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련하다 : 1. 형태가 약간 나타나 보일 정도로 희미하다. 2. 빛깔이 엷고 희미하다.
봉황수(鳳凰愁) _조지훈
벌레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鳳凰)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泉)에 호곡(呼哭)하리라.
<‘문장’13호(1940.2)>
*두리 기둥 : 둥근 기둥
*풍경(風磬) : 처마끝에 달아 바람에 흔들려 소리가 나게 하는 경쇠.
*추석(우물벽돌) : 돌을 거의 정육면체에 가깝게 깎아 다듬은 벽돌.(우물벽이나 바닥, 대궐이나 절 따위의 복도나 뜰의 바닥에 깔았음.)
*패옥(佩玉) : 왕조 때, 벼슬아치가 금관조복의 좌우에 늘이어 차던 옥.
*품석(品石) : 대궐 안 정전(正殿) 앞뜰에 계급의 품계를 새겨두고 정1품부터 종9품에 이르기까지 두 줄로 세운 돌.
*바이-전혀, 아주
*구천 : 가장 높은 하늘. 九萬里長天의 준말.
승무(僧舞) __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빰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나빌레라 : 나비로구나. ([문장] 11호, 1939.12)
성북동 비둘기 __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鄕愁)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김광섭(金珖燮, 1905 ~ 1977) 시인. 함북 경성 출생. 초기에는 꿈과 관념, 허무의 세계를 노래하였고, 이후에는 인생 · 자연 · 문명에 관한 작품들을 발표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동경”(1938), “해바라기”(1957), “성북동 비둘기”(1969), “김광섭 시선집”(1974)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