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요십조 8항 원문을 보면:
원문 :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銜統合之怨, 犯 生亂, 且其僧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 或附王侯宮院, 奸巧言語, 弄權亂政, 以致 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여기서 문제가 되는 車峴以南, 公州江外의 지역은 어디인가?.
한자를 보면 車峴의 峴은 볼見에 뫼山이 옆에 붙어있는 고개/재 峴자로 산이 눈높이에 보이는 높지않은 지역를 뜻하는 글자다. 嶺이란 거느릴領에 뫼山을 머리에 이고있는 글자로 산들을 거느리고 있는 높은 지역을 뜻하는 글자다. 낄夾에 뫼山이 옆에 붙어있는 峽[협]은 높은 산과 산사이에 있는 낮은 지역을 뜻한다. 구릉지와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고개나 재가 많으며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가는 종적개념으로 지역의 높낮이에 따라서 峴,嶺,峽를 선택하여 사용했다.
峴을 사용한 예를 보면, 서울 강북에 있는 大峴/阿峴/車峴/梨峴/紅峴/雲峴/藥峴/葛峴/餠市峴/瓦署峴/西學峴/綠礬峴, 서울 강남의 論峴/上峴/南峴/栗峴, 개성의 泥峴/銅峴/不朝峴/朱雀峴, 성남의 葛峴/金峴/走川峴/陽峴/書峴, 용인의 上峴/葛峴, 인천의 葛峴/橘峴/三呼峴, 다산 정약용의 고향 남양주 馬峴처럼 지역내에서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구릉지같이 높이가 낮은 고개에서 사용되었다. 嶺을 사용한 예를 보면 鐵嶺,寒溪嶺,陳富嶺,彌矢嶺,大關嶺,花折嶺,鳥嶺,秋風嶺,車嶺,六十嶺처럼 높이 솟은 산봉우리와 그에 연결된 험준한 산마루가 있는 高峯峻嶺[고봉준령]지역에 사용되었으며 높고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지역에 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까지 사용예가 남아있는 서울의 갈현동,송현동,대현동,아현동,논현동,남현동,율현동,녹번동의 녹번현,상도동의 상현처럼 야트막한 산이나 구릉지가 있는 지역에 峴을 써서 표기했다. 높은 산과 험준산 산마루가 있는 조령[鳥嶺]은 충북과 경북을 가르는 백두대간에 있지만 전국 여러 곳에 있는 조현[鳥峴]이란 지명은 높이가 낮은 고개들이다. 峴은 마을이 형성될수 있는 구릉지대지만 嶺은 높고 험준한 지역에 쓰였다. 峴는 전국 방방곳곳에 매우 많이 있지만 嶺은 제한적이어서 손에 꼽을 정도이다.
훈요십조를 원문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원문의 峴이란 글자를 嶺으로 바꿔치기하여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峴자를 嶺자로 바꿔치기하는 것도 모자랐는지 한술 더떠서 종적개념인 峴자를 산맥처럼 길다란 횡적개념인 산맥으로 왜곡하여 원문의 車峴以南을 車嶺山脈以南으로 조작 왜곡함으로써 원문의 뜻이 완전히 달라지도록 만드는 사람이 있다.
車嶺山脈 명칭은 1903년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가 처음 만들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용어로 일제시대 이전의 산경도나 지리서에는 없는 명칭이다.
고토분지로가 명명한 車嶺山脈은 백두대간이 강원도 중남부 오대산 부근에서 분기하여 남서로 뻗어 충청북도와 경기도의 도계를 이루고 충북과 충남 경계지역에서 끊겼다가 다시 충남 북부지역에 나타나 서해까지 뻗은 산맥이다. 따라서 훈요십조의 차현이남을 차령산맥이남으로 왜곡하여 해석하면 차령산맥이 지나는 지역 아래지방인 강원도 남부이남과 충청도이남 전체가 된다. 훈요십조의 峴을 嶺으로 왜곡 변형하여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고문서/기록들을 보면 車峴 지명이 있는 곳은 평북 정주시,평양시 순안구역,황해도 은율군, 漢城府 車峴大路,충북 음성군,충남 연기군,경남 산청군 등이고 車嶺 지명이 있는 곳은 충남 천안시,강원도 정선군,평북 초산군이다.
