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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역사기행을 어떻게 해야 되나? - 열린 미래와 공생공존, 평화를 위하여
중국 동북삼성 약도(독립운동과 고구려유적지 중심탐방 7일 또는 8일 여정)
용정시, 연길시, 도문시 지도(독립운동 3일 코스)
용정시, 연길시, 도문시, 훈춘시 (독립운동 4일 코스)
빨간 점이 찍한 곳이 연변자치주 8개 시현의 중심지이다.(훈춘시, 왕청현, 도문시, 연길시, 용정시, 화룡시, 안도현, 돈화시)
요즈음 역사기행의 봇물이 터지고 있다.
푸르른 산천도 유람하며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장소를 방문하여 배우고 익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역사기행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역사 지식과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줄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미래와 인류를 위하는 열린 공생과 개방적 평화 가치를 깨닫게 해줄 것이다.
나 자신이 역사기행을 통하여 역사를 보는 지평이 민족에서 인류, 국가에서 지구촌으로 열리는 체험을 하였으므로 삼국을 접하게 되는 북간도 여행을 많은 사람들에게 권한다. 그러나 지금은 도도한 역사기행의 흐름이 우리를 역사의 무덤에 빠트려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의식으로 돌아가도록 부추기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불편하다.
역사기행을 통해서 역사의 의미를 추구하고 과거 역사와 현재 우리의 역사 그리고 미래의 역사를 공생과 공존, 생명 친화적으로 이끌어 가는 의식과 가치 형성이 기행의 주목적이라면 우리는 특별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북간도와 서간도의 역사 기행은 시간적으로 1860년대에서 1945년까지의 기행이다. 물론 고구려 유적답사를 제외하고서는 말이다. 또한 공식적으로 우리의 영토가 아닌 청나라의 영토에 조선인들이 기근과 조선 양반들의 학대를 피해 달아나서 살았기 때문에 이 지역에 관한 한국의 정사(正史) 기록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비록 우리가 만든 우리의 교과서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해방 이후 임정의 자료들과 독립신문을 비롯한 많은 자료들을 검토하여 편성한 역사 기록이다. 특별히 우리의 기록은 사회주의 이념을 배격하며 민족주의자 계열의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역사를 정리 편성하였기에 우리의 역사 기록이 중국 측의 기록과 북측과 일본 측의 기록과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중국은 우리가 역사기행을 하는 동북삼성에 대하여 우리 보다 훨씬 더 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 물론 중국 측의 기록은 청나라의 기록, 민국의 기록, 위만주국의 기록으로 나뉘어 있다. 또한 1920년 대 초반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의 기록도 있을 것이다.
북한 또한 나름대로 역사 기록이 있을 것이다. 아직 접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그들의 기록은 공산주의 여러 계보에서도 만주파를 그 중심에 놓았을 것이다. 만주 유격대 출신인 김일성, 최용건, 김책, 강건과 김일이 역사의 중심인물로 주인공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일본은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일찍부터 만주를 연구하였고 후에는 조선독립운동을 탄압하며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심지어는 1921년 경신대학살에 대한 기록도 많은 분량을 남겼다. 후에는 일본의 조선총독부를 대신하여 위만주국이 그 땅의 역사를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 시대에 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네 나라의 기록이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청나라는 청의 관점에서 민국은 민국의 관점에서 만주국은 만주국의 시각으로 중국 공산당은 그들의 시각으로 일본은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의 관점으로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북한은 그들의 자리에서 그 땅에서 일어난 역사를 기록하였으므로 사건의 일지도 다르고 규모도 다르고 평가도 다르다. 뿐만 아니라 저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다룰 수 있으므로 어느 기록에는 나오고 어느 기록에는 빠질 수도 있다.
수차례의 동북삼성 역사기행을 통하여 그리고 연변에서 출판된 책을 찾아 읽으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생각과 지식의 폭이 달라졌고 드디어 나름대로 역사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가장 먼저 폐기처분을 한 것은 조선인들이 을사조약 이후로 조선 독립운동을 위해 북간도와 서간도로 갔다는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 이주설 이었다. 조선인들의 이주는 실제로 독립운동을 위한 이주가 아니었다. 그들은 1860년대 조선의 대기근과 양반들의 가렴주구와 학대를 피해 살길을 찾아 끊임없이 기회를 틈타 헬 조선에서 도망친 것이었다.
조선 서변계 관리사인 서상무의 통계에 의하면 1897년에 서간도에 해당하는 통화, 환인, 흥경 등 지구에 이주해온 조선이주민은 이미 8,722세대 3만 7천 여 명이었으며 1903년에 역시 서간도에 해당하는 장백, 임강, 집안, 통화, 환인, 관정, 안동 등지에는 32개 조선족부락이 형성되어 그 인구수가 1만 6,357세대에 5만 5,593명에 달하였다.
1891년 청나라 조정은 조선이주민들을 중심으로 간황사(개척지 관리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북간도에 해당하는 훈춘에 6개 사, 동오도구에 5개 사, 흑정자에 6개 사, 남강에 6개 사를 세우고 이미 개간한 땅을 조사, 등록하였으며 이주민들을 다 간황사에 소속시켰다. 1891년부터 1894년 사이에는 청나라는 북간도에 해당하는 화룡욕(현재 화룡현 지역) 구역에 있는 조선이주민들을 4개 보, 39개 사, 124개 갑, 415개 패(마을 단위)로 편성하고 조선귀화인을 향약으로 임명하여 직접 관리를 시켰다. 갑에는 조선족 5,990세대, 한족 264세대가 있었다.
1907년에 이르러 북간도에 해당하는 연변일대 조선족집거마을은 529개에 달하였으며 조선족 인구는 1만 5,356세대 7만 2,076명으로 연변 총인구의 76%를 차지하였다. 1909년 연변 일대의 조선족은 3만 4,133세대 18만 4,867명으로 늘어났다.
강준만 교수의 ⌜한국근대사 산책⌟에 의하면 1864년에서 1873년까지 이조판서에 임용된 사람은 48명으로 재임기간은 평균 76일이고 공조판서에는 82명이 임용되어 재임 기간은 52일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양반 관료들은 관직에 오르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알았으며 돈을 주고 산 권력이기 때문에 다시 그 돈을 만들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해서 부를 축적하였다.
