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수
<고향의 봄> 속 고향
군생활을 마치고 복직하여 창원에서 일한 적이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7개월 간이었다. 당시 창원은 농촌이었고 전국 7대 도시에 이름을 올린 마산에서 가까웠다. 그런 창원읍에선 그나마 직장 사무실이 있는 북동이 가장 번화가였다. 면사무소와 우체국, 극장이 그곳에 몰려 있었다. 부산과 마산을 오가는 노선버스가 북동을 통과했다. 고향 떠나 서울과 대전 부산 등지를 떠돌았던 청춘에게 창원은 꽤나 쓸쓸했다. 직장에서 골목길을 따라 동쪽으로 100여 미터 나가면 그리 넓지 않은 벌판이 나타났다.
그 벌판 건너편 약간 비탈진 곳에 마을이 있었다. 바로 <고향의 봄> 노랫말을 쓴 이원수 선생이 자란 고향 동네 소답리였다. 그곳은 그때까지도 농촌 자연부락 그대로여서 고즈넉하긴 했다. 하지만 난 휴일이면 카메라를 들고 소답리 반대편인 천주산을 주로 올랐다. 2010년 봄엔 부산에서 가톨릭문인들이 대형버스를 이용하여 창원 이원수문학관을 찾았다. 문학관은 선생이 어릴 때 자랐다는 소답리가 아닌 서상동이었다. 아마도 소답리는 너무 변방이라 탐방객의 교통편을 위해 옛 창원읍의 중심에다 앉힌 것 같았다.
<고향의 봄> 노래가 처음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27년. 시를 쓴 이원수 소년이 16세 되던 해였다. 당시 마산창신보통학교 교사였던 동요 <산토끼> 의 작가 이일래 선생이 이원수 소년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마산에 널리 퍼졌다. 1929년엔 홍난파가 《조선동요 100곡집》에 <고향의 봄>을 실어 조선 사람 누구나 좋아하는 국민노래로 떠올랐다. 그때 마산 사람들 대부분은 노래 속 고향이 마산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때 이미 마산 산호공원에 <고향의 봄> 노래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 들어 <고향의 봄> 속 그 고향이 어딘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같은 경남이지만 양산이냐, 창원이냐를 두고 기초단체 간 신경전이 벌어졌던 것. 이때 마산 사람들은 그 논쟁에서 마산이 빠진 게 못내 서운했다. 이원수 선생이 출생한 고장은 양산이고 태어난 지 10개월 후인 1912년 9월 창원으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을 창원에서 줄곧 보내다 학업시기와 맞물려 그는 마산으로 이사해 보통학교와 상업학교를 다녔다. 그렇다면 과연 노래 속 고향은 어디일까. 이 논란은 창원으로 결론이 났다.
“내가 자란 고향은 경남 창원읍이다. 나는 그 조그만 읍에서 아홉 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산이 나긴 했지만 1년도 못되어 곧 창원으로 이사해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땅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다. 창원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기와로 지은 큰 부잣집들이 있었다. 고목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 집에서 가까운 동문은 석벽이 남아있었고 성문은 없었지만 성문을 드나드는 기분으로 다녔다.
동구 밖에 있는 미나리 논과 개울을 따라 내려가면 피라미가 노는 곳이 있어 나는 그 피라미로 미끼를 삼아 물가에 날아오는 파랑새를 잡으려고 애쓰던 일이 생각난다. 봄이 되면 남쪽 들판에 물결치는 푸르고 윤기나는 보리밭, 봄바람에 흐느적이며 춤추는 길가의 수양버들, 나는 그런 그림같은 경치 속에서도 그것들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하고 이웃에 사는 동무 아이와 같이 즐겁게 놀며 자랐던 것이다.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이원수 선생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라는 책에서 직접 밝힌 내용이다.
창원시는 <고향의 봄> 속 배경이 창원으로 결론나자 기념사업을 적극 밀어붙였다. 2002년 선생이 살던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고향의봄도서관을 짓고 그 이듬해엔 이원수문학관까지 문을 열었다. 지역에 새로 들어선 도서관과 문학관에 모두가 박수를 보내야했지만 사정은 그렇질 못했다. 당시 이원수 선생이 썼다는 친일작품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충격에 빠졌던 것이다. 선생은 일제 말기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기관지 <반도의 빛>에 내선일체를 지지하는 글 다섯 편을 실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이원수 선생은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엔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랐다. 2011년 이원수 탄생 100돌 기념행사에 그의 딸이 직접 나서서 부친의 친일행적을 사과했다. 시민단체들과 이 분야 전문가들은 창원시에다 이원수기념사업을 모두 접을 것을 요구하면서 친일문학인을 국민세금으로 기린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일리 있는 주장이었지만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흠이 있지만 배울 점도 있는 만큼 공과를 모두 살려 기념사업은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선생이 광복 후 약자에 대해 일관되게 애정을 쏟은 시간도 무시할 수 없다는 의견까지 보태졌다.
1937년 친일 글을 쓰기 전까지 이원수 선생의 행적은 친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1926년 조선인을 학대하는 일본인의 만행을 고발하는 글을 학급신문에 게재해 경찰에 발각되기도 했었다. 공립보통학교 6학년 때였다. 24세 때는 독서회활동을 하다가 사상불순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까지 했다. 광복 직후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에 가입하고 정부수립 이후엔 국민보도연맹에 강제 가입되었다. 이원수 선생은 1960년대 이후부턴 당대 정권들과 날을 세우기도 했다.
동화 <어느 마산 소녀의 이야기>(3.15의거 소재), <명월산 너구리>(박정희 독재정권 비판), <불새의 춤>(전태일 분신 소재), <땅 속의 귀>(4.19혁명 소재), <토끼 대통령>(박정희 장기집권 비판), <민들레의 노래>(양민학살사건, 4.19혁명 소재), 동시 <아우의 노래>(4.19혁명 소재), <돌멩이 이야기>(4.19혁명 소재) 등 아동문학가로는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사회비판적인 글을 쉼 없이 발표했었다. 아동문학이 적어도 사회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주장은 선생의 문학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이원수문학관엔 이처럼 선생의 행적을 밝혀놓고 그의 친일 글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나라를 위하여 목숨 내놓고 전장으로 가시려는 형님들이여/ 부디 부디 큰 공을 세우시오/ 우리도 자라서 어서 자라서 소원의 군인이 되겠습니다/ 굳센 일본 병정이 되겠습니다.” 빛과 어둠, 공과를 모두 다룰 때 보다 완전한 한 인간의 상이 만들어진다. 다행히 이원수문학관엔 그의 명암이 모두 담겨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국내 친북 성향 언론은 <고향의 봄>이 남과 북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적신다고 보도하기도 했었다. 바로 2003년 대구에서 열린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와 2018 평창동계올림픽 무대 그리고 북의 살인마 김정은을 끌어들여 ‘평화 쇼’를 벌인 남북정상회담 만찬공연에도 <고향의 봄>은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