼슘을 흡수하여 치아와 뼈를 튼튼하게 하고, 근육과 면역체계를 건강하게 하는데 필요하다’고 합니다.
73세 어머니와 47세 딸이 마주 앉아서 ‘40년 전 사건’을 두고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73살 먹은 엄마가 코너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47살 먹은 큰딸이 ‘초등학교 때 엄마에게 맞았다’고 고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그때, 멍이 들도록 때렸잖아요!” 그 말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때렸다고?” 갑자기, 얼굴이 화끈하고 열이 올랐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한 번도 때려본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멍이 들도록 동생하고 둘이서 맞았다’고 합니다. 때린 사람은 잊었는데, 맞은 아이는 기억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딸아이 말에 의하면, 대단한 일도 아니고, ‘동생과 둘이서 신나게 놀다가 너무 늦게 들어왔다’고 맞았다는 겁니다. 제 성격에 ‘때렸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맞을 만한 짓이 얼마나 심각하고 중요한지?’는 지금에 와서 보니,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맞았다’는 사실만 물 위에 둥둥 떠 있습니다. 다시 듣기도 민망스럽고 심히 부끄럽습니다. 쉰 살이 다 되어가는 딸이 40년 전 엄마에게 맞은 상처를 내보이는데, 그야말로 저는 핵폭탄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나도 체벌을 했구나!’
요즘 ‘체벌’에 대하여 이런저런 말이 많습니다. ‘사랑이 없는 매는 아이들을 병들게 하지만, 사랑의 매는 때려야 사람 된다’고 하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글쎄, 과연 그럴까요? 사랑의 매가 정말 사랑의 매일까요? 맞은 아이가 ‘선생님의 매, 부모님의 매는 사랑의 매였습니다. 매는 아팠지만, 가슴은 뭉클했습니다.’라고 할 때, 그것이 ‘사랑의 매’일 겁니다. 그러나 맞은 사람이 ‘매’라고 느끼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제가 우리 아이들을 때렸을 때, 진정 사랑해서 때렸다면,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슬픈 기억을 가슴에 안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아이들이 약속을 어겼으니, 저는 화가 났을 것이고, 그래서 때렸을 겁니다. 그럼, 그것은 ‘화가 나서 때린 매’이지, ‘사랑의 매’가 아닙니다. 쥐구멍이 열 개라도 딸 앞에서 숨을 곳은 없었습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저를 너무 부끄럽게 했습니다.(출처; 어른공부, 양순자 / 30년간 사형수 상담가로 봉사, 저서로는 ‘인생 9단’과 ‘인생이 묻는다, 내가 답한다!’가 있음)
잠언 13장 24절에는 ‘매를 들어 자식을 때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식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식이 귀여울수록, 꾸지람도 자주 해야 한다.(현대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이 본문을 ‘매를 아끼는 것은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성실하게 자식을 징계한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사랑한다면 매를 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매가 ‘진정으로 사랑의 매인가?’하는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더더욱 문제인 것은, 자식이 그 매를 ‘사랑의 매’로 여기지 않을 때입니다. 그럴 경우, 그 매는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부모가 화가 난 상태에서 자녀에게 매를 댄다면, 그야말로 ‘교육이라는 차원’에서는 한참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부모가 자녀에게 매를 대는 것은 아주 신중해야 할 겁니다. 요컨대, 매를 대지 않더라도 부모의 말에 기꺼이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녀에게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야 합니다. 요컨대, 부모가 먼저 ‘부모다운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물맷돌)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녀를 감독할 권리를 부모에게 주셨으므로,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엡6:1,현대어) 주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것은 너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너를 채찍으로 때리시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참자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리는 시련을 참아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당연히 자녀에게 하실 일을 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로서 자기 자식을 단련시키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히12:6-7)]
우리의 몸과 마음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습니다.
