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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983.08.14. 정인세 원장
갈라디아서 5장 1절만 읽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 한절만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오늘 아침시간에는 김 선생님께 말씀을 해 주셨으면 그렇게 부탁을 어저께부터 드려왔었습니다. 그랬더니 오늘이 해방 절 이냐고 그러세요. 그래서 그렇다고 그랬더니 그러면 자기는 말할 자격이 없으니까 해방 절에 감옥에 갇혀있지도 않았었고 좌우간 할 말이 없다고 안 하시겠다고 감옥에 한번이라도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 해방을 맞은 소감이 있을 거 아니냐? 그래, 오 장로님이나 저 보고 하라고 그러세요. 그래서 저도 독립운동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던 건 아니었거든요. 그것도 신사참배 문제로 해방 전에 얼마동안 잠깐 갇혀있다 나왔지요. 그러고는 해방 때는 강원도 산골짜기에 있다가 나왔지요.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거기가 무슨 리 인가? 깊은 산골짜기에 가서 몇 해 있다가 8.15 해방된 뒤에 거기서 나왔지요. 그러니까는 해방이 되는 소감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도 오 장로님이 말씀 하셨지만 진정한 해방은 죄에서 해방된 것이 진정한 해방이 아니냐? 그것을 절실히 느끼기 때문에 또 계속해서 그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 성경말씀을 우선 택했습니다. 이왕 해방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으니 오늘이 해방일 이라면 진정한 해방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시고 계시는 문제고 항상 생각하고 있는 문제니까, 같이 그 문제를 생각해 볼까 합니다.
여기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은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또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 이외에 어떠한 세상 권세나 유명한 학자나 철학자의 철학설 같은걸 갖고도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킨 역사가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 자유라는 게 무엇이냐는 것이 둘째로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걸 자유라고 그럽니다. 나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는 걸 자유라고 그럽니다.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으면 경제적 자유라고 그럽니다. 공부를 자기 소원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그런 것을 자유라고 이렇게 말 합니다. 그러나 여기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전혀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도리어 반대입니다. 돈을 마음대로 쓰는 게 자유가 아니라 돈에서 완전히 해방 되어서 돈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살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그럽니다. 물질에 대해서도 지식에 대해서도 그렇고,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 하는 거, 우리 마음에서 언제든지 원하고 사모하는 것을 깨끗하게 끊어버린 것을 자유라고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 사람이 우리에게 그런 자유를 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음으로서 가난이 귀한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한자 복이 있다.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사람은 진정히 가난이 복 이로구나. 가난이 복 이로구나. 부자는 하늘나라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기보다 어렵다. 하는 것을 돈에 대해서 고통을 받아본 사람 영혼에 압박을 느껴본 사람이 들이 아 물질 이라는 것은 있을수록 죄로구나. 그걸 깨달은 사람이 프란치스코와 그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성경말씀에 네게 있는 걸 다 팔아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나를 따르라. 그거 한마디를 표어로 삼았습니다. 그러고 제자를 택할 적에도 여러 가지 복잡한 규칙 같은 건 아예 만들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고 네게 있는 걸 팔아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나를 따르라. 그래서 그 말씀을 준행하기 위해서 실베스토 라든지 또 모두 프란치스코에 따르던 그 초대 첫 번째 두 번째 제자들은 자기 집에 있는 재산을 전부 대문간에다 갖다놓고 막 독에다 금화 같은 것도 넣어놓고 그러고 길 가는 사람에게 누구든지 달라고 손 내미는 사람에게 싹 나눠줘 버렸습니다. 다 나눠줘 버리고 그러고 입은 옷 단벌옷 입고 맨발에다가 깡통 하나만 들고 그러고 프란치스코를 따라나섰습니다. 그러고 가난이 내 아내다. 가난이 내 애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가난만 사랑하고 사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성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사람은 가난만을 사랑합니다. 가난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물질에서 해방을 받은 사람입니다. 전혀 물질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물질 때문에 죄를 짓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물질에 마음이 끌리지도 않고, 프란치스코와 그 제자들이 하도 가난하게 곤란하게 사니까 어떤 사람이 동정을 해서 그들이 예배 보는 장소 유리창 문을 열고 돈 주머니를 넌지시 들여놔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프란치스코와 그 제자들은 돈 주머니에다 손을 대지 않으려고 그 더러운 것에다 손을 대지 않으려고 입으로 물어다가 저만큼 갔다가 내 던져버리고 그렇게까지 아주 돈에 대해서 극단의 기피증을 가졌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가지 한 가지에서 해방해 나갔습니다.