그중 충북 음성군의 차현고개, 수레티 고개(한자로 표기하면 車峴고개)는 지금도 사용하는 지명으로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과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사이에 있다. 강원도 중부 오대산에서 뻗어나온 차령산맥의 중간지점인 충북 음성군 삼성면과 생극면 지역에는 차현고개, 차곡리,차평리, 車의 순 우리말인 수레의산, 수레티고개, 수레울등 車에 관련된 지명이 유달리 많다. 수레티의 티나 수레울의 울은 모두 지역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강원도 중남부부터 충남북부 서해안까지 이어지는 차령산맥의 충남 천안 차령지역은 실제로 산이 높고 험준한 高峯峻嶺지역이고 충북 음성의 車峴지역은 산이 낮은 지역으로 삼국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이며 두 지역은 지리적,역사적으로 다른 지역이다. 훈요십조 8항의 차현은 충북 음성의 차현과 지리적,역사적으로 일치한다.
음성군 북쪽의 중부고속도로가 지나는 차현고개주변 차령산맥지역은 삼국시대에 매우 중요한 지리적, 군사적 요충지로, 특히 동남쪽에 치우친 신라가 경상도와 충북의 경계인 이화령을 지나 한강 및 경기도로 진출하여 당나라와 교역하고 한강 경기지역의 풍부한 물자를 수도인 서라벌로 가져오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통일신라는 차현고개 이남인 청주지역에 5소경의 하나인 서원경을 두었고 차현고개 북동지역에 중원경을 두었다. 5소경은 작은 서울이란 뜻으로 중앙정부를 대신하여 통치하고 지방세력을 감시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차현고개 주변 차령산맥을 경계로 북쪽과 남쪽에 전체 5소경중 두개의 소경을 둔 것은 그만큼 이지역이 정치적,군사적,지리적으로 중요하였다는 뜻이다.
당나라와의 교역물품들과 경기,한강지역에서 생산된 생산물품들을 실은 수많은 마차와 인력들이 차현고개, 이화령을 거쳐 경상도 서라벌로 가고 다시 경상도 서라벌에서 출발하여 이화령 차현고개를 거쳐 경기, 한강지역으로 갔으며 수레(車)와 관련된 지명이 자연스레 생겨났을 것이다. 고지도, 고문서 및 금석문에 차현고개 및 차에 관련된 표기가 많이 남아있고 현재도 차/수레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에 비해 충남 천안은 차령말고는 차에 관련된 지명이 안보인다. (그림1,그림2,그림3)
다음으로 훈요십조 8항 車峴以南, 公州江外의 公州江外는 어디이고 公州江內는 어디인가. 錦江과 公州江은 같은 개념인가.
고지도와 조선시대 山經表등을 보면 白頭大幹의 淸北正脈과 淸南正脈사이에 있는 강을 淸川江이라 하고, 漢北正脈과漢南正脈사이에 있는 강을 漢江이라 하고, 錦北正脈과 錦南正脈사이에 있는 강을 錦江이라 하며, 洛東正脈에 있는 강을 洛東江이라 했다.
동국여지승람 등에 보면 금강은 지나가는 지역에 따라 옥천지역은 赤登津江, 청주지역은 淸州江, 연기지역은 芙江, 웅진지역은 熊津江, 부여지역은 白馬江, 하류지역은 古城津江으로 불렀으며 강 전체를 뜻하는 금강과는 다른 개념이다. 웅진이란 지명이 통일신라 경덕왕때 웅주로 바뀌었고 태조 왕건이 웅주를 公州로 개칭하였으며 공주현지역을 흐르는 강 이름도 지명에 따라 공주강으로 개칭되었다.(그림4)
한강이 지역에 따라 홍천강,평창강,주천강,동강,소양강,북한강,섬강,남한강,임진강으로 불리지만 강 전체를 뜻하는 한강과 개념이 다르고, 낙동강이 지나가는 지역에 따라 안동강,밀양강,영강,금호강,남강이라 불리지만 강 전체를 뜻하는 낙동강과 다른 개념이며, 영산강이 지역에 따라 남포강,목포강,사호강,곡강,오례강,황룡강이라 불리지만 강 전체를 뜻하는 영산강과 다른 개념이고, 만경강이 고산천,소양천,탑천,삼천과 전주시를 지나는 전주천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錦北正脈과 錦南正脈사이에 퍼져있는 강 전체를 뜻하는 錦江과 公州고을을 흐르는 公州江은 다른 개념이다.
