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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목사
저는 출애굽의 해방 이야기를 좋아하고 민중신학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과는 반대의 사고이면서도 그것 못지 않게 좋아하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전도서입니다. 전도서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결여하기 쉬운 사고의 균형을 잘 잡아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는 전도서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전도서는 전도하기 위한 책이다'는 것입니다.
전도서를 가지고 전도하려는 사람은 백발백중 실패할 것입니다. "헛되도다.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로 전도하다가는 마음이 있던 사람도 돌아서겠지요.
둘째는 '전도서는 허무주의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헛되도다'라고 전도서가 말하기는 하지만 허무주의와는 전혀 다른 사고 체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성서의 다른 책들과는 매우 다른 독특한 신학을 가진 책입니다. 오늘 본문에 "지금 있던 것 이미 있던 것이고 앞으로 있을 것도 이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신 일을 되풀이 하신다(3,15)"는 말과 바울 사도의 말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빌립보서 3, 12절 이하)"를 비교해 봅시다.
둘 사이에 확연한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전자를 "윤회적 역사관"이라고 이름을 붙여보았습니다.
이 '윤회적'이란 말은 불교에서 사용하는 꼭 그의미로만 쓴 것은 아닙니다.
반면에 바울의 역사관이고 대부분 성서와 기독교의 역사관을 대표하는 사고를 "직선적 역사관"이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
이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역사관에서 그 목표 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는 선언이 있고 "하나님은 새일을 일으키신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새 하늘 새 땅"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전도서는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것이란 없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새것이다 하고 말 할 수 있겠는가?(1,9-10)"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전부 이 직선적 역사관인데 전도서의 윤회적 역사관이 있어 결국은 기독교 안에 이 두가지를 포하하게 된 셈입니다. 비록 성서 66권 중에 전도서를 제외한 65:1로 기울어 있지만......
직선적 역사관은 목표가 뚜렷하기에 가치판단도 뚜렷합니다. 그래서 분명히 한쪽을 취하고 한쪽을 버립니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모하라"라고 말하며 사람을 볼 때에도 그 사람의 가치가 자명해집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면 저사람 70점, 저사람 60점, 아무개는 50점... 하고 그 가치 판단이 명확하게 정해지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점이 있기에 모든 세상이 명쾌해집니다. 모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전도서 9장 2절은 말합니다.
“모두가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깨끗한 사람이나 더러운 사람이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나 드리지 않는 사람이나 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죄인보다 나을 것이 없고 맹세한 사람이라고 해서 맹세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다.”
만약 이런 사고방식이라면 이제까지의 기독교의 가르침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이런 사고체제에서 잘못하면 개인의 행위에 대해서 무책임해 지고 자신의 욕심을 마음대로 합리화 시키며 방종에 빠질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사람을 대할 때,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내가 못 받아들이고 거부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요한
14,6)"이것은 목표가 뚜렷하지요. 기독교인은 이런 직선적 역사관 때문에 밤 중에 톱가지고 가서 단군상 목을 자르기도하고 남에 절에 몰래들어가 불상을 부숴 뜨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깃발을 꽂습니다.
그리고 "여기 붙어라! 이것이 길이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거기에 붙지 않는 모든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다가 새그림을 그리게 되면 또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다 지워버리고 그 기준대로 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재구성 하기를 반복합니다. 수없이 틀을 짜고 그 틀대로 세상을 작도합니다. 전도서에서 이런 마음은 오히려 마음에 '사악과 광증'(9,3 ; 10,13)을 품고 사는 것으로 봅니다.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7,18)
전도서는 인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가치를 덧없는 것으로 처버립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러나 그 하나님의 뜻도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두고서 나는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이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뜻을 찾아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은 그 뜻을 찾지 못한다. 혹 지혜 있는 사람이 안다고 주장할 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도 정말 그 뜻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8, 17)
지혜도 처버립니다. 지혜라는 것은 지혜문학이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이 지혜는 신적 존재와 견주는 것으로 창조 이전에 있고 만물이 그로부터 유래하고 인격을 가지고 세계를 다스리는 어머어마한 존재입니다. 지혜의 추구는 지혜문학의 목표인데 전도서는 그것 마저 처버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도서는 형식상 지혜문학에 속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지혜서이기를 반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지혜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결심해 보았지만 지혜가 나를 멀리하더라(7,23)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고 아는 것이 많으면 걱정도 많더라(1,18)
노력과 성취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그러나 이 수고도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4,4)
공부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한마디만 더 하마 나의 자녀들아, 조심하여라 책은 아무리 읽어도 끝이없고 공부만 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한다(12,12)
이 구절에 대해서 부모님들은 '이런 불온한 구절이 있나'하는 표정을 짓고 계시지만 우리 청소년부 학생들은 매우 매우 좋아하는 군요. 분명히 이 전도서의 불온한 말들이 어느 한쪽에는 확실한 해방의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서는 "돈은 만사를 해결한다(10,19)"고 하기도 하지만 한쪽으로는 그것마저도 처버립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슬기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고, 눈밖에 난 죄인에게는 모아서 쌓는 수고를 시켜서, 그 모은 재산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주시니, 죄인의 수고도 헛되어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2,26)
어떤 사람이 돈을 모으냐? 하나님 눈밖에 난 죄인 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부지런히 모아 서 쌓는 수고를 시키시고 쓰기는 엉뚱한 사람들이 쓰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돈 보따리를 가지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지런히 모아서 쌓지만 결국은 고스란히 여기에 두고 가는 것이지요.