물론 프란치스코와 그 제자들은 돈에 대해서 물질에 대해서만 특별히 그랬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부모나 형제나 친척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이 말씀을 한 마디 한마디 그대로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비롯해서 바닷가에서 고기잡이 하고 있던 사람들보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두 말도 하지 않고 그러고 자기 가족도 내버리고 그 생활도구인 그물이나 배나 어구도 내버리고 그러고 덮어놓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도 그 돈이 잘 생기는 세관 관리 자리에 앉아서 세금 받아가지고 부자로 잘 살았었는데 너는 나를 따르라. 그러니까 아무소리도 안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은 모든 걸 버렸습니다. 모든 걸, 그저 자기 몸통어리에 있는 것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모든 걸 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물질이나 사회 환경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마지막까지 붙어 다니면서 자기를 괴롭히는 게 자기입니다. 나라는 것,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오늘 여러분들도 그 연습을 하고 계신 줄 압니다. 저도 그렇고, 이 나 가 마지막까지 버려지지 않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나를 버려야 한다. 나를, 이 나를 버리는 것같이 어려운건 없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 한분이 일생동안 자기 수양을 했는데 마지막에 가서 어려운 것이 나를 없애버리고 나를 죽이는 것이 영 되지를 않으니까, 온 미국 땅을 돌아다니면서 산중에도 가보고 바닷가에도 가보고 금식기도도 해보고 혼자 애를 써도 안 되니까, 저 유럽까지 가서 이태리까지 가서 나폴리 바닷가에 가서 가만히 이렇게 서서 생각을 하면서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지긋지긋한 원수, 너는 어째서 여기까지 따라왔느냐? 자기는 그 나포리 바닷가까지 따라와서 영 안 떨어져. 나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마지막 까지 떨어지지 않는 건 나입니다. 죽는 시간가지 이놈의 나는 나를 붙어 다니면서 놓아주지 않습니다. 암만 아마 오 장로님이 공부 시키시는데 주 제목이 내가 죽어야한다. 그걸 거예요. 벌써 10년 전에 저 서울 계명산 에서도 그저 밤낮, 요새는 그런 소리를 덜 하는 것 같지만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그러니까 여기서 공부를 하러 가라고 그럽니다. 누구누구는 공부하러 똑같은 소리 들으러 뭣 하러 계명산 까지 가요? 밤낮 들어도 밤낮 똑같은 소리, 죽어라. 죽어라.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안 죽어 있는 증거거든. 자기가 살아있는 증거야. 그러니까 죽을 공부를 십년씩 이십년씩 해도 죽지 않는 게 자기입니다. 이 자기라는 것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이 한마디로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이기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저주하고 그 원어는 저주하라는 뜻이 있어요. 자기를 저주하고 미워하고 그러고 나를 따르라. 자기를 먼저 죽여 버려라. 네 자신을 죽여 버리기 전에는 나를 십자가도 져지지 않아. 그러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그 다음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아주 그 말씀 한마디가 우리 신앙생활의 요제를 가장 정확하게 찌른 말씀이에요. 나를 부인해 버리고 나를 부인하지 않으면 십자가가 져지지 않고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계속해서 그저 이 시간에도 죽고 다음 시간에도 죽고 또 다음시간에도 죽고 계속해서 죽는 연습을 하고, 그래야 어디까지?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무덤에 내려갈 때까지, 예수님을 따라라. 그래야 예수님을 따라지게 돼. 이렇게 되어있거든. 뭐 기독교는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자꾸 공부를 해라. 어째라. 구약에서 신약까지 또 보고 또 보지만 그거 한마디만 실천을 철저히 하면 기독교는 다 알아버린 거야. 예수 믿는 것은 복잡한 게 아니야. 따지고 보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발자취만 잘 따르면, 제가 요새도 하루에 한 번씩 부닥쳐요. 요전에 그 어린 소녀들이 한 너덧 명이 와서 자기가 지금 어떤 교파에 다니는데 그 교파가 옳습니까? 그릅니까? 그 어린이에게 그 교파에 나쁜 이야기를 다 해줄 수도 없고 내가 다 알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차차 다니면서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거기서 벗어져 나오너라.’ 오늘 아침에도 또 청년하나가 오더니 20년 동안 어느 교회를 다녔는데 영 그놈의 속이 알아지지가 않으니 20년 동안을 똑똑한 청년이에요 고등교육도 받은 청년이고, 그런데 영 알아지지가 않는다고 그래서 ‘그저 복잡한 거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만 쳐다보고 믿으시오.’ ‘예수님만 쳐다보고 믿으시오.’ 그런데 이제 더 말을 하자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 쳐다보고 믿으시오. 그러면 되는 거고, 더 말을 하자면 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 네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에는 기독교가 뭔지 알아지지도 않고 예수님이 누군지도 알아지지 않을 테니 그렇게 해라. 이렇게 하고 싶거든요. 어찌되었든지 우리를 결정적으로 세상에서 끊어버리게 하고, 죄에서 끊어버리게 하고, 내 자신에게서 끊어지게 하는 건 예수님 밖에 없거든.