실제로 조선 백성들은 이런 조정의 부패와 양반들의 횡포와 무거운 세금을 피해 특별히 평안도와 북관의 조선 백성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그들은 생명을 무릅쓰고 생존을 위해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청나라에 잠입한 정치 난민이 된 것이다.
이런 기록들을 접하면서 국사 시간에 배운 독립을 위한 양반 지사들의 망명이 허구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조선의 멸망 또한 일제의 침략 이전 자체 내 붕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 번째로 갖게 된 새로운 인식은 독립운동의 주체에 관한 것이다.
역사기행을 몇 차례 하기 전 까지 만해도 독립운동의 주체가 망명애국지사, 양반관료들, 위인들, 투사들, 영웅들임에 이견이 없었다. 한 번도 가난하고 초라한 망국 백성이 독립운동의 주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본적이 없다. 항상 백성은 관료와 양반들의 지배와 가르침의 대상일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역사가 봉오동전투나 청산리전투를 지휘한 대장들과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거사를 일으킨 열혈애국투사들과 각종 무장단체를 만든 독립운동가로 찬양하고 숭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의 애국애족의 독립운동을 위한 노고와 공로는 자자손손 대대로 기려야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역사기행을 하는 과정에서 나의 생각이 뒤집히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추앙하는 독립 운동가들이 1860년대에 헬 조선에서 도망 나온 천민들이 개척한 농지에서 나온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받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데려다 독립군으로 훈련시켜서 독립투쟁을 벌였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조선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은 천민들과 소작농의 희생과 헌신이 아니었으면 북간도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불가능하였다는 말이다.
독립운동을 하려고 망명 이주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대부분은 양반이고 관료였으며 지주들이거나 그들의 자녀였다. 그들은 조선 멸망에 대한 직접적, 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기득권 의식, 계급 차별과 당파의식, 양반의 자존감, 상업과 공업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고스란히 가지고 망명지에 나왔다. 그러기에 조선의 독립운동은 출신지역에 따라, 종교에 따라, 사상과 이념에 따라, 방법론과 개인들의 위신과 탐욕에 따라 끝없이 분열 할 수밖에 없었다.
가산을 처분해서 현재 시가로 몇 백억을 가지고 망명을 나온 양반이나 지식인조차도 상업에 투자하거나 공장을 지어 자립으로 독립운동을 하려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원대한 꿈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학교 몇 칸을 지어 민족의식을 강화하여 군사훈련을 하는 것으로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였다.
양반관료가 세운 학교로 겨우 1년 정도 유지한 학교가 민족운동, 애국교육의 모범으로 일컬어지는 것이 조선인들과 오늘 한국인들의 양반숭배의 허위의식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한 번도 일본군과 직접 싸워보지도 않고 1920년에 해체된 학교와 독립운동단체가 최고의 무장저항운동 단체로 추앙을 받는 것은 실리보다 명분을 앞세우는 조선 양반의 의식이 아닌가?
개교한 지 1년 만에 자금난으로 후원자와 실무자가 갈등하던 끝에 문을 닫은 군관학교가 엄청난 학교로 자리매김이 되는 것이 내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제 독립운동도 명분보다 저항과 투쟁의 결과로,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도로 평가해야 되지 않는가? 망국의 적을 타도하고 무너뜨린 역사적 실적으로 평가를 해야 하지 않는가?
독립운동의 주체 문제는 역사의 주체 문제와 함께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온 주제였다. 그 주제를 머리와 가슴에 담고 고심하며 씨름을 한 끝에 결국 독립운동의 주체가 고향과 조국에서 떠밀려 생명을 걸고 강을 건너 부평초처럼 떠나온 민초들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들은 한 번도 국가로부터 혜택과 보호를 받은 적이 없는 상놈과 천민들이었다. 역사의 기록은 양반관료들과 명문가의 사람들과 영웅과 거인들을 독립운동의 기록으로 남겼지만 나는 이름도 빛도 없는 민초들, 독립운동을 위해 아낌없이 시간과 돈과 자녀들을 바친 조선이주민들을 가슴에 새긴다. 그들을 독립운동의 주체로 인식하는 때가 오면 한국은 민족을 뛰어넘는 열린 국가로 생명 친화적인 국가로 자리 매김을 할 것이다.
세 번째 생각은 중국에 "남은 자"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중국 조선족에 대한 편견으로 그들을 우리의 핏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이었다
일본 왕이 항복을 선언하자마자 독립운동가들은 자기들의 연고를 따라 북으로 남으로 돌아갔다. 비행기로, 배편으로, 기차로, 버스로, 걸어서 끼리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해방된 고향으로, 나라로 돌아갔다. 당시 2천만 명의 조선 인구 중에 10%인 200만 명이 중국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의 절반만이 고향으로 조국으로 돌아갔다.
1930년대 후반, 40년대 초까지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어준 만주 조선이주민들, 바닥에서 땅벌레처럼 살았던 90만 명의 사람들은 돌아가지 못하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어떤 책에 보니 사상과 이념을 따라서 공산주의 중국에 대한 환상을 품고 남은 자는 10%도 안된다고 하였다. 나머지 90만 여명은 돌아갈 돈이 한 푼도 없어서, 병 들어서, 여기저기로 흩어진 가족을 기다리기 위하여, 돌아가도 먹고 살 궁리가 없어서, 기타 이유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서 원하지 않은 조선족이 된 것이라고 하였다.
돌아가고 싶은데, 모두들 돌아가는데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가난한 인생이 얼마나 한에 사무쳤을까?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을까? 떠나는 사람들을 얼마나 부러워하였을까? 고향산천과 부모형제를 얼마나 그리워하였을까? 남은 자들이 떠나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몇 날 며칠을 하염없이 울었다는 어느 기록에 가슴이 시렸다.
누가 무어라고 말해도 북간도와 서간도의 이주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의 큰 원동력이었다. 그들의 인적, 물적, 정신적 자원에 의지해서 독립운동을 벌인 지도자들은 최선을 다하여 그들의 귀국을 지원하여야 했다. 그러나 조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자신들이 한 때는 동포요, 동지라고 불렀던 그들을 헌신짝처럼 빨리도 잊었다. 감탄고토(甘呑苦吐)를 한 것이다. 필요할 때는 동포요, 동지였지만 나라가 해방을 맞이하게 된 그들에게 이주조선인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그러기에 남은 자들은 버림받은 기억으로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하였다.
