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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01
5월20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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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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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0fn71VaagyI&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2&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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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모터가 다시 돌기 시작할 때>
제초작업 할 공간이 워낙 광활해서 예초기를 몇 대 구했습니다. 다들 ‘초보’다 보니 자주 고장이 나더군요. 농기구 수리 센터를 뻔질나게 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니 은근히 지출도 많아졌습니다.
한번은 또 고장이 났기에, 머리를 싸매고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커버를 벗겨 분해를 했습니다. 노즐에 낀 먼지를 제거도 하고, 뒤틀어진 부품을 바로 잡기도 한 후 다시 조립을 했습니다.
‘잘 돼야 할 텐데..’ 잔뜩 기대를 품고 시동 거는 레버를 힘차게 돌려봤습니다.그러나 웬걸, 모터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투덜거리며 또 다시 커버를 벗겨냈습니다. 그리고 이 레버, 저 레버, 조정해보고, 또 다시 시도를 해봤지만, 모터는 조금도 협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레버를 당겨댔던지 어깨가 다 아팠습니다. 나중에는 욕이 다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오랜 시간 수리에 수리를 반복하던 어느 순간이었습니다.
혹시나 하고, 있는 힘을 다해 시동 거는 레버를 돌렸습니다.
그 순간, 웽 하는 소리와 함께 모터가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웽 하는 소리가 얼마나 반갑던지. 그 순간, 또 얼마나 기쁘던지. 그 순간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 하는 우쭐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예초기의 겉모양이 아무리 좋아도, 예초기의 품질이 아무리 뛰어나도, 예초기가 아무리 좋은 메이커라 할지라도, 웽 하고 돌아가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쓸모가 없습니다. 괜히 자리만 차지할 뿐입니다.
요즘 계속 선포되는 복음 말씀의 주제어는 ‘성령’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모터가 돌아가야 예초기는 제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낫으로 할 일의 몇 배나 되는 일을 별 힘들이지 않고 순식간에 끝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각자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실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신앙인으로서의 구실을 다할 수 있습니다.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힘차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애벌레에게는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장애물이며 스트레스꺼리들입니다만, 나비에게는 세상 모든 것들이 신기한 구경꺼리들입니다.
멈춰있는 신앙인들에게는 세상만사가 다 스트레스 덩어리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미움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힘차게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세상만사 모든 것이 다 축복입니다. 사랑입니다.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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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령은 온유와 겸손을 타고 흐른다>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iAsrn3-5KM8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05)는 군대의 모습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말년 병장 유태정은 선임과 후임들에게 신망이 높은 군인입니다. 그런데 이승영이란 명문대 출신 신병이 들어옵니다. 그는 이등병임에도 군대의 부조리한 면을 뜯어고치겠다고 선배에게 대들고 사고를 칩니다. 태정은 자신이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끝까지 친구를 감쌉니다. 그런데도 승영은 전혀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친구가 걱정되면서도 태정은 제대합니다.
승영이 어느 정도 선임이 되자 부조리하다고 여겼던 군 생활에 아주 잘 적응합니다. 선임에게는 아첨을 떨면서 후임도 최대한 잘 대해주려 노력합니다. 그런데 윤종빈이란 신병이 자신의 부사수로 들어옵니다. 그도 어리바리하고 사고뭉치입니다. 승영이 그를 잘 대해주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사고는 늘어만 갑니다. 종빈 때문에 선임들에게 계속 욕을 먹어가며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릅니다.
그런데 종빈이 여자친구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듣게 된 후로 병영에서 걸어가며 담배를 피웁니다. 군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승영은 자신이 후임 때문에 더는 피해를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마음먹고 그를 야단칩니다. 믿을 사람이 유일하게 사수뿐이었던 그는 자살을 선택합니다.
죄책감을 느낀 승영이 자신의 사수였던 친구 태정을 찾아갑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님을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태정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계속 “내 탓이 아니다.”, “상관없다.”라고 말하는 승영의 태도에 태정도 짜증을 냅니다. 태정이 미안해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승영도 자살하고 난 뒤였습니다.
오랜 시간 사귀었어도 여전히 남남 같은 사람이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잠깐 만나고도 친근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친교는 사랑이 흘러야 합니다. 사랑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흐르지 않는 친교는 친교가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을 통해서만 참다운 친교와 인간관계가 맺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성령을 어떻게 흐르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군대 문화’에서는 사랑이 흐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선임 후임이 즐겁게 다시 만나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그때 함께 지내기는 했지만 결국 자신이 손해를 입는 상황이 되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화를 내고 심지어는 구타까지 하는 일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화를 내고 갈구며 때리기까지 한 사람과 이후에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성령을 교회에 흘려보내 주시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선 당신과 사도들 사이에 성령의 중개가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친교를 맺게 해 주시는 주체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성령의 본성은 ‘겸손’입니다. 같은 하느님 가운데서 가장 겸손하신 분을 찾으라면 성령님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물론 하느님은 세 분 다 완전하신 분이시지만)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자는 아버지께 순종하시지만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드님께 순종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겸손하신 분이 교만한 사람을 통해 흐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당신 마음을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군대 문화 안에서는 사람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통해 흐릅니다.