예수님 외에는 그 어느 학문으로든지 어느 방법으로도 내 자신을 완전히 죽인 역사가 없어요. 제가 불교나 유교를 통 모릅니다. 모르지만 대강 그 정신은 알지요. 대강 뜻은 알지요. 그러나 어떻든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내 자신을 죽이는 방법들을 찾은 것은 제가 많이 봐서 압니다. 어저께도 조금 어제 저녁인가 이야기하다 말았지만 이 선생 같은 분을 본다든지 이공 어른 같은 분을 본다든지. 그 양반들은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자기를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서에 보면 고린도전서 1장 2장 4장. 거기 세 번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자랑할 것은 전부 버려버리고 자기를 여지없이 낮추고 자기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고 그냥 헐벗고 굶주리고 매 맞고 그러고 바보소리를 듣고 병신 취급을 받고 그렇게까지 하도록 자기를 없애 버리라고, 사도바울이 그런 생활을 했다고 강조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 자신이 완전히 그렇게 없어진 뒤에야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는 것으로 성경은 그렇게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는 그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예수님 외에 다른 곳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데서 놓아주셨다는 말이지요. 그걸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를 세상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육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그 마지막까지 붙어 다니는 나에게서 해방시켜 주시고, 이 나라는 것은 이 세상을 축소시켜 놓은 것이 나입니다. 내 안에는 이 세상이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 완전히 죽어져 버리면 세상은 전부 내게서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 내안에 가서 있기 때문에 나만 완전히 죽어져버리면 세상은 전부 끊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못합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예를 조금 들어봅시다. 신학교나 저런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인제 수도원은 좀 더 내적 생활을 권장하고 신학교에서는 내적 생활도 권장하지만 학문을 권장하고 자꾸 4년 동안 5년 동안 2년 동안 학문을 계속해서 학문을 자꾸 배웁니다. 그런데 그 학문이 글자 그대로 신학이야. 하나님에 대한 신에 대한 학문이야. 그런데 신에 대한 걸 자꾸 파고 들어갑니다. 끝없이, 끝없이 뭐 신에 대해서 발트가 어쨌느니 부르너가 어쨌느니 인제 그 유명한 신학자에 대한 학설을 자꾸 공부합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그 사람 속에 굉장한 신학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 꽉 차져 버립니다. 머리빡이 터지도록 꽉 차져버립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을요. 제가 어떤 청년하나를 저 계명산 에다가 방을 하나주고 있으라고 그래봤어요. 그 사람이 대학도 졸업하고 중학교 선생 자격증도 갖은 청년입니다. 그 청년이 그 방 하나를 붙들고 앉아서 아주 어려운 책만 보고 있습디다. 어려운 책만 잡고 뭐 십자가 요한의 신비신학이니 삼위일체론이니 그런 그렇게 한참 보더니, 제가 일 년에 한 번도 가보고 또 몇 달에 한 번도 가보지요. 나중에는 그 지식이 머릿속에 들어가서 머리에 혼란을 일으켜 버린 거예요. 혼란을 일으켜가지고 예수는 어디가 버리고, 자기 생각대로 기독교를 만들었어.
자기 생각대로 지금 그런 사람들 많지요? 모두 박태선이니 모두 문선명이니 그런 사람들 아니요? 자기 머리빡으로 기독교를 만들어내요. 그렇게 해가지고 인제 그런 사람이 조금만 잘못 나갔더라면 교파하나 또 만들었지요? 그래가지고는 여기 제가 시간이 없어 다 찾아보지 못하지만 그 고린도교회 보면 나는 아볼로 파다. 나는 바울 파다. 이런 지금 동광원 안에도 그런데 있거든요. 어떤 선생 말하는 거 듣고 꼭 그 선생 말만 들을 때만 여기 나와 앉아있는 사람 있어. 골라가면서 선생을 골라가면서 그거 벌써 파가 됐어. 그 파가 되어버렸어. 그거 썩어빠진 생각이야. 자기를 안 버려 그런 거야. 자기만 없어졌으면 박 서방이 나왔든지, 김 서방이 나왔든지 누가 말했든지 무슨 상관이야. 말씀만 들으면 되는 것이지 전부 그 자기들이 있어. 자기들이 자기들을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래가면서 자기가 만들어 놓은 예수를 믿어. 그걸 좋다고 그래. 모두 그래서 장로교니 감리교니 천주교니 모두 그러고서는 그렇게 해가지고 사람들을 거기다 꽉 붙들어 매놔. 천주교 하면 천주교에다 사람들을 꽉 잡아매 놓는다고. 절대로 요지부동 못하게 다른 데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거기다가 잡아매 놓는다고 그래가지고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천주교의 제자를 만들어. 장로교 하면 아주그냥 장로교로 머리박이 꽝꽝 굳어지게 만들어버려. 그래서 도저히 그 머리빡을 깰 수가 없어. 도저히 사람의 재주로는 깰 수가 없이 만들어. 그러니까 결국은 사람이라는 건 이상하게 마지막까지 자기중심으로 무엇을 붙들려고 하는 그 습관을 놓지 못해.
