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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월) 순종에 따른 복
신 28:1-14
(신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신 28: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 28:7)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신 28:8)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신 28:9)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신 28:10) 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이 너를 위하여 불리는 것을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신 28:11)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신 28: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신 28:13)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신 28: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신 28:1-14 / [순종과 복]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한 주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보다 높여 주실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다음과 같은 복들이 모두 여러분에게 이르러 여러분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3) 여러분은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녘에서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4) 자녀들도 건강하게 태어나 훌륭하게 자라며 농작물도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되고 소나 양과 같은 가축들도 번성할 것입니다. 5) 그래서 광주리마다 온갖 과일이 가득 차고 떡반죽 그릇에도 항상 곡식이 가득 찰 것입니다. 6) 여러분은 집안으로 들어와도 복을 받고 집 밖으로 나가도 복을 받아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될 것입니다. 7) 원수들이 일어나 여러분을 치러 오면 여호와께서 여러분 앞에서 그들을 땅바닥에 메어치실 것이니 그들이 한 길로 여러분을 치러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칠 것입니다. 8)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도록 명령하셔서 여러분의 모든 창고에 가득 차게 하시고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실 땅에서는 여러분이 하는 일마다 복을 받을 것입니다. 9)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분이 가리키는 길로만 따라가면 여호와께서 이미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대로 여러분을 주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10)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자기 백성이라고 선포해주시면 세계 만민이 모두 보고 여러분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11)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에게 많은 자녀를 주시고 가축도 번성하게 하시며 농경지에서도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하셔서 주께서 이미 여러분에게 주시겠다고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에서 여러분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실 것입니다. 12) 여호와께서 하늘의 창고들을 열어 때를 따라 여러분의 토지에 비를 내리셔서 여러분이 수고한 모든 일들이 열대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많은 수확을 거두게 되어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빌려 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다른 민족에게서 빌려 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그대로 지켜 행하면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세계 만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계 만민 가운데에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14) 그러므로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가르쳐 준 모든 말씀에서 좌로나 우로 벗어나지 말고 다른 신들을 따라다니며 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그 전에 순종을 말씀하십니다.
내적인 축복(1-6)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주의 깊게 경청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대로 사는 자들이라면, 산상수훈의 팔복처럼 특별히 복을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주어질 것입니다(마 5:3-12; 마 6:33). 이를 통해 백성에게 주어지는 내적인 축복은 첫째, 민족의 우월성으로 만민 중에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는 민족의 축복입니다(1; 26:19). 둘째, 성읍의 축복으로 공적인 사회생활 가운데 받는 축복과 생계를 위해 노동하는 개인적인 삶의 현장에 받는 생활의 축복입니다(3). 셋째, 자손의 번성으로 가문이 번창하고 토지소산 및 육축과 일용할 양식이 풍성해지는 소유의 축복과 그리고 집 안에서나 집 밖에서 항상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출입의 축복입니다(창 22:17; 사 61:9).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풍요로운 삶이 약속되어 있으며,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외적인 축복(7-14)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외적인 축복들은 전쟁에서의 승리입니다(7). 어떤 대적 자들이든 그들이 얼마나 강하고 많은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적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백성의 목전에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삼하 5:10; 왕하 22:1-23:30; 롬 8:35, 37-39; 고전 10:13; 엡 3:20; 엡 6:12-13; 요일 5:4). 그리고 민족의 부강입니다(8-12). 순종하는 자에게는 그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창고에 있는 것뿐 아니라 그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출 23:25 ;레 25: 21; 신 10:12).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위에 여호와의 명성과 권위를 있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의 소유된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권을 선포하여(렘 14:9)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7:6 ;26:19; 출 19:5, 6; 합 2:14). 끝으로는 민족적 명예입니다(13-14).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순종하면 세계 만민 중에서 으뜸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또한 우상을 멀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며,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사람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이기 때문입니다(출 20:3-6; 마 6:24).
적용: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받은 축복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영적 독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결단력이 중요합니다. 순종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영적 성장은 물론이고 성령의 놀라운 기적도 체험하게 됩니다. 문제는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연약한 죄인들입니다. 때문에 영적 독서가 내세우는 방법의 4단계에서 ‘기도하기’는 순종하며 그 열매를 맛보는 절정이 되겠습니다.