이탈리아 ‘폼페이’라고 하는 곳은 2,000년 전에 매우 번성하고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화산이 갑자기 폭발하여 화산재로 오랜 기간 덮여 있다가 최근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입니다. 그 오래 전에 이 도시엔 이미 수도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도관을 잇는 곳은 납으로 봉해져 있었습니다. 납중독을 모르던 때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도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40살이 안 되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께서 세상 끝까지 흐르십니다. 성령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따라 흐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중간중간 가리옷 유다처럼 자신이 흘려보내야 하는 성령을 통해 이웃을 납중독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또한, 전혀 변하려 하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 모든 에너지를 쏟을 필요도 없습니다. 나의 마음이 이웃들 앞에서 온유함과 겸손함을 잃어갈 때 그런 납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만약 그렇게 끝나버린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도 외로울 것이고 영원히 그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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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12-15 : 진리의 성령이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12절) 사도들은 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시려 한 것들을 그때는 깨달을 수 없었지만,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심으로써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밝혀 주셔서 깨닫게 되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지금은 감당하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감당할 수 있게 되고 분명히 밝혀지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이시다. 성령 안에서 제자들은 모든 말씀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3ㄱ절)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참다운 진리가 무엇인지, 참다운 삶이 무엇인지,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조금씩 깨우쳐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즉 사랑 안에서 더 충만한 지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사랑 안에서 살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 우리가 배운 것들을 마음으로 깨닫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즉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13ㄴ절)이 말씀은 성령께서는 스스로 오시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오시는 분이시다. 성령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들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아들은 성령을 통하여 영감도 주고 말도 한다.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들의 말씀이며, 아드님이 주시는 것은 아버지의 것이다. 아들도 성령께서도 스스로 말하지 않으신다.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 하시며,”(13ㄷ절)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통하여 나오시는 분이며, 하느님 아버지와 본질이 같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지니신 지식은 아버지의 지식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들으시며, 그것이 똑같은 지식이다. 그러기에 그분의 가르침은 아들의 가르침이며, 성령께서는 아들이 가르친 것을 말씀하실 것이다. 그 말씀들은 아들의 말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는 말씀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뜻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13ㄹ절) 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 성령의 은총으로 충만하여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의 삶을 이 땅에 미리 앞당겨 살고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 은사를 통하여 하늘나라의 기쁨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에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즉 하늘에서 약속된 것에 대한 소망을 우리 안에 불붙이시고 ‘앞으로 올 일들을’ 알게 해 주신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즉 하느님 안에 살 때, 성령께서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4절)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충만케 하시어 아들이 아버지와 동등한 분임을 알아보게 하심으로써 아들을 분명하게 드러내도록 하실 것이다. 성령의 은사로 충만해지면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역사와 가르침은 주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당신에게서 받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당신에게서 나오신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에게서 받았듯이 성령께서 당신에게서 받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15절)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아들의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이것들을 아들에게서 받지만, 또한 아버지에게서 바든 것이기도 하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일치하신다. 이 일치 안에서는 변화가 없다. 누구에게서 받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은 아들이 주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아버지이시지만, 당신은 아들로서 아버지에게서 나오신 분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령께서는 우리를 평범한 인간적 삶에서 벗어나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생명에로 건너가게 하시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시는 것이다.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를 맡겨드리고 따를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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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진리 안에 머무는 것은 타인에 대하여, 나아가 하느님에 대하여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 말하고 행동합니다. 각자의 생각을 고쳐 하나의 사실과 정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생각을 제대로 정리하고 다듬는 것이 진리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진리는 다름의 자리에서 서로를 향한 열린 눈과 귀를 간직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진리의 영께서 일깨워 주십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 믿음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길잡이시며 버팀목이셨습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신앙의 정답을 제시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아버지 하느님께 들으신 것을 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여러 가르침은 획일화되고 화석이 되어 무조건 그대로 수행해야 하는 정언 명령이 아니라, 다양한 색깔로 채색된 화려한 그림과 같습니다.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리의 영께서 이어받으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들은 이야기를 진리의 영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과 같이, 신앙인들은 서로의 다른 생각을 교환하고 교환한 자리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누리는 개방적이고 초월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생각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다듬고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른 이와 우리 각자의 생각을 나누기 위하여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합니다. 기도와 묵상은 저 혼자 이야기하는 시간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느님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사람들과의 친교를 되새기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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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진리의 영>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여기서 ‘진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뜻하기도 하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성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또 믿음을 통해서 얻는 구원으로 사람들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또는 새로운 것을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앞으로 올 일들을” 알려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즉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재판을 받으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 이 말씀의 뜻은, “나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왔다. 구원받기를 바라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일 것이다.