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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7일 성령강림절 후 스물세 번째 주일예배
성경: 롬1:16~17절(신240)
제목: 이신칭의의 능력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주일로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천주교의 수사이며,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그 대학교회 정문에 95개 조항 반박문을 붙인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17절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507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루터의 갈등과 경험을 참조하면서 오늘 본문(1:16-17)을 읽고자 합니다. 이것을 통해 당시의 종교개혁의 정신인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3대 핵심 가치를 재확인하며, 그 정신과 본문의 말씀을 오늘의 우리 상황에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당시 천주교는 ‘성경과 은혜과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말하면서 성경을 해석하는 ‘교회(전통)의 권위’를 성경과 동등한 것으로 주장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하여 그들은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그 은혜로 인한 선행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즉 처음에 믿음으로 시작한 구원을 위하여 인간의 업적(공로)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여기서, 당시 천주교와 종교개혁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오직’이라는 단어입니다.
이제 루터의 종교개혁에 이르렀던 경험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당시 천주교의 구원론에 따르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가질 수 없습니다. 이는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이 시작하였지만, 최종 구원을 위한 자신의 업적(공로)에 대하여 확신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천주교도 소수를 제외하고 다수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외경인 ‘마카비 2서’에 근거하여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구원의 공로가 부족한 사람이 그 공로가 만족 될 때까지 들어가 있는 ‘연옥의 교리’를 만들었고, 그 공로가 많은 사람이 부족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식의 ‘동공’의 이해를 하였습니다. 여기서 ‘동공’은 사도신경에서 ‘성도의 교제’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당시 천주교회는 성당의 건축 등에 부족한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고해성사 후에 자신의 죄책이나 연옥에 있는 사람의 죄책을 면하는 증서(면죄부)를 돈을 받고 판매한 것입니다. (면죄부는 죄가 아니라 죄책을 면하는 증서입니다). 이 면죄부는 천주교회를 점점 부패하게 하였고, 결국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당시 천주교의 구원론에 따랐던 루터도 하나님의 심판을 아주 두려울 정도로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죄인인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천주교의 수사가 되어서 많은 금식과 고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 안에 있는 죄악을 없게 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번개만 쳐도 그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겨 극단의 공포에 빠지곤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루터가 본문의 17절의 ‘하나님의 의’를 읽었을 때 어떠했을까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아주 싫어하고 미워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의’를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의 이해는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하여 율법에 따라 공의의 심판을 하시기 때문입니다(2:8-9).
그러던 중에 어느 날 루터는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말씀이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기쁜 소식인 복음에 하나님 공의의 무서운 심판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가’였습니다. 루터는 이때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바울의 그 말씀에 끈덕지게 매달렸고 아주 열렬히 바울이 원하는 것을 알고자 했다. 마침내 하나님의 자비로 밤낮으로 묵상한 가운데 나는 그 단어들이 나오는 문맥에 주의를 기울였다.” 결국, 그는 17절의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이신칭의)’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이 ‘이신칭의’를 통한 구원의 확신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완전히 새로 거듭나 열린 문들을 통하여 낙원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느겼다. ...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이전에 미워하였던 것만큼이나 이제는 가장 달콤한 사랑의 단어로 찬양하였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루터는 당시의 천주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관행들에 대하여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주장들을 반박하였던 당시의 천주교와의 치열한 논쟁을 통하여 루터는 그의 종교개혁의 3대 정신, 즉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확립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유산인 ‘믿음으로 의롭다(사죄)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받았지만, 많은 다툼과 비난과 분열이 있습니다. 이는 다른 성도들이나 다른 교파를 복음에 나타나는 ‘이신칭의’, 즉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그의 아들들’(엡1:4-5)로 적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 간다는 미래구원을 확신하지만, 현재 세상에서 성도들이나 세상 사람들과 거의 구별이 없습니다. 즉 입으로는 믿음을 고백하는데 경건의 능력이 없는 상태이기에 세상의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개혁하자고 외치고 있지만 개혁되지 않고 점점 쇠퇴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문제일까요? 복음에 나타나는 이신칭의의 교리에 약점이 있을까요? 어떤 신학자들은 ‘처음에 믿음으로 언약의 관계에 들어가지만, 그 언약 관계를 유지하는 데 순종이 필요하다’라는 ‘바울의 새 관점’ 또는 ‘언약적 신율주의’를 주장하여, 믿음과 순종을 강조하는 천주교의 구원론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복음에 나타나는 이신칭의를 강조하다 보니, 그리스도의 복음 중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그의 십자가(죽음)의 의미는 강조되었지만, 그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며 가르치는 것 없이 역사적 사실로만 믿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이해에서 그의 죽음뿐만 아니라 부활과 승천에 대한 의미도 알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16세기의 종교개혁 당시보다 현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성경 신학이 발전하여 성경을 구속 종말론적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천국(하나님 나라)은 미래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믿는 우리에게 이미 실현되고 있기에 현재 들어가는 것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 해석방법론은 바울의 온전한 복음을 이해하는데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제, 루터의 경험과 오늘의 우리 상황을 고려하면서 오늘 본문을 읽어가고자 합니다(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문의 구조는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16a), 그 이유인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16b절, 그리고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16b)의 이유인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17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이것은 복음에 대한 바울의 확신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구조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 즉 복음을 자랑하는 그의 확신을 선포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바울과 같이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과 자랑과 확신을 가지는 것이 절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3번이나 나오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1:1-4절에서 그의 복음을 소개합니다.
먼저 1:1-2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복음’(1)을 언급하고 그것을 설명합니다(2-4).