< 설 교 >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리라
신 28:13-14 / 박기완 목사
신명기서는 모세오경 가운데 다섯 번째 책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던 지도자 모세가... 이제 40년이 지나 가나안이 바로 앞에 바라다 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신명기는 사실상 죽기 직전에 광야의 2세들에게 남긴 유언적인 설교의 말씀입니다.
애굽 바로 왕의 학대와 이스라엘의 울부짖음.... 그리고 출애굽의 거사, 홍해의 이적과 시내산에서의 율법 부여의 사건, 그리고 광야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이적들.... 그러나 이제 역사의 산증인이었던 출애굽의 제 1세대는 다 죽고....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지 못한 광야의 2세들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들에게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의 유래와 계승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신명기라는 말뜻은 신명기 17:18절에 보면 '율법을 등사하라' 는 뜻입니다. 즉, 신명기는 율법의 복사판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40년동안 광야에서 지냈는데 처음에 애굽에서 나왔던 제 1세대는 목이 곧고 불순종하고 원망하는 실패의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는 애굽 세대를 전멸시켜 버리고 광야에서 새롭게 태어난 제 2세대에게 율법을 다시 복사하여 주시면서 젊은 세대를 향한 최후통첩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너희들도 조상의 길을 따르므로 저주를 받겠느냐 아니면 이 율법의 복사판대로 순종하여 복을 받을 것이냐 하면서 양자택일하라는 말씀입니다.
즉, 신명기의 목적은 복과 저주간에 확실한 선택과 결단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명기의 전체 내용을 살펴보면 ①유일무이하신 한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고 ②오직 지정된 한 성소에서 ③선택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만이 섬길(예배)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모세의 유언적 설교 가운데서 세 번째 부분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신명기 28장은 흔히 축복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저주의 말씀도 기록된 말씀이요... 이는 순종과 불순종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율례, 계명)에 순종하면 '머리' 가 되는 복을 받지만, 불순종하면 '꼬리' 가 되는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머리는 축복이요, 꼬리는 저주이며.... 머리는 신앙이요, 꼬리는 불신앙이고... 또한 머리는 구원이요, 꼬리는 멸망이라는 진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머리가 되기만 하면... 신명기 28장에서 말씀하신 이 모든 복을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하여 꼬리가 되면 역시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모든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아니하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는 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다면 머리가 무엇입니까?....
1. '머리' 의 진정한 의미
먼저 축복의 원천으로서 머리는 하나님 자신을 가르킵니다. 고린도전서 11:3절에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고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켜 '만물의 머리' 요(엡1:22, 4:15), '각 남자의 머리' 이며(고전11:3), 그리고 '교회의 머리' 라고 하였습니다(엡1:22, 5:23, 골1:18).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족속의 지도자를 족장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바로 머리(首長)를 뜻하는 것입니다. 곧 어른, 두목, 두령, 족장 등의 칭호입니다(출 6:14, 18:25, 민 1:4, 13:3, 수 14:1) .
민족의 지도자, 집권자, 영도자, 통치자들을 머리라고 불렀습니다(삿11:8-11).
이사야는 참된 선지자(지도자)는 머리요, 거짓된 선지자는 꼬리라고 구별하여 말했습니다. 이사야 9장 14-15절에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며 종려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머리' 는 축복의 원천이요, 축복의 근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복이요 모든 것을 능가하는 복입니다. 가장 앞서가는 복이요 지배하는 복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계명, 율례)과 직결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명하시는 명령(말씀, 계명, 율례)을 듣고 지키는 것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신28:1, 2, 9, 13, 14).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할 때 저들은 종교적으로, 사상적으로, 교육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그 시대를 앞서고 축복하는 열국의 머리(으뜸)가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에만 있고 뒤에 있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복된 성도는 언제나 앞서 가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멀찍이 뒤따라 오지 마세요... 그러면 꼬리가 되어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고 실패하게 됩니다.
축복받은 사람은 언제나 머리요, 위에만 있어야 합니다. 앞에만 있어야 합니다. 선진(先進)해야 합니다. 아래에 있고, 뒤에 있는 것은 꼬리가 되고, 잡히고, 밟히고, 물리게 되어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머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머리가 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2. 머리가 되는 비결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들어야 합니다.
