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8,33ㄴ-37
+찬미 예수님
오늘 함께 미사 드리는 형제자매님들은 멀리 경남, 진주에서 오신 분들로, 아침 새벽같이 오셨습니다.
이렇게 여기 오기까지 과정은 겉으로 보면 사람들의 계획에 따른 것 같지만,
제가 피정에 말씀드렸듯이 하느님이 선택해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지난주 토요일과 일요일 제주방에서 번개가 계획되어있었는데, 동광성당 신부님께서 대림 특강을 청하시어,
대림은 아니지만 조금 당겨서 월 화 수 3일간 피정을 지도하고 왔습니다.
사실은 편안하게 쉬다 오려 했던 것이었기에, 처음에는 조금 부담이 있었습니다.
또, 예전 강의했던 것을 보니 기억도 잘 안 나는 거예요.
아마 학교 선생님들도 2년 만에 강의하면 그럴 것 같아요.
코로나 이후 아마 한국에서 거의 처음으로 하는 피정일 텐데, 내가 문을 잘 열어야 하는데,
꽃이 남쪽부터 피듯 제주도부터 열린 말씀의 잔치가 육지 쪽으로 올라가는 성령의 역사일 텐데,
기억이 안 나니 정말 큰일 났다고 생각하고, 번개 모임 후에도 계속 피정 지도할 것을 생각했죠.
그런데 결국은 ‘내가 아무리 걱정해봐야 뭐하나. 내가 말 못 하면 하느님 손해지.’하면서 맡겼죠.
피정 강의는 지식을 전달하는 대학 강의가 아니어서, 성령이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어느 피정에서 내가 준비한 것은 한마디도 못 하고, 다른 이야기만 하고 온 적도 있었어요.
미리 주임 신부님이 부탁하신 주제였는데 죄송하다 하면,
‘신부님, 우리 본당 사정 어디서 듣고 오신 거 아니세요? 정말 우리 본당에 딱 필요한 꼭 집어서 이야기해 주셨어요.’
합니다.
돌아오면서 ‘오늘도 주님이 내 입을 가지고 노셨구나.’ 생각합니다.
라틴어 격언에 ‘인간이 계획하면 하느님은 허무시고, 인간이 부수면 하느님은 다시 짓는다.’ 했잖아요.
내가 아무리 지혜롭게 강론을 준비한다 해도, 전혀 다른 이야기하고 올 때가 많다는 거죠.
이번도 그랬어요.
내가 준비한 것의 3분의 1도 못하고 주제가 완전히 바뀐 거예요.
저는 내려갈 때 ‘향주삼덕’ 이야기를 하려 한 것이 아니었거든요.
사실 이번 피정은 내가 나에게 한 피정이었습니다.
‘김 신부, 너 향주삼덕(신덕, 망덕, 애덕) 잊지 말고 살아라.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너도 실행에 옮겨라.’
사제로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순명해야 하죠.
또, 독거노인처럼 18층 유리 밖으로 지나가는 차만 보며 우울함도 몰려왔어요.
코로나 상황이라 누구를 만나기도 힘들고, 방문하기도 쉬운 일도 아니죠.
그런데 향주 삼덕의 망덕을 이야기하면서 다시금 기쁨이 솟았어요.
그리고 은퇴하면서 주교님에게 서운한 점도 있었고, 잘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향주삼덕의 세 번째가 애덕, 용서잖아요?
그런 마음으로 있다 교우들에게 향주 삼덕을 강의하면서 제가 피정한 것이죠.
교황님도 주교님도 향주 삼덕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일을 했다 해도 천국에 못 갑니다.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또, 제가 치유 기도는 일 년에 한 번 정도만 하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이번에는 어떤 때보다도 섬세하게 하나씩 짚은 것을 보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마 많은 신자가 치유 기도를 듣고 많은 역사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동광성당 신자분들만 들으신 거 아니죠?
유튜브로 2천 명 넘는 분이 함께하셨어요.
벌써 하느님의 역사로 치유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저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 하면 추수 감사 미사가 생각나요.
추수한 것을 제대 앞에 쌓아놓고 감사 미사를 드렸었죠.
여러분들은 올 일 년 추수한 것이 무엇이 있으신가요?
추수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지요?
저도 오늘 추수 감사 미사를 준비하면서, 하느님께 무엇을 드릴까 많이 생각했어요.
영적인 예물을 무엇을 드려야 할까?
교회는 연중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라 정하고,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왕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고, 우리들의 믿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2020년을 걸쳐 2021년까지 인간 위에 군림한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코로나였죠.
왜? 이놈이 성당에 못 가게, 하느님을 못 만나게 했잖아요.
외적으로 보면 하느님보다, 대통령보다 세요.
