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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무늬의 시대로 비색 청자가 아름다움을 뽐낼 무렵 새로운 청자 하나가 등장했습니다. 이 청자는 비색 청자에 없던 무늬가 있습니다. 토기든 도자기든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가장 빨리 알려주는 지표가 바로 이 무늬인데요. 비색 청자의 절정기와 교차하며 나타난 무늬 역시 고려 사회에 무서운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처음 무늬가 나타난 것은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의종 임금 때입니다. 당연히 문벌 귀족들이 고려 사회를 손 안에 넣고 뒤흔들 때이기도 합니다. 왕은 귀족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문벌 귀족들은 하늘 무서운 줄 몰랐습니다.
의종은 자존심이 강했던 모양입니다. 문신들에 대하여 그 어느 임금보다 우대하였지만 그것으로부터도 고통을 받았거든요. 임금은 지나치게 오만방자해진 문벌 귀족들로부터 왕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임금의 노력만으로 유학자인 문벌 귀족들의 학문적 수준을 넘어 서기란 불가능했습니다. 혹시라도 문신들로부터 학문을 싫어 하는 임금이란 소리를 들을까 싶어 문신들에게 온갖 혜택을 다 주면서도 그들이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내내 괴로웠습니다.
유학자인 그들을 학문으로 따라 잡기 쉽지 않다고 생각한 임금은 나라 곳간을 있는 대로 털어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고, 화려한 건물이나 정원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귀족들의 콧대를 누르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귀족도 궁궐을 짓고 살 수는 없는 법이었지요. 의종 임금은 귀족들이 꿈도 꾸지 못할 사치를 부리는 일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잔치에 초대받는 사람들은 고귀한 신분들, 귀족 중의 귀족인 문벌 귀족들. 그들은 임금에게 조금도 굽히려 하지 않은 채 잘난 체를 해댔습니다. 임금은 틈만 나면 송나라 문학이 어떻고, 역사가 어떻고 하고 떠들어 대는 귀족들의 입을 아예 틀어 막아 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여 감히 왕실을 우습게 보는 일 따위를 하지 못하게 할 일을 의종은 꿈꿨습니다. 바로 그 때 청자로 지붕을 덮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원래 지붕을 덮은 기와는 그렇게 값이 비싼 재료가 아닙니다. 하지만 청자라면 달랐지요. 청자로 지붕을 만든다는 것은 그 규모만 생각해도 아찔할 지경입니다. 임금은 기분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그 청자를 좀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걸 본다면 어떤 귀족도 왕실을 업신여길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니까요.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양각 청자로 만든 기와입니다.
▲ 청자 모란꽃 새김 무늬 막새 고려 의종 때 청자로 기와를 만들었다는 문헌 기록은 이런 막새 유물이 출토되면서 증명되었습니다. 화려한 양각 기술과 고급 청자 제작 기법을 보여주는 문벌 귀족 사회 최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 북한 양각 청자
이 기와로 지붕을 덮고 잔치를 벌여 귀족들을 초대했습니다. 양각 청자로 만든 그릇에 음식을 담고, 양각 청자로 만든 술병에 술을 담아 양각 청자로 만든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습니다. 정말로 임금을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칼과 청자 고려는 정복 국가 시대를 끝내면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호족에게서 칼과 힘을 빼앗는 것이 임금들의 과제였습니다. 그 후 무관은 고려 귀족 사회에 참여할 길이 없어졌습니다. 과거 시험에 무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려 시대를 빛냈던 서희, 윤관, 강감찬 등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장수들 모두 문과 출신의 문신들입니다. 이름난 장수가 되는 길은 학문을 닦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다 보니 무신들은 높은 벼슬에 오르지도 못하고 문신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였습니다.
문벌 귀족들이 하는 행동은 기가 찰 뿐이었습니다. 거란과 여진이 국경선을 뻔질나게 넘어 오는 상황이라 고생은 무신들의 몫이었고, 문신들은 개경에 앉아 잔치만 벌였습니다. 그런데도 문신들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니 울분이 쌓이고 있었지요.
