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현지> 연혁 기록을 보면, “인조조숭정신미이지도역변혁파……”라고 인조 신미(9년, 1631) 2월에 창녕현이 지도역변至道逆變으로 현이 혁파되고 영산현에 합속되어 버린 큰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곧 역적 ‘지도’란 사람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큰 규모의 현을 없애버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지도”는 창녕현 유학幼學 성지도成至道(?~1631)란 선비로 임란 때 의병군으로 싸웠으며 하동현감, 맹산현감을 지낸 성천유의 아들인데 망우당 곽재우의 둘째 사위 두회암 성이도斗回菴 成以道(1582~1671)의 동생이기도 하다. 그들은 창녕의병장 성천희의 당질이기도 하고 또 성천조는 곽재우의 자형이기도 하다. 형 성이도는 장인 망우당으로부터 양생술을 터득하여 90세까지 살아서 세상 사람들이 선해仙解라 일컬었지만, 동생 성지도는 신미옥사 때 역적으로 몰려 젊은 나이로 죽었으니 형제간 운명이 안타깝게도 크게 엇갈렸다. 소위 ‘정한鄭澣의 역모사건’에 영남의 유력 가문이 얽혀 들어 남명학파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는데 전주류씨, 창녕성씨 등 인척 관계에 있던 가문들이 모두 연루되었던 큰 사건이었다.
먼저 창녕현 남곡에 살았던 형 성이도는 <덕천서원 원생록>에 등재되어 있는 성균생원이었다. 덕천서원은 산청에 있는 남명선생 서원이니 그곳 출입을 한 선비라면 영남의 유림과 교유했음을 알 수 있다. 경수敬修 성이도는 1610년(광해 2년, 경술)에 한양에서 실시하는 식년시 생원시에 응시하여 14위(100명 중)로 생원이 되자 문과 과거 응시 자격이 있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다. 응시생 100명 중 14등이라면 대단한 실력을 가진 선비로 문과 과거에 곧 급제할 촉망받는 선비였다. 이때 진사시도 같이 있었는데 그 당시 성균생원이 진사보다 대접을 받는 시기였다.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었을 때 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맨 적이 있었다. 타향천리 인척이 없는 한양이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허어! 성균관 생원이 염병에 걸려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어 죽게 되었다니!” 조정 대신들이 시중에 떠도는 소문을 듣고서 탄식을 하였는데 마침 의령사람 대사헌 남이웅南以雄이 그 소리 듣고 물었다. “아무도 구해주는 사람이 없다니! 어디 사는 선비라던가?” “창녕 사람이라 합니다. 지난번 생원시에 14등으로 합격했다지요.” 남이웅은 창녕사람이란 소리에 의령과 가까운 이웃 지역이라 생면부지이지만 영남의 선비 동향인이란 생각에 들자 성이도를 살려야겠다 생각하였다. 그는 사람들을 시켜 성균관으로 가서 들것에 성이도를 실어 자기 집으로 데려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온갖 노력을 다해 치료하여 병이 낫자 성균관으로 돌려보냈다. 성이도와 일면식도 없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남이웅이 의협의 풍모가 있다고 하자, 공 역시 웃으며 사양하지 않았다. 남이웅은 후에 우의정, 좌의정, 춘성부원군까지 지냈다. 그 후 성이도는 망우정에 은거하고 있던 곽재우의 둘째 사위가 되어 출입하며 장인에게 양생술을 배우게 되니 이도순과 함께 제자로도 인정되었다. “신愼으로 몸가짐하고 효孝로써 어버이 섬기며 충忠으로 임금을 섬겨야 한다.”라고 망우당이 일러주었다. 그 가르침은 두회암이 평생 가슴에 품은 천금의 부절이기도 하였다. 곽재우가 1610년 한성부 좌윤 등에 제수되었을 때 한양으로 장인을 수행해 가서 대소사를 처리하였다. 광해 6년(1614) 10월에 정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었다.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했던 영의정 유영경 등 소북파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웠다하여 받은 것이었다. 또 중국 사신의 수행원으로 다녀오기도 하였지만 1621년(광해군 13)에 국사가 나날이 잘못 되어 가는 것을 보고는 벼슬을 마다하고 산천을 돌아다녔으며, 또 동생 성지도가 1631년 신미옥사로 역적으로 몰려 죽자 벼슬살이를 접고 깊은 산속을 찾았다. 안동 풍산현 묘봉 암석간 절벽에 집을 짓고 은거하며 솔잎을 먹으며 도인술 선도 수련을 했다.
동생 성지도는 인조 9년(1631) 2월 합천의 정한(1582-1631), 고령 도진의 박희집과 함께 광해군 복위를 계획하였다 하여 옥사가 일어나 역적으로 몰려 정한, 박희집 등과 함께 40여 명이 처형되고 6명이 유배당하였다. 핵심 인물 정한은 정인홍의 재종제 정인준의 아들이었다. 인조반정 후에 정인홍이 처형되고 나서 그 문인들이 불안해 하다가 행동으로 구체화된 것이 광해군 복위사건이었다. 『연려실기술』 24권 기록에 의하면 중이 되었다가 환속한 양천식(승명 승윤)이 영호남 지방을 왕래하면서 풍수와 관상을 봐주며 여러 곳을 두루 떠돌아다녔는데, 정한ㆍ권대진ㆍ조철 등을 만나 반역을 모의하였다 한다. 그런데 옥천 사람 조흥빈, 공주 사람 한설 등이 감사에게 고변하여 포리들이 사방으로 나가 연루자를 잡아 처형하니 3개월 사이에 참형을 당한 자가 셀 수 없었다고 한다. 이때 전국 8개 처에 동조 세력 1.000여 명 군졸을 청주에 모아 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무산되었다고 한다. 죄인이 모두 삼남에 있었다고 하니 영남 인사 중에는 정인홍과 연관된 사람들이 많았다. 지역적으로는 합천, 함양, 삼가, 거창, 진주, 고령, 창녕, 영산 등 경상우도 전역에 걸친 대규모의 옥사였다. 성지도와 그 일족인 성창리, 성람 등이 핵심적으로 관련되었다. 성지도가 옥에 갇혀 연루자를 고하라며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풍수설과 정감록을 들먹이면서 횡설수설하여 동조자들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다 한다. 창녕현이 이 일로 현에서 강등되어 영산현에 속하게 되었는데 6년 후인 인조 15년(1637)에 어영군의 상소로 복현되었다.
형 성이도는 이웃 밀양의 묘봉산으로 숨어들어 솔잎을 먹으며 도인술 선도 수련.정진해 90세까지 살았다. 죽은 후 남곡(지금 남지) 마근산에 장사 지냈으며 창산원에 배향되었다. 형은 90세까지 장수하였으나 동생 성지도는 불행하게도 죽음을 맞았으니, 형제간의 운명도 크게 엇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