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740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으로 시작하는 이난영의 노래는 193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향토 가요 가사로 당선된 문일석의 노랫말에 작곡가 손목인이 곡을 붙여 만든 「목포의 눈물」이다. 이 노래뿐 아니라 「목포는 항구다」로 기억되는 목포를 광주의 시인 문병란은 「목포」라는 시에서 노래하였다.
더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와서
동백꽃처럼 타오르다
슬프게 시들어버리는 곳
항상 술을 마시고 싶은 곳이다.
잘못 살아온 반생이 생각나고
헤어진 사람이 생각나고
배신과 실패가
갑자기 나를 울고 싶게 만드는 곳
문득 휘파람을 불고 싶은 곳이다.
없어진 삼학도에 가서
동강난 생낙지 발가락 씹으며
싸구려 여자를 바라볼거나
삼학 소주 한 잔을 기울일거나.
······
실패한 첫사랑이 생각나는 곳이다.
끝끝내 바다로 뛰어들지 못한
목포는 자살보다
술맛이 더 어울리는 곳
······
목포를 어째서 목포라고 불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영산강 물과 서해 바닷물이 합쳐지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길목쟁이’처럼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하여 ‘목개’로 부르던 것을 한자로 옮겨서 목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진을 쳤던 고하도가 목화의 집산지라서 이곳에서 생산한 목화를 일본으로 실어 날랐기 때문에 ‘목화의 항구’라는 뜻의 목포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목포가 큰 항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주위에 섬이 많고 항만 동남쪽에 있는 영암반도의 돌출부와 남서쪽에 가로놓인 고하도가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배후의 유달산이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여 목포는 지형상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1895년 관제개혁으로 무안군에서 분리된 목포에 목포만호청이 설치되었고, 청일전쟁이 끝난 1897년 10월부터는 개항되어 목포진 또는 목포항이라 부르게 되었다.
목포는 유달리 예술가들이 많이 태어난 곳이다. 소설가 박화성, 천승세가 있고, 작고한 문학평론가인 김현, 우리 시대의 시인 김지하, 극작가 차범석, 동양화가 허건도 이곳 목포에서 살았다.
목포 유달산무안에서 바라다 보이는 영산강 하굿둑 아래가 바로 항구 도시 목포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적을 물리치기 위해 이용했던 유달산 노적봉도 보인다.
목포 하면 떠오르는 삼학도에 얽힌 전설이 하나 있다.
옛날 목포에 무예를 익히려는 한 장사가 있었다. 그는 유달산에서 무예를 익히면서 절벽 같은 암벽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바위와 바위 사이를 건너뛰기도 하며 날아가는 새를 화살을 쏘아 떨어뜨리기도 하고 큰 칼로 호랑이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놓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가 무술을 익히고 있는 유달산 아래에는 세 처녀가 살고 있었다. 아침마다 마을에서 올라와 물을 길어갔는데 늠름한 장사의 모습에 연정을 품게 되었고, 장사 역시 처녀들에게 마음이 끌려서 무예를 닦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러다가 무예 수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할 것 같다고 느낀 장사는 세 처녀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당신들을 사랑하게 되어 마음이 혼란스러워져 무예를 익힐 수 없으니 무예 수업이 끝날 때까지 멀리 떨어진 섬에 가서 나를 기다려주시오.”
이 말을 들은 세 처녀는 어느 맑은 날 돛단배에 몸을 싣고 먼 섬으로 향하였다. 그 광경을 몰래 지켜보던 장사는 세 처녀가 살아 있는 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유달산에서 배를 향해 화살을 마구 쏘아 날렸다. 장사의 화살을 맞은 배는 두 동강이 나면서 목포 앞바다 한가운데에 가라앉고 말았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세 마리의 학이 솟아올라 하늘 높이 날아갔으며, 곧이어 그 자리에 세 개의 바위가 솟아나 섬이 되었다. 그 섬을 삼학도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삼학도는 1968년 이후 목포와 연결되면서 자연이 크게 파괴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목포 앞바다의 섬들로 이루어진 군이 신안군이다. 신안군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1969년이다. 그전에는 지도군이었으며, 1914년에는 무안군에 소속되었다가 1969년에 신안군이라는 이름으로 떨어져 나왔다. 안좌도, 압해도, 암태도, 장산도, 대흑산도 등을 비롯하여 유인도 111개와 무인도 719개로 이루어진다. 흑산도 파시는 우리나라의 3대 파시, 즉 흑산도, 위도, 연평도의 조기 파시 중 제일 남쪽에 있는 곳이다.
