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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식량을 받고 있는 아프리카 여인. 일부에서는 원조가 아프리카인들의 자립심을 해친다고 비판하고 있다. |
소액대출 사이트 키바의 ‘인생 바꾸는 대출’
키바 홈페이지. |
아프리카에 원조를 중단하라고 촉구한 기사에서 모요는 “원조 대신 구글에서 키바(Kiva)를 검색해보라”고 했다. 모요의 글을 읽고 구글에서 키바를 검색해보았다. 구글 검색창에 키바를 입력하자 컴퓨터 화면에 사진과 국가별 국기, 그리고 화살표로 가득 찬 담록색 웹사이트 창이 떴다. 화면 상단에는 ‘인생을 바꾸는 대출’(Loans that change lives)이라는 키바 슬로건이 보였다. 무담보 소액대출 사이트인 키바는 스와힐리어로 ‘화합’을 의미한다. 키바 슬로건 아래는 ‘소액대출로 부유층과 빈곤층이 하나 된다’고 쓰여 있다. 실루엣과 익명으로 처리된 채권자 사진이 낡은 재봉틀 뒤에 앉아 있는 한 아프리카 여성과 화살표로 연결돼 있다.
키바는 2005년 미국인 매트 플래너리와 제시카 재클리가 설립했다. 아프리카 현지에서 저개발국 원조 단원으로 일하던 재클리는, 꿈이 있는 소규모 사업가들에게 자본을 구하는 통로가 막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키바를 구상하게 됐다.
키바 홈페이지에는 대출을 원하는 방직공, 어부, 농부들의 사진이 나왔다. 쌀과 옥수수, 콩 등 곡류 씨앗을 사려는데 600달러가 부족하다는 에콰도르의 농부 엔리케 레이어스의 사진도 보였다. 케냐의 직물상 율리우스 키아마는 중고 이브닝드레스와 블라우스를 구입하는 데 750달러가 필요해 대출을 신청했다. 구입한 옷들은 그가 시장 좌판에서 직접 팔 상품이다. 나는 시에라리온의 주도 마케니에서 운영하는 식당을 확장하려고 875달러가 필요하다는 쿰바 무어의 사진에 시선이 갔다.
키바 웹사이트에 프로필이 실린 대출 신청자들은 기부나 적선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대출이며, 향후 1년 내에 한 푼도 남김 없이 대출을 상환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약속하고 있다. 독일인 관점에서 이들이 필요로 하는 액수는 결코 많지 않다. 키바 웹사이트에 따르면, 이 단체는 지난 5년간 70만 명이 전세계 빈곤국가의 약 40만 명에 이르는 소규모 상인들에게 소액대출을 해주었다. 최소 대출액 단위는 25달러이다. 전체 대출 거래는 싱가포르의 결제 사이트 페이팔(PayPal)에서 한다.
나는 이전부터 소액대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2006년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과 은행 설립자 무함마드 유누스가 빈민에게 소액대출을 제공해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하지만 2010년 유누스는 1억달러를 그라민은행의 자회사로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았다. 인도에서는 소액대출기관이 부채 지급 능력이 없는 여성 채권자들을 자살이라는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는 기사가 한때 언론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내가 키바를 통해 저개발국 소상인들에게 대출해준다면 소액대출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갔다.
구글에서 키바를 검색하기 몇 주 전, 시에라리온의 마케니에서 남쪽으로 5700km 떨어진 아졸리니 하이웨이의 버스정류장에 있는 쿰바 무어의 식당에 서류가방을 든 한 남자가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그의 방문 이후 나와 무어가 연계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무어의 식당 건물은 폐기물을 재활용한 이동식 컨테이너다. 한쪽 벽면에는 음식 나오는 창구가 뚫려 있다. 창구 앞에는 골조 함석 베란다가 있고, 베란다 양쪽에는 올리브 잎이 햇살과 비를 가리고 있다. 출입구에는 음식을 먹고 있는 남녀 커플 그림이 있고, 그림 위에는 ‘Welcome to K-Restureant’라는 표기법이 틀린 식당 이름이 적혀 있다. 컨테이너 뒤에 있는 주방은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주방 화덕에는 쌀과 열대 관엽 낙목인 카사바, 그리고 쇠고기 스튜가 끓고 있다.
