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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2. 1. 소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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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수, 예수』 팀 켈러 / 두란노 2017년
울고 있는 인생의 생명줄, 예수
- 흠투성이 인생들을 ‘은혜의 식탁’에 둘러앉히시다 -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님의 출생을 밝힌 마태복음의 기사는 크리스마스마다 집중 조명하는 사건들(별과 목자와 구유)로 시작되지 않는다. 훨씬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지루해 보이는 족보를 장황하게 나열한다. 이 대목에서 자칫 인내심을 잃고, 진짜 활동이 벌어지는 아래쪽으로 건너뛰기 쉽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의 주제는 단순히 출생이 아니라 '강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일은 창세전부터 그분이 계획하신 일이었다(계 13:8). 유능한 작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하나님도 예수라는 위대한 인물을 면면한 역사 속에 미리 암시해 두셨다.
그래서 이 본문에는 생각보다 배울 게 아주 많다. 이 족보는 크리스마스와 기독교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지금부터 우리는 마태가 말하지 않은 내용과 말한 내용에서 각각 두 가지씩 배울 것이다.
1) 예수 복음은 좋은 충고 정도가 아니다
마태는 예수 탄생 이야기를 “아주 먼 옛날에”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작되는 건 동화와 전설과 신화와 <스타워즈>다. “아주 먼 옛날에”라는 말은, 그런 일이 아마 없었거나 사실 여부가 확실하지 않지만 그래도 배울 게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걸 넌지시 일러 준다. 그런데 마태가 내놓은 기사는 그렇지 않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와 행적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허구가 아니라 실존 인물이다. 이 모두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있다. ‘충고’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조언하는 것이다. ‘소식’은 이미 실행된 일을 전하는 것이다. 충고는 당신에게 뭔가 일을 해내라고 촉구한다. 소식은 이미 벌어진 일을 인식하고 그에 맞게 반응하라고 촉구한다. 충고는 모든 게 당신의 행동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소식은 이미 누군가가 행동했다고 말한다.
어느 성읍 쪽으로 침략군이 쳐들어온다고 하자. 이 성읍에 필요한 것은 군사 고문단이다. 충고가 필요한 것이다. 보루는 여기에 쌓고, 참호는 저기에 파고, 사수들은 저 위에 배치하고, 탱크는 저 밑으로 가야 한다고 누군가가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막강한 왕이 이미 침략군을 요격하여 무찔렀다면 이제 이 성읍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군사 고문단이 아니라 사자다. 사자를 일컫는 헬라어 단어 ‘앙겔로스’에는 ‘천사’라는 뜻도 있다. 사자는 “너희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만 달아나라! 요새를 그만 구축하라. 더는 스스로를 구하려 하지 말라. 왕께서 너희를 구하셨다.” 이미 일이 이루어졌고, 그래서 모든 게 달라진다.
크리스마스에 관한 성경 본문들은 역사에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지 바른 생활의 좋은 본보기를 담은 《이솝 우화》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복음을 또 하나의 도덕 강론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천만부당한 말이다. 예수 탄생에 ‘이야기의 교훈’이란 없다. 그분의 부모와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은 우리에게 교훈으로 제시된 존재가 아니다.
복음서는 전반에 걸쳐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신 일은 진리이고 기쁜 소식이며 발표다. 구원은 당신 스스로 하는 일이 아니다. 당신을 구원하시려 하나님이 오셨다.
다른 종교들과 많은 교회들은 구원을 충고 정도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전한다. “당신이 애써 노력해 구원을 쟁취해야 한다. 당신이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 한다. 당신이 기도하거나 순종하거나 의식이 바뀌어야만 구원이 온다.” 하지만 기독교의 복음은 다르다. 주요 종교 창시자들은 방식만 다를 뿐 “내가 너희에게 영적 실체에 이르는 길을 보여줄 테니 그대로 다 행하라”라고 말한다. 그것은 충고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셔서 “내가 곧 영적 실체다. 너희가 결코 내게로 올라올 수 없기에 내가 너희에게로 내려왔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소식이다.
물론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 하지만 그분의 생애와 구원 전체가 크리스마스에 배태되어 있어 장차 이루어질 일을 예고해 준다. 그분은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셨고,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고, 우리가 당해 마땅한 일을 당하셨다.