(나를 배척하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것과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것은 모두 구원의 진리를 거부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오?” 라는 반응을 보였는데(요한 18,38), 그의 말은, “진리 따위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라는 뜻입니다. (‘구원’을 받는 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고, 그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관심 갖지 않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길을 그들 자신들이 차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에 관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이 말씀에서 ‘자유’는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사람의 행복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원’은 ‘참되고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의 뜻은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대로 살면 너희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통해서 자유를 얻는 것의 반대 상태를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요한 8,34) ‘진리’의 반대쪽에는 ‘죄’가 있고, 참되고 영원한 자유’의 반대쪽에는 ‘죄의 종’이 되어서 사는 상태가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서 진리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도움은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을 수 있습니다. 즉 죄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고,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살기를 희망하고, 또 그 희망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죄 속에서 살면서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은 성령의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복음을 ‘진리’로 표현하신 것은, 당신의 복음이 아닌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가르치신 것이기도 합니다. 거짓 복음을 믿고 그것을 따라가면 구원이 아니라 멸망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거짓 복음’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 누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라 1,7-9)
사도들이 전해 준 예수님의 복음만이 진리입니다. 자기가 어떤 계시를 받았다고, 또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복음인 것처럼 가르치는 자들은 모두 이단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사탄의 수법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복음과 다른 것을, 또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악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4-6).” 구원의 진리는 하나입니다. 만일에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와가 뱀의 말에 속아 넘어간 것은 뱀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않았다는 것도 한 이유입니다.이미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신자들이 이단 종파와 사이비 종교의 주장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또 자기가 이미 받아들인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리를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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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산 넘어’라는 영화가 지난 4월 30일 부처님 오신 날에 개봉하였습니다. 영화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동화작가 정채봉 프란치스코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을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어린 날의 추억을 담담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듯이, 어린 시절은 우리 모두의 고향과 같습니다. 몇몇 뜻있는 사람이 추기경님의 어린 시절을 영화로 만들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영화는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투자를 받기 위해서는 흥행성이 있어야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영화에 대해 선뜻 투자를 하는 사람이 나서지 않았습니다.
몇 년째 표류하던 영화는 뜻밖의 투자자를 만났습니다. 투자자는 독실한 불교신자였지만 김수환 추기경님을 존경하였고, 추기경님의 어린 시절을 영화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는 달랐지만 한경직 목사님,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님을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분들은 시대의 어른이었고, 그분들이 있어서 위로를 받았고, 희망을 보았다고 합니다. 무지개는 일곱 가지의 색깔이 있습니다. 색이 다르지만 하나의 무지개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종교도 많습니다. 종교는 어쩌면 하나의 무지개를 이루는 것은 아닐까요? 서로 조화를 이루고, 보듬어 주기에 무지개입니다. 무지개는 다투고, 갈등하고, 분열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에 희망과 진리가 있음을 알려주는 이정표입니다.
코로나19로 힘든 상황에서 많은 나라가 한국식 모델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진단키트와 방호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건강에는 국경도, 종교도, 이념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국민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자존심도, 체면도, 선진국이라는 자부심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미국의 대통령도 전화를 하였고, 각국의 정상들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한국 정부도 기꺼이 정보를 공유하고 있으며, 가능한 범위에서 진단키트와 방호복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국 또한 더 좋은 모델이 있으면 기꺼이 도움을 청할 것입니다. 국민의 건강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국가의 존립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전쟁과 정쟁을 중단하고 코로나19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을 함께 돕자고 호소하셨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우선적으로 도와주자고 호소하였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한국을 외면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국민의 건강보다 정치적인 계산을 먼저 하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일본은 일방적으로 반도체 등 일부품목의 한국수출을 금지하였습니다. 한국을 화이트 국가(우방국가) 명단에서 제외시켰습니다. 한국은 부품을 국산화하는 노력을 하였고, 한국인은 일본 제품의 불매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가깝고도 먼 나라인 것 같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 백제의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문화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백제와 동맹관계였습니다. 역사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일제 강점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나라이기에 생길 수 있는 애증의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국민의 건강 앞에서는 정치적인 계산도 넘어서야 합니다. 역사적인 애증의 관계도 넘어서야 합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서 존립하기 때문입니다. 확진자가 늘어나고, 사망자가 늘어나는 일본의 현실을 보면서 일본 정부의 현명한 판단과 대처를 기대합니다. 생명은 모두 하느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 위로의 성령, 굳셈의 성령, 지식의 성령, 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따뜻함과 온유함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해 질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생명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생태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나눔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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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까닭>
요한 16,12-15 (성령께서 하시는 일)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까닭>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분께서
시나브로
내게 스미는
까닭은
늘
나는
그분을
오롯하게
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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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제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미스 리틀 선샤인>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한 가족이 나오는데 각자 강한 캐릭터를 지닌 구성원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 중 특별히 사춘기를 심하게 겪고 있는 소년이 나오는데, 비행기 조종사를 꿈꾸며 성인이 될 때까지 말을 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묵언 수행을 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이 소년은 자신이 색맹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색맹은 비행기 조종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크게 좌절합니다.