公州江外의 外자가 사용햇던 예를 보자. 왕이 있는 도성안[都城內] 도성밖[都城外], 왕이 있는 본주내[本州內] 본주외[本州外], 서울市內/市外 부산市內/市外, 공주市內/市外처럼 행정구역이나 성벽, 강과 같은 인공물이나 자연물이 경계를 이루는 안쪽과 바깥을 구분하기 위해 內/外를 사용한다. 왕이 있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가리킬때는 內/外를 쓸수 없으므로 왕이 있는 지역에서의 방위를 따져 東西南北을 붙여서 사용하였다.
고려초 수도 개경이 있었던 관내도(關內道), 평안도 지역인 패서도, 충청도 지역인 중원도,하남도 전라도 지역인 강남도, 해양도, 경상도 지역인 영남도, 영동도, 산남도 모두 이런 방식으로 지어진 명칭이다. 따라서 왕이 있는 도성이나 왕이 있는 본주와 멀리 떨어진 지역은 왕이 있는 곳에서 봤을때의 동서남북 방위개념을 사용하여 표기한다. 이러한 표기법은 중국과 한국등 한자문화권에서 수천년간 표기해온 표기법이고 지금도 널리 사용하는 방식이다. 왕성이나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동서남북 방위 대신에 外를 써서 표기한 예는 없다. 外를 以南으로 조작 왜곡하여 해석하는 것은 근거를 찾아볼수 없는 잘못된 해석이다.
公州江內/外식으로 표기해보면 한강을 경계로 한성쪽은 한강내라 하고 강건너편은 한강외라 하고 공주강을 경계로 공주성쪽은 공주강내라 하고 강건너편은 공주강외라 하고 전주천을 경계로 전주성쪽은 전주천내라 하고 건너편을 전주천외라 하며 달구벌강을 경계로 대구성쪽을 달구벌강내라 하고 대구성 강건너편을 달구벌강외라 한다. 아직도 그런 표기 흔적이 남아있는데 신라말에 서원경성이 있었던 지역인 청주시 쪽을 강내[江內]라 하고 강건너 지역을 강외[江外]라 하였는데 지금도 금강을 경계로 청주시 쪽이 청원군 강내면[江內面], 강 건너편이 청원군 강외면[江外面]이다. 따라서 훈요십조 公州江外는 公州城에서 봤을때 공주강을 경계로 안쪽은 公州江內이고 강건너편이 公州江外이다.
위와같은 내용들을 가지고 훈요십조 8항의 車峴以南 公州江外을 해석하면 車峴은 충북 북쪽에 있고 公州城은 공주강 아래에 있으므로, 차현고개에서부터 남쪽(車峴以南)으로 내려오다 만나는 공주강바깥(公州江外)지역까지이다. 즉 車峴以南지역과 公州江外지역이 서로 겹치는 교집합 지역을 말한다. 이지역은 신라말 西原京지역으로 오늘날의 음성,진천,청주,연기지역이 될것이다 (그림5). - 훈요십조 8항 車峴以南 公州江外 해석의 결론.
만약 훈요십조 8항식으로 개성과 서울 사이의 파주지역을 표현하면 開京以南 漢城府外가 되며 이것은 개성이남과 서울시 바깥 경계 사이에 있는 지역인 파주를 뜻하지 서울시 남쪽인 강남이나 수원을 뜻하지 않고, 漢江以南 水原市外라고 하면 한강이남과 수원시 경계 바깥사이인 과천,성남을 뜻하지 수원시 남쪽인 천안을 뜻하지 않는 것과 같다.
송악산[松岳山]은 개성의 북쪽에 있고 평양강[平壤江]은 평양성[平壤城] 남쪽에 있으므로 松岳以北 平壤江外라하면 개성 북쪽지역으로 올라가서 평양강까지로 양쪽 사이에 있는 황해북도 지역을 뜻하지 평양강[平壤江] 북쪽지역 평안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鳥嶺以南 安東江外라 하면 조령이남과 안동강 사이에 위치한 문경지역을 비정한 것이고, 달구벌(대구의 고지명)강은 오늘날 대구시 금호강으로 공주강이 公州縣을 감싸고 흐르듯 達句伐縣를 감싸고 흐르는데 鳥嶺以南 達句伐江外라 하면 조령이남과 達句伐縣(대구시) 경계 사이에 있는 지역을 뜻하지 達句伐江(금호강) 남쪽인 대구시와 경남을 뜻하지 않는 것과 같다.