그것이 결국은 장로교가 나쁘고 천주교가 나쁜 게 아니야. 자기 속에가 그런 마음보들이 있어. 자기 속에 가서 무엇 하나 기어이 붙들어야만, 붙들어야만 만족하는 성질들이 있어. 그래서 심지어 선생을 골라도 저 선생이 더 좋은가? 저 선생이 더 좋은가? 이렇게 가만히 봐. 그래가지고 자기 마음에 맞는 선생이 좋다는 거야. 결국은 그거야. 다른 거 아니야. 자기 마음에 맞는 선생이 좋다는 거야. 전부 그 자기를 버리지 않아. 이 마지막까지 원수같이 붙어 다니는 게 자기야. 자기야, 그래가지고 그것에서 해방되기가 제일 어려운거야. 알고 보면 제일 어려운거야. 여기 지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다는 것은 모든 것에서 해방시키신거야. 일체에서 해방시키신거야. 일체에서 해방시키신거야. 자기에게서도 해방되고 모든 요새말로 하자면 교파에서도 해방이 되고 모든 자기 지식에서도 해방이 되고, 모든 것에 물질에서도 해방이 되고 육체에서도 해방이 되고 그래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버리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버리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가 소원이라고 사도바울은 그래. 사도바울도, 그 빌립보사에 보면 내가 어찌하던지 그랬어. 빌립보서는 주후 62년 말에 쓴 겁니다. 사도바울이 신앙생활을 오래 한 뒤에 이제 얼마 있으면 순교를 당할 때가서 쓴 책이에요. 그런데 그때 가서도 이미 내가 다 얻었다함도 아니요.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주님께 붙들린 그걸 내가 잡으려고 쫒아간다. 그랬어요. 마지막까지 사도바울도 버리지 못한 게 있고 끊어버리지 못한 게 있어. 자기 안에서 미완성된 부분이 있었던 거야. 그걸 알 수 있어.
그래서 어찌하던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기가 소원이라고. 아마 여기 앉아있는 분들 중에서 누가 다 이루었다고 할 자가 있겠습니까? 사도바울과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이런 말은 감히 할 수도 없지만 바울사도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땅위에는 그럴 사람이 없지요? 그런데 어떻든지 우리 안에서 없어질 것이 다 없어지고 그러고 내가 지금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게 아니요.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그래도 이렇게 말 할 수 있어. 내가 너희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하나님도 증거 하신다고. 그럼 모두 빌립보서에 있는 말씀이지요. 그렇게 생각을 한다든지 그렇게까지 어느 정도 되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는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려는가? 그 전에는 자유라는 말을 써서는 못써요. 자유 해서도 안 되고 우리가 자유를 얻지 못한 것을 알아야해. 무엇에든지 사로잡혀있어. 무엇에든지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자유 할 수 없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그 다음에 가보면 사도바울은 그걸 또 다지지 않았어요? 여러분이 자유를 얻었는데 그 자유로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오늘 기독교 내에서 얼마나 이 자유로서 심지어 나를 따르라고 교파를 만들고 막 미국까지 다니면서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자기를 줄줄이. 이렇게, 제가 그전에 대포리 강단에 살적에 보니까요. 쥐가 새끼들을 데리고 피난을 갑디다. 쥐가 새끼들을 데리고 피난을 가는데 (끊김)
그냥 줄줄이 달고들 우리교파가 더 많다. 우리 교파가 제일이다. 우리교파로 들어와라. 그러고들 그냥 무엇에 쫒기는 거 마냥, 서로 경쟁들을 해가면서 막 눈에 심지를 쓰고 싸우면서 하나라도 더 움켜가야겠다고 자기 쪽으로 다 가져다 움켜쥐려고 전부 지금 그 싸움들을 하고 있어. 아주 그냥 교인들 약탈전에 피비린내가 나요. 교인들 약탈전, 어디가 성경에 그러라는 데가 있어? 어디가 우리는 지금 완전히 자유를 얻은 사람이야. 그런데서 일절 해방을 받은 사람이야. 해방을 받고 우리가 지금 따라간다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데는 무슨 유형적인 그런 물질적인 이건 없어도 되는 거야. 전혀, 내 영혼이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그리스도와 나와 일대일로 내 영혼이 그리스도의 영을 사모하고 따라가는 거야.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면 이런 말이 있지요? 하늘나라에 가면 그전에 정 경옥 목사가 여기 와서 설교하면서 기독교의 신관을 이야기 합디다. 그리스도의 신관 하나님이 계신 곳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걸 이야기 하는데 하늘나라에 가보니까 아무것도 없더라. 텅 빈 것이 그런데 그것이 물론 신학설로 어려운 이야기니까 이 시간에 제가 설명할 재주도 없고 할 필요도 안 느끼지만, 사실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면 지독히 이기주의지요.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나만 사랑해라. 나만 사랑해라. 그랬으니 그런 이기주의가 어디가 있소? 아주 지독한 독재주의 같지. 그렇지만 하나님을 가서 붙들려고 해보면 잡히지 않는 거야.