1절에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삼가' 라는 말은 주의해서 듣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목소리를 주의해서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 받을 그릇이 되고, 복 받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느헤미야 8:6절에서 학사 에스라가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펼 때... 모든 백성이 일어서서 손을 들고 아멘으로 응답하며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를 경배하였던 것처럼, 누가복음 10:39절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에 앉아 열심히 말씀을 사모하여 들었던 것처럼, 사도행전 10:33절에서 고넬료가 베드로의 심방을 간청하고 온 가족이 모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것처럼.... 말씀을 사모하고 삼가 들을 때 복을 받는 것입니다(계1:3).
둘째로,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1절에 보면,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절에서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라고 했고, 9절에서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이라고 했습니다.
13절 이하에도 보면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면 이 모든 복을 주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으며 약속하신 모든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실 때 무조건 내려 주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조건을 걸고 그 조건을 지키는 자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계명을 잘 준수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머리가 되어 약속하신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머리가 될 때 받는 복은 어떤 것입니까?....
3. 머리가 되면 받는 복
1) 개인적인 복
첫째로 개인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신28:2).
① 경제적 축복
먼저 본문 3절에 보면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경제적인 복입니다.
사람이 많은 도시나 사람이 적은 농촌에서나.. 공적인 장소나 사적인 장소나.... 어디에서나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② 자녀의 축복
그 다음에는 '네 몸의 소생' 이 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신28:4). 이는 자녀의 복입니다.
③ 소유의 축복
그 다음에는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 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신28:4b). 또한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 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신28:5). 이는 소유의 복입니다.
④ 출입의 복
그리고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신28:6). 이는 출입의 복입니다. 어디를 가도 하나님이 동행하시므로 복되고 형통하세 되는 임마누엘의 복입니다.
2) 민족적, 국가적인 복
두 번째로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복입니다.
① 뛰어나게 하리라
본문 28:1절 중에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이는 민족적 특이성, 우월성, 창조성을 말하는 복입니다.
② 승리하리라
또한 7절에 보면, 공격(대적)해 오는 적국의 침략에 대해서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하였습니다(신28:7).
③ 부하게 되리라
그 다음에 8절에 보면, 추진하는 모든 일들이 잘되어 창고가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11-13절에 보면 모든 경우에 생산이 풍부하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국가적인 부강의 축복을 말합니다.
모든 세계를 먹여주는 부강한 나라를 말합니다. '많은 민족에게 꾸어주는 나라' 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④ 높이 세워 주리라
계속해서 9절 말씀에 보면, 민족적인 명성과 권위, 우월과 명예의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라고 하였습니다. 10절에서는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로 명성을 떨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⑤ 머리가 되게 하리라
그 다음에는 13절에 보면, 열강을 주도하고 지배하는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국가적으로도 ① 뛰어나게 하리라 ② 승리하리라 ③ 부하게 되리라 ④ 높이 세워 주리라 ⑤ 머리가 되게 하리라 하신 이 모든 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머리되는 복, 위에만 있는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모두들 머리가 되셔서.... 개인의 복은 물론이요, 민족과 국가적인 복을 다 받아 누리시는 복된 권속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꼬리가 되면 받는 저주
그렇다면 머리의 반대가 되는 꼬리가 될 때 받는 저주는 무엇입니까?...
사실은 신명기 28장을 보면, 축복의 사실보다 저주의 사실을 더 자세히 더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5절부터 68절까지 그 내용을 매우 길게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주도 크게 나누면 두 가지입니다.
(1) 개인적인 저주
먼저 개인적인 저주입니다(신28:15-19). 그것은 모든 일상생활에서의 저주입니다.
성읍에서 저주를 받고 들에서도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몸의 소생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토지의 소산과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고, 모든 출입에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민족적, 국가적 저주
그 다음은 민족적, 국가적인 저주입니다(신28:20-68).
그것은 모든 질병(신28:21-22), 한재(신28:22), 풍재(신28:22), 전화(戰禍;신28:25-26, 28-34, 36-37, 41), 종기(신28:27, 35), 흉년(신28:38-40), 낮아져 버림(신28:43-44), 빈곤과 대적의 침략을 받음(신28:47-57), 그리고 국가 자체의 멸망이라고 하였습니다(신28:58-68).