하나님과 이웃에게 죄를 범한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바깥의 춥고 어두운 데다. 예수님은 춥고 어두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하지만 그것은 전조에 불과하다. 생을 마치실 때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부르짖으셨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영적 어둠 속에 내던져지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따뜻한 임재와 빛 속에 들어갈 수 있다.
요컨대 기독교의 주된 관건은 수양이 아니다. 기독교는 단지 삶의 감화나 지침을 얻는 곳이 아니다. 물론 기독교의 복음은 당신이 살아가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근본 메시지는 당신에게 구원이 필요하며, 그 구원이 털끝 만큼도 당신의 행위에서 나지 않고 그분이 이루신 일에서 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길은 윤리를 받아들이거나 개과천선(改過遷善)하거나 심지어 공동체에 들어가는 게 아니다.
우선 역사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정말 인간이 되셨는가? 예수님은 정말 당신을 위해 이 땅에서 사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는가? 정말 무덤을 이기고 부활하셨는가? 만일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삶의 방식도 다 정당성을 얻는다. 그러나 만일 성경의 이야기가 “아주 먼 옛날에”로 시작되는 감동적 충고일 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의 발표가 아니라면, 이 모두는 말짱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 크리스마스는 기독교가 단지 좋은 충고가 아님을 보여 준다. 기독교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2) 궁극적 실체를 가리키는 이야기들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픽션이 아니지만 단언컨대 픽션을 읽는 방식까지 아주 놀랍게 바꾸어 놓는다. 피터 잭슨(Peter Jackson) 감독이 톨킨(J. R. R. Tolkien)의 소설 <반지의 제왕>으로 첫 영화를 선보이기 직전까지도 문학 평론가들을 비롯한 문화계 인사들은 수많은 기사에서 공상 소설과 신화와 전설 따위에 열광하는 대중을 개탄했다. 그런 것들이 다분히 퇴행적 관점을 조장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모름지기 현대인이라면 더 현실주의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현실이 흑백이 아니라 회색이라는 것과, 해피엔딩은 실제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잔혹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앤서니 레인(Anthony Lane)은 톨킨의 원작 소설을 <뉴요커> (The New Yorker) 지에 이렇게 논했다. “온통 허세로 점철된 책이다. 그런데도 책이라는 걸 처음 읽을 때 우리 대부분이 그랬듯이 거기에 끌려 다닌다면 정말 탐독한다면 그만큼 삶의 애매한 현실을 직면할 마음이 없다는 증거이며 비겁함에 가까운 처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는 계속 여러 형태로 동화를 재활용한다. 사람들이 거기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미녀와 야수》,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아서왕》, 《파우스트》 등 유명한 동화와 전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다. 실화가 아닌 허구다. 그런데도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일련의 열망을 채워 주는 것 같다. 사실주의적 픽션은 결코 그런 열망을 건드리거나 채워 줄 수 없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갈망이 초자연 세계를 경험하려는 갈망, 죽음을 면하려는 갈망, 영원한 사랑을 만나려는 갈망, 늙지 않고 오래오래 살며 창의적 꿈을 실현하려는 갈망, 하늘을 날려는 갈망, 인류 이외의 존재와 소통하려는 갈망, 악을 이기려는 갈망 등이기 때문이다.
잘 구성된 판타지 이야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감동과 만족을 얻는다. 왜 그럴까? 이야기가 허구인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리 마음이 그런 것들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는 잠시나마 이런 갈망을 채워 주고, 미치도록 가려운 곳을 긁어 준다.
《미녀와 야수》는 우리가 자초한 야수성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사랑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우리가 일종의 마법에 걸려 잠자고 있으며 고귀한 왕자가 와서 깨울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설렌다. 내면 깊이 그것을 사실로 믿거나 믿고 싶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서는 안 된다. 악(惡)이 이겨서도 안 된다.