하나님은 무형하신 하나님, 하나님에게 하나님은 부분이면서도 전체를 갖으신 게 하나님, 이 전체를 우리가 마음에다가 다 집어넣는 재주는 없어요. 이 우주를, 만물을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이치를 우리 영혼에다가 다 집어넣는 재주는 없어요. 우리가 만물을 다 소유하려면 만물 안에 들어가서 우리가 없어져야만 돼. 없어져야 돼. 그래서 모든 것을 소유하려면 모든 것을 버리라는 그런 말이 생겼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하고 하나가 되려면 내 자신이 아주 완전히 없어져 버려야해. 그림자도 없어져 버리고, 나라는 형체 그 무슨 조그만 것도 없어져버려야 그때 가서 인제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하나가되는 그것이 원리거든요. 그러면 지금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다는 건 우리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고 그러시는 거야. 하나가 되게 하려고, 그런데 그 말도 어폐가 있지요.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그러면 그 나 라는 것이 언제든지 나라는 말이 붙어있어. 그게 폐단이 있어. 내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그 내가 라는 것이 그 말이 어폐가 있어. 그러니까 그 신학자들 가운데서는 아니 나 라는 말을 쓰지 않고 내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방법은 없을까? 나라는 말은 쓰지 않고, 그 나 라는 것이 제일 걸리적거리는 존재니까 그러려면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십자가에 죽어야하는데 그 죽어질 때까지가 문제야. 언제든지 내가 마지막까지 살아서 남아있어 가지고는 죽지를 않으니까 저도 지금 말을 더는 못해요.
이 이상은 못 하는 게 내가지금 아직도 살아있는 부분이 많거든요. 나도 일생동안 나를 죽이려고 애쓴 사람이야. 또 나는 내 생각에는 여러 번 죽어버린 줄 알았어. 이번에는 죽었다. 이번에는 죽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 죽음의 고비를 얼마나 넘겼는지 몰라도 나도 여러분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게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사람이야. 왜정 때부터 육이오 사변 때로 좌우간 그 전후해서 아 그런 이야기는 지금 다 할 필요가 없지만 어떤 때는 그냥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죽은 것 같은 때도 있었어. 그냥 공산군에게 압박을 당해서 죽는다든지 그러지 않고도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지요. 육이오 때지요. 공산군에게 끌려가서 여자들 열네 명인가하고 저하고 어떤 전도사청년 한 사람하고 둘이 대초지소로 끌려갔어요. 대초지소로 끌려가서 우리 둘은 남자 둘은 유치장에다 갔다넣고 여자들은 그 동네 집을 하나 얻어서 거기다 갔다넣고 그러고 인제 밤중이 되니까 한 아홉시나 됐을까 몰라요. 이제 캄캄해지니까 나하고 그 전도사하고 두 사람을 이제 잡아내다가 죽여 버리려고 어디다가 죽여 버리려고 했는지는 몰라요. 그러니까는 그 전도사라는 사람이 나를 붙들고 자꾸 통곡을 하면서 통회를 하면서 웁디다.
제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전도사 노릇을 한다고 살았지만 제 배만 위해서 살았습니다. 배만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냥 뭐 제가 예수님이나 되는 거 마냥, 나도 지금 죽겠는데 그냥 붙들고 웁디다. 한참을 그러고 났는데 밖에서 쿵쿵쿵 하더니 데리러 옵디다. 데리러 왔는데 조금 이렇게 내다 보니까 마루에다 뭐 널빤지도 갖다놓고 아마 패 죽이려고 그랬는지 어떻게 죽이려고 그랬는지 몰라. 그런데 막 끌려 나가서 이렇게 조금 나갔는데 그 미군 비행기가 왔어. 그냥 웅 웅 공중에서 비행기 소리가 나니까, 그냥 화락하고 호각을 불더니 모두 도망을 가. 우리도 내버리고 모두 도망을 가서 숨어버립디다. 그래서 또 들어가 있었지. 들어가 있으면 이제 조금 조용해질듯 하면 이제 또 밖에서 모두 갖다가 죽일 준비를 하고 있어. 또 인제 전도사가 눈물을 흘리고 울고 자복을 하고 회개를 하고 그 양반이 지금 결국은 나중에 가서 훨씬 뒤에 가서 그 총살을 당했어요. 당했으니까 내가 지금 마음 놓고 이야기를 해요. 안 계신 분이니까. 인제 그래서 나도 그 통에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긴 셈이지요. 그 저녁만 하더라도 아마 너더댓 번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까요. 그런 전후좌우를 해서 그러니까 그 사람이 자복하고 회개할 때 나는 어땠겠소? 나는 속으로 자복이 안 나왔겠소? 또 내 자신의 반성은 되지 않았겠소?
그렇게 여러 번을 별 고비를 다 넘기니까 내 속에 나라는 것이라든지 이기주의라든지 사욕이라든지 그건 없어진 듯 해. 뭐 제가 죽을 번한 고비는 여기서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에요. 나이는, 나이도 좀 먹었지만 어떻든지 많이 그랬어. 그래도 안 죽어. 내가 안 죽어. 그런데 여러분들 중에서 다 죽은 양반 있다면 그 양반은 내가 참 신으로 모시겠습니다. 그건 참 정말 비상한 은총이야. 비상한 은총이야. 마지막 까지 붙어 다니는 거야. 그런데 이것이 내게서 다 떨어져 버리기 전에는 자유가 없어. 자유 없어. 자유라는 말 아예 쓸 생각도 말아야해.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해서 이런 말씀을 했을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셔서 그러니까 해방이라는 말도 함부로 쓸 수가 없어. 해방이라는 말을, 우리가 잠깐 눈을 돌려서 정치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일본사람만 물러나가면 해방이라고 그랬지요? 어디 해방 하나나 됐소? 그 다음에는 미군들이 들어와서 딱 지배를 했지요. 또 계속해서 지금 38선 반쪽은 공산주의가 딱 물고 영 놔주지 않지요? 그냥 부르독이 고기 덩어리 물고 늘어지듯이 지금 절대로 38이북을 놔주지 않거든요. 북쪽에서, 또 그러면 남쪽 반은 해방이 됐냐 말이야. 남쪽은 오늘까지 벌써 40년이 됐소. 해방 된지 몇 해가 됐소? 모르지만 오늘까지도 진정한 자유는 내가 알기에는 한 번도 못 누려봤어. 이 민족이 진정한 자유를 한 번도 못 누려봤어.
