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결코 정복당해선 안 되는 것
<스윗 프랑세즈>(사울 딥, 로맨스/멜로, 15세, 2014)
독일 나치가 프랑스 파리를 점령한 1940년 6월 16일부터 1944년 드골 장군이 파리에 입성하기까지 프랑스를 이끈 것은 비시(Vichy) 정권이었다. 독일군이 파리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프랑스는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항복하였다. 당시 부유했던 프랑스가 독일군의 침공에 너무 쉽게 항복한 이유는 1차 세계 대전으로 급격한 인구 감소와 전력 소모가 있었고, 정치적인 정적들 사이에서 일어난 내부적인 분열도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파리가 전쟁으로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예술과 문화재로 가득한 도시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은 그럴 듯 했지만 프랑스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오명을 남겼다. 패전 후 비시 정부가 출현함으로써 프랑스는 나치의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적극 협력한 국가 중 하나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라의 열쇠>와 <라운드 업>은 비시 정권과 나치의 소위 ‘콜라보(협업)’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다.
영화 <스윗 프랑세즈>는 프랑스의 패전 후에 프랑스 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여러 에피소드 가운데 특히 독일군 장교와 프랑스 여성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계 여성 작가 이렌 네미로프스키가 독일 나치에 붙잡히기 전까지(1942년 7월) 집필한 미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되었다. 총 5부로 기획했지만 2부를 끝으로 네비로프스키는 체포와 동시에 집필을 중단하고 같은 해 8월에 아우슈비츠에서 명을 달리했다. 가방 안에 들어 있었던 그녀의 원고는 60년이 지난 후 딸에 의해 발견되어 빛을 보게 되었는데, 2004년 프랑스에서 출판 후 프랑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르노도상을 수상하였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되어 지금까지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문학세계사에서 “프랑스 조곡”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가 이번 영화 개봉을 계기로 “스윗 프랑세즈”로 제목을 바꾸어 재출간되었다.
소설 가운데 1부 “6월의 폭풍”은 파리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후 파리 시민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 뷔시 마을로 속속들이 몰려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파리를 보호할 명목으로 서둘러 항복한 이후 프랑스 사회는 급속도로 와해되었고, 프랑스인들은 갑작스런 변화로 극도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특정 인물에 중심을 두지 않고 당시 상황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려내듯이 서술하면서도 2부에 등장할 인물들의 관계를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2부(돌체)는 파리를 점령한 독일군의 일부가 뷔시 마을에 주둔하면서 뷔시 주민들과 갖는 다양한 관계를 다룬다. 영화는 2부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영화의 배경은 파리 남부의 작은 시골 마을 뷔시다. 뷔시의 이모조모를 마치 스케치하듯이 보여주고 있는데, 평온한 전원풍경과 마을의 평화로운 분위기는 몰려드는 피난민과 점령군에 의해 순식간에 혼돈으로 변했다. 특징적인 점은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마을 주민들 사이의 갈등과 반목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에 있다. 지주와 소작농 사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 이웃 간의 갈등과 반목의 관계 등은 당시 마을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게 해준다. 마을은 평화로운 듯이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전쟁 전에도 이미 갈등과 반목이 있었고, 계급 차별이 일상이 된 농촌 마을이었다. 전쟁으로 전통 가치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없었던 일들이 전쟁과 함께 생긴 것이 아니라 그동안 숨겨진 모습들이 표면적으로 드러났을 뿐임을 역설한다.
이 사실은 관찰자의 시점에서 볼 때 적과 아군에 대한 생각을 모호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데, 영화 안에서도 이런 시점의 혼란은 적군인 독일군에 대해 우호적일 뿐만 아니라 그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갖는 마을 여성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독일군을 프랑스인과 비교해서 크게 다르지 않은 남자로 생각했다. 독일군이 가난한 소작농을 착취하는 지주들이나 서로 질시하고 반목하는 마을 사람들보 오히려 더 낫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이 영화가 단순히 로맨스가 아니라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사회 영화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전쟁과 함께 드러나는 마을 주민들의 갈등과 반목을 보여주면서도 영화는 한 남녀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 말해서 파리를 점령한 독일군이 이곳에 주둔하였을 때, 장교들은 계급에 맞는 거주지를 배정받는 규정에 따라 마을 사람들은 그야말로 적과의 동침을 감내해야만 했다. 독일군 장교 브루노는 루실과 시어머니가 사는 집에 거주하게 되었다. 참전 후 아무 소식이 없는 남편을 기다리며 마음을 조아리고 있던 터라 루실은 물론이고 시어머니 역시 이런 상황이 편할 순 없었다. 특히 프랑스의 항복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어머니는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불미스런 일을 염려하여 며느리에게 독일군과 결코 말을 섞지 말라고 엄히 경고한다. 그러나 피아노를 전공한 루실의 마음이 밤마다 브루노가 연주하는 미상의 피아노곡에 끌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긴장의 시간 속에서 음악은 두 사람을 연결하기에 충분했고, 둘은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며 마침내 금지된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를 눈치 챈 동네 사람들의 비난 때문에 루실은 심각한 마음의 갈등을 겪는다. 과연 적과의 동침은 계속될 수 있을까?
