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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4.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16.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17. 우리의 연약한 것을
3. 많은 사람을 고치시다 ( 8: 14-17. 막 1: 29-34. 눅 4: 38-41. )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8: 14.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다. 마가복음은 그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증언한다.
* 막 1: 29-30 –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예수께서는 많은 무리들 중 특히 몇 명의 제자들을 늘 그와 함께 있게 하셨다. 그는 베드로의 집에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 누가복음은 그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렸다고 증언한다. 열병은 높은 열로 고생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1]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당시 베드로는 갈릴리 해변의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다.(4: 18-20). 요 1: 44에 의하면 베드로의 고향은 빌립과 마찬가지로 벳새다였다. 따라서 베드로가 벳새다에서 출생하여 결혼과 동시에 가버나움으로 이사하면서 어부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 요 1: 44 -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어떤 이들은 가버나움과 벳새다는 서로 인접해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설사 고향이 가버나움이었다고 하더라도 벳새다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일정한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8: 20) 베드로의 집에 자주 들러 거기서 거처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2] 그의 장모가
이 말은 베드로가 결혼하였음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그의 아내는 바울과 베드로의 전도 여행에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 고전 9: 5 -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그의 장모는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의 딸과 사위와 함께 살고 있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도 함께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의 결혼은 성직자들의 독신을 강조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다소 희석시키는 사건이기도 하다.
3]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은 오늘날의 병명으로 말하자면 아마 말라리아나 장티푸스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의사인 누가는 그녀의 병을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녀를 위하여 예수께 구했던 것으로 보아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추측할 수 있다.
* 눅 4: 38-39 –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4] 보시고
베드로의 집에 들어서는 즉시 목격하셨음을 암시한다.
주변 사람들이 예수께 치유를 간청하기 전에 환자의 안타까운 사정을 목도(目睹)하셨다.
8: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시중들더라. )
예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셨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께 요청했다고 증언한다.
이번에는 그 환자와 직접 관계된 자의 요청이 아닌 것 같다. 이처럼, 환자 본인이든지, 그의 주인이든지, 혹은 그와 좀 멀리 관계된 자일지라도 치료를 간청할 때 주께서는 치료해 주셨다.
주께서 그의 손을 만지시자 그의 열병은 떠나갔다. 마가는 예수께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났다고 증거했고, 누가는 그가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시자 병이 떠났다고 하였다. 그 열병은 즉시 치료되었던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는 즉시 일어나 예수께 시종들었다.
* 눅 4: 39 -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1] 그의 손을 만지시니
현대 의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열은 어떤 질병에 대한 증상으로 규정되고 있지만, 그 당시는 열 자체를 일종의 병으로 여겼던 것 같다.
* 요 4: 52 -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 행 28: 8 -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유대인의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생활방식을 규정하는 랍비들의 율법인 할라카(halacha)는 열병이 있는 자들과의 접촉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3절에서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에 대신 것과 같이 여기서도 환자에게 손을 대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접촉이 금지된 환자를 만짐으로써 환자가 깨끗해진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은 나병, 중풍병, 열병 등 다양한 병들의 치료에서 나타났고, 어떤 때는 주께서 환자에게 손을 대셨고 어떤 때는 단지 말씀으로만 하셨고 어떤 때는 그 병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동일하게, 주 예수의 치료는 즉각적이며 완전하였다.
2] 열병이 떠나가고
마태복음에서 이 사건은 세 번째로 등장하는 예수님의 기적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순간적인 치유와 더불어 오랫동안의 건강까지 선사하셨다(Chrysostom).
3]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시종들더라(*, 카이 디에코네이 아우토).
'수종(侍從)들더라'는 말의 동사 원형은 '디아코네오'(*, 시중들다, 돌보다, 섬기다)로서 본문에서는 과거 미완료 형으로 기록되었다. 과거 미완료 형이란 것은 과거 어는 한 시점을 전후해서 사건이 계속됨을 가리키는 시제로서, 본문은 '섬기기 시작했다'(began to serve)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자가 자신을 구원한 주님께 기꺼운 마음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구원받은 자는 자발적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예수께서 병들을 고치신 사건들은 그의 신적 능력과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런 증거들을 읽고 듣고 그가 누구이신지 깨닫고 그를 믿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놀라운 신적 구주가 계시다.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구주이시며,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 성령으로 우리 속에서 일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는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구주이시요, 또 우리의 육신의 문제까지도 도우실 수 있는 주님이시다.