결국 욕설을 내뱉으며 세상을 한껏 비난하는데, 그를 위로하고자 하는 삼촌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냥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잠만 잤으면 해요. 고등학교고 뭐고 다 지나갈 때까지.”
그러자 삼촌이 이야기 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를 아니? 프랑스 작가란다. 완전한 패배자지. 직업을 가져본 적 없고 짝사랑만 하고, 심지어 동성애자였어.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20년에 걸쳐 썼지. 하지만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작가일거야. 항상 불행한 삶을 살아온 그는 말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힘겨웠던 시절이 삶에서 가장 좋았던 때였다고 말 했단다. 그게 자신을 만들었으니까. 행복했던 시절에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었대. 고등학교? 삶에서 가장 고민이 많을 때란다. 그보다 고통스러운 때는 없을 거야. 하지만 네가 열여덟 살 까지 잠만 잔다면 얼마나 소중한 경험들을 놓치게 될지 상상해 보렴.”
이 장면은 영화 안에서 커다란 울림을 주는 장면인데, 실제로 그토록 피하고 싶은 고통스러운 순간에 삶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선사해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는 곧 제자들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어제의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안에서 제자들이 지금 당장 “감당할 수 없는 것”은 곧 당신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끌려가 처절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리라는 것을 제자들이 알게 된다면 그들이 극심한 심적 고통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감추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성령이 그들을 이끌어 주리라는 것을 예언하십니다.
이 성령은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활동하는 존재가 아닌, 예수님과 같은 위격을 지니며 그분의 의향대로 움직이는 존재,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전달해주는 존재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예견하고 계시듯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 극심한 고통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고통은 이별로 인한 단순한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전 인생과 존재 의미를 뒤흔드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그들에게 선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짐작해 보면, 눈앞에서 체포되는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력감.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죄책감. 영원히 살 것이라고 예언했던 예수님에 대한 배신감. 기적을 베푸시며 언제나 당당했던 예수님이 무력하게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대한 의구심. 태도를 바꾸어 죄 없는 예수님을 비난하고 핍박하는 유다인들에 대한 분노.직업과 삶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일을 도왔는데 이제 더 이상 그분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상실감. 예수님을 따랐다는 이유로 받게 될 사람들의 눈총과 비난에 대한 두려움 등등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미처 상상할 수 없었던 제자들에게 어마어마한 불행과 혼란으로 다가 올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와중에서 언뜻언뜻 그들의 머릿속을 비추는 희망이 있을 것이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오늘 약속하신 진리의 영, 즉 성령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령이 그들에게 다가왔을 때 그들은 비로소 지난날의 아팠던 과거가 사실은 영광의 순간이었으며 진정으로 소중한 시간들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고통스러운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이 평화롭고 행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고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순간 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행하시는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오늘 복음 환호송이 이러한 예수님의 약속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아버지는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이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주님이 보내주신 성령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이 성령은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가장 좋은 보호자입니다.
프루스트의 말처럼, 불행했던 시절이 뒤돌아보면 은총의 시간이었던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특별히 우리가 성령의 인도로 세상의 어려움 앞에서 쓰러지지 않고 잘 버텨냈을 때, 즉 죽음 이후 주님의 면전 앞에 바로 섰을 때 반드시 들게 될 생각입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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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바오로 사도의 아레오파고스 연설은 ‘자연 종교’와 ‘계시 종교’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잘 알려 줍니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서 만물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진리는 ‘자연 종교’에서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구세주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계시 진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제자들에게만 받아들여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 사상을 대변하는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그리스도교 진리를 설파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인들의 종교심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을 하느님의 계시 진리와 부활 신앙으로 인도합니다.
어떤 이들은 비웃고, 다음에 듣겠다는 이도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 몇몇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계시 진리를 믿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른 사상과 종교와 열린 대화의 장을 가지면서도 복음의 진리를 용감히 선포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이 진리이지만, 세상은 이를 진리로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진리의 영을 모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사랑의 삶을 살아갑니다.