하나님의 복음(1)은 하나님이 하신 일(사건)들에 대한 기쁜 소식인데, 이것은 그의 아들에 관하여 구약성경에서 미리 약속(예언)하신 것입니다(2). 여기서 그의 약속은 세 가지 요소, 하나님의 정한 심판과 구원의 시기(카이로스)인 여호와의 날(종말), 그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영원한 아들(왕), 그 아들(왕, 또는 주)을 통한 약속(종말)의 성령 시대의 시작입니다(4).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이 그의 선지자들을 통한 그의 약속을 그 아들을 통하여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1:3-4절에서 설명합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여기서 ‘육신으로’(3)와 ‘성결의 영으로’(4)의 대조는 ‘예수님의 인성’과 ‘그의 신성’의 대조가 아니라, ‘육신으로만 사는 시대인 이 시대(세상)’와 구약 예언의 종말론적 성취로 시작된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시대인 오는 시대’의 대조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에 그의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사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즉 만물과 교회(우리)의 주로 선포(임명)하사 종말의 성령의 시대를 시작하셨다는 것(4)이 바울이 전한 온전한 복음입니다. 고후4:5절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성도 여러분,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바울과 우리의 주가 되셨다면, 바울은 그의 종(1), 우리도 그의 것(종)이라는 것(6)은 너무 당연한 우리 자신의 이해이며,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 자신을 위하여 살 수 없고, 주님과 그와 연합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 수밖에 없다는 것(14:7-9)이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먼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16b) 이유인 17절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오직’은 원문에는 ‘그러나(데)’이며, ‘기록된 바’도 ‘그것이 기록되어 왔던 것같이’입니다. 여기의 ‘하나님의 의’는 루터가 새롭게 이해한 대로 복음을 믿는 자에게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 즉 ‘이신칭의’입니다. 이는 루터가 말한 문맥인 “그것이 기록되어 왔던 것같이,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와 일치하며, 로마서의 문맥과도 일치하기 때문입니다(3:21-5장).
3:21-24절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복음)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또한, 고후5: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루터는 이것을 즐거운 교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와 하나님의 의의 교환)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믿음에’ 계시 되고 있는데, ‘믿음으로 믿음에’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구속사적으로 보면, 이것은 ‘모든 믿는 자’(16)를 가리킵니다. 즉 ‘유대인, 즉 아브라함의 믿음으로부터 이방인의 믿음에’를 의미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개인의 구원 문맥으로 보면, 이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믿음으로, 즉 오직 믿음으로’를 의미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사람(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록된 바(그것이 기록되어 왔던 것같이)’는 복음에 하나님의 이신칭의가 계시 될 것(17a)이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왔다는 것을 말합니다(1:2, 3:21, 4장).
바울은 그들 중에서 하나인 합2:4b절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아’는 ‘살리라’가 아니라 ‘의인’을 수식합니다. 특히 여기의 ‘그러나’가 이것을 분명하게 합니다. 유대의 죄악에 대한 하박국의 탄원(1:1-4)에 하나님은 바벨론을 사용하여 유대를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고(1:5-11), 바벨론이 유대보다 더 악한 나라이기에, “어찌하여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기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1:13)라는 하박국의 재탄원에 정한 때(종말)의 묵시를 그에게 주십니다(2:1-3).
그 묵시(비전)가 합2:4절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여기서 ‘그러나’는 앞부분의 ‘그의 마음’, 즉 ‘죄악의 바벨론’(2:4a, 2:5-19)과 그들 중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을 대조합니다. 즉 “그러나(즉 그들 중에서) 믿음으로부터 의인이 된 자는 살리라‘입니다. 이신칭의‘의 내용인 합2:5b절은 ’이신칭의‘의 문맥인 갈3:11절과 히10:38절에서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복음에 계시 되는 ’이신칭의의 진리‘는 성경 전체가 증거하는 아주 중요한 진리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율법(창조) 언약에 따라 죄인에게 저주와 사망의 심판을 하시고, 의인에게 그의 생명과 복을 주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최후의 심판), 즉 복음을 통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은혜로 받은 의인에게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은 절대 진리입니다.
고후3:9절입니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는 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에게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이신칭의의 능력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16b절입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절의 이신칭의 때문에 복음은 구약 약속의 종말론적 성취에 따라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먼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사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즉 만물과 우리의 주가 되게 하셨을 뿐(4, 엡1:20-22)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16, 엡1:19). 여기서 ‘구원’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재 마귀와 죄의 저주와 사망에 해방되어 만물과 교회의 머리가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하나님 나라)와 연합(그의 소유)되는 것도 의미합니다(1:6). 행11:21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행11:24절입니다.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그러므로 ‘구원을 주시는(위한) 하나님의 능력’은 과거의 구원, 현재의 구원, 미래의 구원(8:23-24)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에게’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불신이나 의심의 반대가 아니라 우리의 행위의 반대어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동의어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거에 오직 믿음으로, 즉 성령을 통한 그의 능력으로 구원받았고, 현재도 오직 믿음으로, 즉 성령을 통한 그의 능력으로 구원받고 있으며, 미래에도 오직 믿음으로, 즉 성령을 통한 그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것을 믿고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개혁’은 기존의 부족함이나 잘못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오직 성경(사본이나 번역본이 아니라 원본)의 객관적 계시의 권위 아래 교회(우리)의 신학과 같은 주관적인 계시들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아니라 자기의 주장을 절대화하여 주장하는 것은 당시 천주교가 교회 전통을 가지고 종교개혁자들을 공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507주년의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성경 진리의 권위 아래에 겸손하게 서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우리 한국교회에 절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찬송 585장을 부르신 후에 다같이 기도하며 축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