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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0) 행복
행복하려면 행운과 불운에도 긍정적 태도 필요
프랑스 철학자 알랭(Alain/Emile-Auguste Chartier, 1868~ 1951)은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알랭은 그의 「행복론」(1928)에서 잎이 무성한 100년 묵은 느릅나무에 송충이가 번식할 것을 걱정한 청년이 결국 비관하여 마을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통해 평소 불행해지기는 쉽지만, 행복해지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소소한 일상에 숨겨진 행복을 찾는 일은 사실 쉬운 것이 아니다. 낙관적 태도보다는 비관적 태도에 더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행복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εὐδαιμονία)’는 ‘에우(εὖ/좋은)’와 ‘다이몬(δαίμ ων/신, 신령)’이 결합한 단어로서 어휘적으로 ‘좋은 신령이 깃든 상태’, 다시 말해 ‘좋은 삶’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행위는 어떤 ‘좋음(ἀγαθό ν, 아가톤/선)’을 원하며, 다른 것이 아닌 그 자체 때문에 원하는 것을 ‘최고선(τὸ ἄριστον, 토 아리스톤)’이라 하고 이를 ‘행복’이라 부른다고 했다. 이때의 최고선은 플라톤이 주장하는 모든 것의 최종 목적인 형이상학적 의미의 최고선(τὸ ἀγαθὸ ν, 토 아가톤)이기보다는 삶의 목적과 자기완성과 관련된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최고선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인간의 고유한 본성을 활짝 꽃피우는 것, 즉 인간의 본성적 기능을 충만히 발휘하는 데 있다면서 이를 ‘관조적 삶’이라 정의한다. 최고선으로서 행복은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기에 필연적으로 자족적이어야 하며, 탁월성(덕)·완전성·지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는 사유활동인 관조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육체적으로 한계를 지니지만 자기 고유의 본성인 정신 활동을 통해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육체적 결함으로 인해 순간 불행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정신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삶에서 이상적인 행복을 누리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우선 자기 본성과 관련하여 탁월함의 상태, 소위 덕스러움을 최고 발휘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과연 이런 완덕을 이룰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행복을 뜻하는 독일어 ‘글뤽크(Glück)’는 흥미롭게도 ‘행운’의 뜻도 가지고 있는데, 행운은 어원적으로 좋거나 나쁜 어떤 일이 우연히 ‘이루어짐’을 뜻하는 ‘게뤽케(Gelücke)’에 뿌리를 두고 있다. 행운을 뜻하는 라틴어 ‘포르투나(fortuna)’ 역시 행운이나 불운을 모두 가져오는 로마 신화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원적으로 이런 중의적 의미를 지닌 행운이 행복과 같은 단어로 사용되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이와 관련하여 ‘삶의 기예 철학’으로 유명한 현대 독일 철학자 슈미트(Wilhelm Schmid, 1953~)는 우리가 진정 행복해지려면 이렇게 운과 관련해 부정적인 경우에서조차 긍정적 태도를 지닐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행복을 위해 지나치게 ‘행복한 우연’(행운)에 기대거나 혹은 반대로 ‘불행한 우연’(불운)을 탓하기보다는 어느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운명을 거슬러 싸우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치유를 위한 행복의 본질이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1) 희망
절망 속에서도 희망 잃지 않으려면 ‘역설적 신앙’ 필요
“여기에 들어오는 자들이여,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1265~1321)의 「신곡」 지옥 편에서 지옥문에 적혀 있는 문구다. 희망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희망이 없는 삶은 지옥과 같다. 그런 점에서 인간에게 희망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 신들의 기원(계보)을 묘사한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있는 ‘판도라의 항아리(상자)’는 ‘희망’에 관한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제우스가 자신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한 프로메테우스에게 벌을 내린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불로 강력해진 인간에게 재앙을 내리기 위해 그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판도라라는 여인을 선물로 보낸다. 호기심 많은 판도라가 열지 말아야 할 항아리를 열어 온갖 재앙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놀란 판도라가 항아리를 닫자 미처 나오지 못한 희망만이 항아리에 남게 된다. 이 이야기가 전하는 말은 무엇일까? 마치 ‘희망 고문’을 하듯이 본래 희망은 재앙의 하나라는 것일까? 아니면 재앙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일까?
프랑스 실존철학자 마르셀(1889~ 1973)은 희망(espérance)은 욕망(désir)이나 염원(souhait)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 주장한다. 욕망과 염원은 내 존재 밖에 근거하고 있는 기대 가능한 소유에 속하지만, 희망은 소유 불가능한 존재에 속한다. 다시 말해 희망은 한계 상황 속에서 실존적으로 느끼는 존재의 감정이자 나를 존재하게 하는 힘인 존재에의 응답이다.
