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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시험
제목 :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
성경 : 약 1:16~18
찬송 : 299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1112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약 1: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약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지난 주일에 ‘죽음에 이르는 시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이 유혹에 이끌려 죄에 빠지고 결국 사망에 이른 과정을 오히려 생명의 잉태와 성장 그리고 출산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은 그야말로 역설적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사망을 낳을 수 있습니까? ‘사망’과 ‘낳는다’는 이미지가 서로 이처럼 충돌할 수가 없습니다. 전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두 이미지들이 부딪힙니다. 야고보는 왜 이런 이미지의 충돌을 의도했을까요?
생각해보면, 이렇게 시험에 들고 죄를 짓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마치 생명을 잉태하고 낳는 과정과 흡사할 만큼 생생하고 ‘속기 쉽다’는 뜻이 됩니다. 죄를 짓고 사망에 이르는 과정도 의를 이루고 생명에 이른 과정처럼 흥미진진하고 생생하고 무언가 생명을 얻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야고보는 뭐로 시작합니까?
속지 말라
약 1: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약 1:16 결코 속임을 당하지 마십시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이여(채영삼 역)
여러분!
무엇에, 어떻게 속임을 당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후에 야고보는 적극적으로 “마귀를 대적하라!”고 권고합니다(약 4:7). 하지만 13~15절의 묘사에서 마귀나 그의 속임수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는 성령에 의해 다루어지지 않은 자신의 육적인 욕심에 이끌리어 시험에 걸려듭니다. 스스로에게 속는 셈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참으로 생명을 얻는 과정과 흡사하다는 점입니다. 즉 유혹을 받아 죄를 짓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참 생명을 잉태하고 그 생명을 출산하는 생명의 과정을 그대로 복사하기는 하지만, 정작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 어둡고 황폐한 죽음의 과정임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속는 것입니다(16절).
생명을 가장한 죽음이 사람을 유혹하여 죄로 이끌고, 결국은 그를 사망의 열린 입 속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하지만 시험에 드는 사람은 처음에는 그것이 죽음을 낳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것은 마치 생명을 낳고 생명을 얻는 과정처럼 여겨집니다. 죽음이 생명을 모방하여,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임을 당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속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야고보는 16절에서 “속임을 당하지 말라”고 하고, 수신자들을 ‘나의 형제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들’(아가페토이)이라고 부릅니다. 매우 친근한 어조라는 사실 외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 안에 있는 자들로, 그래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들의 마음과 삶의 특징이 되어야 함을 상기시는 호칭입니다. 그들은 과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모든 풍성한 것들을 누리게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이로써 야고보는 저들이 하나님과 관계해야 할 자들임을 간접적으로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삶의 특징인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야고보가 소개하는 하나님
약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야고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소개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시험을 당해 닥친 문제 앞에서 그것을 하나님이 해결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더욱 결정적입니다.
“모든 풍성한 주심과 모든 온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바,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바뀌는 것도, 회전으로 인해 드리우는 그림자도 없습니다.”(약 1:17/채영삼 역)
17절에서 야고보가 ‘주심’(은사/도시스)과 ‘선물’(도레마)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런 문제 때문에 시험에 들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1)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십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이 ‘주시는 분’(the Giver)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온갖 좋은 선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주시되 쩨쩨하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주십니다. 더구나 세상처럼 주면서도 그 받은 사람을 망하게 하는 그런 ‘주심’이 아니라, 풍성하게 주시며 또한 그렇게 주시는 일로 결국 그 사람을 복되고 하고, 선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그를 살려내는 주심입니다(참고, ‘후히 주시고 거절하지 않으시는’ 1:5).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지만, 마귀는 겉으로는 주는 것 같은 거짓말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합니다. 바로 이런 차이입니다. 주는 방식이나 의도가 전혀 다릅니다. 마귀는 풍성히 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늘 부족한 곳입니다.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빼앗아야 하는 곳입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으로도 만족은 요원합니다. 늘 부족하고 결국은 허무합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원래 ‘주는 분’(the Giver)이십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놀라운 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십니다. 모든 것을 무상으로 풍성하게 주십니다.