이야기 자체는 허구여도 그 배후의 실체만은 사실이거나 사실이어야 함을 우리는 가슴으로 느낀다. 그런데 우리의 이성(理性)은 이를 부정하며 비평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동화에 취해 절대적 도덕과 초자연 세계를 정말 믿고 또 인간이 영원히 살 줄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국 현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니 거기에 빠지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만난다. 언뜻 보기에는 이것도 다른 전설이나 판타지 이야기처럼 보인다. 이야기 속 인물은 다른 세상에서 우리의 세상에 침투하는데,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어 풍랑을 잔잔하게 하고 병을 고치고 죽은 자들을 살린다. 이에 적들이 공격하여 그를 죽임으로써 모든 희망이 사라진 듯 보이지만, 결국 그는 죽음에서 살아나 모두를 구원한다. 이것을 읽으면서 우리는 또 한 편의 훌륭한 동화라고 생각한다. 과연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배후의 실체를 가리켜 보이는 또 하나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아주 먼 옛날에” 대신 예수님의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여 그런 생각을 논박한다. 동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배후의 실체를 가리켜 보이는 또 하나의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 자신이야 말로 모든 이야기가 가리켜 보이는 배후의 실체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초자연 세계에서 오셨다. 머리에서 아니라고 말해도 우리는 그 세계가 존재함을 가슴으로 느끼고 안다. 크리스마스에 그분은 이상과 현실 사이 영원과 시간 사이를 뚫고 우리 사는 세상에 오셨다. 그러므로 마태의 말이 옳다면 이 세상에 악한 주술사가 존재하고 우리는 마법에 걸려 있다. 그런데 고귀한 왕자가 그 마법을 깨뜨리셨다.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을 사랑도 존재한다. 언젠가 우리는 정말 하늘을 날고 죽음을 이길 것이다. 지금은 “인정사정 봐 주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날에는 나무들도 춤추며 노래할 것이다(시 65:13; 96:11-13).
다시 말해서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동화는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진리 덕분에 전혀 현실 도피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이야기 (또는 그것이 가리켜 보이는 초자연적 실체)는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녀가 책을 읽다가 이렇게 말할 때 무어라 답할지 몰라 난감할 것이다. “정말 왕자가 있어서 용에게서 우리를 구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슈퍼맨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늘을 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럴 때 “정말 그렇게 될 건데!”라고만 내뱉고 말 수는 없다.
영화 <후크> (Hook)의 한 장면에서 영화배우 매기 스미스는 피터 팬 이야기 속 노년의 웬디 역으로 나온다. 그리고 로빈 윌리엄스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장성한 피터 팬을 맡았다. 웬디가 피터의 자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피터도 재미있어 한다. 그러다 한순간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피터, 이 이야기들은 실화야”라고 말한다.
크리스마스가 정말 실화라면 인류 전체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들이 전혀 오락용 현실 도피가 아니라는 뜻이다. 복음이 실화이기에, 그런 최고의 이야기들도 궁극적으로 모두 실현될 것이다.
3)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분
지금까지는 마태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는 복음서의 서두(序頭)부터 족보를 밝혔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내용은 무엇인가?
먼저 마태가 살며 글을 쓰던 당시의 문화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개인주의적 문화에서는 사람마다 자신의 학력과 경력과 실적을 열거하여 사람들에게 자기를 홍보하고 추천한다. 그러나 가족 중심의 공동체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마태복음 1장은 족보처럼 보일 수 있고 사실 족보이지만 또한 이력서이기도 하다. 당시의 이력서는 집안과 혈통과 가문으로, 즉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니까 족보는 세상을 향해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방식이었다.
흥미롭게도 당시 사람들도 요즘처럼 이력서를 위조했다. 우리가 자신의 경력 중에서 불리한 부분은 빼는 경향이 있듯이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알다시피 헤롯대제는 자신의 공식 족보에서 많은 이름을 삭제했다. 자신이 그들과 관계되어 있음을 아무도 모르게 하려고 말이다. 족보 겸 이력서의 취지는 자신이 수준 높은 명문가 출신임을 내세워 주변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데 있었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님께 정반대로 했다. 이 족보는 충격적이리만치 고대의 여타 족보들과 다르다. 우선 족보에 여자가 다섯이나 등재되어 있다. 모두 예수님의 어머니들이다. 현대 독자들에게는 이것이 특이해 보이지 않겠지만 고대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를 족보에 언급한 예는 사실상 전무하다. 다섯 명씩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문화의 여자들을 성적 아웃사이더라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그들이 버젓이 등장한다.
게다가 이 족보에 실린 여자들은 대부분 이방인이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사람이었고, 룻은 모압 사람이었다. 고대 유대인은 그런 나라 출신을 부정하게 취급해 성막이나 성전에 들어가 예배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인종적 아웃사이더라 할 수 있는 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는 버젓이 등장한다.