서류가방을 들고 온 남자는 식사를 하러 무어 식당에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자리에 앉자 식탁 위에 서류를 올려놓았다. 무어는 주저하면서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서류를 바라보는 무어는 반신반의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1974년 3월28일 자신의 생년월일부터 시작해 ‘마케니 경찰 막사 B블록’이라는 집 주소에 이르기까지 작성해야 하는 서류의 빈칸이 상당히 많았다. 경찰인 남편의 연봉을 묻는 질문도 있었다. 남편의 한 달 급여는 20만리온(약 35유로)였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는 생활비의 절반을 대기도 빠듯하다.
6개국 21명이 모아준 자금 875달러
‘은행이 거부한 여인’ 껴안아
라이너 루이켄 Reiner Luyken <디 차이트> 해외 특파원
시에라리온의 유일한 공항인 룽이공항은 길다운 길은 찾아보기 힘든 습지대에 있다. 공항에서 마케니까지 자동차로 이동한 4시간은 고문이나 다름없는 고된 여정길이었다. 4시간을 달리는 동안 도로는 질벅거렸고, 도로에 파인 구멍과 무릎까지 오는 물구덩이와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시에라리온의 우기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지만, 습도가 높아 상당히 후텁지근했다. 마치 강렬한 햇살이 도로 양옆에 있는 무성한 덤불에서 지난 몇 달간 내린 비를 다시 빨아들이는 듯했다.
내가 식당에 들어갔을 때 쿰바 무어는 음식 나오는 창구 뒤에 서 있었다. 무어는 당황한 듯 인사하며 컨테이너에서 베란다로 나왔다. 무어는 자리를 권하며 식사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때는 오전 11시였다. 나는 전혀 배고프지 않았지만 “네”라고 답했다. 무어는 컨테이너로 들어가서 쇠고기에 짙은 녹색 소스를 끼얹은 요리를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그릇에 내왔다. 고기요리가 매운지 밥이 산더미만큼 나왔다. 음식을 식탁에 올려놓은 뒤, 무어는 옆에 앉아서 음식을 먹는 나를 바라보았다.
무어는 자신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주었다. 무어는 빈곤에서 가족을 일으켜세우리라는 희망으로 2년 전 이 식당을 열었다. 무어의 아버지는 11년간 5만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2002년에 종식된 내전 중에 사망했다. 무어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14살이라니 너무 어린 나이였죠.” 그녀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에라리온 여성의 평균 출산율은 6명이다. 무어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에서 멈추었다. 방학 중인 아들과 딸은 식당 일을 돕고 있었다. 16살인 아들 로렌스는 벌써 어른티가 나고, 14살 딸 루스는 10대 청소년답게 반항적이면서도 서툴러 보였다. 무어는 두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했다.
무어는 호텔학교를 졸업했다. 호텔학교에서 고객서비스 개념을 배운 무어는 자신의 식당을 찾는 손님이면 누구나 진심으로 서비스를 받고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도록 노력했다. 식당을 개업한 첫날에는 15명, 둘쨋날엔 17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지금은 하루에 최대 300명까지 손님이 오며, 그중 적잖은 수가 단골이다. 무어는 지역 라디오방송사에 몇 분짜리 광고도 냈다. 또한 저개발국을 지원하는 원조단체를 찾아가서 식당을 홍보했다. 이 단체의 직원들은 대다수 원주민들보다 연봉을 더 많이 받는다. 점심시간이면 영국인과 미국인, 일본인이 그녀의 식당을 찾아왔다. 그즈음 무어는 식탁 3개와 의자 7개에 불과한 식당을 확장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수입이 적어 식당을 확장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무어는 마케니의 한 은행에 300만리온(약 720유로)의 대출을 신청했지만 거부당했다.
MBC 다큐멘터리 <아프리카의 눈물>의 한 장면. |
이자율 24%, 사채업자와의 차이점은?
무어와 테이블에 함께 앉은 유럽인 채권자인 나는 시에라리온의 여느 은행가들과는 달리 손목시계도 차지 않았고, 노키아의 최신 휴대전화도 갖고 있지 않았다. 여느 유럽인 채권자들과는 달리, 나는 다음날 길거리의 이발소 목조 노점에서 저렴하게 이발했다. 무어는 이런 내가 유럽인 채권자에 대한 통념에 비춰볼 때 이상해 보인 모양이다.