인간은 비극적이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이 있기에 이를 견디어 낼 수 있다. 마르셀은 역설적이지만 시련이 없는 곳엔 희망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영혼은 희망에 의해서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시련이 있기에 희망이 싹트며, 그 희망은 비대상적이고 비소유적이며, 오로지 자기 존재 자체에서 근원하는 ‘존재에의 용기’이자 ‘존재에의 기쁨’이다. 그렇기에 희망하는 것만으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희망은 확실한 근거가 있는 확신이나 신념과 다르게 당위성을 넘어서 있는 비약이자 도약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한 바다에서 표류하는 인간에게 희망은 언제 올지 모를 구원의 손길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존재를 지탱하고 견디는 인내 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시련 속에서 자기 존재 전체를 감당하는 인내가 쉬울 수는 없기에 우리는 절대적 존재(하느님)에 기대곤 한다. 그래서 칸트(1724~1804)는 “희망은 오직 도덕에 종교가 첨가되는 경우에만 비로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희망의 부재는 절망을 낳는다. 키르케고르(1813~1855)에 의하면 절망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엇갈림’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절망의 순간에도 인간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함으로써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이사악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보듯이 부조리한 ‘역설적 신앙’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희망은 절망의 대립 개념이지만 절망에 대한 반항이나 도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반항이나 도피는 또 다른 절망의 모습일 뿐이며, 오히려 희망은 절망 속에서도 자기 됨을 포기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에 근거한다. 믿음은 희망을 싹트게 하며, 희망은 믿음을 견고하게 하며 자라게 한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2) 죄성
죄의 실제적 가능성은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에 근거
그리스도교 사상에 따르면 인간은 ‘죄스러운 존재’다. 교부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악의 형이상학적 실체를 부정하면서도 악의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죄의 실체를 인정하고, 오히려 이를 인간의 종교적 실존 자각의 중요한 계기로 삼는다. 죄는 인간의 삶에 깊숙이 침투하여 악한 현상을 낳고, 인간을 고통으로 내몰 뿐 아니라 인간 영혼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의 흔적을 남기곤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론」에서 죄의 현상을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해 설명한다.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으로부터 죄의 근원적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신의 완전성에 따라 죄의 형이상학적 실체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교 사상의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죄의 현상을 완전히 구명하고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 실존철학자 키르케고르(1813~1855)는 “형이상학은 죄를 붙잡을 수 없고, 심리학은 죄를 극복할 수 없으며, 윤리학은 죄를 무시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죄는 어떤 가능 능력을 지닌 상태로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죄스러운 존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자기 안에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보다는 인간의 행위 실행과 함께 죄성이 현실로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죄’와 ‘죄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죄는 질적 범주 개념인 반면 죄성은 양적 범주 개념이다. 아담이 지은 ‘최초의 죄’에서 보듯이 죄는 근본적으로 실존적인 질적 비약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 들어오는 ‘허물’이자 ‘책임’이며, 이런 실존적인 질적 비약이 정신적으로 무지의 상태를 벗어나는 도덕적 인식의 깨어남에서 발생한다면, 죄성은 인류의 보편적인 ‘죄 있음’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세대를 거쳐 전해지면서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죄의 가능성, 즉 죄의 ‘실제적 가능성’은 오로지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에 근거한다. 인간이 자유로운 정신을 갖고 있지 않다면, 애당초 죄의 가능성 아래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죄 또한 세상에 들어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원죄’ 교리는 최초로 세상에 들어온 죄의 기원과 그로 인한 인류의 죄성에 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죄와 죄성 사이에 개인의 죄가 인류의 죄성으로, 인류의 죄성이 개인의 죄로 침투하는 순환적 관계가 놓여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무한한 ‘자유의 가능성’ 앞에 선 존재다. 매 순간 자기 자신과의 관계 정립을 통해 진정한 ‘자기 존재’가 되고자 하지만, ‘할 수 있음’이라는 무한한 자유의 가능성과 그 책무 앞에서 역설적으로 자신을 불안케 하는 가능성에 내몰려 있다. 인간이 죄책을 느끼는 것은 일차적으로 바로 이런 불안에 근거한다. 자유의 가능성 앞에서 최선의 행위를 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기의 유한성과 한계를 경험하고 자신의 행위를 결코 절대적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1883~ 1969)는 이런 한계상황을 근본상황으로서의 ‘죄책’으로 규정한다. 우리는 모두 죄책의 근본상황이자 한계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는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결과를 빚으며, 이에 대한 책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3) 의미
삶의 의미는 목표지향적 삶을 살아갈 때 발현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야스퍼스(1883~1969)의 실존철학에 영향을 받은 ‘로고테라피’로 유명한 프랑클(1905~1997)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때 ‘실존적 공허’에 빠지기 쉽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엇일까? 의미는 어휘적으로 운동의 방향성을 뜻하는 말에 그 어원을 둔다. 코레트(1919 ~2006)에 의하면 의미는 이론적-의미론적으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뜻’과 실천적으로 목표 혹은 합목적성의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방향’의 두 가지 근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행위는 그것이 움직이는 일정한 방향성에서 의미를 얻게 된다. 삶의 의미는 무엇보다 우리가 목적을 갖고 방향을 잃지 않는 목표지향적 삶을 살아갈 때 발현된다. 따라서 삶의 목적 설정과 방향 잡기는 의미 충만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하다.