예상 밖의 반전은 또 있다. 특정 여인들을 거명함으로써 마태는 일부러 독자들에게 성경의 가장 더럽고 추하고 부도덕한 사건들 가운데 몇 가지를 환기시킨다.
예컨대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고 되어 있다(마 1:3). 그때 일을 떠올려 보라.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 자신과 동침하게 만들었다(전체 문맥을 보면 유다가 다말에게 저지른 불의도 분명히 나온다). 이런 근친상간 행위는 성경 어디를 보나 하나님의 법에 어긋난다. 예수님은 세라의 후손이 아니라 베레스의 후손인데도 마태는 굳이 베레스와 세라를 병기했고 다말까지 포함시켰다. 사건의 전말을 기어이 소환하기 위해서다. 바로 이 역기능 가정에서 메시아가 오셨다. 라합이 누구인지도 잊지 말라(마 1:5). 그녀는 가나안 사람으로도 모자라 매춘부였다.
그러나 전체 족보에서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인물과 그 배후 이야기는 6절에 나온다. 거기 보면 예수님의 혈통에 다윗 왕이 등장한다. 당신은 “조상 중에 왕이 있었다니 누구나 바랄 일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마태는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덧붙인다. 이는 성경의 굉장한 반어적 축소 표현이다. 성경의 역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이상해 보일 것이다. 왜 그냥 여자의 이름을 쓰지 않았는가? 그녀의 이름은 밧세바였다. 그러나 마태는 굳이 우리에게 이스라엘 역사의 비참하고 끔찍했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일단의 남자들이 광야까지 따라가 그의 편이 되어 목숨을 걸고 그를 지켰다. 소위 다윗의 용사들이다. 우리야도 그중 하나로 다윗을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썼다. 그는 다윗의 친구였고 다윗은 그에게 목숨을 빚졌다(삼하 23:39).
그런데 세월이 흘러 왕위에 오른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바라보며 탐했고 결국 동침했다. 그러고는 손을 써서 우리야를 죽이고 그녀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솔로몬인데 예수님은 그의 후손이다. 마태가 밧세바라는 이름을 뺀 이유를 알겠는가? 그녀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다윗의 치부를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 역기능 가정에서 그리고 이 치명적 흠이 있는 인간에게서 메시아가 오셨다.
여기 도덕적 아웃사이더들이 있다. 간음과 근친상간과 매춘을 저지른 남녀가 있다. 본문이 일깨워 주듯이 사실 남자 조상들인 유다와 다윗도 도덕적 실패자였다. 아울러 문화적 아웃사이더, 인종적 아웃사이더, 성적 아웃사이더도 있다. 모세 율법에 따라 모두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모두를 예수님의 조상으로 공공연히 인정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선 문화나 상류 사회나 심지어 하나님의 법에 의해 배제된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당신의 혈통이나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 설령 살인을 했더라도 상관없다. 회개하고 그분을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당신의 죄를 덮고 당신을 그분과 연합시킬 수 있다.
고대에는 ‘의식(儀式)상 부정하다’는 개념이 존재했다. 거룩하고 고상하고 착하게 살려면 부정한 것들과의 접촉을 삼가야 했다. 부정함이 전염된다고 보았으므로 그것들과 분리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것을 뒤집으신다.
그분의 거룩하심과 선(善)하심은 우리에게 닿아도 부정해질 수 없다. 반대로 우리가 그분께 닿으면 그분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 전염된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 왔든 관계없다. 아무리 도덕적 오점이 많아도 괜찮다. 그분께 오라. 그러면 그분이 당신을 눈처럼 순결하게 해 주실 수 있다(사 1:18).
반면에 다윗을 보라. 그는 세상 권력의 요건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고,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고, 빈민이 아니라 왕이었다. 하지만 마태가 보여 주듯이 다윗 역시 오직 은혜로만 예수님의 가족 안에 들 수 있었다. 그의 악행은 족보 속의 여자들이 행한 어떤 일보다도 악했다. 그런데도 그는 건재하다.
착한 사람은 받아들여지고 악한 사람은 배제되는 게 아니다. 누구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받아들여진다. 당신도 예수께서 이루어 주신 일을 믿음으로써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사람도 없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믿으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창녀와 왕,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서로 다른 민족이나 인종, 도덕적인 사람과 부도덕한 사람이 모두 대등하다. 똑같이 잃어버린 죄인이고 똑같이 사랑 받고 받아들여진다.