그래도 무어는 내가 지급한 대출금 덕에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식당을 개업하기 전 이 도시의 반대편에 있는 한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그 레스토랑은 호텔 야외 수영장 옆에 있었다. 주고객인 다이아몬드 거래상들과 저개발국가 원조단체 직원들은 호텔에서 하루 묵는 데 70달러 이상을 거리낌 없이 지출했다. 무어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하루 1달러를 벌었다. 그녀는 키바(Kiva) 대출금이 자녀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물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어쩌면’ 자기 집을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지 모른다고 여겼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무어는 계속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손님에게 음식을 서빙하고, 도로 맞은편에 있는 시장에서 채소를 사오기도 했다. 매일 새벽 4시30분이면 방 2칸짜리 집에서 나와 보통 밤 9시 전까지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무어는 한 번씩 쑥스러운 듯 웃으며 자신이 제대로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무어는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을 방문해 자신의 수표를 찾아왔다. 무어는 이자율이 24%나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뿌듯함에 미소를 짓는다. 24%는 일반 은행의 이자율에서 불과 3% 낮은 수준이다. 그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 나는 키바의 소액대출은 무이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살로네소액금융신용 사무실은 빈민 지역에서는 빌라처럼 보이는 건물에 있었다. 그 건물 2층에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의 사장인 레지나 술라의 사무실이 있다. 건물 내부는 호화로운 외부와는 달리 아무런 장식 없이 썰렁했다. 건물 안에는 합판 문을 단 아주 작은 사무실들이 있었다.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의 설립 비전과 가치가 적힌 도금 액자가 사장 집무실의 유일한 장식품이다.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은 “경제적으로 능동적인 빈곤계층을 위한 서비스 기관”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다. 즉, 무기력하게 기부를 받는 사람들을 위한 기관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자녀 넷을 둔 51살의 술라는 고국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의 한 대학에서 농촌 개발을 전공한 뒤 소액금융업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이 일반은행과 대출조건에 별반 차이가 없다는 세간의 비난에, 술라는 개인적 비방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이윤과 예비금 없는 사업모델이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인플레이션이 17%라면 무어에게 부과된 이자율 24%는 실질이자율 7%를 의미한다. 24%는 매우 현실적인 이자율이다.”
하지만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은 과연 무엇을 위해 예비금을 적립해야 한단 말인가? 술라는 이렇게 말했다. “소액대출금을 상환하지 않는 대출자들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이 키바에서 현재 별 4개 등급에서 별 5개 등급으로 상향 조정되려면 예비금을 비축할 필요가 있다.” 별 5개 등급으로 상향 조정되면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은 대출 규모를 늘릴 수 있게 된다.
즉, 현재 대출자 4천 명과 대출액 100만달러에 그치지 않고, 대출자와 대출액 모두 두 배로 늘릴 수 있게 된다. 솔직히 나는 술라가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생소했다. 저개발국 소액대출에서 ‘원조’ 개념이 무미건조한 경제적 논리에 앞서야 한다는 것이 내 신념이었다. 금융매니저의 경제적 논리로 무장한 술라는 사용하는 용어도 ‘대출 과정’ ‘체계적 오류 감지’ ‘효율적 고객 서비스’ 등 전문용어 일색이었다. 내가 선뜻 내놓은 250달러가 이런 무미건조한 금융대출에 쓰이는 것인가?
2007년 9월 대선 결선투표 뒤 시에라리온 수도 프리타운의 모습. 이곳에서는 불안이 끊이지 않는다. |
석 달 뒤 대출금 중 27.77달러 첫 상환
마케니 첫 방문에서 석 달이 지난 뒤 키바에서 전자우편이 왔다. ‘무어가 대출액 중 27.77달러를 처음 상환했다. 이 돈은 당신 은행계좌로 송금해줄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고객에게 다시 빌려줄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몇 주간 동일한 내용의 전자우편이 수차례 왔다. 전자우편에는 무어가 지난 몇 개월간 정확히 34만764리온을 마케니의 살로네소액금융신용 창구에 상환했다는 내용과 함께, 좀더 자세한 내용을 참조하라며 홈페이지를 링크해놓았다.