진리의 영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 놓으면 우리의 삶은 단순하고 소박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은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고 이기심과 욕심이 사라져 새로운 질서를 포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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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예수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하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수는 없었고, 다음으로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꺼번에 하느님의 진리를 다 파악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가르치고 알아듣는다 하는 것은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기에 하느님의 진리를 인간이 알아듣는 데도 점차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인간을 가르칠 수 있고, 사람이 하느님의 진리를 배울 수 있는 한계가 있기에, 합당한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한 실례를 보면 : 이스라엘이 상대 적국을 공략 점령하고서는 가축과 남녀 아이들까지 멸하라고 명하고 있는 구절들이 여러 곳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말을 우리가 들을 때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하다고 하겠지만 그러한 말의 배후에는 그들이 지켜야하는 중요한 사상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야훼 하느님을 아는 유일한 백성으로서, 하느님을 모르고 미신에 젖어있는 이들로부터 자신들이 감염되어, 자신들의 신앙의 위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향을 받을 위험이 있는 이교인들을 멸망시켜버리는 편이 더 낫다는 다시 말해서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야훼 하느님께 대한 종교의 순수성을 고취해 나간다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신 다음에는 달라졌습니다. 이방인의 멸망이 아니라, 모두가 한 하느님 안에 한 백성으로 함께 구원에 참여하는 구원의 모습으로 발전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계시는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발전되고 더 깊이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복음적인 계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 왔으나 그분의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그분의 부활하심으로 살아 계셔서 항상 진리를 계시하십니다.
또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는 영신적인 진리뿐 아니라 과학과 학문, 예술 등 모든 진리에 대해서 밝혀주시는 것입니다.
신학자와 설교자들만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새로운 진리를 알아듣고 밝히는 것은 아닙니다. 헨델은 그의 작품 "메시아중의 알렐루야 코러스"를 어떻게 작곡했느냐?에 대해서 말할 때, "하늘이 열리고, 장엄하신 하느님께서 그 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라고 했습니다.
과학자가 인간의 수고를 덜어주고 보다 나은 생활에 공헌하는 것을 발명할 때, 외과 의사가 인간의 생명을 구하고 고통을 덜게 하는 새로운 기술을 발견할 때, 그 모든 것도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비추어 주심으로 알게되는 은혜인 것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탐구에 몰두하면서 어떤 한계점에 부딪칩니다. 이때 인간의 사고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 문제의 해답이 그의 머리 속에 섬광처럼 떠오르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것은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그의 사고가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지혜 자체이신 하느님의 은혜가 들어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진리를 하느님께서는 점차적으로 인간의 모든 분야에서 밝혀주시고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에게도 하느님의 진리를 풍부히 들어내시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공헌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약속하신 바 그 진리의 성령의 은혜를 내리시도록 간절히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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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조영만 세례자요한 신부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신앙>
요한 복음 16장은, 최후의 만찬자리 그러니까 이미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앉혀 놓고 그들에게 일러주시는 마지막 유언, 이제는 곧 이별을 앞둔 스승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고별의 담화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고, 또 3장에 걸쳐서 진행되는 이 고별담화를 통해 요한은 예수님과 공동체, 곧 교회와의 관계를 정리해 나가는 긴 대목 중의 일부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잘 알아들으려면 우리의 시선을 그 시대의 상황으로 좀 되돌릴 필요가 있는데요,
우선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은 지금 우리처럼 그리스도교라는 교회가 일반적이지 않은, /대단히 작고, 어쩔 수 없이 그 당시의 사회로부터도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던 시절에, 그러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어떠한 박해를 당할지 모르는, 마치 비밀결사 집단이나 가질 법한 긴장과 철저함이 가득 베여있는 초세기 교회공동체가 그 대상입니다.
세상은 아무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않는데, 이를 고백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나버리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건을 체험한 그들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목숨을 내걸고서라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 자신들 역시도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올지 두렵고 또 모든 것을 박탈당할지도 모를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들이 뼈저리게 체험하는 바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두렵고 떨리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어둠 속에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그리고 그분께서는 기어이 우리에게 다시금 돌아오실 것이라는 굳은 약속.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막막한 두려움 속에서도 울려 퍼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그분의 이끄심에 대한 의탁을 예수님의 유언 형식을 빌어 이 글을 읽는 교회 공동체 신자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시선으로 오늘의 말씀을 다시 봅시다. ‘지금은 너희가 어둡고 괴로움 속에서 무엇인가라도 잡으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오히려 지금 너희가 하느님의 뜻을 다 감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진리의 영, 곧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오시면 그분이 너희가 가야할 길들을 일러주실 것이다. 그분은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시며, 어둠에 덮어두었던 모든 것들은 빛으로 폭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대동소이합니다. 참으로 많은 어두움과 두려움, 그리고 막막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다구니를 써서라도 하느님의 뜻이 이거다 저거다 재단하고 무언가 하나 턱하니 내세우고 욕심이 앞섭니다.