마태복음 1장은 “낳고”의 연속이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고 …” 그래서 지루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에나 편만하여 성경의 족보에서조차도 그분의 자비가 뚝뚝 떨어진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 우리는 다 그분의 가족이다. 히브리서 2장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11절)라고 했다.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볼 수도 있다. 모든 문화는 구성원들에게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얕보고 자신들의 우월성을 스스로 자랑하도록 몰아간다. 어쩌면 그 상대는 인종이나 계급이 다른 사람들일 수 있다. 어쩌면 당신은 교육 수준이 아주 높은 ‘먹물들’이라고 해서, 아니면 아예 배운 게 없는 ‘무식쟁이들’이라며 상대를 경멸할지 모른다. 또 어떤 사람들의 정치적 관점이 나라를 망친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깔볼지도 모른다. 이런 모든 예(例)에서 당신은 여태 배운 대로 상대를 속되고 부정한 괴짜로 보면서 자신만은 괜찮다고 여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은 혈통과 돈과 인종과 계급을 중시하지만 그분은 이 모두를 뒤집어 엎으신다. 예수님의 교회 밖에서 애지중지되는 그것들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서는 안 된다. 그분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바깥세상에서 퍽이나 중요한 것들이 나의 집에서는 그렇게 중요해서는 안 된다.”
4) 약속을 지키려 지금도 최선을 다하신다
족보에서 배우는 교훈이 또 있다. 족보는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많은 세대가 흘렀음을 일깨워 준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12:3). 사실은 그보다도 더 거슬러 올라간다. 창세기 3장 15절에 하나님이 친히 예언하시기를 장차 누군가가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하고 악을 무찌를 거라고 하셨다.
그런데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 그녀가 낳을 아기 이야기를 하기까지는 수십 세기, 수천 년이 흘렀다. 그때 마리아는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에게 하시리로다”(눅 1:54-55)라고 노래했다.
약속이 이루어지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직전 400년 동안에는 메시아는 커녕 선지자 하나도 그 백성에게 보내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잊으신 듯 보였고 아무도 오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분은 오셨다.
당신의 시간표로 하나님을 판단할 수는 없다. 더디어 보일 수 있으나 그분은 결코 약속을 잊지 않으신다. 일하시는 속도가 아주 느리거나 아예 약속을 망각하신 듯 보일 수 있지만, 그분이 하신 약속은 반드시 실현되며, 그분의 약속이 실현될 때는 언제나 당신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는 예수 탄생 이야기의 중심 주제 중 하나다. 사실은 성경 전체가 그렇다. 구약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를 보라. 오랜 세월 하나님은 요셉의 기도를 무시하신 채 온갖 재앙을 겪게 두신 듯 보였다. 그러나 결국 밝혀졌듯이 모두가 구원받으려면 그 모든 사건이 하나하나 다 필요했다. 요셉은 자기를 노예로 팔았던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 50:20)라고까지 말했다.
예수님은 또 어떤가. 그분은 병들어 죽어 가는 소녀를 고쳐 달라는 부탁을 받으셨으나 중간에 멈추어 다른 사람을 상대하시느라 야이로의 딸을 죽게 두셨다. 그분의 타이밍이 완전히 잘못된 것 같았으나 결국 그렇지 않음이 밝혀졌다(막 5:21-43).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무난하다고 여기는 기간이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사실상 전무(全無)하다. 그분은 우리의 의제나 일정에 따르지 않으신다. 방금 막 딸이 죽어 절망에 빠진 아버지 야이로에게 예수님은 “믿기만 하라”(막 5:36)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이나 같다. “나를 너의 시간 기준에 꿰어 맞춘다면 결코 내 사랑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네 쪽에서 잘못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니 말이다. 나는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
하나님은 약속을 잊으신 듯 보이지만 그분의 때에 반드시 이루시며, 막상 이루어지기까지 우리는 그분의 방법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신 일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자 왕이신 그분이 태어나신 곳은 궁전이 아니라 마구간이었다. 모든 기대에 어긋나는 방법이었지만,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셔야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하나님은 아마도 내게 약속을 지키시겠지만 나는 그분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나는 이미 인생을 망쳤고, 회복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족보를 보라. 마태복음 1장 2절에 보면 야곱이 메시아의 조상인 유다를 낳았다. 유다가 어떻게 야곱의 자식으로 태어났는지 아는가? 야곱은 거짓말로 아버지를 속이고 에서의 몫인 장자의 권리를 가로챘다. 이 사기극 때문에 가족이 분열되었고, 에서는 야곱에게 적의를 품었으며, 야곱은 고향을 떠나 도피해야 했다. 야곱은 가족을 잃고 죗값을 톡톡히 치렀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있었기에 그는 레아를 만났고, 레아도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다.