의미 발견은 이미 세계가 의미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전제한다. 후설(1859~1938)에 따르면 의미 발견은 지향적 의식 주체의 의미 대상(노에마, Noema)과 의미 작용(노에시스, Noesis)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 부여의 행위다. 그런데 하이데거(1889 ~1976)는 이런 지향적 의식 주체의 의미 부여 행위는 근본적으로 ‘존재’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의미 부여는 인간 현존재가 세계 안에 있는 존재자(사물)와 관계하고 배려하는 가운데 자기 존재 가능성을 향한 ‘유의미성’에로의 기획투사를 말한다. 결국 의미는 인간 현존재가 그때마다 바로 자기 존재 가능성을 실현하는 데서 발현된다. 이때 사물들은 오로지 현존재의 존재 가능과 관련하여 유의미성을 가지면서 일정한 사용 사태 속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세계가 이미 의미로 가득 채워져 있음은 세계 자체가 존재 가능과 관련하여 이런 기획투사를 통해 이루어진 ‘앞서’ 이해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이해된 유의미한 세계 안에서 자기 존재 가능성과 관련하여 유의미한 행위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계에서 발견하는 의미는 결코 고립되어 개별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의미 전체’의 의미 연관 속에서 파악된다. 여기서 의미는 의미 전체의 ‘의미 지평’뿐 아니라 절대적 존재 혹은 하느님과 같은 의미의 ‘최종 근거’로 나아간다. 하나의 개별적 사태는 의미 전체와 관련하여 그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이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한계상황 속에 있다는 사실과 연결되는데,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죽음·우연 등은 그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채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의미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삶과 존재는 그 자체가 신비로운 만큼 그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야스퍼스는 “모든 상황은 의미를 넘어선 초의미 안에 의미를 지니지만, 그 의미는 자주 은폐되어 잘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사실은 인간은 절대적인 한계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는 ‘의미에 헌신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초월자와 관계하는 실존적 결단을 통해 자기의 존재 의미를 그때마다 드러낼 뿐이다.
철학상담은 내담자의 자기 실존과 존재 의미를 밝히는 삶의 테스트 이해와 해석에 특히 관심을 가진다. 내담자의 고유한 삶의 경험이 의미 있는 텍스트로 전환될 때,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가 발견되고 부여될 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4) 자유
자유, 인간의 자기 이해와 자기실현을 위한 근본 개념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한다. 이는 한편으로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부자유한 존재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철학적으로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두 가지 신념, 즉 세계가 필연적인 인과율의 법칙 아래 놓여 있다는 자연과학적 신념과 세계가 신의 절대적 예지 아래 놓여있다는 신학적 신념은 오랫동안 자유에 반하여 ‘인간이 과연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형이상학적 물음의 배경이 되어 왔다.
그러나 자유는 인간의 자기 이해와 자기실현을 위한 근본 개념으로, 자유 없이는 인간 삶 또한 생각할 수 없다. 정신적 존재인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행위를 통해 세계에 자기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코레트(1919~2006)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자유 영역이 열려있으며, 이를 ‘근본 자유’라 부른다.
근본 자유는 20세기 초반 철학적 인간 학자들의 통찰로서 인간의 본질적 특성인 ‘세계 개방성’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에 의하면 인간은 동물과 달리 환경과 충동에 얽매여 있지 않은 존재로서 자연의 직접성에 매여있지 않고, 오히려 이를 매개로 고유한 세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 자유에 근거하여 세계를 열며 세계에 개방되어 있다.
자유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로는 ‘엘레우테리아’ ‘파르레시아(παρρησία)’ ‘아우타르케이아’가 있다. ‘엘레우테리아’는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실천할 수 있는 자유로서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규정과 기대에 강요당하지 않는다는 ‘행위의 자유’를 뜻한다. ‘파르레시아’는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 앞에서 솔직하게 드러내놓고 말할 수 있는 ‘담론의 자유’를, ‘아우타르케이아’는 인간의 고귀함과 품위를 나타내는 말로 자치와 자율을 뜻하는 ‘내면의 자유’를 말한다.
이런 개념은 신체적 자유, 법적∙정치적 자유, 사회적 자유, 심리적 자유, 윤리적 자유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특히 고대 스토아 및 에피쿠로스학파 철학자들이 ‘정신과 마음의 평정’을 뜻하는 ‘아파테이아’와 ‘아타락시아’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추구한 만큼 자유는 이론 차원을 넘어 실천적 삶을 위해, 무엇보다 철학상담의 관점에서 정신적 건강과 치유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철학상담은 정신의 건강과 마음의 안정, 고통의 경감을 위해 사람들이 부자유한 조건 속에서도 자유를 발견할 수 있도록 초대한다. 자유는 인간 실존의 기본 원칙이자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라는 점에서 내담자가 자기를 괴롭히는 내적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결정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외부 압력과 지배에서 벗어나 자기를 지배하고 자기 결정을 이끄는 ‘내적 자유’가 요구된다. 이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근원적으로 열려있는 세계 안에서 자기 결단을 통해 실존적 자유를 실현할 때 가능하다.