샬롬! 지난밤동안 안녕하셨는지요? 10월 7일 토요일, 10월의 첫 주말아침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하루 즐겁고 행복한 주말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울증을 극복하게 해주는 영양과 그 음식’ 두 번째는 ‘현미’입니다. 그리고 계란과 유제품, 통곡물을 섭취하여 비타민B와 엽산을 충분히 섭취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호박씨는 ‘양질의 아연 공급원’이라고 합니다.
2천 년 전,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 아침, 숲을 거닐고 있던 노자(老子)는 주위에서 요란한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올려다봤더니, 굵고 튼튼한 가지들 위에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지들이 처음에는 점차 무거워지는 눈의 무게를 구부러짐 없이 지탱하고 있었지만, 마침내는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부러져버렸습니다. 반면에, 이보다 가늘고 작은 가지들은 눈이 쌓임에 따라 자연스레 휘어져 눈을 아래로 떨어뜨린 후, 다시 원래대로 튀어 올라 본모습을 유지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형태를 구부러뜨림으로써 변화하는 게, 버티고 저항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이치로구나!” 이것이, 노자가 얻은 ‘깨우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성장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변화에 저항하고 버티는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해(害)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우리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때, 이러한 ‘내면의 아우성’을 잠재울 수 있다. 즉, 능력 역시, 욕구의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장차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산맥도 결국에는 닳아 없어지고, 대륙들은 조금씩 서로 멀어지고 있으며, 한 세대가 가면 다음 세대가 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 있는 것도 우리 몸속의 낡은 세포들이 새로운 세포들로 대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이 지나면, 우리 몸속에 있는 분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새것으로 교체될 겁니다. 또한, 우리의 몸과 마음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단 한순간도 고정적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고로, 우리가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길 때, 우리는 비로소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만물은 늘 변화하므로, 고정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글 수 없다.”
우리 주변에는 끊임없이 배우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늘 유쾌하고 활기에 넘치고 열정으로 가득하며,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흥미를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반면에, 변화를 두려워하면서, 단지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낡은 생각과 행동의 틀 안에 갇혀있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만 홀로 그대로 머무르길 고집한다면, 곧 혼자만 저만치 뒤에 남겨질 뿐입니다.(출처; 멋지게 나이 드는 법, 도티 빌링턴 지음 / 윤경미 옮김)
아시다시피, 변화(變化)와 변질(變質)은 엄연히 다릅니다. 물론, 둘 다 ‘사물의 형상과 성질 등이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변화는 품질이 향상되는 것이고, 변질은 품질이 낮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변화는 사람의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하고, 변질은 사람의 수고가 없어도 저절로 그 품질이 떨어지거나 퇴화하게 마련입니다. 고로, 우리 인간은 부단히 노력하고 수고함으로써 계속 성장을 도모해야 합니다. 위의 글에서는, ‘끊임없이 배우려는 자세를 가질 때에 성장을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사람이 영육(靈肉) 간에 성장을 도모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세월의 흐름 따라 인간은 저절로 변질되고 퇴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변질과 퇴화를 조금이라도 늦추려면, 천국에 갈 때까지 계속 성장을 도모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계속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물맷돌)
[우리는 언제나, 진리를 따라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더욱더 닮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지휘에 따라 온몸이 서로 완전히 어울려서, 각 지체는 각기 다른 지체를 도와야 합니다. 그러면, 온몸이 건강하게 성장하여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엡4:15,현대어)]
그날, 저는 제 마음속에 시어머니를 ‘진짜 엄마’로 받아들였습니다.
샬롬! 지난밤 편히 쉬셨는지요? 10월 6일 금요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를 참으로 행복하게 보내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늘부터는 ‘우울증을 극복하게 해주는 영양과 그 음식’을 소개합니다. 그 첫 번째는 ‘엽산’입니다. 엽산은 우울증 위험을 낮춰주는데, ‘바나나 계란 견과류 씨앗 시금치 병아리콩 등이 그 공급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금치와 케일과 같은 녹색 잎채소에도 엽산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합니다.