기도하면서도 안달하게 되고, 믿는다 하면서도 끝없는 불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식의 대답은 성에 차지 않습니다. 하느님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분의 때가 있고 그분의 시간이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를 성령께, 하느님께 내맡기지 않고 내가 나서서 자꾸만 뭔가를 해결 지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꼬여가는 신앙의 길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신앙은 바로 그분 친히, 이렇게 안달하고 끝없이 돌아서려는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일, 그분의 성령께 아프고 억울하고 작아보여도 그래도 그분께 나를 다시금 이끌어주시도록 내맡기는 일,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오늘 요한은 우리에게 그런 기다림을 이야기하십니다. 지치지 말고, 포기하지도 말고, 정말로 스승의 말씀과 그분의 성체에 머물러라고, 그러면 우리가 예상치도 않았던 때에 모든 것이 드러나게 해주시리라고 격려하십니다.
여러분. 부디 힘을 내십시오. 2,000년 전의 사람들도 이런 절박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들과 함께 같은 기다림의 대열에서 반드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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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샌디에고 주립대 심리학 교수인 진 트웬지 박사는 요즘 젊은 학생들의 우울증과 자살에 관해 연구하던 중에 상관관계가 있는 두 가지 활동을 지적합니다.
첫째는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 등의 전자기기 사용이고, 두 번째는 텔레비전 시청이었습니다. Screen 대 Non Screen의 차이가 상당히 크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스크린 이용 시간이 하루에 2시간을 초과하면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점점 커졌고, 2시간 이하면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젊은 학생들은 스크린을 통해 소속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뉴런 설계는 타인과의 친근하고 대체로 지속적인 대면 접촉 속에서 진화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대면 접촉이 아닌 스크린 접촉을 통해 소속감을 느끼려고 하다 보니 시스템에 불안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스크린을 통한 접촉은 쉽습니다. 그래서 사회성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회성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것을 피하려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스크린에 의한 접촉에 쉽게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쉽고 편한 것은 결국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것을 통해 우리는 나의 성장과 더불어 진정한 사회관계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쉽고 편한 것만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 역시 쉽고 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짊어지셨고, 우리에게도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삶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쉽고 편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즉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나약한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어렵고 힘든 것을 피하려고만 하고, 도저히 희망이 없다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내적인 귀와 눈을 밝히는 영적 빛과 말씀으로 인간의 마음을 가르치십니다. 제자들도 그러했지요. 성령이 주어지기 전에는 여전히 율법의 그림자에 매여 있는 노예와 같았지만, 성령께서 내려오신 뒤에는 성령의 가르침과 단련으로 모든 진리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따라서 더는 쉽고 편한 길만을 쫓아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성장을 가져다주는 어렵고 힘든 길을 향해 걸어갈 힘을 주시는 성령을 굳게 믿으면서, 지금의 삶을 힘차게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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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만나는 시간의 중요함>
세계보건기구가 21세기 최대의 위험으로 지목한 병이 무엇일까요? 암이나 에이즈가 아닙니다. 바로 직업에서 느끼는 스트레스로, 번아웃 신드롬 혹인 탈진 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증상입니다.
이 증상은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일에 탕진한 나머지 정작 자기 삶을 위해 쓸 수 있는 기운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기분은 점점 나빠지고, 믿을 수 없이 공허해지면서 부정적인 마음이 가득해집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부정적 감정까지 사라지면서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며 생기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오는 것은 신체가 나를 향해 보내는 구조 신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조금 더 열심히 하자’라며 노력을 더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것은 더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잠깐 뒤로 물러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야말로 내 삶의 의미를 찾는 엄청나게 소중한 시간이 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기도할 시간도 없다고 말합니다. 21세기 최대의 위험 질병에 스스로를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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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아초월自我超越의 여정旅程>
-진리의 영-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에서의 바오로 사도의 설교입니다.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대단한 종교심을 지닌 그러나 하느님을 모르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소개하는 바오로입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아직 하느님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오늘날의 모든 철학자, 예술가, 종교인들은 물론 모든 이들에게 하시는 말씀같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하느님뿐입니다. 하여 절박한 것이 회개의 은총입니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만나 믿음과 희망, 사랑을 고백해야 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 불가사의한 인간입니다. 그처럼 자명한 하느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이토록 친밀한 생명의 결합을 종종 망각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명백하게 거부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태도들은 매우 다양한 근원에서 비롯될 수 있다. 곧 세상의 불행에 대한 반발, 종교적인 무지나 무관심, 현세와 재물에 대한 근심, 신앙인들의 좋지 못한 표양. 종교에 대한 적대적 사조, 그리고 끝으로, 하느님이 두려워 몸을 숨기며, 그분의 부르심을 듣고 달아나는 죄인인 인간의 태도등이다.”(교리서 29항)
그러나 사람은 하느님을 잊거나 거부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 당신을 찾아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끊임없이 부르십니다. 끊임없이 사람을 찾는 하느님이시며, 우리 역시 마음 깊이에서는 하느님을 찾습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니, 하느님은 사람의 운명이자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하느님을 만납니까? 회개의 은총을 통해서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분이 바로 보호자 진리의 영, 성령이십니다. 참 좋은 선물, 보호자 진리의 영께서 우리를 회개에로 이끄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오늘 복음 환호송 말씀처럼 파스카의 예수님 덕분에 진리의 영을 선물받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거듭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분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이미 진리의 영께서 오셨고 오늘 지금 여기서, 아니 앞으로도 모든 진리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참으로 진리의 영, 성령의 은총으로 부단한 회개와 더불어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됨으로 비로소 무지로부터 벗어나 주님을 닮은 참나의 자유인이 됨을 깨닫습니다. 모든 진리는 파스카의 예수님 안에 다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진리의 영의 은총으로 부단히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예수님을 깨달아 알아가는 일뿐이겠습니다.