지금 우리는 우리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 버린 조선족의 후손을 노동력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역 이주를 가속화시켰지만 그들을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는 칠십 여 년 전에 갈라진 그들의 보이스 피싱과 범죄와 사기에 혀를 내두르며 그들을 의심하며 백안시한다.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가 자랑하며 자부심을 가지는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대전자전투, 동경성전투 등 모든 전투가 그 땅의 인적, 물적 자원으로 일어났으며 우리가 자랑하는 윤동주 시인 또한 그 쪽 출신임에도 우리는 그들이 역사의 무대에 출현하게 된 배경도 그들이 독립운동사에 기여한 공로도 모르고 우리가 조금 잘 산다는 이유로 우월감을 가지고 동족으로 존중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선족 형제와 자매들에게 상처를 주는 한국인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려 사과한다. 우리 교만과 무례를 용서해주시라고.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역사의 희생제물이 된 그대들이 있기에 우리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북간도와 서간도에로의 역사기행은 길게는 2천여 년 전으로 짧게는 10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는 기행이다. 그러므로 많은 상상력과 유추, 관점이 필요하다. 그런 이유로 인하여 여행 가이드들과 교사들이 고구려나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팩트에 근거한 역사 서적보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국수주의 작가들이 쓴 흥미진진한 역사소설로 교육하고 안내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들은 역사의 팩트 인식과 팩트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에 근거한 객관적인 해석보다 우리 민족에게 좋은 것은 무조건 다 좋은 것이라는 시각으로 자기 생각과 일치하는 역사소설의 콘테츠를 그 당시 역사로 안내하는 우(愚)를 범할 수 있다. 이는 역사 공부를 하는 자로서 경계해야 하는 허구에 근거한 역사 왜곡이다.
첫째 우리는 역사기행에서 무엇보다도 국수적인 민족주의를 위한 역사 왜곡을 경계해야 한다.
역사 왜곡은 흔히 맹목적인 민족주의에 따라 민족의 선민사상과 위대성, 국가의 이념과 열정, 비전을 강조한다. 민족주의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의 역사에 나타나고 있으며 배타성과 폐쇄성 그리고 민족적 우월감과 호전성을 내포하고 있다.
극단적 민족주의로 세계를 전쟁으로 이끈 히틀러, 무솔로니와 히로히토의 인종 대학살,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모택동의 문화혁명에 의한 조선족 대학살, 일본의 관동 대학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전쟁, 보스니아 내전, 르완다 내전, 콩고 내전, 비아프라전쟁, 서사하라내전, 소말리아내전 등은 과거의 일이 아니며 오늘도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주의의 광기이며 폭력이다.
우리의 간도 역사기행은 현지에서 느끼게 되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분노와 사회주의 일당 독재로 동북아의 패자가 된 중국에 대한 위화감으로 과거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위대성을 강조하며 미화시키고 숭배하고 싶은 나머지 우리 역사를 과장하거나 제대로 파악 되지 않은 유물이나, 유적지, 지명과 나라들의 강역 등을 무조건 우리 식으로, 우리의 것으로 주장하며 해석하는 애국애족을 위하는 왜곡을 범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식민지로 지배한 일본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으로 일본의 세계적인 위상과 면모를 완전히 무시하며 불구대천의 원수로 대적한다. 이는 국수주의적인 민족주의 발로로 독일의 나치주의와 일본의 군국주의처럼 단기적으로 민족을 뭉치게 하며 자존감을 살려주고 민족의 정체성과 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미래 세계의 흐름에서 이탈하게 되어 조선 말기 위정척사파처럼 자신은 물론이고 나라까지도 퇴행과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민족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의 거의 모든 전쟁과 내전에는 맹목적인 민족주의가 작용하고 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는 민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민족을 전쟁으로 쉽게 선동한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보면 이해가 잘 될 것이다.
마거릿 맥밀런은 ⌜전쟁은 인간에게 무엇인가⌟에서 전쟁의 한복판에 ‘민족주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를 통틀어 대규모 전쟁의 한복판에는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든, 구세주를 좇는 것이든, 사악하거나 그냥 미친 것이든, 늘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민족주의’(한쪽 끝의 인종주의부터, 공통 역사와 문화에 가치를 두는 반대편 끝의 애국주의까지 광범위한 개념) 추종자들은 ‘민족’(또는 국가)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싸우고 죽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미국의 애국주의 독립군 네이선 헤일은 1776년 영국에서 스파이 혐의로 교수형을 당하기 전에 “나라를 위해 내놓을 목숨이 하나밖에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말했다.”
⌜전쟁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91쪽
1792년에 프랑스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하여 벌인 ‘발미 전투’에서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는 보통사람들이 생명을 다하는 열정과 신념으로 상대국의 직업 군인들을 상대로 하여 승리를 거두는 대 이변이 나타났다. 이로 말미암아 국가를 위하여 백성을 하나의 의식으로 묶어 버리는 민족주의가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국민을 ‘민족’이라는 것의 일부로 일체화하는 사상)가 역사에 폭발적으로 등장했다. 게다가 19세기가 진행되는 동안 (산업 혁명과 사회변화 등) 두 가지의 더 큰 변화가 이 첫 번째 변화와 함께 작용하여 전쟁이 더 폭력적이고 잔혹하고 파괴적으로 변했다.”
⌜전쟁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159쪽
“민족주의는 이념에 의해, 지식인•소설가•민족지 학자•역사가의 저작에 의해 배양되었지만 대중의 식자율 향상, 저렴한 서적의 보급, 빨라진 통신 수단 덕분에 사회의 저변으로 그리고 유럽을 거쳐 전 세계로 영향력을 확장해 나갔다.
…생략…
민족주의는 전쟁에 대한 열광을, 산업혁명은 전쟁 수단을, 그리고 사회 변화는 전쟁 주체뿐만 아니라 전시 동원에 대한 지지까지 만들어냈다.”
⌜전쟁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159쪽
민족주의가 득세하면서 각 나라들이 국민개병제를 병역법으로 택하여 민간인들을 대규모로 전쟁에 동원하였다. 국가는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살아있는 조직체가 되었고 제국의 황제처럼 국민들에게 충성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무솔로니와 히틀러와 히로히토를 비롯한 이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들은 그런 국가의 정상의 자리에서 전쟁을 공동의 외적에 맞서 국민을 단합시키는 수단으로 또는 전쟁 반대세력과 급진적인 혁명주의자들을 탄압하는 구실로 사용하였다. 실로 민족주의는 전쟁을 부추기며 군인이나 민간인을 막론하고 적을 사람이 아닌 악마로 만들었으며 자신들의 원대한 꿈과 빛나는 이상에 방해물이라고 판단되는 나라와 민족은 전쟁으로 학살, 파괴, 방화하였다.
