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페로 들어서자 창가에 앉아있던 그가 손을 흔들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가을이 헤꼬지 한다던가요?”
맞은편에 앉으며 묻는 내게 그는 웃으며 말했다.
“별 뜻 없이 한 소립니다. 수정씨랑 괜히 술 마시고 싶어 수작 부린 겁니다. 그리고 사실 꼭 이유가 있어야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유 같은 거 오늘 벗어버립시다.”
가득 채워 내미는 술을 나는 시원하게 받아마셨다.
그랬다. 어쩌면 이유 같은 건지도 모른다.
대산이와 나는 한 달 만에 서로를 본다는 설렘 같은 걸 담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가을밤에 정우씨가 앉아있는 저 자리에 대산이가 앉아 있어야 한다.
그게 이유다.
그런데 지금 대산이는 벌렁 자빠져 있다.
나중에 행여 상황이 이상하게 변하더라도 이건 내 책임이 아니다.
날 방치해둔 방조죄. 넌 가슴을 치며 후회해야 한다.
우리는 술을 엄청 마셨다.
그리고 마신 양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이야기라는 것에 엄청 굶주린 사람들처럼.
목이 말라 깨어보니 낯선 침대였고 그는 침대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가?
나는 가물거리는 기억의 끈을 필사적으로 잡아당겼다.
우리는 소설과 영화를 이야기 했고 영화 속의 환타지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던 게 떠올랐다.
지금이 환타지라고 했던가?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대산에게서 두어 번 전화가 걸려왔던 것 같았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흔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둥근 침대와 한쪽에 놓인 조그만 소파. 생수 통이 꽂혀 있는 정수기, 작은 냉장고, 남녀화장품, 하얀 가운, 그리고 침대 위 천정에 달려있는 대형 거울. 거울 속에 누워있는 정우.
아, 모텔이었다.
나는 얼른 이불을 들춰 침대를 살폈다.
별다른 흔적은 없었다.
팬티 속에도 손을 넣어보았지만 무미하고 건조했다.
그의 잠든 모습은 평화로웠다.
내가 곁에 누워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잠을 잘 수 있는 걸까?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옷을 입었다.
옷을 입는 데 왠지 가슴속으로 바람이 쉬익,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를 이렇게 무미하고 건조하게 내버려두고도 저렇게 평화로울 수 있다니.
은근하게 속삭이던 말들은 모두 거짓이란 말인가.
아니면 나름대로 착한 남자라는 걸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일까.
간밤에 마셨던 술의 양만큼 머릿속이 복잡해졌고 그의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모텔에서 나와 곧 바로 병원으로 들어섰다.
“복복혀.”
옆 침대에 있던 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대뜸 그 말부터 했다. 할머니가 심심찮게 하는 말이었다.
“복복하다는 말, 잘 모르지? 저 할망구가 걸핏하면 저러는데, 지지리도 복도 없고 외롭다는 말일거야. 아마 내가 부러운 모양이지. 허허”
노인은 웃음 뒤 끝에 기침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아버님, 정우씨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어릴 때는 어땠어요?”
“나도 그놈 잘 몰라. 그놈 크는 걸 보지 못했으니. 그래도 다행히 지 애밀 닮았으니 널 고생시키지는 않을거구만.”
쉰 듯한 노인의 목소리는 깊었다.
“그래도 참말 다행이지. 객지로 떠돌아 댕긴다고 아예 집구석은 생각도 않았는데 병든 지 애비를 맞아주니 말야.”
나는 노인의 어깨를 주무르며 잠자코 기다렸다.
“그놈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고생 많이 했을 거야.”
“왜 그렇게 놓아두셨어요? 보고 싶지도 않았어요?”
“시간이 그리 빨리 지나가는 줄 몰랐어.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난 그저 동네 한 바퀴 돌다온 것 같은데......”
노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도 그럴까? 노인만큼 나이를 먹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더 많아질까?
그때 뒤춤에 찔러두었던 휴대폰이 울려 확인해보니 대산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쨌거나 제주도에서 날 만나기 위해 달려온 대산이를 혼자 내버려두고 정우와 함께 밤을 보냈다는 사실 때문에 선뜻 받을 수가 없었다.
전화가 뚝 끊기자 한 쪽 가슴이 아려왔다. 조금 있자 전화가 또 울렸다.
나는 얼른 폴더를 열었다.
“어젠 미안했어.”
폰을 열자마자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안한 게 뭐 있나요. 그렇게 말하니 내가 더 미안해지네요.”
대산이 아니라 정우씨였다.
속이 아프다고. 콩나물국 먹으러 가자는 전화였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8.20 21:20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8.20 22:18
첫댓글 나이스 타이밍!
갑자기나도콩나물국땡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