훈요십조가 기록된 고려사를 보면 936년 태조 왕건 19년에 후백제를 평정하고 후백제 지역을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였는데 安은 長安의 뜻으로 왕이 있는 개경을 뜻하며 安南은 개경의 남쪽 지역이란 뜻이다. 또한 경주(慶州)를 개경의 동쪽지역이라 하여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개경의 서쪽지역 해주(海州)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라 하였다. 또한 거란의 침입으로 훈요십조 원본이 불타기전인 고려 6대왕 성종 995년에 지방 행정구역을 공주,대전지역의 공주강 남쪽지역을 하남도(河南道), 전북지역을 강남도(江南道), 전남지역을 해남도(海南道)라 하였다. 개경에서 봤을 때 공주강 남쪽에 있으면 河南道, 江南道라 하였고 개경에서 봤을 때 백두대간 남쪽에 있으면 嶺南道, 동쪽에 있으면 嶺東道라 하였다. 왕이 있는 개경에서 봤을때 명칭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봤을때 전라도는 금강 남쪽이란 뜻의 湖南, 경상도는 백두대간 남쪽지역이라하여 嶺南, 강릉지역은 嶺東, 원주지역은 嶺西라 하였다. 위의 경우처럼 고려 태조 왕건부터 조선말까지 公州江以南 지역은 개경과 한양에서 봤을때 남쪽이므로 南이란 단어를 넣어서 기록하였다. 태조 왕건이 생전에 公州江以南을 개경에서 봤을 때 남쪽이라 하여 南을 써서 표기했고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등 우리 조상들이 기록한 정사에 公州江以南 지역을 개경이나 한양에서 봤을때 南으로 표기했지 外라는 희한한 표기는 없다.
車峴以南을 빼고 公州江外을 錦江以南으로 왜곡 변형하면 公州江은 크게 전북과 충북에서 발원한 지류(몇몇 고지도는 충북에서 발원한 금강지류를 더 굵고 길게 표시했고 신라말에 청주를 금강 명칭을 따서 청천현이라 했고 고려,조선시대 기록에도 청주강이라 표기된 예가 있음)가 公州縣에서 만나 公州江이 형성되므로 전북에서 발원한 지류로 보면 충청도 중부/남부와 전라도, 충북에서 발원한 지류로 보면 충청도 동부와 경상도로 삼남지방 대부분이 해당된다. 그러나 훈요십조8항에서 차현이남을 빼고 공주강외를 금강이남으로 해석하는 것은 원문을 왜곡 조작하는 해석이며 그리 할 이유가 없다. 만약 태조 왕건이 오늘날의 충청도 중부/남부와 전라도를 지칭하고 싶었다면 복잡하게 車峴以南 公州江外라 하지않고 간단히 公州江以南이나 또는 당시 충남, 전북을 가리키는 河南以南지역 또는 江南以南지역이라고 했을 것이다.
지역주의자들 방식대로 훈요십조의 차현이남이 차령산맥이남이라면 강원도 중남부 오대산에서 내려와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인 차령산맥이남 지역은 강원도 남부, 충청도이남 전체가 된다. 충북 음성의 차현을 충남 천안의 차령과 혼동하여 차현을 차령으로 변형하고 공주강외를 공주강이남으로 왜곡 변형하여 해석하여도 공주강 남쪽에 있는 공주,부여,대전,청주 등 삼국시대부터 충청도 지역의 정치,경제,문화 및 교통의 중심지역이 모두 들어간다. 그럼에도 직접 해당지역인 충청도는 빼고 멀리 떨어진 전라도설을 주장하는 이유가 뭔가. 지리적,인문적 소양 부족이나 사악한 정치적 목적이 아니면 주장할수 없는 비학문적이고 비양심적인 주장이다.