종교는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국민들에게 목숨을 바칠 명분을 주며 영생을 약속하였으며 민족주의는 언어와 종교적 상징으로 스스로를 신성하게 포장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와 세르비아의 민족주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부활하였듯이 다시 일어설 것이며 나라와 민족을 위한 희생이 장차 지상에 천국을 가져올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에 종교들이 열렬히 합세하여 민족주의를 지지했다. 1차 세계 대전 중에 각 국의 민족주의와 결합한 기독교와 이슬람교들이 자국의 전쟁을 지지하며 자기 민족의 신에게 자기 민족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였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의 민족 종교인 신도 또한 전 일본인뿐만 아니라 식민지 백성들까지도 승리를 기원하도록 신사에 동원하였다. 일제로부터 독립을 위해 만들어진 조선의 민족종교 또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천제를 지내며 독립을 열렬히 기원하였다.
민족주의를 위한 역사 왜곡을 경계하는 것은 미래 전쟁에 대한 경계이며 평화를 위한 노력이다.
1945년 이후 세계에는 150~300건의 무력충동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 한국전쟁이나 걸프전쟁, 이라크 전쟁, 소련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은 국가 간의 싸움이었지만 대부분이 독립투쟁이거나 민족의 갈등으로 인한 내전이었다.
탐욕, 두려움, 자기 방어, 민족 감정, 이념, 종교 같은 전쟁 유발 요인은 우리가 그것을 지니고 사는 한 끊임없이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에서 작용할 것이다. 또한 희소자원 갈등, 국민 간, 국가 간의 양극화 심화, 배타적인 민족주의 포퓰리즘의 득세 그리고 이런 것들을 약용하는 교조적이고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들의 권력욕은 과거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계속 전쟁을 부채질 할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전쟁, 미얀마 내전으로 전 세계가 휘청거리고 있다. 전쟁의 불똥이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감으로 지구의 어깨를 누르고 있으며 지구상에 적재되어 있는 무시무시한 신무기, 인공지능의 영역확대, 살인 로봇과 사이버 공간 전쟁은 인류가 종말을 맞이할 수 있는 시대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역사기행을 통하여 전쟁의 원인이 되며 원인을 제공하는 극단적 민족주의적 사고와 의식을 주입하거나 주입당하는 일이 없도록 서로 주의하며 경계해야 할 것이다.
둘째 역사기행에서 경계해야 하는 것은 현장 역사 학습을 통하여 분노와 증오를 확대재생산하는 것이다.
역사는 반드시 기억되고 지켜져야 한다. 민족과 나라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창조적으로 평화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가르쳐서 잊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소환하여 복수와 배타, 전쟁과 단절로 이끄는 과거에 초점을 두는 교육과 해설은 지양되어야 한다. 참으로 역사 교육으로 국민들이 하나 되어 과거에 조선을 멸망시켰던 나라를 보이콧하며 국제 관계 속에서 그들을 단죄하고 보복하는 것은 통쾌할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복수가 복수를 낳고 전쟁이 전쟁을 낳아서 함께 파괴되고 죽임당하는 악순환을 보여준다.
과거를 통하여 재생산되는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애국심은 대부분의 나라가 교육과 정치를 통하여 배양하여 계속 대립과 갈등, 긴장과 경계를 조장한다. 배타적 애국심으로 조선말의 위정척사를 주장하던 유학자들처럼 국민들의 사고와 의식이 경직되면 그 나라는 시대의 흐름과 외교 관계를 일방적으로 무시하며 고립을 자초하며 무모한 전쟁도 감수할 수 있게 된다.
반복적인 교육으로 사람들에게 침략국이나 인접국에 대한 적대감을 지속적으로 확대재생산하는 것은 비단 나라뿐이 아니다. 가문, 지역, 민족, 집단 등도 소속집단의 존립과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행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두 가문의 오랜 싸움을 보여준다. 몬타규와 캐플렛 가문은 오랜 세월 동안 교육으로 가문의 사람들에게 분노와 증오를 확대 재생산시켜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서로 만나기만 하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게 하였다.
기원전 431년에 시작된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전쟁은 무려 2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가 강력한 해군력으로 주변의 도시국가들을 제압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동맹국이었던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견제하고자 새로운 동맹을 결성하였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식민지인 포키온에서 반란이 일어난 기회를 노려 아테네에 도전 하였고 이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동맹국인 보이티아를 공격하였다. 이 작은 영토분쟁으로 시작된 펠로폰네소스전쟁의 초반은 주도권을 아테네가 잡았다. 그러나 두 나라 다 전쟁으로 피해가 막심하였기 때문에 6년 동안 휴전을 하였다. 기원전 430년에 지도자 페리클레스 잃은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대한 분노와 적대감으로 충만한 시민들의 애국적 열정과 외침에 이끌려 시칠리아 원정으로 스파르타의 동맹국을 공격하였고 결과적으로 대패를 하였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아테네의 해군을 격파하고 승승장구하여 아테네를 포위 공격하여 기원전 404년에 항복을 받았다.
아테네가 항복함으로 전쟁은 끝이 났지만 아테네 시민 4명 중 1명이 전쟁과 역병으로 목숨을 잃었다.아테네의 민주정치는 붕괴되고 스파르타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식 교육과 훈련으로 패자가 된 스파르타 또한 기원전 371년 테베에게 점령을 당하였다. 그 후 스파르타지역은 마케도니아제국에 귀속되는 운명이 되고 더 이상 역사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황태자가 단독으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였다. 당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세르비아 국민으로 인식하였으며 지배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에 불타고 있었다. 사라예보에 총성이 울린 그 날은 마침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 왕자 라자르가 오스만제국에 희생당한 것을 기념하는 세르비아 국가 기념일이었다. 피의 보복을 원했던 세르비아의 국수적인 민족주의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태자 부부를 저격하였다. 그들의 죽음은 오스트리아에게 눈에 가시 같은 세르비아를 공격할 빌미를 주었다. 독립 국가를 원하는 세르비아는 끊임없는 저항으로 오스트리아 남쪽 국경의 골칫거리였던 것이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세르비아왕국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유럽은 4년이 넘는 제1차 세계대전의 광란 속에 들어갔다.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편을 들었다. 독일은 벨기에 침공하고 프랑스를 향해서 진군하였다. 영국은 벨기에와 프랑스를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 들었다. 러시아도 동맹국인 세르비아를 지원하였다. 오스만제국은 독일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왕국을 지원하였다. 결과적으로 1,000만 명의 군인이 사망하였으며 유럽 열강이 약해지며 미국과 일본이 세계의 열강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독일은 베르사이유조약이 정한 배상금으로 말미암아 이내 나치즘의 광기에 사로잡혀 2차 세계대전의 포문을 열게 되었다. 많은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차 세계대전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국수주의, 쇼비니즘의 발로로 포문이 열렸음이 분명하다.
