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739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영산강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48킬로미터 구간은 전라남도의 서남부인 나주, 무안, 영암, 해남군과 다도해 섬들과의 수운에 이용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영산포에 조창이 설치되었으므로 물자 수송의 중심지가 되었다. 전라도 남부의 쌀은 이곳을 통해 영산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다른 지방으로 수송되었다. 최근까지도 소기선(小汽船)이 내왕하여 영산포에 등대가 있었으나, 육상 교통의 발달과 하상(河上)의 변동으로 현재는 운행되지 않는다. 남북국시대 때 나주의 옛 이름이 금성이었기 때문에 영산강을 금천(錦川) 또는 금강(錦江)이라 했고 나루터는 금강진(錦江津)이라 하였으나, 신안군 영산도 사람들이 왜구를 피하여 나주 근처의 포구에 개척한 영산포의 이름을 따라 영산강으로 바꾸게 되었다.
영산강 유역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한 곳으로,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무문토기들이 나주군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백제시대의 옹관묘 군집이 강 하류인 나주군과 영암군에 산재해 있다. 나주 지역은 강 유역의 기름지고 넓은 들판인 문평, 함평 등지에서 나는 물산과 바다에서 오는 물자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고려 때부터 전라남도 지역의 중심지였다.
영산강 유역은 본류의 사행도(蛇行度,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강길)가 다른 주요 하천에 비하여 비교적 높아 홍수의 위험성이 높았다. 오죽했으면 ‘큰애기 오줌만 싸도 영산강 물이 넘친다’는 말이 회자되었을까. 그러나 나주호, 장성호, 담양호, 광주호 등 대형 농업용 저수지의 건설과 하굿둑의 건설 그리고 이를 기초로 한 영산강 지구 대단위 농업개발 사업 등이 성공리에 끝나게 됨에 따라 영산강 유역은 홍수와 한발의 피해를 받지 않는 전천후 농업 지역이 되었다. 나주시 다시면에 자리한 다시평야에서 나는 다시 쌀은 품질이 좋기로 이름났는데, ‘다시 사람은 좋은 쌀을 먹기 때문에 송장도 무겁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곳 다시면에서 백호 임제가 태어났으며, 삼봉 정도전이 이곳으로 유배를 왔다.
또 서남쪽은 강과 바다를 통해 물자를 실어 들이는 이익이 있어서 광주와 함께 이름난 고을이라 일컬어졌지만, 영산강 하굿둑이 만들어지면서 명산 숭어와 장어를 비롯해 영산포까지 올라오던 영산포 홍어 등의 특산물들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영산강은 고려시대에 지세(地勢)에 등져 흐르는 3대 강의 하나였는데, 고려 때의 문장가 김극기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푸른 강 천만 이랑에 외로운 배 떠 있네.
봉우리 끝에는 붉은 해를 보내고,
바다 밑에서 흰 달 맞이하네.
물가에 가득한 모래 서리 같고,
공중에 연한 물결 눈인 양
고기잡이 젓대 소리 서너 곡조에
갈대 사이 절로 처량하구나.
영암 상대포영산강 하구에 자리한 무안군의 백제 때 지명은 물아혜군(勿阿兮郡)이다. 이중환은 이곳에 대해 “주민들은 꾸밈이 없어 수수하며 실속 없는 겉치레는 숭상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영산강 하구에 자리한 고을이 무안군이다. ‘주민들은 꾸밈이 없어 수수하며 실속 없는 겉치레는 숭상하지 않는다. 농사와 길쌈을 본업으로 삼고 하찮은 기술 따위를 일삼는 경우는 드물다’는 무안의 백제 때 지명은 물아혜군(勿阿兮郡)이다. 무안의 진산은 승달산(僧達山)인데, 승달산이라는 이름이 지어지게 된 유래가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원나라 때 임천사(臨川寺)의 승려 원명이 바다를 건너와 이 산을 택한 뒤 풀을 엮어서 암자를 만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임천에 있던 그의 제자 5백 명이 원명을 찾아와서 함께 도를 통했으므로 승달산이라 하게 되었다.
바로 이 승달산에 호승예불혈(胡僧禮佛穴)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이 혈은 승려가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는 모습이라고 하는데 “이 혈에 묘를 쓰면 98대에 이르도록 문무백관을 탄생시킬 것이다”라고 『도선비록』에 전해온다. 1대를 대체로 30년으로 보는데, 98대라면 3천 년에 이르는 긴 시간이다. 그래서 이곳의 명당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은 ‘이러한 혈은 개인이 소유할 수 없는 혈이고, 그래서 개인의 욕심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자리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 시대가 아닐까.
조선 초기의 문신 권극화의 시에 “땅은 바다 어귀 봉수 가까이 잇닿았고, 성은 산기슭 거친 곳에 잇닿았네” 하였던 무안의 끝자락에 목포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목포영은 현에서 남쪽으로 68리 떨어져 있다. 나주와 목포가 여기 와서 바다로 들어가는 까닭에 통칭 목포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곳에 수군만호 한 명이 있었고 후삼국이 자웅을 겨루던 시절에는 이곳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
고려의 왕건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주 포구에 이르렀는데, 후백제의 견훤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전함(戰艦)을 벌여놓아 목포에서 영암군 덕진포까지 뱃머리와 꼬리가 서로 잇닿아 있었다. 게다가 수군과 육군이 겹겹이 깊고 넓게 배치되어 병세가 매우 왕성하였으므로 여러 장수가 근심하고 있었다. 이때 왕건이 말하기를 “걱정 마라, 싸움에 이기는 것은 단결에 있는 것이지 수가 많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진군을 명하여 공격하자, 견훤의 전함이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때 바람을 타서 불을 지르자 타 죽고 강물에 빠져 죽은 자가 태반이고, 머리를 베어 모은 것이 5백여 급이었으며, 견훤은 작은 배로 도망을 가고 말았다.
무안군 상향면 남악리에 전라남도청이 이주해온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광주광역시에 있던 기존의 도청을 옮기기 위해 1999년 1월 9일 신도청소재지용역을 실시했고, 그 결과 현재의 대지가 선정되었다. 3년의 공사 끝에 2005년 11일 11일 개청식을 열었다. 전남도청이 있는 무안에서 바라다 보이는 영산강 하굿둑 아래가 바로 항구 도시 목포이고, 목포의 노적봉이라고도 부르는 유달산(儒達山, 해발 130미터)도 보인다.
도갑사 해탈문 © 유철상영암군 월출산에는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갑사(道岬寺)라는 사찰이 있다. 국보 제50호로 지정된 도갑사의 해탈문(解脫門)은 모든 번뇌를 벗어버린다는 뜻이다.
영산강의 이름
남북국시대 때 나주의 옛 이름이 금성이었기 때문에 영산강을 금천(錦川) 또는 금강(錦江)이라 했고 나루터는 금강진(錦江津)이라 하였으나, 신안군 영산도 사람들이 왜구를 피하여 나주 근처의 포구에 개척한 영산포의 이름을 따라 영산강으로 바꾸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