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젤 사후에 발행된 우표 ⓒ gettyimages/멀티비츠 |
We are family, I got all my sisters with me~♬
We are family, Get up everybody and sing~♬
1979년의 어느날, 시스터 슬레지(Sister Sledge)의 신나는 디스코 음악이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클럽하우스에 울려 퍼졌다. 노래를 튼 사람은 클럽하우스의 리더 윌리 스타젤(39)이었다. 스타젤은 어깨춤을 추며 이렇게 말했다. "이봐 친구들, 이제부터 이 노래가 우리의 노래(team anthem)야."
로베르토 클레멘테가 홀연히 떠나간 후에도, 피츠버그는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따뜻했던 리더로 꼽히는 스타젤 덕분이었다(스타젤은 클레멘테의 급작스런 죽음이 자신에게 더 큰 사명감을 가져다 줬다고 밝혔다). 언제나 유쾌했던 스타젤에 대해, 상대 팀 선수였던 조 모건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뛰었을 때, 메이저리그에는 600명의 선수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 599명은 스타젤을 사랑했다(나머지 한 명은 스타젤). 그는 단 한 번도 남을 나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남에 대해 나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좌투좌타 1루수였던 스타젤은 실력도 뛰어났다. 초대형 홈런이 그의 장기였다. 1962년에 개장한 다저스타디움에서 지금까지 나온 장외 홈런은 네 개. 그 중 두 개를 스타젤이 때려냈다. 스타젤이 1969년 8월6일에 날린 507피트(155미터) 홈런은 지금도 다저스타디움의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스타젤은 1974년 몬트리올 올림픽스타디움에서 535피트(163미터)짜리를 때려내기도 했다. 명예의 전당 투수 돈 서튼은 "스타젤에게 홈런을 맞으면 자존심까지 날아간다."고 했다.
스타젤은 피츠버그에서만 21년을 뛰면서 475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그리고 22세부터 30세까지의 첫 9시즌을,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 홈런을 때려내기가 가장 어려운 구장이었던 포브스필드에서 뛰었다(좌측이 110미터, 좌중간이 141미터, 센터가 135미터, 우측이 115미터인 포브스필드의 위력은, 필자가 비디오 게임 'MLB The Show'를 하면서 제대로 실감하고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스타젤이 포브스필드에서 뛰지 않았다면 600개를 넘겼을 거라고 확신한다. 1969년 스타젤은 29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포브스필드의 펜스 앞에서 잡힌 것만 22개였다. 실제로 스타젤은 스리리버스스타디움 개장 첫 해였던 1971년 48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홈런왕에 올랐고, 1973년에도 44개를 기록하며 두 번째 타이틀을 차지했다. 피츠버그가 포브스필드를 쓴 62년 동안 우측 지붕을 넘어간 홈런은 18개. 그 중 7개를 스타젤이 때려냈다(현 PNC파크 좌측 99미터, 좌중간 125미터, 센터 122미터, 우중간 114미터, 우측 98미터).
하지만 스타젤이 가진 최고의 능력은 바로 엄마 품처럼 포근한 리더십이었다. 그는 피츠버그의 어린 선수들에게 자신을 '아저씨'(pops)라고 부르도록 했다. 그리고 좋은 활약을 한 선수에게는 마치 부모가 아이에게 칭찬 스티커를 주듯 자신이 손수 만들어 온 노란색 별을 나눠 주었다.
선수들은 '스타젤이 주신' 별을 받으려고 치열하게 경쟁했고, 자랑스럽게 모자에 붙였다. 가끔 스타젤이 깜빡할 때면 해당 선수가 스타젤을 찾아가 왜 주지 않냐며 항의하는 일도 일어났다. '스타젤의 별'(Stargell's Star)이 피츠버그 선수들의 모자를 가득 메우자 피츠버그는 아예 별이 달린 모자를 만들었다(한때 우리 선수들 사이에도 홈런을 칠 때마다 헬멧에 별을 붙이는 유행이 있었다). 피츠버그는 '스타젤 패밀리'로 불렸다. 스타젤은 그들의 족장이었다.
그 시절 피츠버그의 모자 ⓒ gettyimages/멀티비츠 |
1979년 마지막까지 몬트리올과 치열한 경쟁을 했던 피츠버그는, 마지막 6경기에서 4승2패를 기록함으로써 1승4패에 그친 몬트리올을 두 경기 차로 제치고 NL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3전2선승제의 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빅 레드 머신'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었던 신시내티를 3연승으로 제압했다. 1차전 연장 11회초에 터진 스타젤의 결승 스리런홈런이 결정적이었다. 피츠버그는 앞서 세 번이나 신시내티에게 패해 월드시리즈 진출이 좌절된 바 있었다.
월드시리즈 상대는 1971년에 만나 승리했던 볼티모어였다. 피츠버그는 첫 네 판 중 세 판을 내주며 1승3패의 패배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나머지 세 경기를 모두 승리함으로써 통산 5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만들어냈다. 1960년 월드시리즈 유일의 7차전 끝내기 홈런(빌 마제로스키), 1971년 스티브 블래스의 7차전 1실점 완투승과 클레멘테의 결승 홈런으로 우승을 차지했던 피츠버그는, 이로써 5번 모두 7차전 승리를 통해 우승을 결정짓는 진기록을 만들어냈다.
월드시리즈가 끝난 후 스타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겼다. 하나가 되어 즐겼다. 서로 다른 개인들이 하나로 뭉쳤다. 우리는 인종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다. 하지만 클럽하우스에서의 우리는 오직 하나였다."
앞서 리그 챔피언십시리즈의 MVP였던 스타젤은 12타수4안타 3홈런 7타점의 성적으로 월드시리즈 MVP까지 차지했다. 그리고 리그 MVP까지 가져오게 됨으로써, 한 시즌에 챔피언십시리즈-월드시리즈-리그 MVP를 모두 차지한 유일한 선수로 남았다. 1979년은 바로 스타젤이 마지막으로 100경기 이상을 뛴 해이자 피츠버그가 마지막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해다.
스타젤이 은퇴한 1982년 이후 꼴찌로 내려앉았던 피츠버그는, 1990년대 초반 다시 강력한 대포들을 장착하고 나타났다. 배리 본즈, 바비 보니야, 앤디 반슬라이크, 제이 벨 등 정상급 선수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스타젤이 그랬던 것처럼 클럽하우스를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는 선수는 없었다. 1990년대 피츠버그의 간판이었던 본즈는 오히려 스타젤과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선수였다.
1979년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 후 35년이 지난 지금, 피츠버그에는 본즈의 실력과 스타젤의 인성을 가진 선수가 있다. 그가 'We are Family'를 트는 날, 피츠버그에는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