실존적 자유는 절대적인 진리 혹은 의미 전체성을 향해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야스퍼스(1883~1969)는 실존적 자유를 인간이 초월자와 만나는 ‘근원을 사유하는 의지 활동’으로 규정하며, 비에리(1944~2023)는 내적 강박과 내적 갈등 그리고 자기기만을 해소하는 ‘자기 인식’이라 한다. 자기 인식이야말로 자기를 구속하는 내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기 치유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의 원천이자 행복의 원천이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5) 자기 경계
경계는 세계 자체임과 동시에 나의 고유한 세계
인간은 경계를 짓고 경계 안에 사는 존재다. 경계는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계 유다인 사회심리학자인 레빈(1890~1947)은 사회학적인 차원에서 다른 문화권에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경계’라는 개념으로 해석한 바 있다. 여기서 경계는 자기를 보호하는 울타리이자 자기 정체성을 찾아 삶의 뿌리를 내리는 터전이기도 하다.
철학적인 차원에서 경계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어떤 조건 속에 있음을 가리키며, 이는 인간이 양극 ‘사이’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혼과 육체, 무한과 유한, 영원과 시간, 위대함과 미소함 사이에 놓여있으면서 진정한 자기로 있기 위해 둘 사이를 끊임없이 조정하는 가운데 자기 경계를 설정하는 존재다. 그러나 이 경계가 균형을 잃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절망한다.
인간의 경계 짓기는 세계 속에서 실현된다.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그 태어난 세계로 던져지며, 또 그 세계에서 자기 실존을 위한 투신이 이루어진다. 이 세계가 바로 앞서 이해된 경계 지어진 세계다. 이미 이해된 세계는 과거와 현재의 해석 사이에서 경계를 이루지만, 곧 그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이해로 우리를 초대한다. 새로운 이해를 통해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경계를 넘어서는 체험을 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여러 제약으로 경계 지어진 근본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매 순간 결단과 도약을 통해 경계를 넘어서는 노력을 시도한다. 경계를 넘어서는 체험은 절대적 존재 혹은 초월자를 향한 정신의 초월성을 발휘함으로써, 또 자기 존재 가능성을 향해 세계에 자기를 ‘기획 투사’함으로써, 끊임없는 자기규정 안에서 자기를 초월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철학상담적인 차원에서 경계는 세계 자체임과 동시에 나의 고유한 세계를 의미한다. 정신에 의해 매개된 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철학상담에서 내담자 치유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나의 경계는 정신에 상응하여 고유한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고 구조화되어 있다. 인간은 정신적 존재로서 감정을 표현하고 사고하며 행위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세계에 기반하여 자기 고유한 세계를 형성하며, 이는 나를 경계 짓는 조건이 된다.
이런 경계는 반복적이고 고정된 일정한 나의 ‘행동양식’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일정한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또 개인의 고유한 관습·습관·교육·체험 등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때 행동양식은 일정한 ‘개념’과 ‘고정관념’을 통해 이루어진 ‘상황 해석’이자 ‘판단 작용’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개인 및 집단적 경험에 기반한 문화(역사)와 이념(철학)의 영향 아래 놓여있으면서 나의 행위 전반에 걸쳐 강한 힘을 발휘하며 삶을 통제하기에 쉽게 자기 경계를 허물지 못한다는 뜻이다.
오르테가(1883~1955)는 「대중의 반역」을 통해 오늘날 자기 성찰이 부재하는 비인격적이며 무책임한 거대한 대중 집단의 고정관념에 우리가 너무도 쉽게 노출되어 있음을 경고한다. 이러한 대중 집단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의무와 책임을 도외시하고 자기 의견만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존재도 무시한다. 대중 집단이 휘두르는 폭력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길은 대중에 편승하여 안정감을 추구하는 자기 경계를 비판적으로 탐색하고 허물 때만 가능하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6) 절망
절망에서 벗어나려면 어긋난 자기 관계 회복해야
삶이란 수많은 역경과 시련의 연속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의미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릴 때 사람들은 절망한다. 절망스러운 현실을 잊기 위해 알코올과 약물 과다 복용·자살 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해마다 증가한다.
경제학자 디턴(Angus Deaton, 1945~)은 이러한 죽음을 ‘절망사’(deaths of despair)라고 부른다.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절망사는 빈부격차의 확대 속에 삶에 지친 빈곤층이 누적된 심적 고통에 짓눌리다 자살·마약·알코올 중독 등으로 생을 마감하는 일종의 ‘사회적 죽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절망사를 막기 위해 경제적·사회적 안전망 확보와 대책 마련이 시급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외부적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다. 사람들은 절망을 외부적인 장애 요인들과 연결해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절망은 철학적으로 더 근본적인 인간의 실존적 현상이며, 외부적 장애 요소가 제거된다고 완전히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망을 인간 실존의 근본 현상으로 고찰한 철학자가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다. 그는 현대를 ‘절망의 시대’로 진단하고,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을 본래적 자기를 획득하는 ‘자기 됨’의 주요 계기로 삼는다. 절망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로서의 종합, 즉 영혼과 육체, 유한과 무한,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자유와 필연의 관계를 자기 삶에 관계시키는 가운데 오는 불균형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스스로 소진하는 ‘자기 잠식’이자 절대적 존재인 신과의 관계 단절에서 오는 ‘죄스러운 상황’을 의미한다.