단풍이 물드는 어느 가을날, 저는 가족들에게 임신소식을 알렸습니다. 모두가 손꼽아 기다려 온 기쁜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아이가 많이 아프네요.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의사가 이렇게 말하자,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아무리 힘들고 슬프더라도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는 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저의 손을 꼭 잡아주던 시어머니 품에 안겨 펑펑 눈물을 쏟았습니다. 아이가 잘못된 것도 가슴에 사무쳤지만, 4개월간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병원에 동행해주신 시어머니를 실망시킨 것만 같았습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저 때문에 손주도 못 안아보시고….”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자, 시어머니는 한숨을 크게 쉬셨습니다. 시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제가 미운 게 당연할 겁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해도 서운해 하지 말고 다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없이 눈물을 닦아주시던 시어머니는, 제가 조금 진정이 되자, 비로소 입을 여셨습니다. “아가, 네가 시집와서 나한테 ‘어머니’하고 불렀을 때, 나는 너무 좋아서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우리집은 ‘말없고 무뚝뚝한 아들’만 셋이잖니? 네가 곁에서 조잘조잘 떠들면, 나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너 같은 천사가 축복처럼 왔는데, 내가 뭘 더 바라겠니? 엄마는 너만 있으면 돼!”
유산수술을 받은 후, 시어머니는 우리집에서 지내며 저를 돌봐주셨습니다. 제가 울면 따라 우셨고, 잠을 못 이르면 밤새 다리를 주물러주셨습니다. 하루는 어디선가 ‘유산은 아이를 낳는 거나 다름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 시장을 뒤져가면서 가장 비싸고 좋은 미역을 찾아서 사오셨습니다. 그리고 미역국을 끓여 밤낮으로 떠먹여주셨습니다. 그날, 저는 제 마음속에 시어머니를 ‘진짜 엄마’로 받아들였습니다.(출처; 좋은생각, 김미진 / 대구 달서구)
정말 ‘좋은 시어머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글쓴이는 비록 ‘소중한 자식을 잃어버리는 불행’을 당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시어머니를 ‘진짜 엄마’로 받아들이게 된 것만으로 위안 삼아도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시어머니들 중에는 참으로 이상한 분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특히,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며느리의 남편이 죽었을 경우, 그러니까 그 아들이 죽게 되면, 며느리에게 ‘남편을 잡아먹은 년’이라는, 정말 험악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을 하는 시어머니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자신도 여자이건만, 같은 여자로서 어찌 그처럼 며느리를 구박하며 무시무시한 험담을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며느리도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으니, 그 슬픔이 오죽하겠습니까? 아무튼, 옛날에는 고약한 시어머니가 많았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하나의 흐름’이었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시어머니가 되면 의례히 며느리를 구박해야만 되는 줄로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흐름이 역전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옛날에는 ‘고약한 시어머니’가 하나의 시대상이었다면, 이제는 거꾸로 ‘고약한 며느리’가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의 흐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며느리는 의례히 시어머니를 구박해야 되는 줄로 아는 ‘시대적인 풍조’가 되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며느리들도 머지않아 곧 시어머니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며느리를 안 볼 가능성도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들이 없거나, 아니면 있어도 결혼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어쩌다가 시어머니가 될 경우, ‘시대적인 풍조’에 따라 ‘구박받는 시어머니’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고로, 이런 ‘시대적인 흐름’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고약한 시어머니’도 없어야 하지만, ‘고약한 며느리’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며느리들이 성경말씀에 따라 ‘아름다운 며느리’가 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물맷돌)
[이제 이 아이가 당신에게 살맛나게 해주겠군요. 늘그막에 당신을 잘 모시겠지요. 이 아이는 일곱 아들보다도 더 당신을 극진히 모시던 당신 며느리가 낳은 아들이니까요.(룻4:15,현대어) 이 아이는 당신에게 삶의 의미를 불어넣어주었고, 당신이 늙었을 때 당신을 돌보아 줄 사람입니다. 당신의 며느리는 당신을 많이 사랑하며, 당신에게 아들까지 낳아주었습니다. 착한 당신의 며느리는 아들 일곱 명보다 낫습니다.(룻4:15,쉬운성경)]
‘아이가 있는 삶’을 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샬롬! 어젯밤 단잠 이루셨는지요? 10월 5일 목요일 아침입니다. 오늘 하루도 내내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불안감을 극복하도록 돕는 영양과 그 음식’ 세 번째는 ‘양질의 단백질’입니다. ‘양질의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함께 섭취하면 소화가 잘 되는 이상적인 식사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에너지를 천천히 방출하고 혈당을 낮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답니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꿈에 그리던 임신에 성공하면서, 저는 10년 만에 ‘난임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보통 드라마도 이쯤이면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현실에 드라마 같은 결말이 순순히 존재할 리 없습니다. 임신과 함께 ‘입덧’ 지옥이 시작되었고, 따끔한 헤파린 주사가 덤으로 찾아왔습니다. ‘항인지질 항체 증후군’이라는, 희귀질환 진단을 받은 것입니다. 대학병원 전문의조차 책에서나 봤다는, 낯설고 긴 이름을 가진 병이었습니다. 이 병이 있으면 ‘몸속의 피가 굳는다.’고 합니다. 산모의 피가 응고되는 것은 태아에게 치명적이기에, 저는 피를 묽게 만드는 헤파린 주사를 매일 맞아야만 했습니다.