그런데 이 녀석이 현미경으로 봐야만 보이는 바이러스라는 것이 참 기가 막힌 거죠.
이스라엘에 왕은 예수님 탄생 전 약 11세기에 비로소 등장합니다.
그때까지는 그들에게 왕이란 개념은 없고 오로지 하느님만이 유일한 왕이셨어요.
그러다 기원전 11세기부터 위대한 다윗이라는 왕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하느님께서는 왕을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다윗을 왕으로 모시기 시작하면서 왕이 나온 거죠.
그런데 다윗 왕 이후에 하나같이 백성을 실망시키는 왕만 나왔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새로운 다윗을 기다렸죠.
새로운 다윗이 나오길 소망하는 백성들의 기대는 메시아 신앙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언젠가는 다윗처럼 자신들을 불행한 처지에서 해방해 줄, 복된 나라로 이끌어 줄 메시아가 오기를 기대한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그런 왕은 등장하지 않았어요.
모진 박해 생활, 많은 기간 노예 생활, 식민지 생활을 해도 하느님이 아무런 일을 하시지 않는 거예요.
그러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아, 드디어 새로운 다윗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믿었어요.
다윗에 버금가는 훌륭한 왕으로 새 이스라엘을 건설할 분이라 믿었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원하는 그런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죠.
다시 말해 유대인들을 식민지에서 건져내고, 굶주림에서 해방하고,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을,
그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줄 왕으로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외면하셨죠.
바로 여기에 백성들의 갈등이 있었던 거죠.
사람들은 예수님이 처음 나타났을 때 새로운 다윗이라 생각하고,
또 말씀과 행적을 보면 분명히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틀림없는데,
그분은 왠지 속 시원하게 세속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고, 기껏해야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 떼어내고,
또 하느님 나라에 대해 설교하며 사람들을 약간 감동시키는 소극적인 일만 하셨죠.
사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쫓아다닌 근본 목적은 새로운 다윗도 아니었죠.
권력 있고 힘 있는 왕이었죠.
예수님을 3년 동안 쫓아다녔던 열두 제자 역시 왜 쫓아다녔겠습니까?
지금도 대통령 후보를 쫓아다니는 사람 있죠? 왜 쫓아다니겠습니까?
이 사람이 대통령 되면 장관도 하고 싶고, 총리도 하고 싶고, 출세 때문에 쫓아다니는 거죠.
정치의 마지막 목적은 권력이죠.
그때 예수님을 쫓아다녔던 열두 사도도 똑같았어요.
결국은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일만 생각하느냐.’
하시죠.
여러분들 사시면서 세속적으로 발등에 떨어진 불 해결해달라고 매달릴 때 있었죠?
속 시원히 해결해 주셨습니까?
안 해주실 때가 더 많았을 겁니다.
우리 아들 이번에 수능 점수 잘 나오게 해달라 했는데, 망쳤어요.
주식 처음 투자한 것 대박 나게 해달라고 아무리 기도해도 안 돼.
우리 집 하나 산 것 두 배로 뛰게 해달래도 다른 동네만 올라.
이것은 다 세속적인 문제들이죠.
그때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그런 문제 해결해 달라고 쫓아다녔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생각은 안 하시고, 하시는 말씀도 허공에 뜬 말씀만 하시니,
유대인들도 갈등이 생기고, 열두 사도도 헷갈리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다가 유다가 ‘이분이 내가 생각하던 그분이 아니구나, 3년 동안 속았어.’ 하면서 팔아넘긴 거고
군중들도 예수님을 못 박았던 거죠.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못 박으라 했던 군중은 바로 예수님을 3년간 쫓아다녔던 군중입니다.
유다인들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지 않습니다.
이천 년 전 예수라는 흔한 이름의 시골 청년을 그리스도교인들이 메시아로 모시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은 지금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어요.
예전 중동전쟁에서 모세 다얀 장군이 앞장서서 거대한 이집트에 대승을 거두죠,
마치 예전에 모세가 이집트를 물리치듯 말이죠.
그때 이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렸던 다윗이라고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었어요.
이 정도로 유대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의 왕은 영원히 왕으로 삽니까?
죽어서든, 때가 되어 후계자에게 물려 주든, 쿠데타로 인해 쫓겨났든 내려와야 합니다.
아무도 반석 위에 자기 왕권을 영원히 간직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왕이시죠.
세상의 어진 왕들은 백성이 배 안 고프고 불안한 일 없게 하고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최대의 일이었지만,
죽은 다음의 세상까지는 책임을 못 집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것을 책임지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고 천국은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보잘것없는 사람 가운데 예수님은 계신다고 하셨죠.
굶주리고, 헐벗고, 감옥에 갇히는 등, 비참한 인간들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왕이고,
그들을 통해서만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어요.