현재 EU 주도국에 속하는 프랑스와 독일은 843년 베르됭조약 이전에는 프랑크 왕국에 속하였다. 샤를마뉴대제가 죽은 뒤 프랑크왕국이 서 프랑크, 중 프랑크, 동 프랑크로 삼분됨에 따라 그들은 각각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기원이 되었다.
프랑크왕국의 중심지였던 알자스로렌 지역은 독일에 속하였으나 프랑스가 전쟁을 치를 때마다 빼앗고 빼앗기는 땅이 되어 프랑스의 반독일 감정 또는 독일의 반 프랑스 감정을 부추기는 역사적인 장소가 되었다.
843년 삼국 분립 시 그 땅은 신성로마제국(독일)에 속하였다. 그러나 1618년에 일어난 30년 전쟁의 결과물인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말미암아 프랑스로 귀속되었다. 알자스로렌이 실지(失地)한 국토가 되어 독일 민족주의자들이 회복을 염원하는 뜨거운 땅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은 유럽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뒤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제외하고 라인연방을 결성하여 신성로마제국(독일)을 해체시켰다. 독일은 패전의 대가로 1807년 틸지트 조약을 맺어 영토의 절반을 잃었고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하며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를 하자 독일은 유럽의 제국들과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을 격퇴하여 유럽을 프랑스혁명 이전으로 돌려놓는 비인체제를 만들었다. 독일은 승리의 대가로 작센지방의 5분의 2를 얻고, 베스트팔렌 지방과 라인 강 좌안 유역의 광대한 영토를 추가로 보상받았다.
1870년에 시작된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은 1871년 5월에 프랑스 임시정부와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맺으며 종결되었다. 독일은 스당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나폴레옹 3세를 폐위시켰으며 임시정부를 압박하여 1월 28일에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프로이센은 이 조약으로 50억 프랑의 배상금과 함께 베스트팔렌 조약과 함께 프랑스에 넘어갔던 알자스와 로렌지방을 다시 넘겨받았다.
전쟁에 패한 프랑스는 파리 시내 모든 조각상 위에 검은 천을 덮었다. 전쟁의 패배로 낮아진 국민적 자존감과 잃어버린 두 지방 알자스와 로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에 패전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다시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랑스에 반납하였다. 프랑스와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시 적국이 되었으며 독일의 프랑스 점령으로 알자스와 로렌은 다시 독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전쟁에 대한 배상으로 알자스로렌지방을 다시 프랑스에 반환하였다.
현재도 프랑스와 독일은 알자스로렌을 상기하며 애국심을 고양시키며 반국가적 정서를 고취하며 불편한 이웃으로 유럽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에서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국가와 종교가 세뇌교육으로 양 국민 간에 서로 불신과 분노, 적개심을 가지도록 격려하며 원한과 분노를 끝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나라의 대표적 케이스이다. 양국은 그 에너지로 전쟁과 폭동과 테러를 끊임없이 일으키며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쪽에는 시오니즘을 표방하는 극우 정당이 있고 한쪽에는 자치정부 집권당 파타와 과격한 이슬람 종교정당 하마스가 있다.
헤브론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성조(聖祖)로 숭배하는 아브라함과 이삭(이스마엘)과 야곱이 묻혀있는 거룩한 땅이다. 성지는 이스라엘 구역과 팔레스타인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양국의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이스라엘 쪽 아브라함의 무덤에는 랍비들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이 있고 팔레스타인 쪽 야곱의 무덤에는 역시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이 있다. 양쪽의 종교 지도자들이 어린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지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들의 심각한 눈빛이나 긴장된 어조로 보아 서로가 상대국에게 당한 고통과 원한을 상기시키며 후세대들의 복수의 DNA에 새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은 애국과 종교의 이름으로 전수되는 원한과 증오로 끝나지 않을 전쟁의 그림자가 아이들의 미래에 운명처럼 덮치는 공간이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의 역사는 1948년 5월 14일 선주민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2차 세계대전에 나치에 의해 홀로코스트를 당한 일로 세계적인 여론의 지원을 받아 팔레스타인 땅에 나라를 건국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팔레스타인 선주민들에게는 재앙이었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의 땅에서 뿌리를 뽑혀 주변국가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등으로 흩어지거나 아니면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잔류하였다. 그리하여 팔레스타인은 생존을 위해 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처절하게 학살과 방화, 파괴를 주고받는 참혹한 복수의 땅이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시간에도 제 5차 이•팔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 이래 일어난 수차례의 전쟁과 팔레스타인의 민중 봉기(인티파다)는 양국의 교육과 종교가 계속되는 전쟁과 폭동을 지지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의 종교 근본주의가 성전이라는 미명으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된 날 주변국 이집트와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등이 이에 반기를 들고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1차 이•중동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스라엘 건국을 둘러싼 전쟁이다. 전쟁의 주축이 팔레스타인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팔 전쟁이라고 명명하기는 애매하지만 팔레스타인이 빌미가 되어 일어난 전쟁이기 때문에 이•팔 전쟁이라고 칭해도 무리함이 없을 것이다. 1차 전쟁은 1949년 1월 7일,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영국이 위임 통치하던 서부 팔레스타인의 80%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망하였고 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여 유대인들에 대한 아랍인들의 증오와 복수심이 커졌다.
제2차 이•중동 전쟁은 1956년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이스라엘의 선박의 통행을 금지한데서 시작되었다.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타격을 받게 된 이스라엘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이집트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압력 때문에 휴전을 한 후에 점령지에서 철수하였다.