주를 알지 못하는 자마다 이 증거들을 읽고 그를 알고 그를 영접하여야 한다. 그는 우리의 영적 문제를 돌보시고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구주시다.
4]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예수님
베드로가 독신으로 일생을 살았다고 하는 카톨릭의 주장과는 달리 본문은 베드로가 결혼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들어가사'라는 표현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다 피곤하시면 곧잘 베드로의 집에서 쉬어가셨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베드로의 장모가 나음을 얻은 후 예수님께 수종들었다라는 말씀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1) 일하는 자는 안식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그날을 복 주어 거룩하게 하셨다.
* 창 2: 1-3 –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그러므로 안식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원리요 축복이다. 그런데 오늘날 지나친 욕심에 이끌려 쉼 없이 과로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리고 본인뿐만 아니라 자기가 고용하는 이들을 충분한 휴식 없이 혹사하는 사람들도 많이 본다.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창조원리와 축복을 거부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것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모세 당시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노릇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도 없이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것이 잘못된 제도임을 가르칠 필요성을 느꼈다. 십계명에 안식일에 관한 명령이 들어가야 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 출 20: 8-11 –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본문의 예수님 역시 열심히 일하셨다. 서론에서 살펴본 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 심신의 피로를 푸시고자 하셨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예수님은 열심히 일한 자는 반드시 휴식으로 피곤을 풀어야 한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안식의 축복을 아무도 제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2) 안식 중에도 할 일은 해야 한다.
안식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축복이지만 동시에 안식은 새로운 일을 위해 휴식을 통하여 새힘을 얻는 목적도 있다. 특별히 여기서 일이란 인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일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에 관계된 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과로하지 않는 한, 일은 안식보다 우위에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 막 2: 27 -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본문에서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휴식을 취하시기 위해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지만 거기에 열병으로 몸져누운 베드로의 장모를 거리낌 없이 고쳤던 것을 본다. 사람의 생명, 혹은 고통과 관계된 일이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의 안식도 포기하고 그 일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3)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가 베푼 사랑을 사랑으로 갚으셨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많은 병자를 고치셨지만 친히 병자의 손을 만지심으로 병을 고치신 경우는 드문 경우다. 예수님은 대부분 말씀으로 병 고침을 행하시거나 명령을 통하여 귀신을 쫓아내셨다. 또 안수하실 때는 병자의 몸에 손을 대시었지 직접 손을 잡진 않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칠 때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고치셨다는 것은 그만큼 베드로의 장모를 사랑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예수님과 베드로의 집안 사이에 특별한 교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전부터 예수님은 수제자인 베드로의 집에 종종 들르셨으며, 그때마다 베드로의 장모는 사랑으로 뜨겁게 환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 장모의 사랑을 사랑으로 갚으신 예수님을 발견케 된다.
(4) 베드로의 장모는 병이 나은 즉시 예수님께 수종을 들었다.
베드로 장모는 예수님을 사위의 친구나 함께 일하는 사람 정도로 보지 않았다. 단순한 종교적 지도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종된 입장이요 예수님은 주인된 입장으로 보았다. 그녀가 병이 나은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께 수종을 들었다는 사실이 이를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다. 만약 그녀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보지 않았다면 침상에서 막 일어난 상태에서 그처럼 예수님께 수종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도들에게는 베드로의 장모와 같이 예수님을 섬기려는 자세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베드로의 장모가 병상에서 막 일어났음에도 개의치 않고 예수님을 섬겼던 것처럼 우리도 베드로의 장모처럼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은혜를 보답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8: 16.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
이 사건은막 1: 32-34과 눅 4: 40-41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다.
1] 저물매
날이 저물었을 때, 사람들은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왔다. 귀신들은 타락한 천사들이다. 그들의 왕은 사탄이다. 귀신들은 모든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일들 배후에 활동하고 있고 또 많은 질병이나 재난, 불행한 일들을 일으킨다.
특히 귀신이 들어와 그를 주장하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과 의지를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귀신 들린 자들이다. 이들은 정신 이상자들과 비슷하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께 왔을 때,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모든 병자를 고쳐주셨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신 다음에 일어났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께 데려온 시점은 저물 때였다. 곧 해가 지고 저녁이 된 때인데, 이는 하루가 끝나고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했던 유대인의 시간 개념과 연관이 있다.