그 때 의종 임금이 보현원에 나들이를 갔습니다. 물론 잔치를 벌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임금은 허구한 날 잔치를 벌여 놓고 문신들을 초대하여 화려한 임금의 자태를 보여주는 일에 빠졌습니다. 고려 최고의 시인들과 술잔을 맞부딪히며 이야기를 나누노라면 스스로도 최고의 학자가 된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요?
오랫동안 이를 갈아오던 무신들 중에서 정중부 일행은 더 이상 참지 않기로 결심하고, 이 날을 거사일로 삼았습니다. 마침내 반란이 일어난 것이지요. 언제나 효율과 일사분란한 명령 체계를 최우선의 덕목으로 하는 무신들은 칼의 힘을 앞세워 신속하고도 확실하게 문신들을 비로 쓸듯이 쓸어 버렸습니다. 의종 임금은 유배를 가는 신세가 되었고요.
이렇게 해서 1170년부터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무신 정권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나라는 칼을 쥔 사람의 품에서 품으로 휩쓸렸습니다.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 여러 무인들을 거쳐 마침내 1196년에 최충헌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무신 정권은 더욱 강하고 더욱 무서운 시대로 접어든 것입니다.
새파랗게 젊은 문신이 오랫동안 국경에서 고생한 늙은 무신의 수염을 쥐고 흔들어도 아무 말도 못했었으니 문벌 귀족들에 대한 무신 정권의 태도는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드러내 놓고 그들에게 분풀이를 했습니다. 그것은 청자에도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문벌 귀족들은 중국 송나라에서 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라 중국풍을 좇는 일이 많았습니다. 불티나게 중국 책을 베끼고, 중국 귀족들 사는 모습을 따라 하느라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었습니다. 의종 임금 때엔 왕과 귀족은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이 사치를 부려 보통 때보다 무려 스무 배가 넘는 중국 상인들이 벽란도를 드나들며 물건을 팔아 댔습니다.
문신들은 송나라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무신들에게 그런 모습이 좋아 보일 리 없었지요. 무신들은 약해 빠진 학자들이나 좋아하는 송나라 도자기에 대항해 자신들의 정신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정말 놀랍고도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최고의 도자기로 여겨지는 상감 청자가 그런 무신들에 의해 꽃 피웠다는 것입니다. 차별받던 무신들의 칼의 노래가 상감 청자로 울려 퍼진 것일까요?
상감 청자의 탄생 배경 왜 청자의 나라인 중국에는 상감 청자가 없는 것일까요?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우리나라 상감 청자의 진가를 전혀 모르는 소리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만이 상감 청자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생각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과학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청자에 무늬를 그려 넣지 않은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청자의 바탕은 도화지처럼 하얗지 않아 그림을 그리면 지저분해집니다. 그래서 그림이 그려진 청자는 없습니다. 대신 무늬를 넣는 양각 청자가 만들어 졌습니다.
▲ 청자 목단문 태고동 중국 북송 시대 양각 청자로 화려한 당초 문양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송나라 자기에는 양각 무늬는 등장하지만 그림을 그리거나 상감 기법을 사용한 청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신 북송 시대 이전부터 내려온 당나라의 당삼채와 같은 화려한 색채 기술을 이용한 자기가 있어서 단색 청자를 보완하고 있습니다. ⓒ 중국 북송 청자
무신들은 자신들만의 청자를 만들려니 순 청자도, 상형 청자도, 양각 청자도 아닌 새로운 청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요. 하지만 그림을 그려 넣는 것만 빼고는 이미 다 세상에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뼈 속까지 문신들에 대한 원한에 사로 잡힌 무신들이 문신들을 따라 할 리 없었습니다.
무신들의 제작 의뢰를 받은 고려의 도공들은 깊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림을 그려 넣자니 오히려 지저분해지고, 그렇다고 그것 외엔 딱히 방법도 없고…
그러나 창조성에서는 그 어떤 민족보다 우수한 우리 민족의 선조답게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청자의 표면을 파서 색을 메워 그림을 그려 내면 어떨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표면을 파서 문양을 만들었기 때문에 상감 기법이라고 부르는 이 새롭고 창조적인 방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청자가 상감 청자입니다.
물론 상감 기법은 이 때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장식품인 금속에도 상감 기법을 이용해서 금과 은을 세공하거나 보석을 넣는 일을 했던 것이니 아주 새로운 기법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기법 자체만으로 창조적이다 하고 감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왜 상감 청자가 그토록 위대한 것일까요?