내가 무어의 ‘K-Restureant’을 두 번째 방문한 것은 정오의 열기가 마치 바늘로 살을 찌르는 듯한 건기의 어느 날이었다. 무어는 자신의 컨테이너와 옆집 컨테이너 사이의 목재 벤치에 앉아 있었다. 무어의 언니가 그녀의 머리를 가느다랗게 땋아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소리치며 여기저기 뛰어다녔고, 파리떼는 윙윙거리며 날아다녔다. 뚱뚱한 여성이 바닥에 놓인 아기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식당 내 공기는 숨이 막힐 듯 후텁지근했고, 땀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무어는 마치 오랜 친구나 사랑하는 이를 만난 듯 환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의 남자 직원이 당신이 오늘 방문할 것이라고 알려줘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왜 진작 전화를 주지 않았어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무어와 나는 그 사이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서로 호감이 생겼다고 하여 250달러 소액대출 실험에 영향을 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학술연구 중인 학자처럼 실험 대상에게 거리감을 둘 생각이었다. 특히 대출과 관련해 그간 좋지 않은 일이 여러 차례 무어에게 생겼다.
지난번에 차고 있던 ‘짝퉁’ 디자이너 손목시계 대신 무어는 낡아빠진 플라스틱 시계를 차고 있었다. 휴대전화도 닳아서 금이 간 저렴한 모델이었다.
무어는 플라스틱 시계가 딸의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몇 달 전 음식 나오는 창구 앞에 놓아둔 지갑을 도둑맞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지갑에 있던 100유로와 휴대전화 2개, 금목걸이와 귀고리 2개, 손목시계가 함께 없어졌다.
오랜 내전으로 고통받았던 시에라리온. |
남편 말라리아 감염 등 불행 이어져
무어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토바이를 한 번도 타본 적 없는 아들 로렌스가 친구의 소형 오토바이를 빌려 탔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로렌스는 맞은편에서 오던 어린 남자아이를 실수로 다치게 했고, 다리가 부러진 남자아이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무어가 병원비를 전액 내야 했다. 운전면허증 없이 오토바이를 탄 아들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경찰관에게 뇌물을 주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뒤 무어의 남편이 말라리아에 감염되자 돈은 바로 바닥이 났다. 시에라리온에서는 경찰도 유급 병가를 낼 수 없어서 남편의 급여는 하루아침에 끊겼다.
무어의 식당 확장은 예상보다 많은 돈이 들어갔다. 인플레이션 탓도 있지만, 무어가 키바를 통해 대출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건축 인부들이 원래보다 더 많은 공사비를 요구한 것이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식당 확장 규모를 원래 계획의 절반으로 축소했다. 무어의 식당에는 여전히 식탁 3개와 의자 7개뿐이다. 무어가 키바를 통해 대출받은 돈은 거의 바닥났다. 식당 수익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무어가 대출받은 직후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새로운 식당이 문을 열었다. 그곳은 무어 식당 손님 중 가장 돈이 되는 고객인 서구의 저개발국가 원조단체 직원들을 주요 고객층으로 겨냥했다. 유니세프의 시에라리온 현지 직원이 급여를 털어서 개업한 식당인데 직장 동료들은 당연히 발길을 돌렸다. 이는 유니세프 외국인 직원들도 무어의 식당에 발길을 끊었다는 것을 뜻한다. 무어는 식당을 그만두고 술집이나 화장품 가게 등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할지 갈등했다.
무어가 겪은 온갖 사건·사고를 검토한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의 소액대출 담당자는 그녀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고 했다. 살로네소액금융신용에 기록된 무어의 대출금 상환 기록에는 그녀의 어려운 상황이 고스란히 배어나왔다. 무어는 마지막 두 번째 대출 상환 기일을 맞추지 못했지만, 한 달 뒤 2회 분납으로 상환했다.
현재 무어는 마지막 대출 상환액을 2주 연체한 상태다.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은 현재 별 4개 등급에서 하향 조정되지 않기 위해 예비비에서 내 대출액을 키바에 상환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해 미국· 오스트레일리아·프랑스·독일·스웨덴과 필리핀의 채권자들은 무어의 최근 힘든 상황을 알 길이 없었다.
