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 이어령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그 운(韻)은 출렁이는 파도에서 배울 것이며
그 율조(律調)의 변화는 저 썰물과 밀물의 움직임에서 본뜰 것이다.
작은 물방울의 진동(振動)이 파도가 되고
그 파도의 진동이 바다 전체의 해류(海流)가 되는
신비하고 신비한 무한의 연속성으로 한 편의 시(詩)를 완성하거라.
당신의 시(詩)는 늪처럼 썩어가는 물이 아니라,
소금기가 많은 바닷물이어야 한다.
그리고 시(詩)의 의미는 바닷물고기처럼 지느러미와
긴 꼬리를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뭍에서 사는 짐승과 나무들은 표층(表層) 위로
모든 걸 드러내 보이지만 바다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작은 조개일망정 모래에 숨고, 해조(海藻)처럼 물고기 떼들은
심층(深層)의 바다 밑으로 유영(遊泳)한다.
이 심층 속에서만 시(詩)의 의미는 산호처럼 값비싸다.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바다는 대기(大氣)처럼 쉽게 더워지지 않는다.
늘 차갑게 있거라. 빛을 받아들이되 늘 차갑게 있거라.
구름이 흐르고 갈매기가 난다 하기로, 그리고 태풍이
바다의 표면(表面)을 뒤덮어 놓는다 할지라도
해저(海底)의 고요함을 흔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고요 속에 닻을 내리는 연습을 하거라.
시(詩)를 쓴다는 것은 바로 닻을 던지는 일과도 같은 것이니….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바다에는 말뚝을 박을 수도 없고, 담장을 쌓을 수도 없다.
아무 자국도 남기지 않는다. 바다처럼 텅 비어 있는
공간(空間)이야말로 당신이 만드는 시(詩)의 자리이다.
역사(歷史)까지도, 운명(運命)까지도 표지(標識)를 남길 수 없는 공간….
그러나 그 넓은 바다가, 텅 빈 바다가 아주 작은 진주(眞珠)를 키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초승달이 자라나고 있듯이
바다에서 한 톨의 진주가 커 가고 있다.
시(詩)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한 방울의 눈물을 티운다.
그것을 결정(結晶)시키고 성장(成長)시킨다.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 바다처럼 하거라.
바다는 무한(無限) 하지는 않지만 무한한 것처럼 보이려 한다.
당신의 시(詩)는 영원(永遠)하지 않지만 영원한 것처럼 보이려 한다.
위대(偉大)한 이 착각(錯覺) 때문에 거기서 헤엄치는 사람은
늘 행복(幸福)하다
[이어령] 언론인, 평론가, 교육자.
1956년 “한국 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 전후 세대의 비평가로 활약.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디지로그》외 다수.
한국의 대표적 석학으로 많은 활동과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작년 2월, TV 대담에서 췌장암 투병하시는 병상에서, 죽음을 앞둔 초연한 듯 담담함이 초인의 모습이셨습니다.
<시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모든 글을 쓰는 이들에게 띄우는 당부, 정성어린 편지입니다.
첫댓글 <시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모든 글을 쓰는 이들에게 띄우는 당부, 정성어린 편지 가슴 깊이 담습니다.
감사합니다.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반복되는 당부가 가슴에 닿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