1964년에 결성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시리아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대 이스라엘 게릴라전을 전개하자 이스라엘이 그 보복으로 시리아 전투기 6대를 격추시키고 시나이반도를 침공하였다. 이집트는 시나이반도에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였지만 참패를 하였다. ‘6일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제3차 이•중동 전쟁은1967년 6월 5일에 시작되어 6월 10일에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요르단, 시리아를 기습 공격하여 시나이반도는 물론이고 요르단 강 서안, 골란 고원을 확보하였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대승에 놀라면서 정전을 압박하였고 이스라엘은 정전에 응하였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 영토는 시나이 반도, 구 예루살렘지구, 요르단 강 서안지구, 가자지구, 골란공원 등의 확장으로 약 4배 정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난민 증가로 주변국들의 적대감과 분노는 더욱 깊어졌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유대교 축제인 욤키푸르 기간에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였다. 아랍 국가들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제4차 이•중동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집트와 시리아는 제3차 이•팔 아랍 전쟁 때 빼앗긴 각자의 영토를 찾고자 하였다. 이집트 군은 이스라엘 공군과 전차 부대로 사나이반도의 거점들을 장악하였으나 골란고원을 공격한 시리아군은 이스라엘 군을 제압하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은 전열을 가다듬어 이집트 수도 카이로를 위협하게 되었고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근처에 이르렀다. 10월 2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정전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양측이 동의함에 따라 전쟁은 16일 만에 끝났다.
1977년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캠프데이비드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였으나 자국 선박의 수에즈 운하 이용권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가자 지구, 골란 고원, 요르단 강 서안, 동 예루살렘은 돌려주지 않았다.
이 협정을 기점으로 이스라엘과 주변국 간에 표면적으로 평화가 정착되었으나 전쟁 난민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그 동안 4차례의 전쟁은 팔레스타인 주변국과 이스라엘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1987년부터는 PLO와 팔레스타인 급진단체 등의 지도 아래 주민들의 봉기(인티파다)가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인티파다는 테러였으며 수천 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인티파다는 침입자 이스라엘에게 저항하는 독립전쟁이다. 양쪽의 충돌은 끝없이 악순환을 반복하였다. 팔레스타인의 공격은 이스라엘군의 보복으로 이어졌고 이는 꼬리를 무는 팔레스타인의 보복을 불러왔다.
1987년 12월 팔레스타인 아랍인 거주 지역 가자에서 한 아랍인이 죽은 일로 1차 주민봉기, 인티파다가 일어나 전 아랍인 거주 지역에서 유대인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이 일어났다. 이스라엘군의 탄압으로 1,000 명 이상의 아랍인들이 죽었다. 인티파다가 빌미가 되어 PLO는 1988년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선언하였으며 1989년에 아라파트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하였고 같은 해에 유엔총회에서 독립국가로 인정받았다. 한편 과격단체 하마스는 제 1차 인티파다의 후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가 떨어져 나와 아흐메드 야신을 지도자로 하는 정치조직으로 설립되었다. 1차 인티파다는 1993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평화협정이 중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2000년 9월에 제2차 인티파다가 일어났다. 예루살렘 이슬람교 성지 알아크사사원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순례자 간에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아랍인 거주 지역에서 제2차 인티파다가 재개되었다, 이스라엘 군인은 인티파다를 막기 위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을 재점령하였고 아라파트 집무실을 포위하여 연금시키는 강경한 군사정책을 취하여 팔레스타인 경찰까지 봉기에 참여하여 요르단 강 서안지구와 가자 지구는 전쟁상태가 되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기능을 상실하고 PLO의 급진세력인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전선, 하마스, 이슬람 지하드 등의 조직들이 자살폭탄테러와 요인암살을 하면서 민중봉기를 자극하였다.
이스라엘은 2002년 6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의 공격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와 경계선인 요르단 강 서안에 길이 130km의 분리장벽을 실시하였고, 예루살렘 등지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잇따라 발생하자 공습으로 강경하게 대처하였다. 이스라엘의 가자 공습으로 하마스의 지도자이자 반이스라엘 투쟁의 상징이었던 아메드 야신이 사망하면서 양국은 처절한 복수를 서로 반복하였다.
2004년 11월 PLO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정부의 수반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가 사망하고 마흐무드 압바스가 새 지도자로 선출되며 평화를 위한 희망으로 양국의 대표가 무장충돌을 중지하기로 합의를 하였다. 이스라엘 내각은 샤론 총리가 제안한 가자지구 철수 수정안을 승인하였고 2005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이집트, 요르단의 대표가 모여 2차 인티파다를 종식시키기로 약속하였으며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수감자를 석방하고 서안지구 마을에서 철수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하마스 무장정당은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지구 그리고 동 예루살렘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돌려주기 전까지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맞섰다.
하마스는 2006년 1월 팔레스타인 입법부 총선에서 74석을 확보한 다수당으로서 가자 지구의 통치 정당이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 강경 이스라엘 노선을 선두 지휘하고 있다. 드디어 하마스 무장정당은 작년 10월에 이스라엘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제 3차 인티파다가 시작되었다. 하마스가 공격을 시작한 인티파다가 제 5차 중동 전쟁으로 비화될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 이 시간도 전쟁은 승전을 위하여 누군가를 향해서 죽음의 포를 발사하고 있다. 생명을 으스러뜨리고 가정을 파괴하며 행복을 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무도 쉽게 어느 한 편을 악으로 규정하거나 단죄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역사의 기록은 하마스 급진무장 정당과 이스라엘 극우 정당의 치고받는 전쟁의 끝없는 파괴와 대량학살의 잔학행위를 애국과 성전으로 미화시킬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자기집단의 권력 유지의 방편과 자신의 소신과 존재감 확인을 위해 벌이는 전쟁, 파워 게임에 짓밟히는 민초들의 생명과 평화는 결코 역사의 자리에서 소중하게 취급되지 않으며 결코 기록되지 않는다.
2006년 1월 팔레스타인 총선 직후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팔레스타인 사람 73%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고, 85%는 평화협상을 지지한다고 응답했다. 이스라엘 국민 48%도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정부와 대화를 하며 공존하기를 희망하였다.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난민으로 사는 549여 만 명의 팔레스타인 국민들과 960여 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질과 평화를 생각하며 속히 전쟁이 끝나고 서로 겸허히 인정하며 존중하며 함께 사는 세상, 사자들과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평화 세상을 꿈꾸어 본다.