사업가적 관점에서 무어는 많은 실수를 한 것일까? 무어는 대출받은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대신 별도의 계좌에 예치해놓아야 하지 않았을까? 무어는 개인 돈과 대출받은 자본을, 그리고 식당 투자와 개인 지출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이날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의 사장 사무실에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32살의 아치볼드 쇼다이크가 일하고 있었다. 술라는 사무실에 없었다. 술라는 현지 소액대출 기업 자문을 위해 인도네시아를 방문 중이었다. 무어에 대한 질문을 받자 쇼다이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손바닥을 위로 치켜들었다. “우리 고객들의 문제는 대출금 미상환이 아니라, 사업을 위해 대출금을 최대한 오랫동안 굴리려는 것이다. 고객들은 영리한 사업가다. 유럽인은 아프리카인이 사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프리카인이 이론적으로는 사업적 이해가 부족할지 모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아프리카인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적극 활용할 줄 안다.”
쇼다이크는 무어에게는 힘든 고비가 많았다고 했다. “고객이 힘든 상황에 처하더라도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은 일반은행처럼 대응하지 않는다. 일반은행은 고객의 여건을 고려할 만큼 유연하지 못하다. 고객이 병원비를 대기 위해 사업회계에서 돈을 유용하더라도 우리는 고객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일반은행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더라도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은 빈민층 소액대출로 적잖은 수익을 남기고 있다.”
저개발국 원조단체들이 소액대출 업계의 야박함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마케니에서 만난 영국의 저개발국 원조단체 여직원 3명은 아프리카의 사회적·경제적 재건에 소액대출기관들의 참여도가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그중 1명은 “아프리카는 기후변화로 상황이 악화됐고, 시에라리온 농부들에게 대안 농작법을 전수하고 전통적인 관개용수법을 재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원조단체 직원들의 아프리카의 미래에 대한 기대치는 엄청났다. 이들의 기대치는 더 나은 세상을 실현하는 것만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것도 시에라리온에서 말이다. 반면 소액대출기관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소액대출기관들이 중시하는 것은 시장과 경쟁이며, 더불어 삶의 수준을 개선시키려는 소액대출 고객의 작은 소망이다. ‘저개발국 원조’라는 이상주의와 ‘소액대출’이라는 실용주의는 정녕 모순되는 것일까?
소액대출기관마다 대출 지급과 관련해 상이한 규정을 채택한다는 점에서 소액대출은 실용적이라는 주장은 옳다. 무함마드 유누스의 그라민은행은 회원 20∼25명이 상호 보증을 서는 협동조합에만 대출을 해준다. 살로네소액금융신용도 초기에는 협동조합에만 대출해주었다. 하지만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의 설립자들은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 모델이 시에라리온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에라리온 현지인들은 기나긴 내전 때문인지 서로를 믿지 못한다. 대출 신청자들 대부분은 개인이었다.
ⓒ Die Zeit·번역 김태영 위원
예상된 실패, 예상 못한 여인의 변화
라이너 루이켄 Reiner Luyken <디 차이트> 해외 특파원
무어를 두 번째 방문하고 독일로 돌아가는 길에서 250달러 소액대출 실험은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내 실험은 ‘저개발국가 원조’라는 측면을 충족하지 못했고, 무어의 식당 확장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업성과 이윤을 추구하는 소액대출 은행은 내게 대출금을 약속한 상환 일자에 정확히 상환해주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계획을 하나도 실행하지 못한 무어는 파산 직전이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 원조를 엄격히 거부하면서도 소액대출기관에 대해서는 칭송하고 있는 경제학자 모요의 판단은 틀렸을까?
대출 시점에서 어느덧 1년이 지났다. 키바(Kiva)가 매달 보내는 정기 전자우편이 도착했다. 자동으로 생성된 전자우편은 항상 ‘안녕, 라이너’라고 시작한다. “당신이 지급한 대출금 27.78달러는 지난달 상환됐습니다. 당신의 키바 계좌에는 현재 250달러가 예치돼 있습니다.” 내가 무어에게 빌려준 대출금이 전액 상환된 것이다. 그리고 키바 홈페이지에 자신의 대출금을 모두 상환했다고 무어의 프로필이 업데이트돼 있었다.