궁예는 변란을 피해 차현고개 인근의 칠장사에서 유아때부터 10여세까지 보냈다 (
http://blog.chosun.com/casy/3585459). 그런 연유로 칠장사에서 가까운 5소경중 하나인 서원경이 있었던 청주지방 일대는 궁예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으며 궁예가 청주출신 사람들을 각별히 신임하여 중용하였고
왕권강화를 위해 청주사람들을 철원으로 이주시켜 왕조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왕건일파의 반란으로 나라를 빼앗긴 궁예의 추종세력들은 크나큰 분노와 반감을 가졌고 궁예의 정치적 고향이자 왕조의 기반이었던 청주지방을 중심으로 임춘길,이흔암,선장형제 등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서 왕건이 그지방 호족들에게 동물의 성씨를 내리면서까지 탄압하였고 일부 세력은 후백제에 투항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왕건은 청주인들의 반란이 계속되자 청주인들이 집단이주한 철원지역을 피해 자기의 고향인 송악으로 수도를 옮긴다. 고려중기 청주 남쪽에 있었던 천민주거지역 명학소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차현이남 공주현 외곽지역은 적극 호응하였다.
왕조를 찬탈하면 이전 왕조의 기반이 되었던 지역은 새왕조에서 경계하게되고 이전 왕조의 기반이 되었던 지역은 옛 영화를 되찾고자 틈만나면 도발함으로 왕건이 궁예의 기반이었던 청주지방을 경계하라는 유훈을 남긴 것으로 보여진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왕조의 기반인 개성사람들을 많이 살상하고 과거를 못보게 했던 기록이 있는데 같은 맥락이다.
후삼국시대 말에 풍수도참설을 완성시키고 고려,조선의 정책과 일상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던 풍수의 宗師이자 고려초 國師였던 도선은 왕건의 아버지 왕융에게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지시켰고 송악산에 솔나무를 심고 왕성의 기반을 다지도록 하였다. 또한 전라북도 성수산(聖壽山)이 산세가 천자가 조례를 받는 천자봉조지상(天子奉朝之像)으로 왕기가 서린 지역이라 하여 초야에 묻혀있던 왕건을 데려다 성수산에서 107일간 기도하게하고 고려를 건국하도록 훈육하였다.
스승인 도선에게서 풍수의 영향을 크게 받은 왕건은 청주인들의 반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고 쿠데타로 몰아낸 궁예의 정치적 기반이자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를 건국한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를 멸망시킨 김유신의 출생지역이기도 한 차현이남 공주강외 지역이 풍수적으로 꺼려졌을 것이다.
스승 도선의 고향이자 청년시절 개국의 기반을 닦았던 전라도에 대해 왕건이 다른 지역보다 호감을 가졌다는 증거가 있는데 말년을 함께 보낸 부인들이 전남 승주출신이고,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고 장성한 큰 아들 왕무에게 왕위를 물려준 점이 그렇다. 또한 개국후에 스승 도선의 의견에 따라 여러 곳에 비보 사찰을 세우고 불교 숭양을 훈요로 남기고 국교로 삼았다.
태조 왕건의 권력 핵심중에 핵심이 대부분 전라도출신이며 마음과 권력을 모두 전라도에 주었다고 보여진다. 전혀 그렇지 못한 지역이 태조 왕건이 전라도 차별하는 훈요8항을 남겼다고 왜곡하는 것은 빈한한 자가 부귀한 자를 시기하는 꼴인가!
고려초 기록을 보면 풍수적으로 本州인 개성/경기도와 배류하는 강으로 낙동강,섬진강을 지목했는데 그 이유는 본주를 등지고 남쪽으로 흐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청주강은 충북 음성군 부용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충남 연기군에서 전북쪽에서 오는 지류와 합류하여 부강을 이루고 공주지역으로 흘러가서 공주강을 이룬다. 고려초 풍수에 따르면 차현이남 공주강외 지역에 위치한 청주강은 본주와 배류한다.
훈요십조 車峴以南은 車嶺山脈以南이고 公州江은 錦江이라고 왜곡 조작하면서도 차령산맥이남, 금강유역에 직접 속하는 충청도 지역은 훈요십조가 가리키는 지역이 아니고 차령산맥과 공주강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도지역이 훈요십조가 가리키는 지역이라며 훈요십조 전라도설을 주장한 사람이 누구인가.
자료에 의하면 일제강압기에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편수관 이마니시(今西龍)에 의해 그 해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기 시작하였다. 이마니시는 구한말까지도 우리의 역사로 가르쳤던 단군조선을 신화로 규정하여 우리 역사의 기원을 일본보다 아래로 만들고 임나일본부설을 주입시켰으며 한사군의 위치를 조작하려 점제현비를 조작하고 식민지배에 장애가 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일부 내용을 부정하는 등 일제 식민지배를 위해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 조작했던 핵심인물이다.