지난 번 다니엘 기도회 때 ‘유정옥 사모님’ 간증이 있었습니다. 서울역 노숙자들에게 먹을 것과 목욕을 할 수 있게 해 주고 복음을 전하며, '소중한 사람 힐링센터'(암 환자 치료 병원)을 만들어 무료로 돌본다는 간증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런 하나님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들이 어찌하여 세상의 유혹에 미혹되며, 그로 인해 멸망 길을 가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풍성히 주실 뿐 아니라, 주시는 것이 모두 온전합니다. 야고보는 이미 이 ‘온전한’이라는 용어를 1:4절에서 시험을 통과하는 자가 인내를 통해 결국 얻게 되는 결과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17절에서도 ‘온전한 선물’은 하늘에서 어떤 완제품이 뚝하고 떨어지는 것이라기보다, 그 사람의 인내와 수고와 무관하지 않은 무엇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성품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다른 선물들과는 다르게, 그의 성품이 온전하게 되는 은혜의 선물은 그저 어느 날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랜 인내를 통해 그 사람 자신 안에 형성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온전함’은 동시에 그렇게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며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의 선물, 그 은총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온전한 선물’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불의하게 악한 욕심과 그런 방법을 따라 얻은 재물은 결국 부끄럽고 수치스런 결과를 그에게 안겨 줍니다. 적은 재물이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한 것은 훨씬 온전한 선물입니다. 위로부터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든지 풍성하게 주시는 ‘온전한 선물’들은 평범하게 보이지만, 선하고 아름다고 지속적입니다. 그것은 혹시 매일 해가 뜨고 노을이 지는 일상처럼 때로 지루하고 단조롭게 보일지 몰라도, 누리면 누릴수록 신비로운 생명이 풍성한 놀라운 은혜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모든 온전한 선물들을 모든 풍성함으로, 모든 선한 의도로,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원래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문제는, 세상을 향해 돌아서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세상의 방식대로, 곧 자기 방식대로 취하고 얻고자 혈기를 따라 나아가는 자들, 그래서 시험에 드는 자들에게는 이런 하나님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은혜와 참된 생명의 세계로부터 점점 멀어져 갑니다. 그들에게는 창세후부터 찬연히 빛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점점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근거로 하여, 자신의 방법대로, 그리고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여도 그 수고한 대가를 지킬 수 없는 저주의 세계에 갇혀 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사랑한 대가입니다.
2)빛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빛들의 아버지’(포스 파테르)는 문자적으로는 광명(光明)들, 곧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신 창조주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그분의 창조의 능력과 더불어(욥 38:28), 그분이 여전히 이 세상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빛들의 아버지로서 모든 탁월함과 최고의 위엄을 가지신 분이며, 모든 좋은 것, 특별히 모든 영적인 영광의 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칼빈). 그러므로 빛들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자신이 더욱 빛이심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그분이 빛이신 만큼 그에게는 어둠, 곧 거룩하지 못한 것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인간을 악으로 시험하는 것과 같은 좋지 못한 일을 하지도 않으십니다(박윤선).
그래서 그분은 세상과 전혀 다릅니다. 세상은 부족합니다. 제한적이어서 늘 경쟁하고 다투고 시기함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얻는 것들도 모두 변합니다. 처음에는 만족을 주는 것 같아도 온전치 않습니다. 변질됩니다. 죄악된 것들은 더 합니다. 시기와 분냄과 다툼과 빼앗음으로 차지하지만 이내 변질되고 누추해지고 썩게 됩니다. 하지만 풍성히 주시는 빛들의 아버지는 창조된 세상의 어떤 피조물과도 같지 않습니다. 그분에게는 해나 달처럼 ‘바뀌는 것도 회전으로 인한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습니다.
여기서 ‘바뀐다’는 것은 스스로 이랬다 저랬다 변화하거나 변질되는 모양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해처럼 떴다가 지지 않습니다. 달처럼 작아졌다가 커지지 않습니다. 비유적이지만, 그분에게는 이처럼 아무런 속임도 변덕도 없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 인간은 얼마나 많이 변덕을 부립니까? 과거에는 조석변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분초변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시험에 들어 죄 가운데서 자신의 욕망을 잘못된 대상을 향해 잘못된 방식으로 채우고자 하면, 그는 스스로 속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혈과 육의 죄악 된 방식으로 얻어야 하고, 그렇게 얻어도 그것은 곧 변질되며 생명을 주지 못해 결국 속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당한 욕구들을 그분에게 알리고 그분이 주시는 대로, 그분이 정한 방식대로 채우고자 하면, 그분은 풍성히 주심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분이 주신 것들은 모두 온전해서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변질되거나 우리를 해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오래도록 한결같은 만족을 주며, 풍성한 생명의 은혜를 더하게 합니다.
사람의 뜻, 하나님의 뜻
약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하나님은 세상과 같지 않으시고, 또한 세상을 향해 불일 듯 일어나는 정욕을 좇아가는 우리들과도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그 속에 정욕을 품어 어떻게 되었습니까? 시험에 들었고, 죄를 지었고, 결국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그 뜻을 품으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이 지으신 바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대조입니까!