이즈음 살로네소액금융신용 담당 직원이 무어에게 사무실 방문을 요청했다. 무어는 지난달부터 다시 대출 상환을 연체 하고 있었다. 담당 직원은 무어의 대출금 상환 영수증의 분홍색 복사본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은 무어의 연체된 채무를 키바에 선불했다. 담당 직원은 잔뜩 찌푸린 채 저축은행장의 포스가 뿜어져나오는 엄격한 목소리로 무어에게 “당신은 우리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했다. 대출 상환이 연체된 만큼 연체금을 내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나중에 내게 무어와의 대화 내용을 전달할 때도 담당 직원은 딱딱한 어조였다. 무어는 돈이 생기는 대로 연체금을 내고 대출금도 모두 갚겠다고 약속했다. 무어와 헤어지는 자리에서 담당 직원은 무어의 재정적 문제는 관리 잘못에 있다면서 제대로 된 돈관리를 당부했다.
시에라리온의 마벨라 슬럼지역에서 아이들이 물통을 나르고 있다. |
250달러 소액대출 실험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났을 즈음, 나는 무어를 세 번째 만났다. 머리를 금발로 염색한 무어는 연한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은색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튀는 외모 덕에 금방 눈에 띄었다. 1년 전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희망에 부풀어 있던 무어와는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그리고 6개월 전 용기를 잃고 풀이 죽어 있던 무어와도 달라 보였다.
무어에게서 수줍은 미소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무어는 자리에 앉아 구겨진 지폐를 세고는 지갑에 챙겨 넣었다. 무어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주방에 음식 주문을 전달했다. 무어의 식당에는 주방보조가 3명 일한다. 2명은 요리를 하고, 나머지 1명은 음식을 접시에 담는 일을 한다. 무어의 조카가 홀에서 음식을 나르고 있다. 무어의 식당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로 가득 찼다. 식탁 7개가 놓인 무어의 식당은 최대 14명의 손님을 수용할 수 있다. 1년 전보다 두 배나 더 많은 손님을 받을 수 있다.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
원조단체의 서구 직원들이 무어 식당에 다시 찾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무어는 “시에라리온 원주민 손님이 늘어났다”고 했다. 현지인들은 대부분 말없이 식사하고 계산이 끝나면 바로 식당을 떠났다. 현지인들은 유럽인들처럼 식당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손님들이 추가 주문 없이 자리만 오래 차지하는 일이 없어지면서 식탁 회전율이 빨라졌다.
무어는 문을 가리켰다. 오타투성이의 식당 간판과 이상한 그림이 그려진 입구 대신 육중한 목재문이 새 경첩으로 연결돼 있었다. 그리고 컨테이너 옆에 새로 들어선 전화기 상점에서 아프리카 록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덕택에 무어는 대출계약서에 필요 기자재로 기입한 음향시설을 구입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후에 큰 흰색 도요타 사륜 구동차 한 대가 식당 앞에 섰다. 무어의 식당 종업원들은 차에 식기와 수저, 그리고 보온 용기를 실었다. 무어는 영국의 산아조절기관 ‘매리스톱스인터내셔널’(Marie Stopes International)이 매달 개최하는 콘퍼런스 케이터링(출장 음식)을 맡고 있다.
콘퍼런스 케이터링은 무어에게 고수익 사업이다. 정식 22인분에 8만리온을 받으면 이 중 5만리온은 순수익으로 남는다. 2~3시간에 약 8유로의 수익을 얻는다. 원조단체 케어(Care)가 매달 이틀간 개최하는 두 배 규모의 콘퍼런스 케이터링으로 무어는 정기적으로 20만~30만리온(약 3146 유로)의 수익을 올린다.
무어는 어떻게 이런 알짜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을까? 원조단체들의 시에라리온 현지 직원들이 무어에게 케이터링 외주를 맡긴다. 무어는 케이터링 서비스로 발생한 수익과 얼마 남지 않은 대출금으로 주방과 식당을 개조했다.