이것은 바로 꼬리가 되는 것, 아래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신28: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사람이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는 것, 앞에만 있고 뒤에 있지 않는 것은.... 알고 보면 그 사람 자신이 결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머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사야 43:1절에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였습니다.
수많은 죄인들 중에서 특별히 선택받아 구원받은 언약의 자손들입니다(창 22:17). 참으로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또한 꼬리는 저주받은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주저없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속에서 멀리 떨어져 나간 무리들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1:2-3절 말씀에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나타납니다. 그 순종의 절정은 그가 보내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입증이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미워하는 자는 그가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앙함에서 입증이 됩니다.
그러므로 요3:18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들을 믿는(순종)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그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불순종) 자에게는 심판, 곧 저주가 있다" 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길입니다. 복과 저주! 머리와 꼬리! 위(上)와 아래(下)! 순종과 불순종! 신앙과 불신앙!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구원과 멸망! 복받은 자들과 저주 받은 자들, 왼편에 있는 자들과 오른편에 있는 자들, 영벌과 영생(마25:34, 41).... 이 두 가지 길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두 갈래인 것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인하여.... 머리가 되고 복 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말씀을 준행하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우리의 믿음과 순종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열심히 삼가 듣고, 그리고 그 말씀을 준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약속하신 놀라운 축복들을 다 받게 되는 귀한 권속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늘 문을 여는 사람
신 28:12-24 / 홍문수 목사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된 인생을 살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복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복이 누구에게서 오는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또 하나는 구체적으로 복을 어떻게 받는 것인지 그 방법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을 받겠다며 추구하는 방법 중에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점을 칩니다. 점을 쳐서 맞기도 어렵지만, 맞는다고 다 복을 받는 게 아닌데도 말입니다. 지난 6월 남아공 월드컵 때 세계적인 점쟁이로 부상한 인기 스타가 있었죠. 문어 도사 파울(Paul)! 독일의 해양생물관에 살고 있는 문어가 독일 팀의 경기 결과와 우승팀(스페인)을 정확하게 알아맞혀서 화제가 됐죠. 8경기 결과를 연속 맞히는 게 확률 상 어렵지만(1/256),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문어가 먹이 찾을 때 학습된 효과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독일 국기를 보면서 미리 학습된 것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겁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예언을 했다며 사람들이 흥분하고 난리였습니다. 독일 팀이 스페인 팀에게 패한 후에는 문어가 저주를 했다며 구워먹어야 한다고 입방아를 찧었습니다. 그러자 스페인 총리가 경호팀을 보내겠다고 맞장구를 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호들갑 떠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문어보다 못한 인간!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복을 구합니다. 도장 글씨체가 이러이러 하면 복이 들어온다며 복 도장을 새깁니다. 복인(福印)이라고 하죠. 꿈을 잘 꾸면 복이 들어온다고도 하죠. 돼지꿈 같은 것 말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밴쿠버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땄죠. 김연아 선수가 떠나던 날 밤에 그 아버지가 똥 꿈을 꾸었다고 하네요. 방안에 넘쳐서 치우지 못할 정도가 됐는데 정말 금메달을 땄다고 신문 기사에 났어요. 그 기사를 읽은 사람들이 나도 언제 똥 꿈을 꿔보나 그랬대요.
여러분, 인간이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복을 누가 줍니까? 우주만물의 창조주 하나님, 주권자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방법으로 복을 구해야 됩니다. 그게 아니고 엉뚱한 방법을 추구하면 다 헛수고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복을 받을 수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으로 복을 구하고 복을 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신명기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장이죠. 흔히 ‘축복장(章)’이라 부르는 대목입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을 거의 마쳐갈 무렵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한 말씀입니다. 이미 모세 자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하나님의 마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비장한 마음으로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둔 백성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미 광야 40년 동안 무수히 많은 말씀을 전했는데, 총정리하면서 재삼 당부한 겁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말씀이 바로 본문 28장입니다. 여기 보면 복을 받는 비결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1] 하늘의 보고 :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의 창고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데, 하늘의 보고가 있음을 언급합니다. 하늘에 창고가 있다는 겁니다. 그 창고에는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복이 가득합니다. 12절.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 ” 이스라엘이 위치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비가 적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비는 모든 복 중의 복입니다. 비가 안 오면 모든 게 끝장입니다. 사람도 힘들고, 농사도 안 되고, 목축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보고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이 가득한데, 그 문을 열 때 비가 오고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약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온갖 좋은 은사와 선물은 바로 복을 의미합니다. 그 모든 게 하나님에게서, 다시 말하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위해 예비하신 복이 얼마나 풍성한지 다윗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31: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축복의 보고에 복을 풍성하게 쌓아두시고 얼마든지 내려주시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2] 하늘 문의 열쇠 : 하나님의 절대 주권
그런데 그 축복의 창고에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려면 열쇠가 필요합니다. 하늘 문의 열쇠입니다. 이 열쇠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만물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12절(상)을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 ” 하나님의 권세로 하늘 문을 열어주신다는 겁니다.