사람은 정욕을 품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시험에 들고, 곧 죄를 낳고 사망을 낳는 데에 이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품으셨는데, 그 결과로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만일 이 대조에 정확한 균형을 맞추려면, 하나님께서 뜻을 품으셨을 때, 그 뜻은 ‘의와 생명’을 낳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두 구절이 각기 완벽한 병행을 이룰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뜻을 품으셨을 때, 그 뜻은 ‘의와 생명’을 낳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낳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변칙적인 병행이 생겼을까요?
흥미롭게도 그 단서는 18절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품으셔서 우리를 낳으셨는데, 무엇보다 ‘진리의 말씀’(로고이 알레쎄이아스)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래는 하나님께서 뜻을 품으셔서 ‘의와 생명’을 낳으셨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의 열매 혹은 결과로 나타나야 하는 그 ‘의와 생명’이, 실제로는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심을 입은 ‘우리’를 통해서 맺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 됩니다.
사람이 자신의 잘못된 정욕에 휘둘리는 모습과, 그 반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으로 사람을 그의 주권적인 뜻을 따라 새롭게 낳으시는 곧 사람 자신의 실패와 하나님의 새 생명의 역사와의 대조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야고보서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대목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야고보서를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지나치고 나면, 야고보서는 ‘행위를 종용하는’ 단순한 교훈 집에 그치게 됩니다. 윤리적 완성을 촉구하는 도덕적 이원론에 기초한 교훈들의 모음집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그의 구원론, 곧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에 근거한 놀라운 구원론을 1:18절 이하, 특히 21절에서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야고보 신학의 중심축입니다. 야고보서는 단지 행위만을 강조하는 서신이 아닙니다. 18절에서 야고보는 죄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사람이 의와 생명을 ‘추구해야’ 한다든지, 그 의와 생명의 길을 ‘실천’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고 있지 않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도리어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뜻을 품으셨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분의 창조의지입니다. 그분의 섭리이며, 그분의 주권적 구원의 의지입니다. 그리고 그 ‘품으신 뜻’의 결과로 우리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곧 성도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의지, 그의 뜻의 나타남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죄와 죽음의 길을 피해 의와 생명의 길을 가고, 그 열매를 맺는 모든 가능성과 소망, 실제적 근거는 모두 18절에 선포된 이 사실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전하는 복음
그렇다면 18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으신’ 사건은 보다 구체적으로 어느 때를 말하는 것일까요? 창조를 말할까요? 구속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까요? 아니면 재창조를 말하는 것일까요?
18절을 ‘빛들의 아버지’를 언급한 17절과 함께 읽으면 18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으셨다는 대목은 자연스럽게 첫 번째 창조를 언급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필로 같은 경우에도 하나님이 세상을 낳으셨다는 표현을 두고 이를 창조를 언급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18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으셨는데 다름 아닌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진리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거의 의심의 여지없이 ‘복음’을 의미하는 관용구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무엇보다 첫 번째 창조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말씀’으로 지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점은 사소해 보이지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반면 18절의 ‘우리’는 곧 1:1절에서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로 언급된 새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교회들은 ‘진리의 말씀’인 복음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창조된 인류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셨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지만(창 2:7), 이제 종말에 새롭게 창조하신 그분의 백성은 ‘진리의 말씀’ 곧 복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고보가 소개하는 하나님은 매우 뜻밖에도 ‘주시는 분’(the Giver)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요구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행위를 요구하시는’ 어떤 판사나 검사와 같은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야고보서를 잘못 읽은 것입니다. 야고보는 우선, 무엇보다,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 아낌없이, 거절하지 않고, 꾸짖지 않으시며, 주저 없이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여러분은 만나셨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의 가장 우선되는 기능은 ‘받는 것’입니다. 입이 음식을 받고, 귀가 소리를 들어 마음에 새기듯,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영적인 은혜를 ‘받는’ 영적 수납기관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믿음 좋은 사람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은 어떻습니까? 즉,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람’, ‘받아 누리며 그것으로 만족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는 사람’인가요?
야고보가 소개하는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을 받고, 받은 것을 깨닫고 누리며 살면,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두 마음을 품을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부터 오는 모든 풍성한 선물들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께로부터 받아 누리는 믿음이 적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어렵습니다. 믿음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나의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받는 것입니다. 받아야 삽니다. 받을 때 두 마음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 능력을 얻습니다. 주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온전한 은사와 선물을 받아 누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