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비밀은 이런 거야. 그것은 아주 단순하지.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거든"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너의 장미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사람들은 그 진리를 잊어 버렸어" 여우가 말했다. “
그가 추구한 진정한 의미의 삶은 개개의 인간 존재가 아니라, 개적(個的) 존재를 초월한, 즉 사람과 사람을 맺어주는 정신적 유대에서 찾으려 했다는 데 있다. 《인간의 대지 Terre des hommes》(1939) 《전투 조종사 Pilote de guerre》(1942)에서는 이러한 그의 관점에서 인간의 관계와 동료 비행사, 그리고 임무 ·의무 ·조국 등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깊은 성찰이 이루어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서 발표한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1943)는 작자 자신이 아름다운 삽화를 넣어서 독특한 시적 세계를 이루고 있다.
1943년 미국에서 발표한 어린왕자(Le Petit Prince)는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인 나는 이상한 소년을 만나 양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 소년은 애인인 장미꽃을 제가 사는 별에 남겨 두고 여행길에 오른 왕자로서 몇몇 별을 순례한 후에 지구에 온 것이다. 외로운 왕자에게 한 마리의 여우가 나타나서,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또한 다른 존재를 길들여 인연을 맺어 두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왕자는 이 세계 속에서 자기가 책임을 져야만 하는 장미꽃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깊은 뜻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 지구에 사는 사람에게도 실망한 왕자는 내 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시적이며 고귀한 분위기 속에 지혜를 짜낸 휴머니스틱한 작품이다
어린왕자는 존재란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설파한 철학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저자자신의 자전적인 관점이 녹아있는…. 저자가 사막에 혼자 불시착하여 절망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글은 시작되고 저자는 어린왕자를 만남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알고 사막에서 물을 찾음으로써 생명을 건지게 된다. 여기서 어린왕자는 인생의 희망을 상징하고 사막은 바로 우리의 인생자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왕, 정치가, 사업가, 주정뱅이 등은 고립되어 있는 개인 개인들을 나타낸다. 어린왕자는 이러한 사람들을 사람이 아니라 버섯이라고 표현한다. 즉 겉으로는 사람같이 생겼으나 사실은 속이 비어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린왕자는 장미꽃과의 불화로 자신의 별을 떠난다. 이것은 곧 그가 - 다른 별에서와 같이 고독하게 살고 있었던 - 최초로 자신의 벽을 노크하고 들어온 장미란 존재와의 관계정립에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즉 그는 장미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오해함으로써) 별을 떠나게 된다. 저자와의 처음 만나는 순간에 어린왕자는 양을 그려 줄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존재의 개념정의가 시작된다. 존재는 결국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요 믿음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인간은 서로간의 의사소통수단으로서 언어를 개발해 냈다. 화가는 그림으로써 작곡가는 음악으로써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의 의사를 나타낸다. 그런데 어느새 인간은 이러한 표현의 수단을 표현 자체인 것으로 오인을 한다. 즉 주체와 객체의 전도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추상화에는 작가가 감상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가 녹아 있다. 이러한 자신의 의도는 감상자가 결국 이 그림을 통하여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이해함으로써 달성된다. 결국 감상자는 그림을 통해서 작가의 입장에서 작가와의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결국 감상자는 단지 색의 조합이 아닌 작가의 의도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표현수단의 한계는 이러한 진정한 의사소통을 더욱 힘든 것으로 만들고 오해를 만들어 낸다. 이 점에 대해서 저자는 여우를 통하여 길들인다는 뜻을 이야기하며 언어는 오해의 근원임을 지적한다. 결국 우리는 서로간의 길들이는 과정을 통하여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고 개인적인 소외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것이 진정한 존재라는 것이다. 서로 고립되어 있는 다양한 군상들은 사실은 버섯으로 존재하는 것 같아 보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란 곧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을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알 수가 없으며 결론적으로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그 것의 가치를 믿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베이커씨의 아들은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 것은 우리에게는 존재가 아니다. 이에 따라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존재는 주관적인 크기를 지니게 되고 바로 이러한 과정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과정은 자신과 남이라는 대립적인 상황을 극복하여 남을 자신의 일부분으로써 받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과정이다. 이는 자신의 입장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이루어 질 수 없으며 남을 진정으로 이해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남을 자기화해 가는 과정 바로 이러한 과정이 길들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은 남을 이해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의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존재를 창조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어린왕자가 작가에게 설명해 가며 작가가 현실의 삭막함(사막) 속에서 마지막 남은 물(희망)을 다 마셨을 때 새로운 우물을 발견함으로써 작가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여기서 이 우물은 마치 인가에 있는 우물인양 모든 것이 준비된 완벽한 우물로서 나타난다. 저자는 이 우물의 물을 단지 영양분이 아닌 하늘의 별과 인간의 노력 속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하며 마음에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여기서 저자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예로 든다. 즉 우리에게 크리스마스가 좋은 이유는 바로 크리스마스에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일이 즐거울 때는 하루 밤을 새거나 하는 것이 힘들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가 없어지거나 실망했을 때는 단 한 순간을 지내는 것이 무척이나 지루하게 느껴지고 힘들어 지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물이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인생에 생기를 주는 말 그대로 크리스마스 선물과 같은 생명수라고 할 수 있다. 어른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러한 선물의 의미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던가. 여기서 저자는 어린왕자이기도 하고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이기도 하다. 사막에 조종사가 어른이 되어 어린 날의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자신이라고 한다면 어린왕자는 어린시절의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저자는 어린왕자를 통하여 다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어린왕자는 그에게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를 가르쳐 주고 장미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 별로 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불시착한 저자는 어린왕자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경험한다. 재미있는 것은 어린왕자의 죽음에 대한 정의이다. 어린왕자는 이러한 무거운 몸을 가지고서는 자신의 별까지 갈 수 없음을 저자에게 주지시키고 자신은 모습을 바꾸는 것일 뿐 죽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어린왕자는 죽음으로 인도한 것은 바로 맹독성의 뱀이다. 여기서의 뱀은 무엇을 상징할까. 이 것은 바로 희망의 파괴이며 죽음이다. 그러나 저자는 뱀조차도 결국 어린왕자를 죽일 수는 없음을 상기시키며 인생의 어떠한 절망도 희망과 꿈을 다칠 수 없음을 주장한다. 뱀이란 여기서 어린왕자가 약속을 지키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어린왕자를 볼 수 없다는 사실 - 자신의 어린시절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 - 자체에 대하여 여전히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즉 자신이 어린왕자가 되고 싶지만 결국은 현실 속에서 여전히 가진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한계를 이러한 아쉬움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