하늘 문이 열리면 그것을 통해 복이 내려옵니다. 이런 원리를 말3:10에서 설명해 줍니다. 이 말씀은 십일조에 관한 말씀이지만, 일반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실 때 어떻게 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늘 문을 열고 복을 부어주시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권세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계3:7~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 ” 1세기 소아시아 7 교회 중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님께서 주신 편지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라고 했나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열쇠’는 왕권을 상징하는 겁니다. 왕적인 권세인데, 아무도 못 말립니다. 열어놓으면 아무도 닫을 수 없고, 닫아놓으면 아무도 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절대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어떤 것인지 잘 설명해 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삼상2:6~7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인생만사 세상만사가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겁니다. 하늘 문을 열면 복이 임하고, 하늘 문을 닫으면 저주가 임합니다.
신명기를 보면, 이런 말씀이 수도 없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신30: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하나님이 인생 앞에 두 갈래 길을 두셨다는 겁니다. 생명이냐 사망이냐, 복이냐 화냐 둘 중의 하나입니다. 신30: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 ” 이 구절도 마찬가지죠. 하늘과 땅을 불러 증거를 삼는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는 뜻입니다. 인생 앞에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화)의 두 갈래 길을 두셨는데, 어느 길로 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할 탓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복을 주실 만하지 않으면, 하늘 문을 닫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본몬 23절~24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23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24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 하늘 문이 단단한 놋으로 막힌다는 것은 비를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땅이 철이 된다는 것은 비가 내리지 않아 심한 가뭄으로 땅이 단단해진 상태를 묘사합니다. 결국 모든 축복이 중지되고 오히려 저주가 임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신명기 28장 전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흔히 28장을 축복장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축복과 저주의 장’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1절~14절에는 축복이 기록되어 있고, 15절~68절에는 저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주에 관한 경고의 말씀이 축복에 비해 거의 4배 정도의 분량입니다. 왜 그럴까요? 한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중에 복을 받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봐 하나님이 오히려 염려되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 번 말씀하십니다. 자녀가 잘못될세라 부모가 자꾸 잔소리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 말씀하시는 겁니다. 비유하자면 ‘하나님의 잔소리’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복을 받는 것은 인간이 할 탓입니다. 하나님이 하늘 문의 열쇠를 갖고 있는데, 그 열쇠를 열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가 바로 하늘 문을 여는 사람입니다. 하늘 문을 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사항이지만, 하나님에 세우신 규칙에 따라 문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어주실 만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겁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열쇠가 맞아야 문이 열리죠. 아무리 육중한 철문이라도 열쇠가 맞으면 철컥하고 열립니다. 하지만 열쇠가 맞지 않으면 절대로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 조건이 바로 순종입니다.
[3] 하늘 문을 여는 사람 : 순종의 사람
그러므로 하늘 문을 여는 사람은 순종의 사람입니다. 순종에는 신앙이 전제됩니다. 신앙이 없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순종은 신앙의 결과입니다. 다시 말하면, 순종은 삶을 통해 나타나는 ‘신앙고백’입니다.
