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령삼거리에서
유월 첫째 토요일은 현충일이었다. 국립 현충원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선 순국선열 추모 행사가 열리는 날이다. 국민 한 사람으로 호국 영령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새겼다. 아파트 베란다 난간 국기꽂이가 망가져 조기는 내걸지 못했다. 이른 아침 10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하니 두대동 창원충혼탑에선 추모 현수막이 내걸리고 행사장 준비를 마쳐 놓았더랬다.
터미널 구내식당에서 김밥을 한 줄 마련해 함안으로 가는 농어촌버스를 탔다. 서마산에서 내서 두척고개를 지날 때 차창 밖 허옇게 핀 밤꽃이 보였다. 중리 아파트단지를 벗어난 예곡부터는 행정구역이 함안으로 바뀌어 칠원을 지나 칠북으로 갔다. 구포를 지나니 칠원 면소재지를 지나 이령삼거리에서 내렸다. 거기는 낙동강 강변 가까운 곳이라도 들판보다 산지가 많은 내륙이었다.
이령마을엔 폐교되지 않은 초등학교는 그림 같은 분교장으로 격하되어 남아 있었다. 내봉촌에서 흘러온 냇물이 낙동강 본류로 합류하는 밀포로 가는 둑길을 따라 걸었다. 어시미산 기슭은 포도와 복숭아 과수원으로 개간되어 있었다. 그곳은 농지가 적다보니 오래 전부터 산지를 개발해 과수원으로 바꾸어 소득을 높이는 부지런함이 돋보였다. 밀포는 창녕함안보와 가까운 강변이었다.
4대강 사업으로 생겨난 둑길을 따라 걸으니 맞은편에선 자전거 라이딩을 나선 동호인들이 다수 보였다. 강변과 강심 모래섬은 갯버들과 갈대가 무성했다. 찬반이 극명하게 엇갈렸던 4대강 사업은 현 정부에서 보를 철거하는 문제로 홍역을 겪고 있는 현장이다. 그렇게 심하진 않은 가뭄에도 물 부족을 겪는 현실을 감안하면 보를 해체하려는 정책은 좀 신중하게 결정했으면 싶었다.
덕남배수장을 돌아 덕촌마을을 지나 소랑교를 건넜다. 중리에서 칠원을 거쳐 온 광려천이 샛강이 되어 낙동강 본류와 합류했다. 천변 둔치는 사료작물로 가꾼 것인지 수확을 끝낸 밀짚을 묶은 것인지 축산 사료로 쓸 엔실리지가 공룡 알처럼 포장되어 있었다. 5호 국도가 낙동강을 가로지른 교량을 지나니 드넓은 둔치는 유소년 야구장과 오토캠핑장이 들어선 강나루 생태공원이었다.
강 건너편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곽재우가 노년에 은거했던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였다. 거기 망우정은 곽재우 장군이 생시 마지막 흔적을 보여주는 유적지로 내가 지난 날 몇 차례 다녀간 곳이기도 했다. 국도 낙동강 교량을 지나니 마산에서 대구로 향하는 고속도로 교량이 나왔다. 예전엔 구마고속도로 불렀으나 지금은 춘천까지 이어지는 중부내륙고속도로로 바뀌었다.
칠서 강변 마을엔 초등학교와 사립 중학교가 남아 있었다. 저습지 강변에 가꾸는 연이 잎을 넓혀가고 있었다. 창원 시민들 상수원으로 삼는 취수장을 지나니 강 건너편은 남지 아파트들이 보였다. 계내 삼거리를 지나니 국가 등록 문화재인 남지 철교가 보였다. 강변 벼랑엔 해인사 말사인 능가사가 위치했다. 해우소 뒤편 용화산 공원으로 오르니 산기슭에 특이한 안내판이 나왔다.
계내 삼거리를 바라보는 언덕 전의 이씨 무덤 앞에 ‘함안차사’ 유래 주인공 노아(蘆兒) 무덤이었다. 강원도 포수로 알려진 함흥차사 유래담과 밀양 아랑의 원한을 풀어준 부사와 유사한 화소가 결합된 전설이다. 대역 죄인을 아버지로 둔 딸 노아가 미인계로 부친 죄를 묻지 못하도록 했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함안으로 내려온 차사마다 노아 치마폭에 놀아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용화산에서 강변을 따라가면 함안 조씨 문중이 관리하는 반구정과 합강정이 나온다. 의령 지정과 마주한 장포는 남강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거름강이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왜군과 맞서 싸워 승전보를 알려준 곳이다. 창원으로 복귀하는 교통이 불편해 거기까지 가질 못하고 쉼터에서 김밥을 먹고 능가사로 내려왔다. 트러스철교를 걸어 건너 남지에서 마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20.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