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 찾아 나란히 / 박선애
자율 대출 자율 반납 참 좋은 말인데, 그 현장은 말처럼 아름답지 못하다. 책등에 붙은 십진분류법에 따라 구분된 색깔조차도 제대로 맞지 않고 다른 것이 군데군데 끼어 있다. 서가에 000부터 900까지 일관성 있게 배열된 것도 아니다. 중간에 뽑아 가고 공간이 생기면 책이 쓰러져 틈이 없어진다. 그러면 그 위에 올려놓아 서 있는 놈, 누워 있는 놈 멋대로다. 천성이 야무지게 정리를 잘하거나 부지런하지도 못하니 웬만하면 그냥 눈 감고 지내고 싶었다. 그런데 가끔 무슨 책 있냐고 물으면 검색으로 존재 자체만 확인해 주면서 "이 방 어딘가에 있을 거야."라는 무책임한 소리만 하고 있기도 민망하고 답답했다. 거기에 우리 학교 도서관은 입학식, 교육과정 설명회 등 행사를 하는 곳이다. 우리 학부모는 학교 일에 유난히 관심이 많다, 도서 정리가 엉망이라고 하더라는 말이 돌아서 내게 왔다. 그것이 무서운 건 아니지만 여러 상황이 나를 재촉했다.
일주일 전에 드디어 일을 벌였다. 순회 사서 선생님과 미리 의논하여 책 배열 순서를 정하고 책의 양을 어림하여 메모지에 분류 번호를 써서 서가에 붙였다. 도서부를 포함해 돕겠다는 아이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점심시간 20여 분뿐이다. 하루 하고 나더니 다음날인 화요일은 학생 자치회 회의가 있어서 못 한다고 한다. 학생 수가 적어 도서부가 다 학생 자치회 임원이다. 학생회장에게 도서부 몇 명은 빼 주라고 사정했다. 급한 일은 아니었는지 회의를 다음으로 미뤘다고 우리 반 여학생들이 거의 다 왔다. 수요일은 ‘교직원 한마음 체육대회’라고 오전 수업만 해서, 목요일은 체험 학습 가느라고 하질 못했다. 그 다음 날은 전날에 안전 체험 학습을 너무 알차게 해 다 지쳐 있어서 하자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도서관은 짐을 풀다 만 이사 집처럼 어수선하다. 번호에 맞추려고 우선 서가를 비우느라 뽑아 놓은 책은 책상과 책 수레 위에 무질서하게 쌓여 있고, 바닥에도 흩어져 있다. 주변이 이렇게 산만하니 아침에도 책 읽을 분위기가 잘 안 난다. 얼른 끝내야 할 숙제로 남았다. 손 빠르게 혼자서도 틈틈이 잘 해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일을 무서워한다.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손도 못 댄다. 무거운 책을 이리저리 옮기고, 뒤섞여 있는 것을 찾아다가 체계적으로 분류해서 꽂는 것은 여럿이 해야 힘도 덜 들고 할 맛이 난다.
얼마 전부터 5월 13일에 총동문회가 있다고 면내 곳곳에 현수막이 걸리고, 책자를 만드는데 재학생 글을 보내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하면서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겼다. 체육관에서 하는 행사를 돕고, 학교 관리하려고 체육 선생님이 출근한다고 해도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금요일 퇴근 무렵에야 학교 문 열렸을 때 와서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휴일에 학교 오려면 행정실에서 보안 카드를 받고 혼자 문 열고, 전원 올려야 하는 이런 일들이 번거롭다. 저녁에 우리 반 카톡방에 토요일 오전 서너 시간 봉사할 사람 모집한다고 올렸다. 밤늦도록 확인해도 한 사람도 대답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봐도 마찬가지다. 할 만한 애들로 콕 집어서 말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었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아침 여섯 시에 도서관 도우미만 카톡방에 불렀다. 1학년과 2학년은 각각 한 명, 3학년은 세 명으로 모두 다섯 명이다. 전교생 수나 하는 일에 비해 많지만 이 애들만이라도 점심시간에 와서 읽게 하려는 계산이 숨어 있다. 애들 반응에 따라 내 하루 일정도 계획해야 해서, 두 명만 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휴대 전화를 계속 봤다. 한참 지나서 숫자가 4로 바뀌었다. 반갑다. 그런데 답이 안 온다. 대답을 고민하는 것이 보인다. 기다린 보람도 없이 약속이 있어서 못 간다는 답이 왔다. 어쩔 수 없다. 계획도 없이 갑자기 일을 벌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휴일 아침 이른 시간에 깨어서 대꾸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지경이다. 한참 지나서 숫자가 3으로 바뀌었다. 또 답을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도서부장이 개인 카톡으로 꼭 가고 싶은데 약속이 있다고 ‘ㅠ’를 열 개쯤 찍어서 보냈다. 아홉 시가 넘어도 숫자는 더이상 줄어들지 않는다.