참 행복은 파스카의 예수님과의 만남에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주는 분이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진리 자체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의 일치를 날로 깊게 하십니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 요즘 계속 강조되고 있는 분이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신 진리의 영,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의 살아 있는 ‘기억’이시며, 사랑의 멘토가 되십니다(교리서1099항). 영적 스승이 없다고 탄식할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겸손히 마음을 여는 누구에게나 최상, 최고의 영적 스승이자 멘토가 되시는 진리의 영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사람은 진리의 사람이요, 이래야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요 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영혼의 영혼입니다. 진리의 영, 성령의 은총이 부단한 회개와 더불어 날마다 자아초월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삶은 성령의 은총에 의한 자아초월의 여정입니다. 마침 어제 써놓고 자유로워 했고 행복해 했던, 또 간절한 소망이 담긴 고백시를 나눕니다. 이 또한 성령의 선물입니다.
-“삶은/첩첩산중疊疊山中
자아초월自我超越의 여정旅程
날마다/힘겹게 정상頂上에 오르니/만나는
오, 확트인 광활廣闊한
신록新綠의 평원平原이신 주님
걸림이 없어라/자유自由로워라
오, 넘치는 행복幸福
요즘이 아니 날마다 그러하다
계속 그러하기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의 사람, 진리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시어 성공적 자아초월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 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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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온 누리를 가득 채우고 계신 하느님의 충만함을 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요한 16,1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을 제자들에게 전달해 주실 겁니다. 이러한 성자와 성령의 관계는 곧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일찌기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요한 8,28)고 하셨습니다. 또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요한 5,19)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 ...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요한 16,15)
성령께서 예수님에게서 받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은 실상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성부에게서 성자로, 성자에게서 성령으로 이어지는 이 관계는 삼위 하느님의 완전한 일치를 가리킵니다. 획일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들이 하나이심을 드러내지요. 온전히 일치하고 온전히 사랑하는 분들에게 다른 생각, 다른 뜻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들은 바를 영혼 없이 되풀이하는 기계적 재연과는 다릅니다.
아버지에게서 예수님께로, 예수님에게서 성령께로, 성령에게서 제자들(우리들)에게로 앎이 이어집니다. 이 앎이 곧 진리이고 사랑입니다. 피조물이고 죄인에 불과한 우리에게까지 이신비적 지식과 영의 기운이 흘러듭니다. 사실 아버지는 당신 안에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길 갈망하십니다. 이 뜻은 아드님도,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의 아테네 설교 대목입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사도 17,25)
인간 편에서는 성전 건축이나 의례, 제물 봉헌 등을 통해 마치 사람이 신에게 무엇이나 대단하게 하는 것인 양 착각을 합니2020년 5월 20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다만, 실은 인간 편에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받고 있지요.
하느님은 무언가를 더 받아 누리고자 인간 주위를 서성이는 채권자가 아니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인간을 만드신 이래 인간을 돌보시느라 잠시도 쉬지 못하고 눈조차 붙이지 못하는 아버지시지요. 그분이 바라는 것는 당신이 가지신 모든 것을 우리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합니다."(사도 17,28)
의식하건 의식 못하건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온 세상을 만드시고 누리를 가득 채우고 계신 하느님을 인류는 자기들 문화와 신심과 체험 안에서 고유의 이름을 지어 불러드리고 섬기고 경배하지만, 결국 한 분이신 하느님이 계실 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온갖 신화와 우상으로 가득한 도시 아테네에서 이를 알리고자 애를 쓰지요.