저의 배는 순식간에 붉은 주사자국과 시퍼런 멍으로 가득해졌습니다. 주사처방을 받은 날은 출산을 7개월가량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남들은 설렘으로 기다리는 날들이 저에게는 앞으로 맞을 ‘주사의 개수’를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만 건강하면 괜찮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피할 길도 없었고 견뎌야만 했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잘 자랐고, 출산 안정기인 38주 차(次)에 나왔습니다. 아이 몸무게는 3.3㎏이었습니다. 2㎏만 넘길 간절히 바랐기에, 표준체중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더없는 축복으로 다가왔습니다.
출산 후, 엄마는 “집에 아이가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니?”라고 자주 말씀하곤 했습니다. 아이가 네 살이 된 요즘도 문득 ‘저의 곁에 아이가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엄마, 보고 싶었어요!”라며 품안으로 달려드는 아이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릿하고 벅찹니다. 한때는 엄마 되기를 포기했고,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육아라고 생각하지만, 아이가 있는 삶을 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출처; 좋은생각, 김 은 / 초등교사, 작가)
이 글을 읽으면서 새삼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지만, 모든 게 과유불급입니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임신조절이 인간 맘대로 안 되던 시절, 자녀를 한 타스(이런 단어를 사용해서 죄송합니다.) 이상 낳는 가정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호구지책(糊口之策)이 문제였던 겁니다.
5?16후에 ‘산하제한’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식량은 산술급수로 증가하나, 인구는 기하급수로 증가한다.’는 말도 이때 유행했습니다. 저의 4학년 담임이었던 박성수 선생님은 ‘산하제한’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시면서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혀를 차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임신조절이 가능한 시대가 되자, 정부정책에 순응하고자 아이를 적게 낳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자녀수를 조절하게 된 겁니다. 그러다가 ‘결혼은 하되,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단계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결혼마저 하지 않겠다.’는, 처참한 상황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아무리 훌륭한 성인이요 도덕군자라도 자신의 의지와 결단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성욕(性慾)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그 진리를 깨닫게 된 ‘오늘의 현실’입니다. 요컨대, 자식을 생산하는 일은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은, 권면의 말씀이 아니라, 절대명령입니다.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인간의 과제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혹시 어떤 분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시대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불가피하게 드리는 말씀이니, 깊은 이해가 있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물맷돌)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 내리시며 이르셨다. “자식들을 많이 낳아라. 자꾸 불어나 온 땅을 가득 채워라.”(창9:1,현대어)]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흔적은 ‘사랑’입니다!