이 조화를 보라. 야곱은 잘못을 저질렀고 그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보다 크신 분이다. 그분은 그 모든 추악함과 미련함과 죄악까지도 쓰셔서 자신의 약속을 이루셨다. 하나님께 차선(次善)이란 없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그분의 목적을 이루고 계시다는 뜻이다. 이 찬송가 가사처럼 그분은 약속을 성취하신다. “주의 자비는 영원하여 늘 확고부동하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지만 아주 고운 가루로 만든다”는 걸 보여 준다. 하나님은 잊으신 듯 보일 수 있으나 지금도 모든 조치를 취해 놀라운 약속들을 성취하시는 중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보라. 그분은 우리가 감히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주실 분이다(엡 3:20).
5) 그토록 바라던 안식
끝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궁극적 안식이시다. 족보 말미에 마태는 세대 수를 강조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대라고 마태복음 1장 17절에 밝혀 놓았다. 보다시피 일곱대가 여섯 번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일곱 번째 일곱의 시작이 되신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성경에서 숫자 7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창세기에 보듯이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기 때문이다. 이레 중 하루인 안식일은 말 그대로 쉬는 날이다. 그런데 안식을 상징하는 숫자 7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모세 율법에 따라 농부들은 일곱째 해마다 자양분이 되살아나도록 땅을 묵혀야 했다. 즉 일곱째 해는 안식을 상징했다.
나아가 레위기 25장에 보면 일곱 번째 일곱 해 중에서 마지막 해인 49년째 해는 희년(禧年)이라 하여 모든 노예가 해방되고 모든 빚이 탕감되는 해였다. 온 땅과 온 백성이 고달픈 짐에서 벗어나 안식하는 해였다. 바로 안식년 중의 안식년이었다. 장차 하나님이 땅을 새롭게 하실 때 모두가 궁극적 안식을 누릴 텐데(롬 8:18-23; 히 4:1-11), 일곱 번째 일곱은 그 안식의 맛보기였다.
마태는 이 안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온다고 말한다. 이제 알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 속에 태어나신 게 아니라 실제로 시공 속에 들어오셨고, 창녀와 왕을 자신의 식탁에 함께 앉히시고자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이미 지금부터 그 안식을 맛볼 수 있다.
그것이 어떻게 믿음으로 가능한가? 우선 예수님 안에서는 당신의 자격을 입증할 필요가 없다. 알다시피 당신이 실패자든 왕이든 결국은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되는데, 그 은혜는 당신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받을 수 있다. 물론 그분을 알고 나면 그분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 싶어진다. 하지만 먼저 개과천선해야만 그분을 구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이 우리 내면에 안식을 가져다준다.
세상의 고생과 악으로부터도 우리에게 안식이 필요하다. 왠지 우리 힘으로 역사를 통제하고 모든 일을 바로 잡아야 할 것 같지만, 이는 진 빠지는 일일 뿐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 비록 반대로 보일지라도 크리스마스는 선하신 우리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말해 준다. 훗날 그분이 모든 일을 바로잡으실 것이다. 성령께서 이런 최종 구원과 궁극적 안식을 상기시켜 주실 때 우리에게 깊은 안식이 찾아온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찰 수 있다.
이것은 그저 낙관론이 아니라 마침내는 모든 일이 잘 된다는 기정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세의 시련과 비극에 부딪칠 때도 평안과 힘이 있다. 결국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을 덮을 것이다. 그때 희년의 왕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마침내 사랑과 기쁨의 온전한 안식을 주실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아주 먼 옛날에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이야기 속에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삶에 대한 교훈이 들어 있다”가 아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들어오셨다.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라”(눅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