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의 뒷면 / 박선애
어머니 친구 김순자 할머니가 요양원에 가신 지 일 년이 되었다. 객지에 사는, 그분의 자식들을 만날 수 없으니 상태가 어쩐지 알 수가 없다. 어머니는 안타까워하면서도, 어차피 나아서 집에 오지 못할 바에는 얼른 하늘나라 갔다는 기별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다음 순서는 ‘우리 오래뜰(이웃)은’으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나올 차례다. 스무 번은 들은 것 같다.
어머니가 젊었을 때 우리 이웃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친하게 지냈다. 집안 큰어머니, 어머니보다 세 살 적어도 친구 했던 김순자 씨, 어머니와 동갑인 정예 엄마, 열 살쯤 젊었던 정미 엄마와 신호 엄마, 창희 엄마 등이었다. 농한기인 겨울이면 같이 나무하러 가고, 밤에는 시어머니 없는 집을 골라 모였다. 일감을 가져와 도와서 하고, 음식이 있으면 나눠 먹었다. 고된 시집살이 또는 가난한 살림에 힘겨워도 한데 모이면 웃을 일이 많았다. 우스갯소리 잘하는 큰어머니가 한몫했다.
시간이 지나 이 관계가 깨졌다. 활달한 김순자 씨는 남편과 함께 열 살쯤 어린 사람들의 또래 부부 계모임에 수완 좋게 끼었다. 그들과 어울려 여행도 가도 수준 있게 노느라 이웃 친구들과 멀어졌다. 가장 어린 신호 엄마와 정미 엄마는 마흔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예네는 동네 변두리로 집을 지어 이사 갔다. 그 사이에 우리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밤에도 어머니는 할머니가 하던 집안일을 했다. 텔레비전도 생겼다. 친구들은 흩어지고 모여서 놀 여유도, 나무하러 갈 일도 없어졌다. 어머니는 한참 위인 이웃 할머니들과 가끔씩 어울려 음식을 나눠 먹고 무료함을 달래기도 했다. 그때도 큰어머니는 언제나 함께했다.
큰어머니는 아들 며느리와 한집에서 살았다. 같이 있기 불편해서 일하고 자는 시간을 빼고는 우리 집에서 지냈다. 우리 어머니가 농사일을 놓으면서는 아침 먹고 오면 하루 종일 놀다 저녁에 가셨다. 나하고도 꽤 친했다. 결혼이 늦어진다고 걱정하는 우리 어머니 옆에서 “시집 그까짓 것 가 봐야 고생이나 해야. 가지 말고 우리하고 놀자.”라고 하면서 웃겼다. 10여 년 전에 큰어머니가 요양원에 가자 어머니는 한동안 그분 고생하고 산 이야기를 하며 가슴 아파했다. 돌아가시고 나서 오히려 마음을 놓았다.
재작년이었던가, 김순자 씨가 작은아들이 이혼한 것으로 마음의 병을 얻어 계원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집에만 있다고 했다. 혼자 잘 먹지도 않아서 건강이 나빠졌다는 소문이 났다. 어머니가 찾아가서 같이 복지관(주간 보호 시설)에 다니자고 권했다. 힘든 일이 있을수록 나가서 사람들과 함께해야 잊을 수 있다고, 거기 가서 챙겨 주는 밥이라도 먹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사정하다시피 했다. 어머니는 같이 다니면서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좋아하면서도 명랑하고 똑똑하던 사람이 정신도 반쯤 놓고 바보가 됐다고 안쓰러워했다. 먼저 다닌 선배로서 옛 친구를 돌보고 챙겼다. 거기서 보살펴 주니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는데 넘어져서 요양원으로 갔다.
어머니는 당신이 이렇게 오래 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푸념하신다. 친구도, 동서들도, 동기간도 다 먼저 보내고 혼자 남아 있는 것을 한탄한다. 막내 고모가 입원한 것을 알고는 전화해서 먼저 가면 절대 안 된다고 하며 울먹였다. 하루빨리 천국으로 데려가시라고 기도한다. 노인이 빨리 죽고 싶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진심으로 이제는 그만 살고 싶다고 한다. 자식들이 한집에서 살지는 못해도 다들 자주 찾아뵈려고 애쓰는 편이다. 외로움을 덜어 주려고 밤마다 전화로 말벗해 주는 딸과 조카도 있다. 그래도 친구의 자리는 채워지지 않는 모양이다. 장수의 복 뒷면에는 고독이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