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ques Alexandre Bernard Law, marquis de Lauriston (1768년 2월 1일 생 – 1828년 6월 12일 사망(60세))
자크 알렉상드르 베르나르 로, 로리스통 후작
로리스통은 프랑스 장성이자 외교관으로, 레종 도뇌르(Legion d'Honneur)와 성 루이 훈장(Order of Saint-Louis)을 수여자이다. 그의 이름은 개선문(The Arc de Triomphe)에 세겨져있다.
(1) 출신
로리스통은 인도의 폰디체리에서 태어났다. 폰디체리는 '파이이야기'에서 파이가 태어나 자란 곳으로 프랑스 식민지였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혈통으로 스코틀랜드 자본가 존 로우의 사촌으로 폰디체리 식민 정권에서 고위직에 있었다.
어머니는 포르투갈 혈통으로 포르투갈 무역 가문인 카르발류(Carvalho) 출신이었다.
(2) 외교관으로의 업적
로리스통은 1786년 첫 장교직을 수여받아 초기 프랑스 혁명전쟁에 포병장교로 참전했다. 1795년 포병준장이 되었으나 1796년 사임한다.
로리스통은 1800년 나폴레옹의 부관으로 다시 부름받아 돌아왔는데, 나폴레옹은 그와 사관생도시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 황제와 로리스통 장군
로리스통은 나폴레옹이 황제로 직위하기 직전까지 라 페르(La Fere) 포병학교 교장으로 활약했다.
외교관으로서 로리스통은 덴마크에 특사로 파견되었으며, 영국에 가서 1802년 조인된 아미앵 조약(Peace of Amiens)을 비준했다.
(3) 이탈리아와 스페인 원정 당시
1805년 로리스통은 소장으로 진급하여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에 참여했다. 로리스통은 베니스와 라구사 공화국(the Republic of Ragusa)를 1806년 점령하고
1807년 베니스 군정사령관으로 있었다. 1806년 에어푸르트(Erfurt)에 협상에 참여하여, 그 해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로리스통은 1808년 부터 1809년까지 치뤄진 나폴레옹의 스페인 원정당시 참여하여 사단을 이끌고 팜플로나(Pamplona) 공성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이탈리아 원정당시 외젠(Eugene de Beauharnais) 휘하에서 라브강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비엔나로 진격했다.
(3) 바그람 전투
1809년 7월 6일 치뤄진 바그람 전투(Battle of Wagram)에서 나폴레옹은 로리스통에게 좌익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기습에 대해 grand battery를 시행하도록 명했다.
grand battery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 포병 전술로 가용한 모든 포대를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오스트리아군의 기습이 치명적이었으며 병력을 막기위해 모든것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시간을 벌기 위해 나폴레옹은 에티엔 마리 앙투안 샹피옹 드 낭수티 장군(Etienne Marie Antoine Champion de Nansouty)의 중장기병대에게 돌격하도록 했다.
4,000여명에 이르는 흉갑기병과 총기병들은 오스트리아군의 포화를 맞으며, 오스트리아 군 척탄병 1개 대대를 궤멸시켰다.
낭수티의 흉갑기병과 총기병이 헛되이 희생되는 동안 로리스통은 112문의 포를 모아 거대 포열을 형성했다.
그가 모을 수 있었던 포는 근위대에서 60문, 카를 필립 폰 브레대(Karl Philipp von Wrede) 휘하의 바바리아 사단에서 24문, 외젠의 이탈리아 군에서 38문이었다.
로리스통은 포도탄 사정거리에 들기위해 포를 전진시켜 사격시켰다. 오스트리아 제 3군단은 불운했다고 할 수 있다. 밀집한 보병들은 표적이 되어, 포탄 한 발에 1개 대열의 병사들이 전멸했다.
코 앞에서 쏟아지는 끔찍한 포도탄의 위력에 요한 콜로브라트(Johann Kollowrat)의 오스트리아 제 3군단은 멈춰섰고 포도탄 사정거리 밖으로 돌아갔다.
시간을 번 나폴레옹은 전열을 제정비해 성공적으로 반격했다.
(4) 제국의 몰락 당시
-쿠투조프와 접견하는 로리스통 장군
1811년 그는 화평을 위한 나폴레옹의 시도로 쿠투조프(Kutuzov)에게 대사로 파견되었다.
로리스통은 1812년 러시아 철수 때 퇴각하는 대육군(Grande Armee)을 지휘해 퇴각을 엄호하는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
로리스통은 1813년 가을 뢰첸(Lutzen)과 바우첸(Bautzen)에서 제 5군단을 지휘했다.
로리스통은 1813년 5월 2일 뤼첸 전투에서 린데나우(Lindenau)마을에 교두보를 구축한 클라이스트(Von Kleist)를 공격해 클라이스트를 퇴각시켰다.
- 라이프치히 전투 배치도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Leipzig_battle.htm)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Battle of Leipzig)에서 황제근위대를 지휘한 로리스통은 무질서하게 퇴각하는 도중 포로로 잡히고 만다.
19일 오후 2시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에 대한 전면적인 철수를 명령을 내렸다. 린데나우와 엘스터 강의 다리는 성급하게 폭파되었고 포니아토프스키(Poniatowski) 원수와 로리스통을 비롯한 많은 병력들이 남겨졌다.
토니아토프스키 원수는 강물에 익사했으나, 로리스통과 병력들은 포로로 잡혔다.
그는 제국이 무너지는 동안 포로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백일천하 당시 로리스통은 나폴레옹의 편에 서지 않고 루이 18세을 옹위했다. 따라서 그는 복고 이후 귀족회 일원으로 인정받음과 동시에 근위대 지휘관이 되었다.
1817년 후작으로 임명되어 피니스테르(Finistere)주 브레스트(Brest) 주둔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1823년 원수로 진급하였다.
1828년 7월 11일 파리에서 뇌종증으로 사망하였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Jacques_Lauriston
THE PAPLOLEONIC WARS : THE RISE AND FALL OF AN EMPIRE, Gregory Fremont-Barnes & Todd Fisher
* 배치도를 제외하고는 출처를 적지 않음(저작권 소멸)
첫댓글 존 로우의 사촌이라니 ㄷㄷㄷ 프랑스부실채권사태의 주범(심지어 혁명의 진짜 이유라고도 희자되는) 바로 그 분의 사촌. 존 로위에는 오를레앙공이 있었고, 이 라인이 지금의 한국에 대입하면 모피아나 검은머리한국인같은 집단들인데, 나폴레옹도 집권하려고, 오만때만 세력이랑 손을 잡았군요. 역시나, 최고통치자들의 뒤는 항상 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