상감 청자 속 숨은 과학의 힘 상감 기법은 고려 청자가 처음으로 도입한 방법은 아닙니다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렇게 묻게 됩니다. "왜 고려 청자만이 이 기법을 도입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나라 상감 청자에는 상감 기법이 가능하게 된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유약에 있었습니다. 아무리 상감 기법이 기발하고, 그래서 멋진 무늬와 그림을 그려 낸다고 해도 청자 유약이 희끄무레하고 불투명하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지저분해서 안하느니만 못하단 소리를 들었을 법 합니다.
그러니까 상감 기법으로 만든 밑그림을 그대로 보여 주면서 아니 더욱 화려하게 빛나게 해준 유약. 그런 유약을 만들어낸 비밀의 물질이 바로 인입니다.
비 오는 날 시골에서는 하얀 달 덩어리 같은 불빛이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에 도깨비불이라고 부르곤 하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본 경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옛날 어린 시절에 본 기억이 나는데요. 어두컴컴하고 흐린 날 비가 그칠 때쯤 가랑비 속으로 올라가던 그 놀라운 경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물론 그 때는 그것이 도깨비불인지도 몰랐습니다만.
바로 그 도깨비불의 정체가 인입니다. 인은 우리 몸의 뼈를 이루는 구성 성분인데요. 무덤 속 시체의 뼈 속에 있었던 인이 증발하면 도깨비불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원소 기호 P)은 자연계 속에 12번째로 많은 원소이니만큼 유약 속에 쉽게 섞여 들어 옵니다.
중국 유약에는 이 인이 우리나라 청자보다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청자보다 훨씬 불투명합니다. 이 유약을 발라 구운 청자에 얇게 새긴 조각이나 그림은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거기에다 상감 기법으로 섬세하고 다양한 그림을 넣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불투명한 중국 청자 유약으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상감 청자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기술적 배경에는 기법이 참신함에 더해 기술적 진보가 있었던 것이지요. 유약을 투명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인의 함량을 줄여야 했고, 그 방법을 찾아낸 도공들의 노력의 결과가 고려 시대 상감 청자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청자가 중국 청자를 제치고 세계 제일의 청자가 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것이었지요. 창조적이고 동시에 과학적인 도공들의 힘.
투명 유약을 만들 수 있어야 백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우리나라가 백자를 그토록 쉽게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기술적 밑받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고려적인 청자 탄생과 무신 정권의 민족주의 1258년에 마지막 지배자였던 최의가 죽을 때까지 최씨 정권은 68년간 집권했습니다.
잠시 권력을 잡았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지배자로서 자신들의 도자기가 필요했습니다. 오랫동안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답게 그들은 도자기가 가진 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름난 도자소는 재빨리 그들 차지가 되었습니다.
몽골족이 침략했을 때 강화도로 옮긴 무신 정권이 그 조그만 섬에서 버텨낸 것은 남해안 지역에 있는 곡창 지대와 도자소를 미리 손아귀에 넣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뱃길로 들어오는 도자기와 곡식으로 부족한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 고려 시대 조운로 이 그림은 고려 시대 조운로를 나타낸 것으로 도자기 운송로이기도 하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강화도가 단지 몽골이 해전에 약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드러 나느데요. 전국의 세금 창고는 모두 이 조운로를 따라 남해·서해안을 타고 올라가 강화도에 도착했으니 무신 정권이 아쉬울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 국립 해양 유물 전시관 도자기 운반로
무신 정권은 군인들답게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졌습니다. 문신들은 송나라를 비롯해 선진국 유학파들이 많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외국의 선진 문물을 더 추종하는 성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층 민중들과 유리되기 쉽고, 그 결과가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한 군인 정권의 탄생을 낳는 게 아닌 가 싶습니다. 무신 정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벌귀족들 사이에서는 절대적이었던 신분 서열도 무너졌고, 천민들도 칼의 능력을 보여 준다면 쉽게 권력자의 자리로 올라 설 수 있었습니다. 소외되었던 사람들에게 무신 정권은 해방자이기도 했습니다. 신분 질서는 꿈틀거렸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신 정권은 민족주의를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송나라나 그 뒤를 이은 원나라에 대해 무신 정권이 그토록 배타적이었던 것은 이런 이데올로기가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유지하는 무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 시험을 통해서라거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지배자가 된 것이 아니라 칼에 기댄 쿠테타로 잡은 권력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벌 귀족의 기반이 된 외국 세력과의 단절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씨 정권이 있는 한 외국 도자기는 더 이상 개경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도자기 시장도 급변했습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외국 도자기를 소유하려는 사람은 매국노였던 셈이지요. 이런 분위기에서는 결국 가장 고려적인 도자기가 만들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가 나온 것은 바로 이 때입니다. 고려 청자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 상감 청자는 최씨 무신 정권의 대표작입니다.