과거를 잊지 않고 현재를 이해하기 위하여 역사 탐방과 기행은 참으로 좋은 역사 학습의 장이다. 그러나 그것이 국수주적으로 기울 때 무한히 증폭되는 애국애족심과 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발로 되어 갈등과 긴장, 전쟁과 테러, 폭력이 유발될 수도 있다.
스리랑카의 자프나를 방문하였을 때 손이나 발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스리랑카 내전에서 사지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불행한 처지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용감한 타밀 반군이었음을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그들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학습 속에서 위대한 타밀 전사(戰士)로 자라고 있음을 목도하였다.
3월에 미조람에 있는 미얀마 소수민족 난민캠프에 다녀왔다. 난민 아이들이 하나같이 전사(戰士)가 되어 미얀마 정부군인들과 싸우는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의 꿈이야말로 탄압받는 소수민족의 자녀들이 꿀 수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위대한 꿈이기에 그들의 꿈이 이루어지길 빌어주고 왔다.
우리 한반도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6•25의 상처를 가슴에 품고 70여 년 동안 서로 적성국으로 대하며 때때로 전쟁위기와 불안을 고조시키며 민족의 대 화합과 통일의 날을 향하고 있다고 믿지 않았던가? 지금 평화를 위하는 수많은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오염 풍선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상황에 심정이 처연하기도 하다.
소말리아 내전, 수단 내전, 키프로스 분쟁, 보스니아 및 코소보 내전, 레바논 내전 등 세상의 수많은 내전과 분쟁에는 소중한 역사 기억이 있고 역사를 뒷받침하는 종교와 급진 진보와 극 보수를 표방하는 선동적인 지도자들이 있다. 특별히 그들은 모두 다 민족과 종교를 지키는 성스러운 사명을 맡았다고 자부하며 일꾼을 자처하며 분노와 증오를 가슴에 이식하는 과장된 역사 학습을 통하여 후세들의 전의(戰意)를 다진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꿈과 야망을 틀렸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런 생각을 포기하라고 강제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인류는 평화를 노래하며 꿈꾸면서도 전쟁과 내전과 폭동에 휩쓸리며 힘겹게 지옥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셋째 역사기행에서 경계해야 하는 것은 여행 국가를 혐오하거나 비하하는 발언이다.
의외로 배타적이고 국수적인 민족의식을 가진 한국인들이 많다. 그들은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유일한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임을 자랑한다. 그리고 두뇌가 뛰어난 민족이라고 믿는다. 옛날에는 유대인 다음으로 우수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은 유대인보다 더 우수한 민족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올림픽과 월드컵 이후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부상을 하면서 우리나라가 세계에 많이 알려졌고 21세기에 K-팝, K-드라마가 대히트를 치면서 K-무비, K-컬처, K-푸드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우리의 자부심과 긍지도 따라서 치솟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250여개 국가에서 살고 있으며 한국의 기업이 5대양과 6대주로 진출하여 이제는 아프리카 오지에서조차도 “코리아”를 알 정도가 되었다.
5대양 6대주에 우리나라 이름을 알린 것은 한국의 기업과 K-팝, K-드라마뿐만 아니라 세계를 향한 한국교회의 선교와 자원봉사가 큰 역할을 하였다. 우리 언론이나 국민들은 한국교회의 선교와 봉사가 세계 속에 한국을 알리는데 얼마나 큰 기여를 하였는가에 대하여 지식도 없고 관심도 없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 보면 한국 교회 선교사들의 이름도 빛도 없는 사랑의 수고와 섬김이 있었기에 K-팝과 K-드라마가 거부감 없이 다양한 나라, 다양한 부족들에게 깊이 어필 될 수 있었다. 1990년대부터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 사람들이 선교사들을 통해서 한국 노래와 춤, 한국 문화를 경험하였기에 K-팝과 K-드라마에 대한 선망이 생겼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우리 문화가 선진국의 문화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는 자타의 평가에 우리가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는 것은 좋다. 그러나 우쭐해서 다른 나라의 문화를 얕보며 교만을 떠는 것은 금물이다. 사람들이 자기 과시와 자만에 빠져 방문 국가에 대한 혐오와 비하 발언이 민간 외교 차원에서 얼마나 큰 손해와 불이익을 가져오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 한국인들의 역사기행은 중국과 일본이 주류를 이룬다.
중국기행은 우리의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으며 일본의 경우는 식민지 수탈과 학병, 징병, 징용 그리고 관동대지진의 희생자들과 원자폭탄 희생자들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중국의 동북삼성을 여행하는 중에 고구려의 고토와 독립운동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던 땅을 빼앗겼다는 열등감과 분노, 작은 나라 국민으로서 상처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동북공정에 대한 적개심이 크다. 또한 사드배치로 인하여 우리의 기업들이 쫓겨난 것과 중국 투자 초창기에 중국의 법을 몰라서 억울하게 당한 경험이 많으므로 화가 치밀어 혐오와 비하 발언을 쉽게 한다. 조선족 문제, 황사문제와 서해바다에서 중국어부들이 저지르는 횡포 등이 언제든지 우리의 뇌관을 터트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기행에서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방문 국가를 혐오하거나 비하하는 발언이다.
우리가 악감정으로 중국인을 비하하면서 “짱깨”, “왕서방”, “떼놈”, “떼국놈”, “짱꼴라”, “중국 오랑캐” 등을 사용하는데 말은 말하는 사람의 감정과 기운을 타고 나오기 때문에 상대방이 정확한 뜻을 모를지라도 무시당한다는 것을 알고 시비를 걸어오며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지켜야 한다. 중국 공안들은 우리가 깃발이나 배너를 들고 사진 찍는 것을 예의주시하며 우리가 자기 나라 영토에서 자기 나라를 무시한다고 생각할 때 호루라기를 불어서 경고한다. 여행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수가 있는 순간이다. 이런 것들이 쌓여지면 그들은 한국인들을 출입금지 시켜버린다. 한 예를 들면 한국인들이 백두산 아래 두만강 상류에 가서 국경을 넘어서 오는 북한 사람들을 숨겨서 자주 탈출시켰기 때문에 우리에게 두만강은 출입금지구역이 되었다.