나라 같은 나라를 한 번도 못 만들어 봤어. 밤낮 물고 뜯고 밀고 밀치고 그냥 네가 주인이다. 내가 주인이다. 그냥 계속 그러지 않고 있어? 어디 진정한 의미에서 해방을 우리가 정말 이제는 해방되었다고 이렇게 활개 칠 수가 있는 세월을 한번이나 만나봤소? 항상 무엇에인지 얽어매가지고 있어.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여기 앉아있는 분들 중에서 나는 자유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분이 계신가? 나는 자유다. 무엇에인지 붙들려가지고 여기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해방을 받느냐? 이게 물론 신앙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해방을 받은 분이야 있지요. 영적으로 해방을 받은 분이야 계시지요. 그렇지만 그런 사람도 24시간 해방가운데 있냐하면 그건 문제야. 어느 시간에 에덴동산에 마귀가 들어와서 아담 하와를 꼬이듯이 그 사람 속에 마귀가 들어가서 또 사로잡아. 계속해서 죄가 틈타고 들어가. 그래서 자유라고 계속해서 자유를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위에는 없어요. 그걸 뭘 봐서 알 수있냐하면 성인들의 전기를 봐서 알아요. 유명한 성인들의 전기를 보면 다 죄를 노래했거든. 그리고 자기가 큰 죄인이 된 것을 탄식을 하고 하나님 앞에 자복을 하고 완전히 죄에서 해방 받은 상태를 노래한 성인을 저는 보지를 못 했어. 아직은, 그러니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려고 오셨지요.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사탄의 쇠사슬에서 끊어서 그냥 일생동안 종노릇하던 너희들을 거기서 풀어서 해방시켜 주려고 예수님께서 오셨다. 이건 엄연한 사실이야.
엄연한 사실인데 그런데 어째서 우리가 진정한 해방을 누리지 못 하는가? 인제 그걸 좀 더 요약해서 수도원 안으로 몰고 들어가 봅시다. 이렇게 수도원 생활이라는 것은 좁은 울타리 속에다 다른 데는 잘 몰라도 서울 혜화동 로타리에 가면 그 십자가 요한 성인을 주임으로 모시는 칼멜 수녀원이라고 있지요. 이제 칼멜 수녀원 이라는 데를 선독수녀회라고 또 수시니파가 나와서 선독회 를 만들었습니다. 그래가지고 거기는 제가 요새는 거기 소식을 못 들었어요. 얼마 전에 들은 대로는 정원이 20명이야. 카톨릭 한국 카톨릭교회 내에서 스무 명만 뽑아서 거기는 집어넣어요. 그 외에는 그냥 후보자가 줄줄이 있어도 받아들이지 않아. 그리고 그 안에는 제가 꼭 한번 들어가 봤지요. 들어가 봤는데 이렇게 그 앞에 일반 교우들도 참석할 수 있는 성당은 요거 삼분의 일 밖에 안 되어요. 조그마하게 의자 몇 개만 놨어. 그러니까 일반 교인들 많이 수용은 들이지도 않아. 그러고 그 중간에 가서 이렇게 굵은 나무토막 이만 할 거예요. 이런 거로 다 기둥 창살을 세웠어. 그것도 반 밖에 안 되게. 그렇게 세웠어. 그런데 그 안을 밖에서 이렇게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수녀들이 면회를 하러 나와요. 면회를 하러 나오게 되면 하얀 이런 결혼 할 적에 면사포 쓰는 거 모양 그런 걸로 얼굴을 가리고 그러고 나와요. 그 안에 있는 수녀들은 스무 명 밖에 없는 수녀가 인제 어머니가 만나러 와도 꼭 면회할 날짜가 있고 시간이 있지요? 그 시간에 찾아와도 꼭 얼굴 가리고 나와요. 얼굴 내밀고, 심지어 신부가 고해성사를 받으러 와도 얼굴 가리고 나와. 생전 그 얼굴은 한번 그 속에 들어가면 구경을 못해. 아무도 그러게 제가 착복식 하는 날 한번 갔었어요.