샬롬! 지난밤에 편안히 잘 쉬셨는지요? 10월 4일 수요일 아침입니다. 긴 연휴 끝에 맞이하는 첫 출근이라 꽤 힘드시겠네요! 아무쪼록, 즐겁고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불안감을 극복하도록 돕는 영양과 그 음식’ 두 번째는 ‘견과류’입니다. 견과류에는 혈당수치의 균형을 맞추는데 필요한 오메가3, 그리고 마그네슘과 단백질이 들어있다고 하네요.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한 여인이 암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암에 걸려 몇 년 동안 지내면서, 비로소 자신의 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암과의 싸움에서 필패할 수밖에 없는 시한부 인생도 투쟁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미미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할 ‘짧은 인생도 살아갈 의미가 있다’고 믿게 된 겁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살다 간 흔적’을 남기려고 애를 씁니다. 거대한 빌딩을 짓고, 드높은 명예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흔적은 사랑이다’라고 믿습니다. 사랑을 하면 상처 또한 피할 수 없지만, 사랑은 인생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주고, 사람을 더욱 바람직한 인간으로 만들어줍니다. 또한, 사랑은 죽음 앞에서도 허무감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자신의 책에서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중국의 한 현자(賢者)에게 물었습니다. “학문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람을 아는 일이다.” 그는 또다시, 현자에게 질문했습니다. “선(善)은 무엇입니까?” 현자가 답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제가 죽는 날을 상상해봅니다. 제 옆에서 ‘두려움에 벌벌 떠는 저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사랑한다!’고 속삭여 줄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내가 ‘사랑한다!’고 말해줄 사람이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제가 인생에서 누려야 할 사랑을 충분히 주고받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은, 비루(행동이나 성질이 고상하지 못하고 더럽다)했던 제 인생이 비로소 완성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출처;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김혜남 / 정신분석전문의)
글쓴이는, ‘정신분석 전문의’로 활동하던 중, 2001년 마흔세 살에 몸이 점점 굳어지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들이닥친 불행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너무 억울하고, 사람들이 밉고, 세상이 원망스러워, 아무 것도 안하고 한 달 동안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아직 나는 죽은 게 아니며, 누워있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서 글 쓰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소개하고 있는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이라는 책이 무려 30만부 판매기록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의사로서 활동한 것보다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이 훨씬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물맷돌)
[사람들이 너에게 나쁜 일을 했다 해도, 복수를 하거나 앙심을 품지 말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나는 여호와이다.(레19:18,쉬운성경) 사랑은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히 채우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러분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율법입니다. 올바르게 사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시간은 종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롬13:10-11상, 현대어)]
중요한 기로에서 ‘망설이기보다는 용기 있게’ 선택하고 싶습니다.
샬롬! 밤새 평안하셨는지요? 추석연휴 마지막 날입니다. 아무쪼록, 즐겁고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부터 며칠간 ‘불안감을 극복하도록 돕는 영양과 그 음식’을 소개합니다. 먼저, 마그네슘이 풍부한 음식인데, 마그네슘은 근육을 이완시키고 신체의 다양한 효소를 조절하기 때문에 불안감을 완화하는데 도움이 된답니다. 마그네슘이 풍부한 식품에는 케일 및 엽채류, 봄나물, 해바라기씨, 다크 초콜릿, 카카오, 파우더 등이 있다고 하네요.
그날은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서 전철을 타고 가던 중이었습니다. 출입문 앞에서 기타를 메고 웅크린 채 앉아있는 한 여학생이 신경 쓰였습니다. ‘어디 아픈가?’ 옆에 앉아있던 할머니께서 양보해주신 자리에 앉아서도, 소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지만, 모두 눈치만 보는 상황이었습니다.
소녀가 너무 힘들어하기에, 저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먼저 경의중앙선 대표번호로 열차번호와 함께 문자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문산 방향 구리역으로 가는 전철인데, 숨쉬기 어려워하는 학생이 있어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때, 여학생의 전화기에서 벨소리가 울렸습니다. 엄마인 듯했습니다. 통화조차 힘겨워하는 학생이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전화를 대신 받아 어머니께 상황을 설명하고는 학생을 부축해 구리역에서 내렸습니다. 다행히 저의 연락을 받은 역무원들이 뛰어와 학생을 의자에 앉히고 119에 연락했습니다. 구조대를 기다리는 동안, 소녀는 역무원이 건넨 물을 마시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저도 점점 마음이 놓였습니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저에게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는 소녀를 보고서야, 저는 안심하고 다시 전철에 올랐습니다.