파시는 성어기에 어항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 넓은 의미로는 해상에서 열리는 어시장뿐 아니라 연안의 육지 시장까지도 포함한다. 파시에서는 어선과 상선 사이에 또는 어업자와 어부들 간에 매매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매년 봄에 열리는 파시의 광경을 묘사한 기록이 있으며, 칠산해(七山海)의 칠산도는 조기의 어획장으로 성어기에 파시가 형성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파시가 형성되는 곳은 주로 조기의 산란장으로 유명한 대흑산도, 위도, 칠산도, 개야도, 녹도, 고군산군도, 어청도, 연평도 같은 서해안이다. 조기는 제주도 남서쪽 및 중국의 상하이 동남쪽 근해에서 겨울을 지낸 후 2월경에 북상하여 전라남도 영광군의 칠산해, 옹진군의 연평도 근해, 평안북도의 대화도 근해 등지에서 산란하는데, 이 시기가 3~6월경이다. 파시는 주로 이때 일시적으로 열리며, 특히 4월 하순부터 5월 하순까지 이루어지는 연평도 근해의 조기 어장은 전국 최대의 어장으로 파시 또한 유명하다.
파시가 열리면 인근 어촌은 외부에서 어부와 상인들이 모여들어 호황을 누렸으며, 일시적인 촌락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거문도, 청산도, 추자도 등 남해안에는 이 지역에서 많이 잡히는 고등어, 멸치 등이 성어기를 이룰 때 파시와 같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동안의 남획으로 인해 서해안으로 회유하는 조기가 적어짐에 따라 파시가 거의 사라졌다.
흑산도는 술꾼들이 즐겨 찾는 홍어와 홍탁, 삼합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홍어하면 떠올리게 되는 흑산 홍어는 흑산도 근해에서 잡히는 홍어를 말한다. 흑산 홍어는 인천이나 군산에서 잡히는 홍어와 달리 씹으면 생선살 자체가 입에 착 달라붙을 정도로 차지고 맛이 좋다.
홍어를 먹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껍질 벗겨 회를 떠서 초고추장이나 겨자를 넣은 간장에 찍어 먹는 홍어 회, 막걸리와 같이 먹는 홍탁, 얇게 썬 삶은 돼지고기에 배추김치와 함께 먹는 삼합, 양념 구이, 겨울철 파릇하게 자란 보리 싹과 홍어 애(내장)를 넣어 끓인 보리애국, 입안에 톡톡 화끈하게 퍼지는 매운맛이 일품인 삭힌 홍어 등이 있다.
신안군 흑산면에는 수려한 단애절벽이 장관을 이루어 남해의 ‘소해금강’이라고 불리는 홍도가 있고, 전국 새우 생산량의 절반가량을 생산하는 전장포가 임자도에 있다. 면화, 쌀과 함께 전라남도 삼백(三白)의 하나로 손꼽히는 신안 소금은 예로부터 이름이 높았다.
안좌면 기좌도에서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서양화가 김환기가 태어났다. 그는 1964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점 그림’으로 이름난 그를 두고 동향화가인 서세옥은 “이 나라의 서양화 도입기에 남다른 안목으로 모더니즘을 꿋꿋이 추구하면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여 참신한 기법으로 작품을 표현했으며, 특히 만년에 미국에 체재하면서 도달한 작품 세계는 한국 현대 미술의 정립에 한 선을 그었다”라고 평가하였다.
흑산도는 중국으로 오가는 배가 도중에 정박했던 곳으로, 1801년에 일어난 신유사옥 때 정약전이 유배를 왔던 섬이다. 정약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다산 정약용의 형이다. 어려서부터 김원성, 이승훈, 이윤하 등과 사귀면서 이익의 학문에 심취했으며, 권철신의 문하에서 배웠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해 전적,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당시 서양의 학문과 천주교 등의 사상을 접했던 이벽 등의 남인 인사들과 교유하고, 이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신안군 흑산면 사리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복성재(復性齋)를 짓고 섬 아이들을 가르치며 저술활동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유배 16년 만에 흑산도에서 고난에 찬 생을 마감하였다.