어떻게 되서 갔었어. 갔더니 신부가 그 수녀 복을 주면서 이렇게 말을 합디다. 여러분은 지금 이 옷을 입는 시간이 관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이라고 그 말해요. 그 수녀 복이 관이야. 관속으로 들어가. 아주 세상하고는 남 되고 담쌓고 죽어버려라. 그런 말이지. 자 그러면 그 속에는 문제가 없어야 할 거 아니야?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 속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시기도 없고 질투도 없고 아무 문제도 없을까요? 그 속에도 문제는 있어. 마귀가 그 창살이 무서워서 못 들어가겠소? 담이 무서워서 못 들어가겠소? 그 속에도 내가 남의 집 집안 살림 이야기는 하지 않겠어. 그 속에도 문제가 있어. 어찌되었든지 별 방법들을 다 써봐. 다 써봐. 그냥 수녀원마다 그 수도원에 대한 역사책을 보면 그런 게 더러 나오지요? 수녀원마다, 마지막까지 죄라는 것은 우리에게 붙어 다니면서 자기를 놓아주지 않는 게 죄입니다. 또 그러고 그 천로역정에서 하나를 이야기 하면 좋겠어. 천로역정에서 보면요? 기독도가 이렇게 길을 가는데 마귀가 인제 그 기독 도를 노립니다. 화살을 가지고 쏠려 고 노리는데 어려운 대목에 가면 꼭 더 공격을 합디다. 그런데 어느 때가서 제일 공격을 하는 고 하니 이제 천성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이 있어. 그 문에다가 마귀가 화살을 제일 집중을 하고 있더구만. 인제 거기만 들어가면 놓쳐버리거든. 인제 아주 그 영혼을 빼앗겨 버리거든.
그러니까 그 천국 문에 들어가는데다가 화살을 겨냥하고 있어. 그걸 알아야해. 우리가 가장 어려운 대목에 가서는 마귀의 시험이 더 따라요. 그건 우리가 그런데서 보지 않더라도 예수님만 봐도 알 수 있어. 예수님이 맨 먼저 전도 시작을 하려고 나서실 때 광야에서 40일 동안을 예수님을 괴롭히지 않았어요?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또 그러지요. 아주 그때는 피땀을 흘리시도록 예수님을 쥐어짜지 않았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도 그러는데 우리 따위야. 여러분들에게는 여러분들 이라고 하면 실례가 되니까 용서하시오. 나 같은 것에게는 이런 것에게는 마귀가 눈도 떠보지 않아요. 문제도 없다. 개떡같이 봐요. 아주 어려운 대목에 가서 마귀는 마지막까지 놓아주지 않는 것이 마귀인데 여기지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그 해방이라는 말이 그러니까 이거 쉬운 말 같지만 참 어려운 말입니다. 이 말이, 그런데 이 공동번역 새로 나온 성경에는 해방이라는 말을 썼어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 말을 읽어볼 적마다 이거 누구에게다가 한 말일까? 참 대상자가 보이지를 않아. 완전히 죄에서는 해방이 돼서 자유하게 된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대상자가 잘 보이지를 않아. 대상자가, 또 여기서 자유라는 것은 완전자유를 가르쳤는데 그러니까는 자유로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그다음에 그랬거든. 그러면 그게 완전 자유일까? 육체의 기회도 삼을 수 있는 자유라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가 아니지요. 에덴동산에서 아담 이브가 그 질문들 하는 사람들이 그 하나님이 짓궂게 선악과 같은걸 만들어놓고 그러셨느냐고 그러지만, 선악과를 따 먹을 수도 있고 따 먹을 수도 없이 된 아담 이브라면 그건 완전한 인간이 아니야. 처음부터 아예 선악과 같은 건 마귀가 와서 뭐라고 그래도 개떡 같은 소리 한다 저리가라. 아 그래버렸으면 될 거 아냐? 뭣 하러 선악과를 따먹어? 마귀가 와서 꾀이는 데는 수단이 있었다고 해도 그 마귀의 꼬임에 빠질 수 있는 인간을 왜 만들어 놓았냐 말이에요. 그런 생각 안 해보셨소?