실은, 여학생에게 다가가기 전까지, 저는 많이 망설였습니다. ‘돕는 데 시간을 허비해서 오늘 할 일을 못하게 되진 않을까?’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을까?’ 그 순간에는 눈치만 보던 승객들이 야속했지만, 돌이켜보니 ‘중요한 약속이나 급한 일로 바빴을 수도 있었겠다.’싶었습니다. 저처럼, 분명 그들도 속으로 백번천번 망설이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중요한 기로’에서 망설이기보다는 용기 있게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먼 훗날 시간을 되돌려보았을 때에 ‘후회가 없을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출처; 샘터, 박다영 / 보육교사)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이것이냐, 저것이냐?’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그 기준은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가 아니라, ‘그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릇된 일인가?’하는 ‘당위성(當爲性)’ 여부일 겁니다. 다시 말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나의 손익(損益)과는 상관없이, 그야말로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그 즉시 실천에 옮겨야 할 겁니다. 하지만, 선택해야 하는 그 순간이 닥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먼저 나서기를 주저하게 마련입니다. 저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선택의 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이미 선수를 친 다음에야, 그 일에 앞장서지 못한 저 자신을 탓하면서 후회하곤 합니다.(물맷돌)
[나는 이제 여러분에게 한 가지 선택을 권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복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저주를 받으시겠습니까?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면 여러분에게 복이 내릴 것입니다.(신11:26-27,현대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섬길 주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가령, 여러분은 죄를 주인으로 섬겨 죽음을 부를 수도 있고,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을 바치는 바로 그 대상이 여러분의 주인이고, 여러분은 그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한때는 죄의 노예가 되는 쪽을 택하였으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여 가르친 것에 마음을 다해 순종하는 자가 되었으니,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롬8:16-17,현대어)]
“선생님, 사람이 왜 살아야 하는 거죠?”
샬롬! 지난 밤 편히 잘 쉬셨는지요? 혹시, 너무 많이 드셔서 배탈이 난 건 아닌지요? 아무쪼록, 즐거운 추석연휴가 계속되길 빕니다. ‘신체부위별 노화대처법’ 여덟 번째는 ‘대장’입니다. 나이 들면서 점액분비 감소로 인하여 변비가 증가하는 고로, 물과 섬유소 많이 섭취해야 한답니다. 그리고 ‘항문 괄약근 약해져서 변실금이 증가하니, 케겔운동도 꼭 해야 한다.’고 하네요.
언젠가 병원에 열일곱 살의 여학생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학교도 안 가고, 친구도 안 만나고, 집 밖에도 안 나가고, 심지어 밥도 잘 챙겨 먹지 않았습니다. 엄마 손에 이끌려 억지로 진료실 의자에 앉은 그녀는, 그저 멍하니 허공만 응시할 뿐이었습니다. 뭘 물어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그녀가 입을 연 것은 몇 달이 지나서였습니다. “선생님, 사람이 왜 살아야 하는 거죠?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직장 가져서 뭐해요? 결혼해서 애 낳으면, 또 뭐하고요? 그래 봤자, 어차피 다 죽을 텐데~”
맞습니다. 인간은 죽습니다. 게다가 광대한 우주와 아득한 시간 속에서 바라보면, 살다 간 발자국 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하는, 미미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유한한 삶에도 불변의 가치와 무한한 의미가 있다’고 믿으면서. 또 그것을 이해하고, 지키고, 후대에 남기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고 보면, 산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죽음이라는 숙명 앞에서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기적이 사랑으로부터 나온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음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경험합니다. 또, 누군가를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경험은, 이 세상에는 ‘나’를 초월한 어떤 가치가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에 빠졌을 때의 합치감과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은, 우리의 한시적인 인생에도 ‘영원성(永遠性)’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즉, 유한한 삶에서 무한한 가치를 체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출처;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김혜남 / 정신분석전문의)
이 ‘아침편지’에서 몇 차례 밝힌 적이 있습니다만, ‘사람’과 ‘삶’과 ‘사랑’은 그 어원이 같다고 말입니다. ‘삶’을 연철시키면 ‘사람’이 되고, 그것이 ‘사랑’으로 변화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인 주장입니다만, 결코 근거 없는 주장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그리고 영어의 사랑은 ‘love’이고, 삶은 ‘live’입니다. 이처럼, 두 단어가 비슷한 것도 참 신기한 일입니다. 아무튼, 사람이 사는 이유는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로, 진실한 사랑을 하게 되면 ‘삶의 이유와 목적’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께 찾아와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에는 어떻게 하라고 되어 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이에, 그 율법학자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눅10:27).”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고, 그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받기 이전에 먼저 주는 것’임을,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신 겁니다. 아무쪼록, 이 진리의 말씀 안에서 ‘참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는 바입니다.(물맷돌)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내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머물러 있어라).(요15:9,현대어)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알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4:7-8,현대인)]
우리는 가족이니까, 넌 내 생각을 따라야 해!”