포기하고, 계절이 바뀌어도 미뤘던 옷 정리나 하기로 했다. 물건을 제자리 찾아 깔끔하게 정리하지도, 잘 버리지도 못해 도서관이나 우리 집이나 어수선하기는 매한가지다. 세탁소에 가져갈 것은 보자기에 싸고, 집에서 빨 것은 내놓았다. 작은방에서 여름옷을 챙기고 있는데, 남편이 민이한테 전화 왔다고 부른다. 지금 일어나서 봤다고, 이제 가도 되냐고 묻는다. 그러자고 해 놓고 나니 바로 후회가 된다. 민이네 집은 학교를 지나 더 들어간다. 집과 학교를 왕복시켜 주고 우리 집에 오려면, 두 시간 가까이 운전해야 할 것이다. 둘이서는 일도 많이 못 할 텐데 투자에 비해 효과가 적을 것 같아 망설여졌다. 그래도 이랬다저랬다 하면 안 되겠다 싶어 나섰다. 열 시 다 되었다. 가고 있는데 학교 앞에 사는 우리 반 남학생 준희가 도서관 봉사 하냐고 묻는다.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키도 크고 힘도 세서 도움이 많이 되겠지만 수요일에 배구공을 디디며 넘어지는 바람에 인대가 부어 반 깁스를 해 체험학습도 못 갔다. 그 발로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괜찮다고 한다.
민이를 데리고 학교에 왔다. 교문 앞 갓길까지 차들이 세워져 있어, 행사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학생 수가 적은 것을 보며 본인이 다닐 때는 800명 가까이 되었다고 안타까워하던 며칠 전 체험 학습장에서 만난 4회 졸업생의 말이 떠올랐다. 교문을 들어서자 두 분이 본관으로 가는 길을 막고 서서 체육관 쪽으로 가라고 안내한다. 창문을 내리고 직원이라고 말하고 나서야 지나갈 수 있었다. 체육관 앞에는 차일이 쳐 있고, 안에서는 무슨 게임을 하는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끝을 올려 반복하다가 중간중간 횟수별로 자리를 안내하는 방송 소리가 들려 잔치 분위기를 돋운다.
혼자서 학교를 지키고 있던 체육 선생님은 문소리를 듣고 나와서 행사 주최 측에서 출장 뷔페 음식을 준비했다고 하니 연락하면 애들과 같이 밥 먹으러 오라고 점심부터 챙긴다. 워낙 편식이 심한 민이에게 뭘 사 먹일까 궁리했는데, 돈도 남고 고민도 덜었다.
오늘은 500번부터 찾아다 꽂으면 된다. 700번까지는 많지 않아서 백 번 단위로만 정리하니 금방 끝났다. 800번 대 문학 도서가 문제다. 워낙 많아 한꺼번에 모아 놓는 것으로는 의미가 없다. 일단 국가별 구분인 10의 자리까지만 가려 꽂고, 한국 문학인 810번 대는 1의 자리까지 나눠서 정리하기로 했다. 여기저기 꽂혀 있는 것들을 찾아서 가져오기 전에 자리를 만드느라 꺼냈다 다시 꽂고, 기껏 정리했는데, 예상보다 양이 많으면 옆 칸으로 옮겨야 해서 상당히 힘들었다. 체육관에서 나오는 '목포의 눈물'과 '보릿고개'와 또 알지 못하는 가요와 민요 가락을 노동요 삼아 잠깐 점심 먹는 시간만 빼고 계속 했더니 웬만큼 가닥이 추려졌다.
그제야 다리를 절룩거리며 책을 들고 다니는 준희, 여러 가지 음식이 있어도 기껏 김밥 몇 조각과 음료수로 점심을 때운 민이가 걱정되었다. 준희는 지루해하고 민이는 지친 것 같았다. 이제 그만하자고 하고 나가려 하면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책이 보인다. 그것만 옮기고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데 다른 것이 또 보인다. 내가 그러니 잠깐 손 놓고 있던 애들도 다시 한다. 평일에는 수업이나 다른 일을 해야 해서, 점심시간은 짧아서 일을 연속으로 하기가 어렵다. 이 일에만 집중하니 능률이 많이 오른다. 같은 색깔의 분류 번호가 나란히 줄 서 있는 것을 보니 뿌듯하다. 애들만 힘들어하지 않는다면 끝장을 보고 싶다. 은근히 중독성이 강하다. 끊는 데는 과감한 결단력이 필요하다. “그대로 놓고 가자.” 하고 데리고 나왔다.
이제야 우리 학교 도서관에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지 대강 눈에 들어온다. 집에 오는 길은 지쳐서 졸음과 싸우며 운전했다. 중독에는 후유증이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