▲ 상감 청자 운학문 매병 절제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매병은 무신 정권의 상징이며, 상감 청자의 최고봉입니다. 무신 정권 시기에 특별히 구름, 학과 같은 도교적인 불로장생적 상징물을 많이 사용한 것은 불교 사원과 결합한 문신들에 대한 견제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권력이 영원불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습니다.이런 십장생 위주의 도자기 그림은 다시 조선 후기 세도 정치 아래서 부활합니다. 권력을 가진 소수인들의 생각은 같은 것일까요? ⓒ 간송 미술관 매병
이 매병은 최씨 무신 정권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모든 권력을 한 손아귀에 쥔 최씨 무신 정권은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도자기를 만드는데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힘의 상징은 칼과 청자였던 것이지요.
무인들의 시대에 청자 매병을 만든 까닭 매화꽃을 꽂아 꽃병으로 쓰면 더없이 멋지겠다 싶어서 매병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만 그것은 술병입니다. 즉 칼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요.
청동기 시절 토기는 결정적으로 변화가 나타나는데요. 그것은 경제 주체가 여성에서 남성으로 넘어 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였습니다.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토기도 권력이 바뀌면 새로운 토기가 나타났는데 이 토기야말로 가장 최초의 권력을 상징하면서도 가장 큰 격변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 검은 간토기 청동기 시대 검의 출현과 함께 나타나는 토기로 권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중앙 박물관 검은 간토기
이 검은 색 토기가 탄생한 배경은 신석기 시대 농업 혁명이 가져온 변화와 함께 시작합니다. 처음 농업 혁명은 사냥하던 남성과 식물 채집하던 여성의 분업이 가져온 혁명이었습니다. 유목민은 그래서 애초부터 남성적 문화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권력을 놓지 않았었거든요.
유목 민족에게는 그래서 남성 유일신만이 존재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심지어 유목 민족의 전통 속에서 태어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서 여자는 몸만 빌려 주는 존재일 뿐이고, 야훼와 예수는 동정녀의 몸을 빌려 자기 복제한 것처럼 표현됩니다.
초기 기독교가 이집트, 로마 등의 농경 국가에서 선교에 고전했던 것이 바로 이런 남성적 유일신 문화가 이해되지 못해서였고, 그 결과 성모 마리아 신앙을 도입함으로써 타협을 이뤄냈다고 합니다.
이것은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불교의 주요한 숭배 대상인 관음 보살의 경우 북방 유목․상업 지대에선 남성으로, 남방의 농경 지대에선 여성으로 표현됩니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농업 국가여서 관음상은 여성상입니다)
고구려나 백제, 신라, 심지어 가야까지도 국가를 세운 국조에 대한 신앙과 함께 국모 신앙이 존재했는데요. 고구려의 유화 부인, 백제의 소서노, 신라의 알영 그리고 가야의 허 황후가 남성 유일 신앙에 대항하는 성모 신앙의 대표적 존재들입니다.(제주도의 영등 할망, 지리산의 마고 할미 등도 역시 성모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뿌리 깊게 국모 혹은 성모 신앙이 남게 되었던 것은 신석기 시대 채집 경제의 주체였던 여성이 씨앗의 순환을 알아내면서 경제 주체가 되었기 때문인데요. 공치기 일쑤인 남성들의 사냥 일보다 여성들의 식량 생산은 훨씬 더 안정적인 먹거리를 제공했던 것이지요.