흑산도 © 유철상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정약전은 그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예수회 신부들이 번역한 유클리드의 『기하원본(幾何原本)』을 읽고 깊이 탐구하였다. 형수의 동생인 이벽의 권유로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克)』 등 천주교 관계 서적을 탐독하였다.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지은 『자산어보』는 흑산도 근해의 수산 생물을 실제로 조사, 채집, 분류하여 종류별로 명칭, 분포, 형태, 습성과 그 이용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 서적으로 실제 조사에 의한 저술이라는 점에서 그의 학문적 관심이 실학적 성격임을 알 수 있다.
뒤를 이어 1873년에는 대원군에게 상소를 올렸던 대한제국 말의 의병장인 면암 최익현이 유배를 왔다. 1876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맺어진다는 소식을 들은 최익현이 의분을 참지 못하고 반대 상소를 올리자 조정에서 흑산도로 귀양을 보낸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섬 주민들은 그가 머물 곳을 미리 정하고 집을 지었다. 이들의 정성에 감동한 최익현은 그 집에 서당을 차리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일신당(日新堂)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일신당 터 뒤에 있는 바위는 위가 평평하여 서너 명이 앉을 수 있는데, 최익현은 이 근처의 풀을 베고 이끼를 걷어내어 그 밑에 흐르는 냇물로 얼굴과 손발을 씻으며 의두석(倚斗石)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편 신안군 지도읍 감정리의 운낭기는 옛낭기 또는 고목포라고도 부르는데, 새날기 서남쪽에 있는 섬이다. 옛날 남해에서 서울로 오가던 배가 머물던 곳이었다.
소흑산도라고 불리는 가거도는 ‘가히 살 만한 곳’이라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는 하의도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났고, 1922년에는 황해도 재령과 평안북도 용천에서 일어난 농민쟁의와 함께 3대 소작쟁의로 꼽히는 암태도 소작쟁의가 일어났다.
나주의 서쪽은 칠산 바다다. 『동국여지승람』에 “해마다 봄에 상선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 판매하는데 서울 저자와 같이 떠드는 소리가 가득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1960년대만 해도 홍농면 칠곡리엔 1킬로미터가 넘게 늘어선 돛단배와 만선을 기원하며 올리던 수산제, 쌀로 빚어 만든 법성포토주 등이 뒤범벅되어 흥청거렸으나 지금은 그러한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택리지』에도 “옛날에는 깊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모래 등이 쌓여 점점 얕아져서 썰물 때엔 물 깊이가 겨우 무릎이 빠질 정도다. 강 한복판의 물길만이 강줄기와 같아서 배들은 이곳으로 다닌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1750년 무렵부터 칠산 바다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칠산 바다 바로 아랫자락에 함평군이 있다. 소리꾼 임방울이 즐겨 부르던 「호남가」 첫머리에 “함평 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바라보니”로 시작되는 함평을 조선 초기의 문신 정인지는 “함평은 바다 곁에 있으므로 경비가 해이하지 않고, 토지가 비옥하므로 백성이 많으니 반드시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야 비로소 수령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인접한 무안과 더불어 전국에 널리 알려진 양파 재배 단지이면서 고구마의 산지인 함평은 쌀이 좋기로도 유명하다.
영산포 시가지조선 초기의 문신 정인지는 “함평은 바다 곁에 있으므로 경비가 해이하지 않고, 토지가 비옥하므로 백성이 많으니 반드시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야 비로소 수령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함평 쌀밥을 먹은 사람은 상여가 더 무겁다’거나 ‘손불면 일대에서 나온 쌀은 경기도 이천 쌀과 안 바꾼다’는 말은 함평 쌀이 그만큼 우수하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1906년에 발행된 『함평군지』에 따르면 이 지방에서 나는 햅쌀, 보리, 밀 등을 왕실에 진상하였다.
목포는 예술가들의 노스탤지어
목포는 유달리 예술가들이 많이 태어난 곳이다. 소설가 박화성, 천승세가 있고, 작고한 문학평론가인 김현, 우리 시대의 시인 김지하, 극작가 차범석, 동양화가인 허건도 이곳 목포에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