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효서의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 이병렬
<전체 줄거리>
전업 작가 생활에 돌입한 지 2년째인 화자, ‘나’는 소설가이다. 다른 작가나 사상가들의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그으며 ‘소설쓰기란 하찮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기거나 진지한 것을 하찮게 생각하기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종로에 있는 서점에 들러 어느 작가의 어떤 책이 ‘무슨 진지한 이야기’로 출간되었는지를 살피러 가곤 한다. 늘 새로운 소설을 써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다.
전업 작가로 왕성한 집필을 하고 꾸준한 발표를 해도 원고료 수입이 한 해 800만 원 안짝이다. 현실적인 아내는 그것으로 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 한다.
그러던 그 해 여름 ‘나’는 아내에게 ‘잘 팔리는 소설’을 구상한다는 거짓말을 하고 집을 떠난다. 짐을 짊어지고 현관을 나서는 ‘나’에게 아내는 ‘생리가 없다’고 말한다. 아내의 이 말은 연봉 1,000만 원도 못되는 소설가에게는 또 다른 현실의 위협이 된다.
‘나’는 대청댐이 생기면서 수몰된 마을 근처 어느 암자로 ‘작가적 고민’을 안고 숨어든다. 암자에서는 된장국에 된장무침 반찬에 삼시세끼를 먹는다. 부엌보살에게 물어보니 주지스님이 좋아하신단다. 할 일 없어 주변의 곤충의 머릿수나 세고, 8월 염천에 피는 꽃이며 야채, 잡초들을 하루 종일 바라보곤 한다. 가끔 후배며 동료작가들이 찾아오곤 하지만 이내 하늘이나 호수를 바라보는 일이 하루 일과의 전부다.
암자 생활 며칠이 지나, 두 사내를 알게 된다. 한 사람은 총무주임이라 불리는 서른 두셋 먹은 청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운전도 하고 집도 고치는 마흔 가까이 된 불목하니다. 하루는 삭막한 방안에 꽃꽂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며 버려진 깡통(캔)을 주워 모은다. 하루 종일 주운 캔 70여 개를 씻다 새로운 발견을 했다. 요즘 캔은 죄다 원터치 방식으로 손으로 딴다는 것이다. 꽃을 꽂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마을 이 집 저 집, 이 가게 저 가게 깡통따개를 구하러 다닌다. 그러나 깡통따개를 가지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은 깡통따개를 구하는 ‘나’를 정신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눈치까지 보였다. ‘나’는 오기가 생겨 버스를 타고 대전까지 나가서 구하기로 한다. 그러나 대전 시내에서도 깡통따개를 구하기란 만만치 않았다. 지성이면 감천, 어렵게 깡통따개를 구해 암자로 돌아왔다.
깡통따개를 손에 쥐고 도착한 수돗가에는 이미 누군가 깡통을 죄다 따놨다. 호미를 이용해 불목하니가 해놓은 일이다. 불목하니의 손놀림에 놀란 ‘나’는 겸손해 하는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불목하니 사내는 전직이 ‘탈출사’였단다. 20년 간 서커스에서 마술과 같은 탈출을 보이는 인기 있는 탈출사였다는 것이다. ‘나’앞에서 직접 시범을 보이기도 하며, 암자에 머무르는 것은 새로운 탈출비법을 연구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튿날 ‘나’는 아침 일찍 숲으로 가서 온갖 꽃을 꺾어다 방에 가득 채운다. 그제야 비로소 가을이 왔음을 깨닫는다. 오늘밤은 꽃향기 가득 잠들 수 있음에 들뜬다. 어둠이 깔리자 꽃향기는 방안 가득 그윽해진다. 갑자기 백합향에 취해 죽은 어떤 일이 생각나며 까닭 모를 눈물이 돋는다. 손등으로 훔치며 어느새 잠에 빠져든다.
다음날 불목하니 사내가 보여줄 것이 있다며 ‘나’를 깨운다. 노끈과 더블백 등으로 탈출 시범을 보여준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주지스님에게 지청구를 들었다. 불목하니 사내는 틈만 나면 ‘나’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주지스님에게 들키고 만다. 며칠 후 사내는 서커스 단원이었을 때 쓰던 구속복을 보여준다. 죄수들에게 입히는, 꽤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옷이었다. 사내는 구속복을 입고 탈출하는 시범을 연출한다. 그러면서 이 방법은 눈속임이 아니라 어깨뼈의 탈골을 이용한 탈출법임을 일러준다. 걱정스러워하는 ‘나’에게 숙달되면 고통은 없다고 한다. 이어서 그의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새롭게 연구해낸 탈출법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나’는 사내가 일러준 대로 방문을 앞뒤에서 잠그고 잠시 후에 열어보았다. 사내는 방에서 사라지고 없다.
불목하니 사내는 또 주지스님께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나’는 PVC파이프를 주워다 단소를 깎고 있었다. 아내로부터 전화가 와서 아이가 낚시를 삼켰다가 겨우 살아난 이야기를 전한다. 무서움에 들뜬 아내의 목소리에 ‘나’는 내일 가겠다고 한다. 아내의 생리는 아직 무소식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짐을 꾸리고 암자를 떠나왔다. 사내는 나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사인’을 한 장 해주었다. 나중에 유명해지면 징표로 삼아 만나러 오라고 하면서 말이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렸다.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어떡하지?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라고 말한다.