전도서는 돈이 되었건 성공과 노력이던 하나님의 뜻이던 지혜이던 간에 어느 하나로 세상을 보는 틀을 만들고 그 사상과 주의에 빠져 외골수로 나가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 틀로 사람을 작도하 고 자르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사상의 틀과 어떤 주의가 인간 보다 앞서는 것을 경계합니다. 아무리 의롭고 좋은 이념이라 하더라도 획일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람을 재단하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유혹에 빠지기가 매우 쉽습니다. 이런 전도서는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 쉬운 직선 적 역사관, 직선적 인간관의 맹점을 절묘하게 보충해 주고 있습니다.
그럼 전도자는 모든 것을 처버렸는데 그가 긍정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전도서에서 여러번 강조되는 반복 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3, 12-13절)
사람에게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알고 보니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 그분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는가?(2,24-25)
기쁘게 사는 삶, 즐기면서 사는 삶, 보람있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삶에 대한 주제가 이 짧은 분량안에 5-6번 강조됩니다. 지혜도 성공도 하나님의 뜻도 소용없습니다. 거창한 사상과 이념에 주눅이 들어 그것으로 이웃을 판단하기 보다는 "아주 단순하게 지금 내가 여기서 먹는다는 것, 마신다는 것, 보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것 자체가 기쁜 일 아니냐? 내가 지금 숨쉬고 있고 내가 지금 식욕이 있어 먹을 수 있고, 내가 갈증 날 때 내 목을 축여줄 물이 있다면 그것 이상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 내가 숨쉬고 있는 것 바로 이것이 기적이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닌가?
그래서 전도서는 말합니다. 그렇다, 다만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7,29).
전도서 저자는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비록 개라고 하더라도 살아있으면 죽은 사자보다 낫다(9,4)고 합니다. 그는 생명을 즐기라고 합니다. "나는 생을 즐기라고 권하고 싶다. 사람에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8,15)" 지금 살아 있는 것 그것 자체가 가장 큰 은혜이고 가장 큰 축복이다. 어떤 무엇으로도 그 생명을 난도질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요?
직선적 인간이 틀과 윤리관에 얽매어 산다면, 윤회적 인간은 그때 그때의 감정에 충실하게 삽니다. 결혼을 예로 들어 말할 때 직선적 인간은 결혼을 전제로 해야지만 남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할 것입니다. 그 목적외의 교제는 삼갑니다. 그러나 윤회적 인간은 그때 그때의 감정에 충실할 뿐입니다. 순간의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도덕, 법규, 윤리... 이런 것에 별로 구애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체로 예술가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유형입니다. 직선적 인간은 자기가 비윤리적이라고 규정한 것을 도저히 참아내지 못합니다. 금방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모두를 집어삼킬 듯이 움직입니다. 반면에 윤회적 인간은 윤리라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틀, 잣대에 불과한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불같이 단죄하는 그것은 또한 나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것들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불같이 성을 내지만 그것은 결국 제 마음의 한 표현 일 뿐, 제 안에 억눌려 있는 감정이나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라고 합니다.
단점과 장점을 살펴봅시다. 직선적 인간은 별로 사귀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자칫하면 그는 남을 정죄하려들고 그에게 별로 상담하거나 의견을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확실하고 그가 내릴 답변은 항상 빤하게 보이기 때문에 구태어 묻고싶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잘 알고 친한 사람하고는 저돌적으로 친하고 그 성실성으로 뜻을 같이 하는 하는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받기도 합니다만 널리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 협소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한계입니다. 반면에 그는 일을 이루는데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윤회적 인간은 자칫하면 자기 감정이나 욕망대로 움직여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태하고 퇴폐적인 행태를 보이기 쉽습니다. 무기력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제 욕심대로 행하고 그것을 합리회 시키는 파렴치한 행태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그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고 아무리 이해하기 힘든 사람일지라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폭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럼 어느 것이 옳으냐는 의문을 가지실 것입니다. 저는 이 두가지 중 우리가 어느 한 쪽을 택해서 살아야할 선택사항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두가지 사고가 다 존재하는 유형입니다. 직선적 역사관은 기독교를 중심한 서양에서 주된 사조를 이루었고 윤회적 역사관은 동양에서 주를 이루었습니다. 최근에 서양에서도 포스트 모더니즘을 통해 윤회적 역사관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둘은 논리적으로는 서로 만날 수 없는 다른 길을 가지만 둘이 다 인간에게 필요한 사상의 유형이기 때문에 늘 역사 안에 서로 다른 유형으로 존재하여 왔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에서 전도서가 여러번 정경 시비에 말려들었고 이런 책이 성서 안에 있어야 되느냐를 놓고 수없이 논쟁하여 왔지만 직선적 역사관이 주를 이루는 기독교 역사관 안에서도 전도서가 제거되지 않고 정경으로 살아 남은 이유는 그것도 꼭 필요한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꼭 어느 한길로만 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는 이 상반된 둘의 가능성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게 길이다라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도 역시 중요한 역할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이 주장하는 진리는 광증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새것을 가졌다고 금방 과거의 것을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나의 과거의 선 자리가 매우 중요하고 유익하기 때문에 지금의 이 자리가 있고 또 앞으로의 자리가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전도서의 자극이 여러분들을 새로운 시야로 이끌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