샬롬! 한가위 보름달은 잘 보셨는지요? 오늘은 추석 다음날이면서 9월 그믐날 아침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가 없는 주말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추석연휴가 계속되시길 기원합니다. ‘신체부위별 노화대처법’ 일곱 번째는 ‘방광’입니다. 나이 들면, 소변 저장량이 감소하면서 잔뇨가 증가합니다. 그리고 소변 나가는 속도가 감소한다고 하네요. 이에 대한 대처법은 ‘항문과 회음부에 힘을 주는 케겔운동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갈등이 없는 부부와 가족은 없으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갈등상황을 대화로 잘 풀어내는 가족은, 그 갈등이 오히려 부부 사이를 더 단단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갈등을 대화로 잘 풀어내지 못하는 가족은 더 깊은 문제 속에 갇히게 됩니다. ‘소통이 안 되는 이유’는 서로 ‘듣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자만의 생각과 감정을 일방적으로 쏟아놓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입니다.
‘부부는 일심동체이니,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겠거니…’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우리 문화는 가족 동일체 의식이 팽배해서,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아는 것이 화목한 가정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단지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증인이 되어 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가족치료사 ‘니콜스’는 “오늘날 우리는 경청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대화할 때는 상대방의 마음과 내 마음이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주입하려 하지 말고, 상대방의 생각을 알아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상대방과 나는 다른 독립체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넌 내 생각을 따라야 해!”라는 식으로 무언의 강요를 하면서, 상대방에게 조언과 비판과 비난을 서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은 가족에게 비수처럼 꽂힙니다.
가족은 어느 조직보다 흉허물이 없는 사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많은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보기 싫다고 안 볼 수도 없는 것이 또한 가족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천국도 되고, 동시에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 맛본 천국과 지옥은 다른 인간관계에로 전이가 됩니다.(출처; 가정과 건강, 전영숙 / 부모역할 훈련전문가)
요컨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자유’와 ‘상대방이 하고 싶은 자유’가 충돌할 때에 갈등(葛藤)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갈등은 칡 줄기와 등나무줄기가 서로 얽혀서 뒤죽박죽이 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이처럼, 칡과 등나무가 계속 얽히게 될 경우, 그 안의 ‘가족’이라는 나무는 말라죽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든지 갈등상황을 해소해야 하는데,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상대방의 자유도 인정해야 갈등이 풀립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 상대방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영역’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게 되는 ‘천국과 지옥’의 첫 경험은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나만 홀로’ 자유를 누리려는 생각을 버리고, 상대방에게도 자유를 허락함으로써 가정천국을 이룰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물맷돌)
[미움은 다툼(갈등)을 일으키나,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잠10:12,쉬운성경) 그러므로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이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다.(마18:4,현대인)]
옛날에, 우리 어머니가 항상 그러셨습니다.