꽃동네 아시죠?
꽃동네에서는 자신도 장애인이면서 다른 장애인을 도와주는 모습을 많이 만나게 돼요.
팔다리가 없는 사람을 대신해서 팔다리가 있는 사람이 밥을 떼어 줍니다.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을 봉사자로 도우러 왔다가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우고 가요.
저는 감사하는 마음이 안 드는 사람들에게는 꽃동네 가서 일주일만 살아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세상에서 얼마나 부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구한 날 눈만 뜨면 불평불만으로 살았는지 깨닫게 되고,
거기서 나올 때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가 교만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말이 집에 돌아오면서 저절로 나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기 위해 호화스러운 왕궁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왕궁에 예수님을 모신다고 수백억짜리 궁전을 지어요. 성당을 짓는다는 것에요.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가난한 자를 바라보고 병든 자를 바라보라고, 슬퍼하는 사람을 찾아보고,
죄 많은 사람을 만나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바로 그들 안에서 내가 있다고 그러셨죠.
100억짜리 성당 안에, 호화찬란한 왕국 안에 예수님 계신다고 말씀하신 적 없었습니다.
아까 제가 코로나 때문에 올해만이 아니라 2년을 잃어버렸다고 그랬죠. 맞는 말이에요.
문제는 이 코로나 또는 이 변종이 올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위드 코로나(with corona)가 시작돼도 걱정은 똑같아요. 아직 치사율이 높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몇 년을 더 잃어버려야 될지, 마스크로부터 언제 해방될까 생각하면 답답하죠.
그래도 우리는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해요.
보이지도 않는 그놈에게 질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우리의 왕이 계신 데, 그놈이 왕 노릇 하려고 하는데 왕 대접해 주면 안 돼요.
진짜 왕을 찾아야죠. 살아야 합니다.
산다는 것이 ‘먹고 산다’하는 1차원적이고 형이하학적인 생명 연장만의 뜻이 아니죠.
우리의 영이 살아야 합니다. 정신이 살아야 합니다.
어두운 시대라 해도 분명히 영적인 추수를 해야 합니다.
아까 제가 물었죠?
“여러분은 오늘 추수감사절 미사의 재단 앞에 무엇을 들고 왔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저도 강론 준비하면서 1년 동안, 멀게는 2년 동안 내가 잃어버린 것과 얻은 것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사제로서 오늘 이 추수감사절 미사에 뭘 드릴까?
되돌아보면 저는 코로나 때문에 제가 주저앉은 적은 없다는 생각에 감사드려요.
저는 싸웠거든요. 내 나름대로 양들을 지키려고 무던히도 애썼어요.
다행히 저는 평화방송보다도 먼저 거의 20년 동안 주일미사 생방송을 해왔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데 순조로웠죠.
그래서 비대면 시대에도 1주일에 4번 정도는 혼자라도 강론을 해서 유튜브에 올리면서
신자들을 격려하고 “우리 기죽지 말자. 조심하자.” 했습니다.
또, 오히려 코로나 전보다도 기도를 많이 할 수 있었고 묵상과 관상을 깊이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어느 때는 어둠도 휴식을 위해서 필요해요.
자기 위해서 불을 꺼야 하죠?
코로나라는 어둠도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하고 우리들이 쉬는 기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코로나도 어떤 의미에서는- 물론 하느님이 코로나를 만드신 것은 아니겠지만 –
우리의 휴식에는 아주 필요하다.
이때를 통해서 마귀는 교묘하게 작전을 피겠죠.
어떤 사람들은 저처럼 더 열심히 기도하고, 관상하고, 묵상하는 좋은 시간으로 보내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미사 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귀찮은데 편안하네. 평화방송 보면 되는 거지, 뭐.’하며
마귀의 장난에 넘어가죠.
이제 레지오가 시작되었습니다.
2년 만에 첫 번째 주회가 있다고 신자들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고 그래요.
코로나 때문에 자꾸 주저앉고 뒤로 물러나는 게 이제 한계가 왔어요.
사제들도 적극적으로 사목을 해야 하고, 신자들도 사제와 똑같은 마음으로 따라야 합니다.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 지내면서
우리는 세속 왕의 백성들이 아니라 천국을 지키는 영원한 왕의 백성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코로나 정도를 두려워하지 말고 조심은 하더라고 그놈 앞에 무릎을 꿇을 필요는 없는 거죠.
우리는 우리 주변에, 우리 뒤에 든든한 빽이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하면서
올 한 해 동안 하느님께 ‘주님, 제 나름대로 이렇게 추수한 것, 작지만 봉헌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영성체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2021년 그리스도 왕 대축일 (11/21)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