그렇다면 내 소액대출 실험은 성공한 것일까? 무어는 자신의 삶이 나아진 것은 아니라고 했다. 돈 걱정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원조단체장들은 케이터링 서비스를 받고 보통 3주 뒤에나 수표에 사인을 해준다. 식당 종업원들도 큰 골칫거리였다. “내 목적이 무엇이고 식당 장사란 무엇인지 종업원들에게 끊임없이 인지시키려 노력한다. 그런데 아무리 얘기해도 종업원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 지금까지 해고한 종업원만 셀 수 없이 많다. 내가 잠시라도 식당을 비울라치면 종업원들은 식당 일은 나 몰라라 한다.” 무어의 하소연이 길게 이어졌다.
1년 만에 만난 무어는 자신감 넘치는 기업인으로 변모해 있었다. 물론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이 무어를 성공 모델로는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무어의 식당 매출액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무어는 일자리를 무려 3개나 창출해냈다. 일자리 창출이 대출계약서에 명시된 조건은 아니었다.
무어는 거리의 부랑아들을 데려와서 식기 세척을 맡겼고, 대가로 공짜 식사를 주었다. 그 덕에 부랑아들은 더 이상 구걸하러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이 모든 변화는 무어의 재정 형편 개선의 시작에 불과하다. 특히 1년 사이에 무어는 몰라보게 성숙해 있었다. 경제적 독립도 이뤘다. 심지어 살로네소액금융신용과 키바로부터도 독립했다. 1년 전 키바 대출금은 당시의 무어에게 적절한 결정이었다.
작별하던 날 무어는 내게 비밀을 하나 털어놓았다. “1년 전 개설한 은행 예금계좌에 지금 150만리온이 예치돼 있다.” 150만리온(약 233유로)은 시에라리온에게 상당히 큰 금액이다. 나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 돈으로 살로네소액금융신용의 부채를 갚을 수 있지 않느냐.” 무어 역시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처지라 비상금이 필요하다.”
무어는 경찰관인 남편 이야기는 거의 꺼내지 않았다. 가족 생계는 무어가 책임지고 있다. 무어는 자신의 아이 2명뿐만 아니라, 자신의 열 자매 중 두 자매의 아이들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두 자매 중 1명은 3년 전에 죽었고, 무어는 졸지에 고아가 된 조카 3명을 떠맡게 되었다.
지난해 6월 무어를 방문한 언니는 심각한 두통을 호소했다. 무어는 언니를 병원으로 데려갔고, 언니는 그로부터 열흘 뒤 죽었다. 언니의 병원비와 장례비, 기타 부대비용 등 총 40만리온(약 62 유로)를 무어가 지급했다. 무어는 죽은 언니의 아들이 법학 공부를 할 수 있게 뒷바라지할 생각이다. 식당에서 버는 수입과 키바에서 다시 대출받을 돈으로 말이다.
ⓒ Die Zeit·번역 김태영 위원
토마스 피셔만 Thomas Fischermann <디 차이트> 경제부 부편집장
소액대출, 이 얼마나 위대한 아이디어인가. 저개발국에 대한 적선 따위는 잊어버려라. 저개발국 소외계층도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기를 원한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력거 릭샤 서비스나 가판대 등 소규모 장사를 시작할 수 있는 지원금이다. 궁극적으로는 스스로를 돕기 위한 지원인 것이다. 여기에 큰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50달러, 500달러 혹은 2천달러면 충분하다. 소액대출은 저개발국 원조의 새롭고 현대적인 방식이다.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는 소액대출운동의 설립 비전 역시 저개발국 원조의 비전에서 진일보한 것이다. 소액대출기관에 관한 정보 플랫폼을 제공하는 미국의 민간 비영리단체 ‘마이크로파이낸스 인포메이션 익스체인지’(Microfinance Information Exchange)에 따르면, 2003~2008년 소액대출 사용자는 연간 20%이고 대출 규모는 34%로 크게 늘어났다. 소액대출 사용자만 전세계적으로 1억5천만 명이 넘는다. 소액대출기관은 1만여 개에 달하며, 소액대출기관의 대출 규모는 수백억달러에 이른다.
원조운동가이자 은행가인 무함마드 유누스가 사회공헌 업적에 대해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으면서 소액대출운동은 탄력을 받게 됐다. 저개발국 원조의 하나인 소액대출은 유누스가 1967년 설립한 그라민은행과 멕시코의 악시온 그룹과 함께 시작했다. 현재는 은행, 협동조합, 소매업자, 온라인 회사 등 다양한 기관이 소액대출업을 한다.