이런 ‘관계의 어긋남’에서 비롯된 절망을 키르케고르는 ‘자기 관계의 병’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절망이 죽을 만큼 고통스럽고 위험하며,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지만 또한 그로 인해 누구도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맞지만, 육체의 질병과 다르게 영혼의 질병으로서 죽는 것이면서도 죽지 못하는, 즉 죽음을 소망할 수조차 없는 상태에 이르는 ‘실존적 병’인 것이다. 그럼에도 키르케고르는 ‘절망이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영원성을 잠식시키는 일은 없다’고 주장한다.
절망은 특수한 일부 사람만이 겪는 병이 아니라 실존하는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현상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절망 가운데에 있지만, 이 절망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으며, 설사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회피하거나 반항한다. 그러나 절망이 자기 관계의 병인 한, 인간은 자기 관계의 실패를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절망과 대면할 필요가 있다.
어긋난 자기 관계의 회복은 자기 위선 없이 절대자(신) 앞에 홀로 서는 ‘실존적 양심’에 있다. 실존적 양심은 자기기만이나 가식 없이 자기를 투명하게 보는 ‘진정성’과 ‘자기 책임’에 기반한다. 진정한 자기를 좇아 실존하는 자에게 삶이란 잔잔한 대하(大河)가 아니라 사나운 돌풍이며, 그 진실은 고통이다. 이에 철학상담은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이 고통으로 절망할 때,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 자기 삶을 결단하고 고유한 자기 실존을 짊어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7) 죽음
인간은 매순간 죽음과 함께 끝을 향해 가는 존재
“오 주님, 저마다 고유한 죽음을 주소서.” 릴케(1875~1926)의 이 고백처럼 인간 삶에서 죽음만큼 고유한 사건은 없을 것이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매우 고유한 종말의 사건이다. 죽음은 인류가 생긴 이래로 종교의 문제이자 철학의 문제였다. 죽음은 영원한 단절이자 종말이며, 모든 것을 허무로 돌리는 짙은 어둠이자 무거운 침묵이다. 인간은 이 불가피한 죽음 앞에서 근본적으로 실존적 불안을 느끼며, 또한 죽음을 이기는 희망을 꿈꾼다.
죽음에 대한 이해는 자연과학에서 주장하는 ‘생명의 단절로서의 죽음’부터 종교에서 주장하는 ‘영원불멸로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유물론자인 포이에르바하(1804~1872)는 이생에서 건강하게 살다가 수명을 다하고 노년에 삶을 마감하는 ‘자연적 죽음’의 의미를 부각하면서 유일무이한 현세 삶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의미 있는 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살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오로지 현세적 삶과의 관련성에서만 죽음의 유의미성을 끌어내는 자연적 죽음으로는 그것이 자연과학적 세계관과 현대성을 표현하는 대표적 표상임에도 불구하고, 나이와 상관없이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노년기의 자연적 죽음이 이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다가오는 낯선 죽음과의 화해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실존철학자 야스퍼스(1883~1969)는 인간의 근본상황이자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에는 인간 실존을 이해하고 규명하는, 생물학적 종말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죽음은 인간이 절대로 넘어설 수도, 범접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경험 및 이해 불가한 것이다.
죽음은 표상할 수도, 사유할 수도 없는 그 무엇으로서 ‘절대적 무지’이자 ‘절대적 침묵’이다. 죽음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순간은 생물학적인 죽음의 순간이 아니라 실존의 가능한 심연을 일깨우는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과 실존적으로 맞닥뜨리는 순간이다. 이러한 태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스토아적 태연함도 아니며, 피안(彼岸)의 삶의 환상으로 죽음의 허무를 이겨내는 세계 부정도 아니다. 오히려 자기 죽음을 의식하며 자기 존재가 무화되는 고통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지고 견디는 태도에서 참된 죽음의 의미가 드러난다.
하이데거(1889~1976)는 인간 현존재를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한다. 죽음은 모든 것이 거기서 무화되는 ‘존재 부재’를 의미하며, 인간은 죽음을 향해 선구적으로 다가갈 때 비로소 현존재 전체성 안에서 자기 존재 가능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투신을 하게 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존재 가능을 염려하며, 그 염려의 배경에는 죽음이 놓여있다. 인간이 최종적이며 종말적으로 떠맡는 것은 바로 죽음의 가능성이다. 이 죽음의 가능성 앞에 설 때 인간은 비로소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매 순간 죽음과 함께 끝에 와있는 것이 아니라 끝을 향해 가는 존재로서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에 내몰려 있다. 죽음은 결코 삶의 종말이거나 삶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한계를 통해 삶을 전체적이며 총체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즉 삶을 보다 의미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삶의 기본 요소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8) 욕망
욕망 부추기는 과도한 탐욕 경계해야 건강한 삶
끊임없이 무엇인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스스로를 닦달하는 현대사회를 욕망의 과잉시대라고 불러도 전혀 과하지 않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1959~ )은 현대사회를 ‘긍정성의 과잉’이 빚은 ‘피로사회’로 규정하는데, 과연 우리를 피로하게 만드는 것이 긍정성의 과잉 때문일까, 아니면 욕망의 과잉 때문일까?