<구성>
◆ 발단 : 독서를 통한 새로운 소설찾기
◆ 전개 : 소설가로서의 현실적 갈등, 암자를 찾아와 보내는 무료한 나날
◆ 위기 : 새로운 인식, 깡통따개의 존재 의미 상실
◆ 절정 : 불목하니 사내와의 만남 그리고 동질감
◆ 결말 : 현실에 대한 염려로 암자를 떠남. 어딘지 모를 곳에 도착
<등장인물>
◆ 나 : 전업 소설가로 ‘소설다운 소설’과 ‘잘 팔리는 소설’ 사이에서 갈등하는 글의 화자.
◆ 아내 : 지극히 평범하면서 현실적인 주부(생활의 현실)
◆ 탈출사 : 전직은 서커스 탈출사였으며 현재는 암자에서 운전도 하고 집도 고치는 둥, 잡일을 하는 불목하니. 끝임 없이 탈출의 기술을 연마하며 언젠가 최고의 탈출사가 되기를 꿈꾸는 사내.
◆ 총무주임 :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고시 준비하러 암자에 들렀다가 아주 눌러앉아 버린 서른 두셋 먹은 청년. 뫄한머루라는 격투기 수련을 통해 도에 이른다는 독특한 종교를 가지고 있다.
◆ 주지스님 : 허무맹랑한 꿈을 품고 사는 탈출사에게 엄한 노스님(또 다른 현실)
<한 눈에 보기>
◆ 갈래 : 단편소설, 자전소설
◆ 배경 :
▷ 공간적 - 대청호 인근의 암자
▷ 시간적 - 현대
◆ 경향 : 자성적, 상징적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문체 : 내면의 자성적 문체
◆ 특징 : 인간의 심리를 상징적으로 묘사
◆ 주제 : 예술가의 끊임없는 작가적 고민과 현실의 갈등
<생각잡기>
작가 구효서(具孝書)는 1958년 9월 25일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에서 출생하여 배재고등학교와 목원대학교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하였고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마디>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시인 이상의 영향으로 시를 쓰다가 동화작가 김요섭을 만나 소설로 장르를 전환하였다. 소설적 주제가 토속적 정서, 현대적 도회적 정서, 해독 불가능한 관념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하다.
1988년 단편소설 <폐어>와 <산길>을 발표하였으며, 1989년에는 <이장>을 발표하였다. 1991년 장편소설 <슬픈 바다>, 1992년 중편소설 <영혼에 생선가시가 박혀>, 장편소설 <전장에 겨울> 등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1994년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인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은 원터치 캔의 등장으로 제 기능을 상실한 깡통따개처럼 살아가는 소설가로서의 자신을 그린 자전소설이다.
서커스단이 없어진 후, 절에서 불목하니로 살아가는 탈출사. 아내와 두 아이의 생활을 책임지지 못하는 ‘전업 작가’로 살아가는 나(화자). 그리고 원터치 캔이 등장한 후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 구비하지 않고 살아가는 깡통 따개가 없는 마을. 이 소설은 그러한 깡통따개를 닮은 사람들의 존재 의미를 묻는다.
작가의 입장은 탈출사와 비슷하며, 또 일견 다르기도 하다. 이 둘의 공통점은 유명해질 수 있지만, 아직 유명해지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탈출사는 자신의 재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라도 탈출사로 재기할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 소설가는 생활을 책임질 수 없다는 부담감, ‘소설다운 소설’을 써보겠다는 막중한 부담감을 껴안고 있다.
어찌 보면 소설가에게는 가정이라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을 잠시 벗어나 꽃을 깡통에 넣어두겠다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다. 그러나 탈출사의 입장은 이와 다르다. 그와 예술(탈출묘기)의 관계는 극히 가깝다. 탈출사에겐 책임져야 할 것이 없는 대신, 예술에 대한 꿈으로 최대한 고무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는 소설가의 존재가 깡통따개에 가깝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설을 찾지 않고, 구입하지 않으며, 누구나 쉽게 연상하지만 가정(일상)에서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소설찾기에 대해 절실한 사람들은 별로 없다. 소설다운 소설의 의미도 이미 퇴색되어버린 지 오래다. 최신 기계와 물품들 사이에서, 누가 낡고 녹슨 깡통따개를 이용하겠는가. 이 작품과 나머지 다른 작품들 속에서도 소설가의 입장과 비애가 절절히 배어 나온다. 과연 이 시대의 소설쓰기란 깡통따개를 찾아 온 마을을 헤매고, 그러다 오기를 부려가며 다른 곳(대전)까지 가서 구해와야 하는 것이란 말인가? 또 막상 구해왔을 때는 이미 용도 폐기가 되어버릴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깡통따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사회에서, 소설가들은, 혹은 창작자들은 더 뛰어난 도구와 예술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구효서의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은 예술가들의 끊임없는 새로운 소재나 기법을 찾아가는 고통의 과정을 그리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나’와 같은 (전업)소설가들에 대한 경고로도 읽힌다. 이렇게 자조적이고, 안타깝고, 불우하게 살아가는 소설가의, 힘없고 지루한 소설을 그들(소설가들)말고는 누가 읽으려 하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