차현이남 공주강외 뜻를 왜곡 변형한 이마니시는 그러나 전라도는 차별받지 않았으므로 훈요십조는 조작됐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마니시의 수제자 이병도는 이마니시 해석은 계승하고 조작설은 부인하였다. 해방후 이병도는 국사학계를 장악하고 이마니시의 식민지사관에 입각한 주장들을 그대로 계승하여 우리 역사를 가르쳤으며 훈요십조 8항 해석도 이마니시의 주장 그대로 1948년에 발표된 자신의 논문에 넣으면서 유포됐다.
건국대 신복룡 명예 교수는 "일찍이 ‘고려사’ 태조 편이 편찬되어 있었지만 현종 시대(1010-1011)에 거란군 40만 명이 쳐들어 왔을 때 모두 불타고 없어졌다. 그래서 태조가 죽은 지 80년이 지나서 ‘고려사’를 다시 편찬했다. 이때 최제안(崔齊安)이라는 인물이 최항(崔沆)의 집에 있는 문서를 가지고 와서 왕건의 유서라고 하며 실록에 끼워 넣었다.(‘고려사’ 열전 최승노·제안 조) 최항은 경주 황룡사(黃龍寺)의 중창(重創)을 주장하고 이를 수행한 인물로서 신라의 후예였다. 최제안은 고려 초기의 중신이었던 최승노(崔承老)의 손자이며, 최승노는 경주 출신으로 신라에서 고위 벼슬을 지낸 최은함(崔殷含)의 아들이다. 이미 불타고 없었던 훈요십조가 8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복원되었고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신라 구신(舊臣)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훈요십조의 진위가 의심스럽다. 왕실의 그토록 중요한 문서가 어떻게 사가(私家)에 보관되어 있었을까?" 라며 훈요십조 진위에 의문을 제기했다.
옛 신라지역 출신인 정몽주는 백제지역 왕조출현에 강한 거부감을 표했고(
http://blog.chosun.com/casy/3651498), 영남출신으로 부관참시당한 김종직과 영남 남인과 같은 남인계열로 당시 전라도 광산김씨가 주도했던 권력싸움에 패해 가문이 큰 고초를 겪었고 자신을 훈육한 부모같은 친형이 장살당한 아픈 기억으로 평생 야인생활을 했던 이익과 이익의 종친, 제자들 중 이중환,안정복 등이 개인 저서에서 훈요십조 전라도설을 주장했으나 고려/조선왕조 인사정책과 관련없는 개인적인 주장일뿐이다. 조선초기 전라도 반남박씨에게 권력싸움에서 패한 경상도 청송심씨는 가훈으로 반남박씨와 통혼을 하지말것을 가훈으로 남겼는데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나올수 있는 개인적 주장이나 가문간의 다툼이 반영된 주장을 지역주의로 왜곡 악용해서는 안된다.
현지 실사를 하지않아서 오는 지리적 개념의 무지나 사료들을 충분히 연구하지 않아서 오는 인문적 소양의 부족 또는 잘못된 식민사학자의 주장을 분별없이 인용했던간에 훈요십조 8항의 전라도설 주장은 잘못됐으므로 학설을 올바르게 정립하여야하며 훈요십조 8항을 왜곡 변형하여 호남지역을 음해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1. 고려초기에 백제지역 호족,귀족들이 중앙에 대거 진출하여 권력의 핵심이 되었고, 8대왕 현종은 공주강이남에서 태어난 공주의 김은부 세딸과 전주 박온의 딸을 왕후와 후궁으로 삼아 김은부의 딸이 낳은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고려중기 17대왕 인종의 비 공예왕후 임씨가 전라도 장흥에서 출생하여 왕비가 되면서 이후 고려가 멸망할때까지 공예왕후계열에서 왕들을 배출했다. 또한 고려후기 26대왕 충선왕이 왕실과 통혼이 가능한 '누대의 공신이요 재상의 우두머리'인 당대 1급 가문들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는데:
언양김(彦陽金), 정안임(定安(장흥)任, 시조 임호), 경원이(慶源李), 파평윤(坡平尹), 안산김(安山金), 철원최(鐵原崔), 해주최(海州崔), 공암허(孔岩許), 평강채(平康蔡), 청주이(淸州李), 당성홍(唐城洪), 황려민(黃驪閔 ), 횡천조(橫川趙), 평양조(平壤趙), 전주김(全州金, 시조 完山君 김태서)"
위의 15개 본관들을 보면 경기도 7개, 황해도 2개, 강원도 2개, 전라도 2개(정안임,전주김), 충청도 1개, 경상도 1개이다. 충청/전라/경상의 하삼도중에서 전라도가 충청도/경상도보다 많다.