즉 사람들은 노동이 금지된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을 예수께 데리고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레 23: 32에는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를 철두철미 안식하였다.
2]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성경은 육체적 질병과 뚜렷한 구별을 두고 '귀신들린 자'를 취급하고 있다.
* 마 4: 24 -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 마 12: 22 -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 마 17: 18 -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따라서 이는 정신적 질환의 일반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성경은 정신 질환의 발병 원인을 사탄의 역사로 보는 경향이 짙다(Weiss). 예수 당시 유대 지방에는 귀신들린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현상은 두 가지로 설명해 볼 수 있다.
(1)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 지적한 바 있듯이 그 당시 유대인들은 대단히 사악하였으며 도덕적 신앙적인 면에서 불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괴상한 마술에 심취하여 악령을 부르고 또 그들과 자주 접촉했기 때문이다(Dr. Lightfoot).
3] 예수께서 말씀으로
마태는 예수의 병 고치는 이적을 기록할 때 이 말을 흔히 사용하고 있다(3, 8절).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곧 능력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주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창 1장).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말했다(히 4: 12).
신구약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성경을 열심히 또 규칙적으로 읽는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을 얻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성과 세상의 악과 마귀의 시험을 이길 능력을 얻을 것이다.
4]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귀신'이란 말은 헬라어로 '타 프뉴마타'(*)로서 그 문자적인 의미는 '영혼들'이란 뜻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는 이 말이 마귀들을 뜻하는 '다이모니아'(*)로 표기되어 있다.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모두 거기서 '귀신들'로 번역하고 있다.
신구약 중간사의 문헌들을 조사해 보면 '타 프뉴마타'란 것은 병을 가져다주는 사자를 지칭하고 있으며 신약성경에서는 이를 보통 악한 존재로 설명한다.
예수께서 귀신의 세력을 축출하시고 그 질환자의 정신을 맑게 하신 것은, 곧 예수께서 영육을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심을 나타내는 동시에 이 땅에 어두움의 세력을 완벽히 몰아내고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 사 11: 1-5 –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 사 35: 5-6 –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누가는 본 사건을 언급하면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이다"(눅 4: 41)라고, 그때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5]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마가복음은 이 구절을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막 1: 34)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다'(all, NIV)란 표현이 마가복음에서는 '많은'(many, NIV)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이 둘은 상충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다 고친 것이, 곧 많이 고친 것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을 통해 마태는 예수께서 고칠 수 없는 질병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라는 자신감 넘치는 신앙을 은연중에 고백하고 있다.
8: 17. 우리의 연약한 것을 -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
주께서는 우리의 죄뿐 아니라, 죄의 결과인 모든 질병과 슬픈 일들도 담당하셨다.
우리는 아직 모든 질병과 슬픈 일들이 믿는 자들에게서 완전히 제거됨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죄 사함은 그것들을 제거하지만, 주께서 남겨두신 것들은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함일 뿐이다.
우리가 천국에 이를 때면 죄와 그 결과들은 다 사라질 것이다.
1]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이 말은 사 53: 4의 인용으로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는 빠져 있다.
* 사 53: 4 -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마태는 그 당시 흔히 통용되고 또 다른 성경 기자들이 인용할 때 자주 사용하던 70인 역이나 아람어로 된 구약 성경을 직접 인용하여 이를 번역했다(Stendahl).
2]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4번째 '종의 노래'인 사 52: 13 – 53: 12에 대한 70인 역이나 탈굼 역은 사 53: 4을 영적인 의미로 번역하여 종으로서의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 사 52: 13 - 53: 12 – 고난 받는 종 – 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15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반면 마태가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히브리어 본문은 이를 영적 의미보다는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의미로 번역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육체적인 연약함과 육체적인 질병을 대신 '담당하고' 또 '짊어지셨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개역 한글 성경 사 53: 4와 본문을 비교해보면 '우리의 질고'는 '우리의 연약한 것'으로, 또 '슬픔'은 '병'으로 번역, 여기서도 '질고'와 '슬픔'은 분명히 추상적이고 영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영적, 육적인 고통과 슬픔의 원인은 죄에 있다는 점에서, 속죄의 교리를 담고 있는 사 53: 4의 영적인 번역은 본질적으로 히브리 본문과 동일한 의미가 있다.