중국은 한반도와 국경을 접한 나라로 우리가 관계를 단절하고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현재 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 대대로 중국과 교류하며 아시아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며 살아야하는 지역운명공동체이다. 그렇다고 조선의 성리학자 지식인들처럼, 중국공산당에 가입해서 충성을 다 바친 장지락이나 정율성처럼 사대주의자가 되자는 말이 아니다. 서로 경쟁하며 견제하면서도 서로 인정하고 신뢰하며 개방과 교류를 통하여 함께 세계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기행을 떠나는 여행자들은 개인의 자격이면서도 동시에 현재와 미래의 후손을 잇는 자로서 역사적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참으로 복합적이며 미묘하다. 우월감과 적대감, 열등감과 거부감이 우리의 의식 근저에 있다.
얼마 전 언론에서 한국 여행객들이 일본에서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일본 엔화의 가치가 하락하여 한국인들이 대대적으로 몰려오는 것에 대한 일본인들의 불편한 심사, 거부반응에서 비롯된 폭력이라고 하였다. 과연 대대적으로 밀려오는 한국인들에 대한 분노와 질투 때문에 그랬을까? 과연 언론의 해석을 그대로 믿어도 될까? 한국 여행객들의 객기, 일본 비하발언과 비난이 그들의 심사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일본인들이 잃어버린 20년 동안에 우리는 K-팝, K-드라마, K-무비로 세계를 향해 벋어 나갔고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서구인들의 한국 인식에도 불구하고 1987년 6월 항쟁과 박근혜대통령 탄핵을 평화로운 촛불집회로 민주주의를 성취해낸 우리에 대한 질투가 작용하였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일본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지는 것은 삼국시대 역사에서 비롯된다.
백제와 신라, 고구려는 우월한 문화와 문명을 일본에 전해주었고 일본의 왕가는 백제에서 유래하였다. 일본은 660년에 백제가 망하였을 때 왕자 풍과 함께 170척의 배와 5000명의 병력과 무기, 군량을 보내 구하고자 할 정도로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였다.
조선과 일본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이 선진국으로 일본에게 조공무역을 허락하였으며 그들의 조공에 하사품을 내리는 교린관계를 유지하였다. 우리는 여기까지 일본에 대하여 우월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왜구의 침략, 조일전쟁 그리고 일본의 한국식민지 통치와 독도문제 등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일본에 대한 적대감과 증오심, 열등감과 비하의식을 심어주었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패전의 폐허를 극복하고 경제대국으로 부상해서 세계를 휩쓸고 있을 때 대부분의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런 일본을 인정하기 보다는 억하심정으로 비하하며 폄하하였다. 우리는 다른 모든 나라와의 경기에서는 패해도 되지만 일본에게는 절대로 져서는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기행에서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방문 국가를 혐오하거나 비하하는 발언이다. “왜놈”,과 “쪽발이”, “게다짝”이라는 비속어(卑俗語)는 삼가야 한다. 여행자들끼리 사용하면서 킬킬거리고 웃는 것도 삼가야 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상대방이 우리말은 알아듣지 못하여도 말에 실려 있는 악감과 기운은 캐치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기행을 하면서 비하발언을 하지 않도록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몇 년 동안 일본에 대하여 이를 갈며 치를 떨었다. 1920년에 일본군들이 북간도에서 우리민족에게 저지른 악랄하고 잔인한 학살과 방화, 약탈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그들에 대한 증오심과 분노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래서 그 때부터 일본이 화산으로 망하고 쓰나미로 망하고 지진으로 망하고 지구 온난화로 물에 잠겨서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길 빌었다. 일본에 대하여 독을 품고 있으니 일본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 혐오하고 폄하하며 비하하며 경멸하게 되었다. 일본인을 바라보는 내 눈에서 불이 나갔다. 마음에서 저주가 나갔다. 심지어는 일본인과 친한 외국인마저도 싫어하게 되었다. 일본이 저지른 악에 대한 심판이 있기를 일본지도 위에 손을 얹고 날마다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이 나의 영혼을 병들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몸도 병들게 만들었다. 결국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가는 방망이에 오는 홍두깨”라는 악의 악순환을 깨달으며 깊은 성찰과 참회의 시간을 가졌다.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터치하여 원수 일본에 대한 증오감과 분노를 깨끗이 씻어주셨다. 그리고 비로소 혐오, 비하, 폄하에서 자유로워졌다. 그 뒤로 여행을 가서 일본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분노와 증오감 없이 차분히 그들에게 1920년 일본군이 조선민간인들에게 저지른 죄악상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그 후손인 일본인들, 그들을 증오하고 혐오하고, 폄하하고 비하하며 저주하였던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조상이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경악하였으며 나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조상들을 대신해서 참회하겠다며 거듭 용서를 빌었다.
일본 또한 바다로 국경을 접한 나라로 우리가 관계를 배타하고 폐쇄하며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현재 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 대대로 일본과 교류하며 아시아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며 살아야하는 지역운명공동체이다. 그렇다고 매국에 앞장을 선 이완용이나 이용구처럼 친일파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서로 경쟁하며 견제하면서도 서로 인정하고 신뢰하며 개방과 교류를 통하여 함께 세계 평화를 위해, 공생공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기행을 떠나는 사람은 사적인 개인이지만 동시에 현재와 미래의 후손을 잇는 자로서 역사적인 공적인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4월부터 북간도 역사기행의 물코가 터질 것으로 예상이 된다.
역사기행의 가이드나 해설을 맡으신 분들이 역사기행이 역사퇴행과 민족적인 국수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특별히 경계하며 비하발언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유의하길 바란다.
혈연 민족주의에 근거한 역사 왜곡과 교육과 해설로 극단적인 분노와 증오를 확대재생산하는 것과 여행 국가를 혐오하거나 비하하는 발언이 있는 역사기행은 평화기행이 아니다. 오히려 나라와 나라 사이에 분쟁과 알력의 씨를 뿌리는 광신적이고 맹목적인 현대판 위정척사 여행이 될 것이다.
생각해보라!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위정척사를 내세우며 배타와 폐쇄 그리고 폭력과 침략을 일삼는다면 세상이 어찌 되겠는가?
역사기행은 모름지기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며 은원을 정리하며 새로운 미래로 가는 여행이어야 한다.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고 더 나아가서는 동북아와 아시아 그리고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역사기행을 꿈꾼다. 우리의 어깨에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의 평화가 달려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2024년 6월 11일 화요일 미시
우담 초라하니
초안하고
2025년 4월 2일 인시
수정하다.
우담초라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