그 왜 마귀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담 이브를 만드셨을까? 처음부터 아예 딱 끊어버릴 수 있는 인간을 만드시지. 그러니까 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라는 것은 다시 죄악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의 자유를 말하는 겁니다. 원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유만은 그런 자유지요. 그런데 그런 것을 조금 그 그림자를 저는 책을 많이 안 읽었기 때문에 잘 몰라요. 성인들의 전기를, 저는 그래도 이 선생님보다도 이공 어른의 대한 것이 머리에가 남은 것이 좀 많아요. 이 공 어른이 이렇게 길을 가시다가 길을 가시다가 여자가 향수를 뿌리고, 여기는 향수 뿌린 사람은 없지요? 향수를 뿌리고 이렇게 지나가면 이렇게 고개를 돌이키신데 냄새가 맡기가 싫어서 향수냄새가, 그러면 이공님은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아서 몰라요. 모르지만 어째서 그렇게 고개를 들이키실 정도로 향수냄새가 맡기가 싫을까? 의식적으로 그러시는 걸가? 본성이 변해버렸다는 거예요. 아주, 변해버렸어. 그냥 아닌 것은 이렇게 보면 저것은 아니다. 하고 생각을 해서 판단을 해서 거절을 하는 게 아니야. 본성적으로 아닌 것을 싫어하는 그렇게 사실은 예수님이 니고데모보고 너희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늘나라 못 들어간다. 그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원은 그런 상태를 가르칩니다. 아주 변해버렸어. 죄악에 대한 것은 아예 그냥 냄새도 맡기 싫고 보기도 싫고 가까이 할 마음도 없어져 버리고, 그렇게 변해져. 이제 그런 정도 되면 어느 정도 자유라는 말을 쓰겠지요? 물질에 대한 유혹이나 육정에 대한 유혹이나 그것이 손도대기 싫고 보기도 싫고 듣기도 싫고 그냥 그런데 마음이 끌릴 가능성도 없는, 끌릴 가능성도 없는 그런데 그런 상태에 놓인 사람이 어디가 있을까? 간혹 가다가 그렇게 이 공 어른에게서 그런 그림자가 조금씩 보이거든요. 가령 이렇게 고사리 대를 이렇게 꺾다가 그 고사리를 꺾으면 거기서 이렇게 진물이 솟아나오지요? 그러면 그걸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고 고사리가 눈물 흘린다고 고사리가 아파한다고, 거기서 피가 솟아난다고 그 고사리를 이렇게 꺾으면 거기서 나오는 물 나오는 거 갖고 그렇게 느껴 보신 적 있어요? 그래서 고사리를 꺾다가 못 꺾고 그건 아주 본성적으로 변한 양반이야. 뭐 이렇게 개미 한 마리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는 그런 것도 그 꾸며서 대는 말 아니야. 아주 본성적으로 변했어. 그런데 그 그리스도 그러면 여기서 조금 생각을 합시다. 이공 어른이 처음부터 그런 양반이었냐? 그렇지 않아. 어제들도 이야기 하셨지만 그렇게 닭 새끼만 한 마리 몰아도 막 작대기를 들고 보통으로 워 워하고 쫒지도 않고 그냥, 그런 양반이 어떻게 그렇게 변했을까? 어떻게 그럴 수도 있는 게 기독교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더러 이렇게 들춰내면 통속의 심해원 이라든지 아주 그냥 그런 사람은 죄에 대한 것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상관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본성적으로 이렇게 멀어져 버렸어. 그런데 예수님은 결국 우리를 그렇게 만들려고 오셨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죄 없는데서 성모 마리아님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하여서 나오신 것은 아예 그런 죄악성하고는 상관도 없이 나셨다는 걸 말하는 거지요. 그러게 그 더러워지지 않은 태속을 빌어가지고 성령으로 잉태해가지고 나오신 것은 아예 그런 죄악의 성질은 조금이라도 몸에다 뭍이지 않고 나오시게 하기 위해서지요. 이제 그 예수 안에 들어가서 새로 지음을 받은 자, 그런데 그거에 대한 걸 사도바울이 여러 군데 지적을 했는데 그 대목을 아무리 읽어봐도 참 뜻을 못 알겠어. 갈라디아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르기까지 내가 해산하는 진통을 겪어야 한다. 이런 말을 사도바울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형상이 되어 질 때까지 예수님의 형상이 보여 질 때까지 사도바울도 애기 어머니가 진통을 겪는 그런 진통을 겪어야 한다고 이런 말을 했어. 그 진통이 무엇인가? 우리는 거기까지 깊은 체험이 없기 때문에 말 할 수가 없어. 어찌되었든지 사도바울도 무던히 애를 쓰신 양반이라는 것은 알 수가 있어. 그 빌립보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너희가 믿음에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기만 한다면 내가 그 위에 다가 내 피를 쏟아 부어도 내가 기쁨으로 그렇게 하겠다. 그리고 다시 말하노니 내가 기뻐하겠다. 아주 이렇게 말씀 하셨어. 그런 심경은 어떤 심경일까? 그 바울사도는 어느 정도 변한 사람인건 사실이야. 다메섹 성문 밖에서도 바뀌고 그 아라비아 사막가운데서 3년 동안이나 있으면서 기도하면서 변해지고. 또 10년 동안 전도여행을 다니면서도 계속 변해지고. 지금까지도 알아지지 못 한 게 있지요. 간그레아에 가다가 머리를 깎았다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때 무슨 비상한 결심을 하느라고 머리를 깎았는데 그럼 그때까지도 결심에 부족한 점이 있었던가? 무엇 때문에 새삼스럽게 머리는 깎고 야단을 치셨을까? 이게 일생동안 죽는 날까지 가면서 치러야하는 고난이야. 우리가 베드로를 봐도 그런걸 알 수 있지요? 베드로가 처음에 얼마나 실수를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그 베드로가 로마 성에서 대 환난이 일어났을 적에, 왜 나이도 그만큼 잡쉈고 이제 신앙도 그만큼 아주 원숙해졌고 그런데 왜 도망을 가려고 그랬을까? 로마 성에서 왜 나와서 피난을 가려고 그랬을까? 물론 전설에 의하면 그때 제자들이 우리들 같은 사람들은 백 명이 죽어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