여성 중심의 경제가 이루어졌을 이 때는 가장 중요한 물건이 씨앗이었고, 씨앗을 넣는 도구는 신성시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석기 시대에 여성들이 경제적 주체로서 권력의 정점을 이루었을 때의 제의는 성모 신앙으로 남게 되었는데요. 고구려의 유화 부인의 경우에도 동굴에 여신상을 모셔 두는 의식을 치름으로써 풍년을 빌었습니다.
이처럼 씨앗을 땅속의 깊은 곳(동굴, 음지, 땅 속)에 있는 여성 신에게 빌어야 한다고 믿거나 식구를 먹여 살리는 할머니 신으로 표현됨으로써 신석기 시대 여성 중심 신앙의 형태가 보존되어 왔습니다.
이 때 씨앗을 넣는 그릇은 붉은 색 토기입니다. 종지 모양의 이 그릇은 잡귀가 근접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붉은 색 칠을 했습니다. 농경 문화권 특히 동양에서는 붉은 색은 잡귀를 몰아내는 주술적 효과가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붉은 색 토기의 소멸과 함께 씨앗 단지 즉 신주 단지로 변합니다.
▲ 붉은 간토기 신석기 시대 이래 씨앗과 농경의 상징으로 이후 신주 단지를 거쳐 달 항아리로 변화합니다. ⓒ 국립 중앙 박물관 붉은 간토기
이런 여성 중심적인 경제가 가능했던 것은 생산 도구가 간단한 마제 석기나 나무 막대 등이었기 때문이었는데요. 결정적인 변화는 보습의 탄생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 돌 보습 이 유물의 탄생은 씨족과 씨족간의 부의 불평등, 씨족내에서 성의 불평등을 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은 돌덩이에 불과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유물이기도 합니다. ⓒ 국립 김해 박물관 돌 보습
돌 보습은 발명되자마자 농업 생산력을 뿌리채 흔들었습니다. 경작은 더 넓고, 더 쉽고, 더 광범위하게 가능해졌고, 돌이나 나무 뿌리가 많아 버려지던 황무지도 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돌 보습은 여성들의 힘으로 경작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힘센 남자들이 경작의 주체가 되었고, 이 때부터 여성들은 부엌으로 쫓겨 났습니다.(그래서 이 경제적 박탈감이 부엌을 무대로 하는 다양한 신화나 전설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경제권을 쥐게 된 남성들은 권력을 손에 넣었고, 그것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남성 위주의 세습 권력, 가부장제를 정점으로 하는 남성 문화를 만들었는데요. 이 때 그들을 대변하는 토기가 검은 색 토기입니다. 검은 색 토기가 만들어지는 순간 더 이상 붉은 색 토기는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검은 색 토기는 왜 만들어진 것일까요? 이유는 이 토기가 술병이기 때문입니다. 즉 술병은 술이 흘러나오면 안 되고, 술이 흘러 나오지 않기 위한 특수 처리를 하다 보니 흑연을 겉에 문질러서 토기의 구멍을 메워야 했던 것이지요.
그럼 다시 이렇게 묻게 됩니다. 왜 술병을 만들었을까요?
가부장제적 세습 권력 구축에 성공한 남성들은 자신들의 힘이 하늘에서 내려온 절대 권력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축제에는 술이 등장했고, 술을 놓고 제사를 지낸 뒤에 술을 나눠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술에 취했을 때의 몽롱한 기분은 하늘과 교감한다고 여겨지게 하였고, 그것은 남성들만의 독특한 교분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여성들의 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우리나라에서는 축제가 남성적으로 흐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을 위한 씨앗 교체 축제가 추수와 함께 만들어졌고, 이 때는 햇곡식을 숭배하는 의식과 함께 떡을 만들어 먹는 풍습으로 남겨집니다. 이것이 한가위 혹은 추석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명절로 전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술과 술병은 남성적 권력 혹은 권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매병이 무신 정권의 절정기에 만들어진 것은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 청동기 시대 칼의 힘을 손에 들었을 때 만들었던 검은 색 토기가 시대를 건너 다시 나타난 것이지요. 매병은 칼의 다른 모습입니다.
상감 청자 매병 속에 숨겨진 도공의 예술 혼 예술이 위대한 것은 시대를 뛰어 넘는 보편성에 있다는 것을 이 상감 청자 매병은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정말 놀랍게도 이 매병을 만든 도공의 손에서 청자는 칼보다 위대하게 시대보다 찬란하게 빛이 났습니다.