샬롬! 지난밤 편히 쉬셨는지요? 9월 29일 추석날 아침입니다. 이번 추석이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도록, 즐겁고 행복한 명절이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혹시, 주변에 소외된 이가 없는지 살펴봤으면 합니다. ‘신체부위별 노화대처법’ 여섯 번째는 ‘위(胃)’입니다. 나이 들면, 괄약근 약화로 위산역류가 증가하는 고로, 식후 바로 눕지 말아야 합니다. 위액과 쓸개즙, 췌장액 분비가 줄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땐 많이 씹고 과식하지 않아야 한답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손을 들어 손가락부터 쳐다봅니다. 퉁퉁 부어있는 걸 보니, ‘오늘은 하루가 힘들겠다.’는 생각에 우울해집니다. 아마도 흐리거나 소나기가 올 모양입니다. 이런 날은 온 몸이 퉁퉁 부어서, 두 다리는 깁스한 것처럼 뻣뻣하고 무겁습니다. 손도 역시, 칼질할 때에 조심하지 않으면, 어디 한군데 베이거나 뜨거운 것에 데기 일쑤입니다.
옛날에 우리 어머니가 항상 그러셨습니다. 어깨가 아프거나 허리가 쑤시고, 무릎을 딱따구리가 쪼는 것처럼 아픈 걸 보면, ‘비가 올 테니 우산을 가지고 가라’고…. 정말 그랬습니다. 하늘이 꼭 ‘사흘 굶긴 시어머니 얼굴 모양’을 하고 있거나,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그런 날은, 갈퀴 같은 엄마 손은 퉁퉁 부어서 주먹이 쥐어지지 않았고, ‘손이 저려서 밥숟가락 들기도 힘들다’고 하시곤 했습니다. 그래도 가끔 어깨랑 손가락을 주물러드리면, 지그시 눈을 감고 “애구 애구~, 시원~하다. 거그, 거그, 아파도 시원혀서 좋다 야!”하시면서, 제 손을 꼭 쥐고 “그만 혀~ 너도 힘든디.” 조금 아쉽기도 하실 텐데, 딸이 힘들까봐 극구 말리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엄마의 그때 그 나이를 먹고 보니, 어깨 무릎 손가락이 일기예보가 되어 있습니다.
봉사 가는 집 어르신이 제가 가운뎃손가락이 부어서 구부러지지 않는 걸 참고 일하는 것 보시더니, “원샘, 우리집에만 오고 다른 집엔 가지마. 그건 어깨를 쉬어 줘야 낫는 병이야! 내가 옛날에 침을 잘 놓는 침쟁이라서 잘 알아!”하셨습니다. “애궁~ 어르신은 욕심도 많으셔. 쉬려면, 어르신네도 오지 말고 쉬어야지요. 그래야, 쉬는 거잖아요?” “안 돼. 그럼 나 심심해! 내가 한 십 년만 젊었어도 그 손가락 내가 고쳐줄 수 있는데… 어깨에다 침 한 번 놔주고 뭉친 것 풀어주면 손가락은 저절로 낫지.” 지나간 시절이 그리운지, 지그시 눈을 감고 90평생을 거슬러 추억 속으로 빠지시곤 했습니다.(출처; 그린에세이, 원숙자 / 한국 수필작가회 이사)
오늘 이야기는 다른 말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6~70이 되신 분이라면, 다들 동감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가 나이 드신 분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이들도 오늘 이야기를 무심코 넘기지 말고 마음에 담아두셨으면 합니다. 지금 나이 드신 분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장차 자신들도 그 나이쯤 되었을 때에 젊은이들로부터 외면당하지 않게 됩니다. 저축하는 셈치고, 어른들을 잘 돌보시기 바랍니다.(물맷돌)
[백발이 성성한 어른이 들어오면 일어서고, 나이 든 어른을 보면 그를 공경하여라. 너희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나는 여호와다.(레19:32,표준) 나이 많은 사람에게 화를 내며 말하지 말고, 부모를 대하듯이 하십시오. 나이어린 사람을 대할 때는 동생에게 하는 것처럼 하십시오.(딤전5:1,쉬운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