인간은 자연 안에서 육체적인 본능적 욕구를 넘어 정신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유일한 주체다. 그러나 욕망은 결코 충족되는 법이 없기에 욕망만을 추구하는 삶은 결국 절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라깡(1901~1981)은 이런 욕망을 무의식으로부터 발호하는 모호한 대상을 끊임없이 쫓는 ‘주체의 결핍이자 환유(métonymie)’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 욕망은 무의식 속의 자아(상상계의 ‘이상적 자아’, moi idéal)가 주체적 자아(상징계의 ‘자아 이상’, idéal du moi)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실체 없는 존재의 실재를 붙잡으려는 데서 오는 주체의 근원적인 결핍 현상을 의미한다.
욕망은 오래전부터 몸(육체)과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발원하는 본능의 하나로 이해되었으며, 육체적 결핍에서 오는 몸의 욕망은 정신적 결핍에서 오는 정신의 욕망보다 철학적으로 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심지어 욕망 자체가 오로지 감각적인 것에 예속해 있는 육체의 탓으로만 돌려지기도 했다.
이는 전통적으로 변화하는 육체보다 불변적인 정신을, 그리고 쉽게 외부로부터 감염되는 감정보다 순수한 이성을 중시해 온 서구 주류 사상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생물학적 필요와 요구로부터 자연스럽게 생성되고, 그것이 충족되면 소멸하는 일반적 욕구와 달리 근본적으로 한계가 없는 정신의 무제약적 행위에 근거한다. 즉 신체적 욕구는 생리적 한계를 갖지만, 정신적 욕망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
인간이 ‘욕망의 주체’인 것은 신체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니라 바로 인간이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욕망이 신체와 전혀 무관하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에게 몸은 정신을 매개하는 수단인 만큼 욕망 역시 본질적으로 신체의 기능 없이는 불가능하다.
욕망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 결핍을 메꾸려는 데서 비롯되지만, 욕망을 부추기는 요소는 다양하다. 현대사회는 구조적으로 끊임없는 탐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인간을 다양한 욕망으로 이끈다. 탐욕이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는 인간 욕망의 한 모습이다. 미디어의 발전이 ‘인간의 확장’을 가져왔다고 주장한 매클루언(1911~1980)의 말처럼 현대사회는 미디어·인터넷·인공지능의 눈부신 발전으로 물리적인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어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현실화시킴으로써 인간의 확장이라는 새로운 욕망을 낳는다.
이와는 달리 지젝(1949~ )은 현대사회를 일상화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로 규정하고 이를 경고하는데, 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란 참여하는 자들의 무지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의 실재를 은폐하는 ‘환상적 구성물’의 일종이다. 이런 욕망의 이데올로기는 특히 우리 사회에서 집단의 이익과 권력을 숨기는 충실한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현대 영성가인 그륀(1945~ ) 신부의 말처럼 탐욕은 결국 병적인 소유욕으로 발전하는 만큼 우리는 건강한 삶을 위해 무엇보다 욕망을 부추기는 과도한 탐욕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9) 노동
일 중독으로 지친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 ‘자기 돌봄’
구약 성경은 노동과 관련하여 인간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다”(창세 3,19)라고 기술한다. 성경 구절의 맥락상 노동은 인간이 하느님의 금기사항을 어긴 데서 오는 죄의 결과로 묘사되지만, 여기에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노동하는 존재’라는 더 근원적 통찰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수고해야 하지만, 인간에게 노동은 단순한 생명활동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철학자 아렌트(1906~1975)는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과 관련해 흥미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고대 노예제도를 통해 인간은 자연환경의 노동(labor)으로부터 해방되어 제작환경의 작업(work)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노동이 자연환경 속에서 적응하고자 하는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상응하는 활동이라면, 작업은 자연환경이 아닌 제작환경을 통해 인공 세계의 사물 대상과 관계하는 인간의 고유한 활동을 의미한다. 즉 노동이 제작과는 무관한 생명활동의 영역이라면, 작업은 생산품을 만드는 제작활동의 영역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의 인간은 더는 ‘노동하는 인간’(homo labor)이 아닌, ‘제작하는 인간’(homo faber)과 더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노동과 작업의 분리는 근대의 자본 집약적 사회구조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된다. 인간이 작업을 통해 물건을 대량 생산하고, 교환을 통해 파생되는 잉여가치를 향유하게 됨으로써 현대의 노동은 작업의 결과인 ‘잉여가치’와 ‘잉여향유’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지젝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잉여가치를 맹목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잉여향유’의 욕망을 부추긴다고 비판한다. 문제는 이런 욕망이 인간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소진케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현대인의 ‘번아웃’(burnout) 현상은 끝을 모르는 인간 욕망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노동하는 인간은 과도한 작업과 과잉 활동을 통해 성과의 극대화를 꾀하는 ‘성과 중심’의 삶을 살아간다. 이들의 삶은 전혀 ‘여유로움’이 없는 ‘조급함’으로 가득하다. 고대 희랍어나 라틴어의 어휘에서 보듯이 ‘일’(ἀσχολία/negotium)과 ‘여가’(σχολή/otium)는 서로 대응 관계에 있으며, 피로는 과도한 일로 인해 충분한 여가를 갖지 못한 데서 오는 심신이 지친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노동을 ‘성과 중심’에서 ‘열매 중심’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열매 중심의 노동은 성과를 지향하기보다는 노동 그 자체로부터 의미를 찾고, 또 노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결실을 지향한다. 이는 전혀 여유로움이 없이 과도한 자기 긍정과 성과만을 지향하는 ‘성과 주체’가 아니라 자기 재능과 능력에 부합한 ‘열매 주체’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독일의 철학자 플라스푈러는 현대인의 ‘우울한 노동’을 경고하면서 현대인은 일 중독에 빠져 있으며, 이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강박적 사랑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일 중독자는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기보다 오히려 일을 위해 자기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다. 일 중독으로 인해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없는 현대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자기 돌봄’이 아닐까 한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30) 노인 혐오