유누스를 비롯한 선구자 격인 소액대출기관들은 단순히 빈곤층에게 대출해주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빈곤층에게 대출해주는 기관은 이미 충분히 많았다. 살인적인 이자와 폭력을 동원한 빚독촉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사채업자들도 굳이 분류하면 소액대출기관에 속한다. 단순한 빈곤층 대출을 뛰어넘어 빈곤층에게 기존 이자율에 비해 훨씬 낮은 이자율로 돈을 빌려주는 점이 소액대출운동의 혁신적 차이점이다. 기존 대출 이자가 너무 높았던 것은 단순히 채권자가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빈곤층 대출 때 채권자는 대출금 미상환과 관련해 높은 리크스를 감수해야 한다. 즉, 채권자들은 대출금의 상당액을 돌려받지 못할 것을 감안해 높은 이자율을 부과한 것이다.
원조운동가이자 은행가인 무함마드 유누스. |
고비용 감시 시스템 필요 없는 메커니즘
유누스와 그라민은행은 대출금 미상환 리스크를 낮추면서 동시에 그물망처럼 촘촘한 고비용 감시 시스템이 필요 없는 메커니즘을 실험했다. 각 소액대출기관은 자체 대출 프로세스와 대출 규정이 있다. 하지만 어떤 방식이 적합한지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일례로 그라민은행은 대규모 그룹에 우선적으로 대출해준다. 그룹 구성원들은 연대보증을 서야 한다. 그래야만 그룹 구성원들이 서로의 신용을 확인함과 동시에 단결할 확률이 높다. 더욱이 대출금 상환과 관련해 서로를 감시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은 대출금 상환 보장을 위한 수많은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채무자들이 소액이나마 매주 정기적으로 부채를 상환하게 한 소액대출기관도 있다. 어떤 소액대출기관은 대출 지급 전에 투자상담원과의 상담을 의무화한다. 대부분의 원조단체는 여성에게만 대출해주는데,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신뢰할 수 있다는 경험에 의한 것이다. 처음에는 소액만 대출하다가 성실하게 대출을 상환한 채무자들에 한해 금액을 늘려가며 대출해주는 기관도 있다.
소액대출업의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타고난 기업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원조 프로그램에 대한 정기적인 연구 조사에 따르면, 기업가 마인드를 가진 채무자나 기존 사업체에 지급된 소액대출은 큰 문제 없이 상환됐다. 기업가 마인드가 없는 사람에게 기업가 마인드를 일깨우기란 어려운 일이며, 아무리 좋은 상담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업가 마인드가 없는 채무자들은 대출금을 기업가적 관점에서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같은 소비재에 지출해버리기 일쑤다.
원조단체들이 오래전부터 비판하는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소액대출이 전통적 원조 프로그램의 대안으로서 극빈층에 대한 공공 투자나 직접적 지원으로 오해받는 점이다. 둘째, 단순하더라도 인프라가 존재하고 기본 영양 섭취가 돼야 기업가적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 극빈층은 소액대출을 아예 신청도 못하는 점은 소액대출의 큰 약점이다.
소액대출이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소액대출기관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것도 문제다. 소액대출기관이 서로 고객 유치 경쟁을 벌이고, 신규 대출 건을 성사시키면 상당한 수수료를 받는 소액대출 판촉원도 생겼다. 최근 인도에서 ‘SKS 마이크로파이낸스’(SKS Microfinance)와 멕시코의 ‘방크 콤파르타모스’(Bank Compartamos)의 주식시장 상장은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소액대출기관 간의 경쟁이 거세지면서 소액대출기관의 내부 규정도 느슨해졌다. 대출을 상환할 능력이 안 되는 채무자들은 경쟁업체에서 신규 대출을 받아 기존 대출을 상환하는 방식으로 돌려막기를 한다. 어느새 부채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불어난다. 비양심적인 사채업자들이 소액대출 시장을 독식하던 과거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지난해 여름 농부들의 연이은 자살로 인도 언론이 떠들썩했다. 인도의 안드라 프라데시 주에서만 30여 명이 과도한 부채에 따른 부담으로 자살했다. 물론 인도에서 농부들 자살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농부들을 자살이라는 극단적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은 사채업자가 아닌 소액대출기관들이었다.
©Die Zeit·번역 김태영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