"주님의 영광, 하늘과 땅에 가득하네."(화답송)
우리는 주님의 영광, 주님의 위엄, 주님의 사랑이 가득 찬 세상 안에 존재합니다. 영의 눈을 크게 뜨면 이 세상이 주님으로 충만하다는 것이 보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이 기운이 오늘도 우리를 숨 쉬게 하고 움직이게 하며 사랑하게 합니다. 성삼위 하느님의 일치 속에 머무르는 우리에게 다른 생각, 다른 뜻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강요나 의무가 아니라 사랑이 그렇게 만들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어 흘러나온 사랑이면 좋겠습니다. 또 누군가에게 전해져 사랑으로 열매를 맺으면 더 바랄 것 없겠지요. 우리는 하느님으로, 그분 사랑으로 꽉 찬 세상 안에서 그분과 호흡을 같이 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알게 된 하느님을 바오로처럼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는 기쁨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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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운이 좋도록 뇌를 사용하는 방법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 때, 뇌는 합리적인 이유를 멋대로 찾아내려고 합니다. 불합리한 상태로는 안정을 찾지 못하는 것이 뇌인 것입니다. 이것은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알아두면 좋은, 뇌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불합리 반대’ by 뇌. 그러면, 운을 좋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늘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다’라고 말해 보세요. 그 사람에게 전혀 고마운 생각이 없어도 좋고, 얼굴을 마주보고 말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실험해 볼까요? 집에서 ‘00씨 고마워요!’라고 이름을 부르면서 우선 30번만 말해 보세요. 어때요? 말하기 전과 말한 후의 그 사람에 대한 느낌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나요? 포인트는, 소리를 내서 ‘고마워’라고 말해 보는 것입니다.
-「3초만에 행복해지는, 명언 테라피」에서
♣달라지지 않았다면, 당신의 뇌는 안정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왜, 저 사람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야?’라고 뇌는 불합리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유도 없이 ‘고마워요’라고 말하는 중에, 그 사람의 잊고 살았던 좋은 점, 감사해야 할 점을 뇌는 멋대로 찾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있지 않더라도 언어 습관이 되면, 의식이 자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좋은 면이나 작은 행복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감사의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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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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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의 생애 중에 성령의 개입은 크게 보면, 세 시기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시기>는 강생 때인데,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라고 표현됩니다.
<둘째 시기>는 세례 때인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마르 1,10) 또 “그 뒤에 바로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마르 10,12)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셋째 시기>는 부활과 승천하실 때인데,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겠다.”(루카 24,49)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고별사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곧 마지막 말씀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만큼 귀중하고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다음 구절부터는 이제까지의 말씀을 다시 요약하시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별사에서만도 성령에 대한 약속을 다섯 번이나 거듭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14,16-17) ‘보호자 성령께서 너희에게 가르치시고 ~기억나게 해 주실 것이다.’(14,26) ‘보호자,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15,26-27) “보호자가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16,7-11)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16,12-1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안내자라는 말씀입니다. 곧 성령의 이끄심이 없이는 진리를 깨달을 수도, 진리를 행할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라고 하심은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 깊이 결속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성령의 일치 안에 있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분께서 기름 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1요한 2,20-27)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들을 때는 우선적으로 성령께 의탁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귀고 아빠스는 성경을 읽기 전에 “먼저, 성령을 청하라. 그러면 빛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성령의 도유, 곧 성령으로 기름 부어진 독서가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성령으로 도유된 독서’(lectio untionis)에 대해서, 성 보나벤뚜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유 없는 독서는 쓸데없다. ~성령의 도유야말로 구원을 촉진시키는 모든 것을 가르친다.”
이는 성령께서 진리의 해석자이시고 동반자이심을 말해줍니다. 말씀의 뜻이 진리의 영으로 하여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웁살라에서 열린 WCC 세계교회협의회 총회(1968)에서, 그리스정교회 이냐시오 대주교(1920-2012)가 한 말을 기억해 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며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십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복음은 죽은 문자이며 교회란 한낱 조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일 뿐이며,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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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주님!
진리의 옷을 입고 당신 정원에 심어진 한 그루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행함으로 꽃을 피우고 의로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당신의 모상에 따라 새로워지게 하소서.
진리의 영의 숨결 되어 흐르는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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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1gHgTHi_fQg&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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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진리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 13)
진리의 길을
일깨워주시는
성령이십니다.
세상의 진리가
아닌 주님의
진리입니다.
성령께서는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낼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불안한
우리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진리를 실천하게
하시는 성령입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을 믿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진리안으로
이끌어가시는
진리의 영입니다.
삶안에서
꽃과 열매를
맺게하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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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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