한편, 브루노와 사랑에 빠진 루실의 마음을 뒤 흔든 사건이 일어난다. 마을에서 독일군 장교가 살해당한 것이다. 가깝게 지내는 이웃의 남편이 저지른 일이었는데, 그는 독일군 장교를 살해 한 후 숲으로 피신했다. 살해자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상황에서 루실은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오직 자신뿐임을 알았다. 브루노는 도망자를 색출하는 책임자가 되고, 루실은 자기 집에 도망자를 숨겨주는 등, 또 다른 의미에서의 적과의 동침이 전개된다. 루실은 비록 음악 때문에 브루노와 가까워졌고, 또 그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집에 숨어 있는 프랑스인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브루노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낌새를 눈치 채고 있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루실을 보호하기 위해 브루노는 모른 척 했다. 게다가 결국엔 그녀가 범인과 함께 파리에 있는 레지스탕스와 합류하기 위해 떠날 때 검문소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한다. 사랑과 애국 사이에서 번민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는 참으로 복잡한 상황과 심리 상태를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사랑과 애국 사이에서 결국 조국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당시 독일 나치에 너무 쉽게 항복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협력한 프랑스 정부와 비교해볼 때 매우 대조적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소설이 프랑스인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프랑스인들에게 자성을 촉구하는 작품으로 평가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로맨스의 장르를 빌리고 있지만, 영화는 결코 사랑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볼 수는 없다. 장르와 소재만을 빌려 왔을 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루실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영화의 메시지를 파악하는 데에 기여한다. 영화는 엔딩 부분에 등장하는 자막을 통해 소설에 대한 네미로프스키 딸의 생각을 소개하고 있는데, 영화를 로맨스로만 보는 관점에서 흔히 사랑과 애국의 갈등 관계 속에서 조명하는 것과 달리, 그녀는 비록 국가는 정복했더라도 개인의 정신만은 정복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엄마의 마음을 이해했다. 독일군은 비록 프랑스 땅을 점령했을지라도, 정신만은 결코 정복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정신만은 결코 정복당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로 들린다.
2009년에 개봉한 영화 <인빅터스(invictus)>는 아파르헤이트(Apartheid)라 불리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에 맞서 흑인 인권을 향한 열정을 불태우다 종신형을 받고 26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넬슨 만델라의 이야기다. 영화는 특별히 대통령이 된 이후 축구와 관련한 일화를 중심으로 해서 전개되는데, 핵심은 그 무엇으로도 점령할 수 없는 영혼에 대한 이야기다.
<인빅터스>의 의미를 연상케 하는 <스윗 프랑세즈>에 필자가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들을 수 있는 친일파 후손들의 변명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온갖 친일 행각을 일삼으며 부와 명예를 누렸던 사람들은, 영화 <암살>에서도 나오듯이, 암울한 시대에 대한제국의 해방을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느냐고 변명한다. 오히려 일제의 내선일치 정책에 적극 협력했기 때문에 전근대적인 나라의 근대화에 이바지 할 수 있었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는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통해 쉽게 굴복했던 정신에 대한 변명을 합리화시키려 하고 있다. 그들은 쉽게 정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해서는 안 되는 정신의 의미를 철저히 간과하고 있다. 근대화로도 결코 보상 받을 수 없는 것이 정신의 피폐함이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정신이 오늘날 대한민국 현실에서 어떤 비극적인 결과를 빚어내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리는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정신을 통해 지켜져 왔음을 믿는다. 비록 폭력적인 정치에 의해 일시적으로 물러나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결코 정복할 수 없는 것은 정신임을 명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