차이를 경계로 받아들이면 모든 영역에 혐오 만연
세계는 바야흐로 100세 이상의 인구가 급증하는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특히 한국은 출산율 감소와 평균 수명 증가로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광범위하게 고령화가 진행되는 국가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가 정상성과 유용성 측면에서 노인을 경제 능력이 없는 불필요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데 있다. 소외와 고독, 경제적 결핍과 타인에 대한 의존이 노후의 숙명일 수밖에 없다는 부당한 사회적 인식이 그들에 대한 낙인과 차별, 그리고 배제를 정당화하는 원리로 작용한다. “노년에 대한 인식은 죽음 자체보다 더 큰 혐오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라는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의 말은 우리가 심리적으로 노년의 삶을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 잘 대변해주고 있다.
미국 여성 철학자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은 혐오의 개념을 ‘원초적 혐오’와 ‘투사적 혐오’로 구분한다. 원초적 혐오는 자기 보호와 생존 수단으로부터 발현된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몸에서 배출되는 분비물이나 부패한 시체·구토·오물·벌레·피 등과 같은 동물성이 자신을 오염시킬 가능성에 두려움을 느낄 때 형성되는 감정이다.
반면 투사적 혐오는 사회 구성원들의 심리가 반영된 감정으로 역겨운 속성을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전가함으로써 그들을 배척하도록 만드는 감정이다. 혐오는 생명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경계선에 있는 감정으로 그 이면에는 항상 죽음의 불안과 공포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노인은 부패한 동물성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보는 이의 불안을 자극하고, 그 불안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배제의 욕망이 생기게 한다.
그 결과 노인을 혐오하는 사회는 젊고 생산력 있는 몸을 이상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이를 동경하게 하고 유지하게 함으로써 노인 집단과 청년 집단을 암묵적으로 분리시키는 인위적이고 상상적인 경계 짓기를 통해 우리 안에 공포를 잠재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졌던 노화의 현상을 삶의 영역에서 몰아내고, 적극적으로 관리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러나 차이를 경계로 바꾸는 경직되고 고정된 모든 영역에는 혐오가 만연하게 된다. 혐오에 맞서려면 노인 스스로가 배타적인 경계 짓기를 극복함으로써 자기혐오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노년에 대한 사회의 시각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먼저 혐오를 유발하는 ‘연령주의(Ageism)’에 맞서 자신을 지킬 필요가 있다. 의존적이고 취약한 노인들은 무용하고 비인간적 존재라는 경직되고 고정된 세계관으로부터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인간이며,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위상과 가치를 지닌 고유한 존재라는 세계관으로의 관점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그럴 때만이 노인 스스로 내면화한 고정관념에서 빠져나와 사회의 위계적 질서를 깨뜨리고 차별과 배제에 저항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가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투사적 혐오의 패러다임을 깨고 건강하게 나이 들어갈 수 있다. 누구에게나 노년의 시간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시간이자 살아내야 할 시간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마지막 시간이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31) 수치심
실존적 수치심, 진정한 자기 존재가 되는 시금석
수치심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자기 의식적 감정’이다.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년경)의 수오지심(羞惡之心)처럼 자신이 부족한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건강하고 건설적인 자기반성과 수양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반면, ‘사람들의 나쁜 평판에 대한 두려움’이 과도하게 발생할 때 심각한 병리적 증상을 수반함으로써 극도의 대인기피증이나 우울증으로 정신건강을 해치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
수치심의 기원과 관련해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7~348/7년경)은 「향연」에서 아리스토 파네스를 통해 ‘불완전함에서 오는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표현한다. 둘이 결합하여 완전한 구형의 모습을 갖춘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에 대항하다 강제로 둘로 나눠진 이후 완전할 때의 자신을 떠올리며 느끼는 원초적 감정이 바로 수치심이다. 인간은 스스로 완전해야 한다는 원초적 갈망을 내재하고 있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할 때마다 이 근원적 수치심을 드러내곤 한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수치심을 성적인 것과 관련시킨다. 에덴 동산에서 알몸이었음에도 부끄러워하지 않던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은 뒤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나 이때 수치심은 은밀한 신체 부위의 노출에서 오는 단순한 부끄러운 감정의 의미를 넘어 근본적으로 자기와 세계의 경계를 인식하고, 무엇보다 금령과 관련하여 신, 즉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시작이자 거기서 발현되는 원초적 감정의 의미를 함축한다.