또한 불교국가인 고려에서 국사는 왕을 계승할 권한이 있는 태자가 왕위를 버리고 승려가 되어 국사가 될 정도로 고귀한 지위이자 왕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기도 하는 자리였으며, 사대부들의 나라인 조선이 세도정치와 서원의 폐단으로 국력이 약화된것 처럼 불교의 나라인 고려는 승려들의 횡포와 사원의 폐단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조선에서 억불숭유정책을 채택하는 부작용을 겪기도 한다. 최상류층인 승려들을 통솔하는 국사가 사찰이 전라도보다 훨씬 많은 경상도,충청도 지역보다 전라도지역에서 대거 배출된 것은 개성/서경 세력에 이어 전라도지역이 제2의 권세를 누렸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2. 이병도는 조선을 팔아먹은 우봉 이씨 이완용의 종친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일제의 조선통치를 정당화하는 식민사관이론을 만들고 주입시킨 인물이다. 이병도는 종친인 이완용이 팔아먹은 조선에 대해 부정적일수밖에 없었고 구한말 및 일제강압기 광주학생운동같은 전라도지역의 조직적이고 극렬한 반일운동과 서재필,김성수,송진우,김병로등 정계와 재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전라도출신들의 항일투쟁으로 신상의 위협과 자신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식민정책 시행에 가장 큰 걸림돌인 전라도지역에 반감을 가졌을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공신이었으나 해방후 역적이 된 친일파 이완용의 종친 이병도는 시대가 바뀌자 종친인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지우려 원광대에 있던 이완용의 자료를 훼손하였으며 친일파들을 배척하지 않은 이승만/박정희정권에서 문교부장관 및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으로 국사학계를 장악한 이병도는 고조선,삼한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 일본의 식민사학자 이마니시와 자신의 이론들을 국사책에 넣었으며 이병도의 제자들 및 일부 사학자들이 이러한 이론들을 인용하고 있다.
3. 조선왕조에서 전라도는 조선왕조 스스로 왕조의 본향이라 하였으며 풍패지향이라 불렸고 전라도 감영이 있던 전주성은 풍패를 따서 남문은 풍남문,서문은 패서문,귀빈들이 머무는 객사인 풍패지관과 조선왕조의 시조묘인 조경단,역대 성군들을 모신 경기전등이 있다. 왕조의 본향이라는 자부심은 왜란/호란같은 국난시에 가장 많은 군사들과 의병들을 배출했고 구한말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궐기한 의병의 40%를 차지했다. 호란때 조선왕조에 반감이 심했던 지역에서 모병활동을 하지 않았던 예만 보아도 왕조의 지역적 기반 및 자부심, 충성심의 지역적 차이를 알수있다.
4. 전라도 지역은 고려초부터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가장 영향력이 큰 왕후장상 및 권력가들을 상대적으로 많이 배출하였고 훈요십조에 따라 전라도가 차별받았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오히려 경기도빼고 권세를 가장 많이 누린 지역이 전라도지역이다. 또한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 첫장 태조실록에 보면 조선왕조의 朝家가 전주에서 나왔다 하였고 영남유학의 시조 점필제 김종직은 그의 문헌 점필제집에서 조선왕조는 전주에서 나왔다 하였다. 실학의 거두 성호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聖朝가 전주에서 나왔다며 신성시 하였다.
훈요십조를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위의 기록들을 해석하면 고려,조선왕조 일천년은 전라도가 여당이었고 가히 전라도 정권이라고 할만하다.
그림1. 조선중기 전국지도인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에 표시된 차현고개 위치.(음성군 차현고개 주변에는 수레의산(車依山,679m),수레울,車谷,車坪,車坪川 등 車관련 지명이 많다)
그림2. 차현고개 주변 등산로(한남금북 제02구간: 차현 (수레티고개) – 마이산 (△472m) - 8번군도 (윗두리실) - 583지방도 (쌍봉1리) - 583지방도 (내송2리) - 82번지방도 (방아다리) - 21번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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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차현고개 주변에 있는 화봉육교
그림4. 공주강이 감싸고 있는 안쪽의 공주목과 공주강 바깥(公州江外)을 표시한 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