'담당하시고'(*, 에라벤)란 위치상의 이동이나 무엇을 취하다(take up)라는 뜻이다.
'짊어지셨다'(*, 에바스타센)는 '참다', '들어 올리다', '고통을 참다'는 의미이다.
이는 질병이나 고통이 예수께 그대로 옮겨졌다는 의미이기보다 예수께서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의 질병과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음을 강조한 표현이라 하겠다. 이는 장차 감당하실 십자가 형벌의 빛나는 열매들이다.
3] 인생의 질고를 담당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고 나서 쉬실 때 마침 날이 저물어 안식일을 지키게 되었다. 이에 많은 사람이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병 고쳐주기를 원하여 나아왔다. 이에 예수님은 귀찮아하거나 싫어하는 기색 없이 모두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어느 곳에서나 병을 고침받기를 원하는 자들을 되돌려 보내신 적이 없다.
(1) 귀신의 유래
① 사탄의 졸개들이다.
사탄은 천지 창조 이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사 중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스스로 교만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여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다. 바로 귀신들은 이 사탄의 추종자들로서 똑같이 하나님을 배역한 자들이다. 이들은 사탄과 함께 천상에서 쫓겨났으며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철저히 도와주고 있다.
② 성도를 괴롭힌다.
이들의 공격 대상은 성도들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성도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려는 일을 방해한다. 백보좌 심판을 통하여 영원한 죽음의 심판을 받게 될 이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을 함께 지옥불에 데려가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며 구원 얻은 자들은 구원의 확신 속에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의심, 삶에 대한 불안, 불평, 갈등, 좌절, 침체 등을 가져다준다.
이들이 이런 공작으로 성도들에게는 핍박과 질병과 사업의 실패, 믿음에 따르는 여러 유혹 등이 뒤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러한 시련이 닥칠 때 이것은 귀신들의 공작임을 알고 지혜롭게 말씀으로 무장하여 귀신들을 대적하여야 하겠다.
(2) 예수님은 귀신을 쫓으셨다.
①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지니셨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도 예수님의 신성이나 신적 능력을 부인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이나 이적을 행하는 능력은 단지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죽은 후에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며 예수님은 완전한 한 인간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옛적부터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해 왔던 대로 태어나셨으며 그들이 예언했던 대로 인류의 메시야로 일하셨기 때문이다.
사탄은 광야에서 그를 시험할 때 사탄조차도 그의 신성한 능력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제자들의 증언과 역사적 자료들을 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② 사탄의 능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권세다.
인간의 관점에서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의 능력은 대단한 것처럼 보인다. 사탄도 병을 고칠 수 있고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며 비상한 이적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막강해 보이는 사탄의 세력도 예수님의 권세를 앞지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창조주요 사탄은 피조물로서 사탄이 행하는 모든 능력도 결국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만 행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수많은 귀신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을 단지 말씀으로 고치심으로 귀신을 제어하는 증거를 보여주셨다.
(3) 예수님은 인생의 고난을 담당하셨다.
① 예수님의 능력은 인생의 고난만을 위해 사용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감수해야 할 사역을 수월하게 수행하거나 사람들에게 표적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용하신 적이 없다.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신 것은 단지 인생들이 질고에 시달리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는 맘으로만 사용하셨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은사를 마치 돈벌이나 명예를 얻는 도구로 사용하는 많은 사람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많은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② 인생의 고난을 담당하셨다는 말은 단순히 능력을 사용한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께서 각종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보고 고쳐주실 때 쉽게 능력을 행하신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라고 하는 말씀은 곧 그들의 병을 고치실 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고통에 참여하셨다는 말이며, 직접 그들의 고통을 대신하셨다는 말씀이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 28)고 말씀하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병들을 다스리는 신적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그는 나병과 중풍병과 열병을 치료하셨고 귀신 들린 자들도 고쳐주셨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언한다! 이것이 사복음서의 목적이다.
둘째, 고난 중에 주를 찾고 그의 앞에 나와야 한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야 한다.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무엇이든지 간구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구하는 바를 들어주셨다.
기도는 믿음의 증거이며 표현이다.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으나,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