타자의 시선은 나에 대한 타자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현전이자 시선 끝에 와 닿는 모두를 대상화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부단히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수치심을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대자적 존재(être-pour-soi)’인 내가 고정되고 종속된 ‘즉자적 존재(être-en-soi)’로 인식될 때, 즉 타인의 시선에 의해 자유로운 주체가 되지 못하고 타인에 의해 규정되고 객체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근원적인 감정으로 본다.
이와 다르게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실존론적으로 더 깊은 차원에서 긍정적인 의미의 ‘실존적 수치심’을 말한다. 실존적 수치심은 스스로 자기를 갉아먹는 부정적 의미의 ‘심리적 수치심’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심리적 수치심이 우리가 주로 사회적 규범이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느끼는 부정적인 심리적 정서라면, 실존적 수치심은 근본적으로 자기 실존의 한계나 불완전함을 인식할 때 느끼는 원초적 감정이다. 이는 한 실존이 다른 실존 앞에서 거짓과 오해를 염려하며 무제약적인 본래적 자기를 보호하려는 태도에서 유발되는 일종의 ‘절대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수치심은 실존이 자기 한계를 인식하는 가운데 진정한 자기 존재가 되는 중요한 시금석으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수치심을 갖는 진정한 이유는 타인을 의식해서이기보다는 진정한 자기로 있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수치심을 상실한 듯하다. 타인의 시선조차 아랑곳하지 않으며, 또한 교묘하게 법망을 피하며 권력과 재물을 탐하는 몰염치한 자가 많다. 어느 때보다도 자기를 기만하지 않고 참된 자기로 있고자 하는 진정한 수치심이 우리에게 필요해 보인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32) 실존적 소통
실존적 소통하려면 ‘자기와의 진정한 만남’ 선행돼야
인간은 소통하는 가운데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소통은 상호 대화를 통해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관계 맺으며, 서로의 이해를 도모하는 화합의 과정이다.
관계적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서 소통은 삶의 핵심 요소이자 사람들과 함께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가는 동력이 된다. 반면 소통의 부재는 사람을 고립시키며, 자기뿐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장애 요소가 된다. 잘못된 소통은 관계를 왜곡시킴으로써 화합이 아닌 분열과 분쟁을 일으킨다. 그런데 소통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와의 만남’이다. 사실 자기와 소통하지 않는 자는 타인과도 제대로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일의 실존철학자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누구보다 인간 실존에 있어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 사이의 진정한 관계는 ‘실존적 소통(existentielle Kommunikation)’에서 비롯된다. 실존적 소통은 관습과 전통을 따르는 정형화된 소통방식이 아닌 고유한 개별 실존이 자유롭게 행하는 무제약적 행위를 말한다. 이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무엇보다도 ‘자기와의 진정한 만남’에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자기 앞에 자기를 세움과 동시에 자기와 소통하는 가운데 타자와 소통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 이해 없는 소통은 진정한 소통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성찰과 반성은 항상 타자를 향해 ‘개방’하려는 의지가 요구된다. 이때 타자는 단순한 나의 소통 대상이 아니라 고유한 인격체로서 스스로 자유롭게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존재다. 소통에서 타자가 자유롭지 못할 때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또 실존적 소통은 결코 종속이나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각자가 자유로운 존재로서 만나는 것이야말로 소통의 가장 기본적 조건 중 하나다. 그러므로 참된 실존적 소통은 두 실존의 자유가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실존적 소통에서 요구되는 또 다른 전제는 자기를 개방하려는 의지와 ‘사랑의 투쟁’이다. 이때 야스퍼스가 말하는 사랑은 서로에 대한 철저한 개방성, 모든 힘과 우위를 배제하는 방식의 투쟁이다. 실존적 소통은 자기 존재와 헌신 사이에 놓인 긴장을 통해 이루어지며, 고독을 전제로 ‘하나’가 되려고 하지만, 결국 둘로 남는 역설이 가능한 방식이다.
무엇보다 실존적 소통에서 중요한 사실은 소통하는 가운데 두 사람 모두 ‘진정한 자기’가 된다는 것이다. 실존적 소통은 나와 타자를 대상으로 서로를 개방하려는 공동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뢰하기보다 권력이나 승리를 목표로 상대를 제압하고 지배하려는 투쟁방식의 소통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실존적 소통에서 두 사람은 사회적 지위나 신분의 위치를 떠나 대등한 관계로 만나며, 무엇보다도 각자 고유한 존재로서 상호 존중하는 가운데 자기 실존을 획득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그런 만큼 실존적 소통에서 참된 관계를 위해 타인에게 쏟는 나의 시간은 결코 자기를 버리는 시간이 아니며, 오히려 참된 자기로 채우는 충만한 시간이다. 완고하고 폐쇄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타자와 맺는 참된 관계란 자유로서 무한히 열려 있는 ‘진정성’이며, 이는 자기의 경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통해 더 넓은 실재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