이 매병에는 도공이 몰래 감춰 둔 수수께끼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신들의 얕은 지식을 비웃고 싶었던 것일까요?
매병을 보면 가장 먼저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지요? 안정되고 편안하면서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한 연구자가 인사동을 중심으로 외국인들에게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외국인의 눈에 가장 아름답게 여겨지는 매병을 조사한 이 결과는 정말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매병의 아름다움의 비밀이 황금 비율에 있었던 것입니다.
외국인이 선택한 가장 아름답다는 매병을 재면 가로의 길이인 병의 지름이 26Cm이고, 높이는 42Cm입니다. 높이가 가로보다 1.615배 큰데요. 이것은 황금 비율인 1.618배에 근접한 수치입니다. 도자기를 구우면 처음 빚었을 때보다 아주 많이 줄어들기 때문에 원래 만들 때는 이 비율을 정확하게 맞췄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황금 비율일 때 자연은 가장 아름답고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피라미드도 이 비율에 맞춰 지어 졌습니다. 음악에서도 한 옥타브 안에 8개의 흰 건반과 5개의 검은 건반으로 되어 있는데 이 수를 나누면 황금 비율이 나옵니다. 사람의 몸도 이에 따라 만들어 졌습니다. 손가락은 다섯 개인데 각 손가락의 마디는 3개입니다. 역시 황금 비율입니다.
이렇게 자연은 3, 5, 8… 같은 숫자로 이루어져 가장 아름답고 편안하며 능률적이 되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을 수학에서는 피보나치 수열이라고 합니다. 수학은 자연의 노래인 셈이죠.
도공은 자연이 주어진 최고의 아름다움을 상감 청자 속에 집어 넣었습니다. 칼로 권력을 손에 쥔 것이 자연이 원하는 것이었을까요? 최씨 정권이 끝난 것은 이 매병이 만들어진 뒤 10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민족주의의 절정 진사 청자 몽골과의 항전을 이끌었던 무신 최항은 가장 많은 고려 사람들을 몽골 군대의 손아귀에 죽어가게 만들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강화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자와 함께 살아갔는데요.
그의 무덤에서는 정말 그다운 청자가 나왔습니다. 바로 진사 청자입니다. 진사 청자는 구리를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붉은 모래로 그림을 그린 청자라는 뜻입니다.
▲ 청자 진사 연화문 표형 주전자 그 기법의 화려함이나 독특함이 고집스런 무신 정권 시대 마지막 모습을 보여 줍니다. 꽃은 가장 화려하게 핀 뒤 지는 법이듯이 무신 정권도 곧 막을 내렸으니까요. 특히 이 시대가 무신 정권이 가장 격렬하게 몽골과의 항전 의지를 불태웠던 때였고,그만큼 고려 백성들에게 처참했던 시기라는 것은 이 아름다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줍니다. ⓒ 호암 미술관 진사 청자
구리는 1,085℃ 정도에서 녹습니다. 도자기를 굽는 온도가 1,300℃입니다. 그러니 가마 안에서 녹아 흘러 내려 버립니다. 꽤 까다로운 방법으로 보이죠?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방법은 중국에서도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뒤늦게 나타났습니다.
상감 청자도 기술적으로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 다른 흙으로 굽기 때문에 높은 온도에서 흙은 제각각 줄어 들어 들뜨거나 구멍이 생기거나 뭉개질 수 있습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무늬를 만들어 내기 위해 흙을 다루는 데서부터 불을 조절하는 데까지 어느 하나 쉽지 않았습니다. 도공들은 불과 흙을 정복했던 것입니다.
상감 청자가 그렇듯이 진사 청자도 민족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하지 않은 것을 하려는 독창성이 만들어낸 진귀한 보물인 것이지요.
비록 그것이 최항이 민족주의를 이용해 무엇을 하려 했는지 보여주는 슬픈 역사의 편린을 담고 있다고 해도 결국은 그것은 우리 민족의 보물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무신들이 닦달해 댄다고 해도 가장 우리다운 것을 만들어 낸 것은 결국 도공들의 높은 기술과 예술적 경지였기 때문입니다.
오마이뉴스 고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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