순종은 신앙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겁니다. 본래 하나님과 인간은 소통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고 불통의 관계 즉 원수 관계가 됐습니다. 말하자면, 하늘 문에 닫힌 겁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겁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함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화목한 관계로 회복시켰습니다. 이때 비로소 하늘 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 ” 예수님으로 인해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 소통이 가능해졌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기본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할지라도 순간순간 그리고 계속해서 원활한 소통 관계가 유지되지 않으면 하시라도 하늘 문이 닫힐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원리를 알기에 모세는 거듭거듭 강조합니다. 순종하라! 순종하라! 신28:1~2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말씀을 듣고 지키면 이게 순종입니다. 그러면 복이 임하여 이른다고 했습니다.(come on you ... overtake you -KJV) 흔히 그런 말을 하죠. 복이 붙는다고 ... 복이 따라와서 붙잡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복을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복이 사람을 따라오는 것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면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순종의 명령이 계속 반복됩니다. 13절(하)~14절. “13 ...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청종(聽從)이란 말이 나오는 겁니다. 들을 ‘청’, 따를 ‘종’입니다. 즉 청종은 경청(listening)과 순종(obeying)을 포함합니다.
순종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 어떻게 복을 받을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어불성설이죠. 순종할 때 하늘 문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시지만 결과적으로 순종할 때 하늘 문이 열리므로 순종의 사람이 하늘 문을 여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승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순종입니다. 흔히 IQ가 좋아야 된다고 하죠. 요즘에는 EQ가 좋아야 한다고 하죠. 그런데 정말 좋아야 하는 것은 OQ 즉 순종지수(Obedience Quotient)입니다. 순종지수가 높을수록 그 사람의 인생에 하늘 문이 여립니다. 그럴 때 어떤 복이 주어집니까? 신28:3~13에 구체적인 목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풀세트’(full set)로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Whenever, Wherever, Whatever)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어 주시면 이렇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 열거된 모든 복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이런 겁니다. 3대 축복인데, 풍요의 복과 명예의 복, 그리고 안전의 복입니다. 이 세 가지면 인생을 사는 데 충분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천국 영생과 더불어 이 모든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복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 하늘 문이 열어야 되는데, 순종이 그 비결이라는 겁니다. 흔히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께 기도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제가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나 마나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일단 기본 관계가 형성되어야 부탁을 할 수 있습니다. 부모 자식 관계, 친구 관계 등 ... 그런데 또 한 가지가 요구됩니다. 좋은 관계여야 합니다. 부모 자식 관계라도 뒤틀려 있을 때는 부탁해도 안 들어줍니다. 친구 관계라도 뒤틀려 있으면 안 들어줍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기도 안 하는 것도 문제지만, 순종하지 않는 가운데 기도만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비근한 예를 들어보죠. 어떤 사람이 비만 문제로 고민합니다. 그래서 다이어트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먹고 싶은 대로 실컷 먹어댑니다. 어떻게 될까요? 기도하나 마나입니다. 절제를 해야죠. 절제 명령에 대해 순종하지 않으면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정말 순종의 사람인지 진지하게 점검해 봐야 합니다. 아직 순종의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리 애를 써도 하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하늘 문에 닫혀 있으면 자꾸 꼬입니다.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이럴 때 하는 말입니다. 뒤로 넘어지는데 왜 앞에 있는 코가 깨지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겁니다. 불순종이 우리 인생을 망칩니다. 순종의 사람이 되면 안 되는 것 같은데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하늘 문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되 온전한 순종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아람 장군 나아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병에 걸려 절망 중에 있던 나아만이 엘리사의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로 향합니다. 불원천리 하고 멀리서 찾아온 나아만! 그러나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사환을 시켜 요단강에 가서 7번 몸을 씻으라고 명령합니다. 그 말을 듣고 화가 난 나아만! 다행히 지혜로운 신하가 만류해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기 시작합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 7번째 몸을 씻기 전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자 않습니다. 7번을 마치자 치유되어 마치 어린아이 피부처럼 변화됩니다. 끝까지 순종하지 않으면 순종이 아닙니다. 부분 순종은 불순종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물을 가열할 때 섭씨 99도까지만 하면 아직은 수증기가 될 수 없습니다. 100도까지 가열해야 수증기가 됩니다. 1도 모자라도 안 되는 겁니다.
순종과 불순종이 하늘 문을 열고 닫는 데 직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두 가지 케이스를 소개해 드립니다.
어느 신학생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가족을 데리고 갔는데 경제적으로 너무 힘듭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학비도 비싸고, 생활비도 비쌉니다. 궁리 끝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1년만 일해서 돈을 번 다음에 신학공부를 하겠습니다. 딱 1년만 봐 주세요!” 사실은 기도가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였습니다. 그리고 친지들에게 돈을 빌려서 조그만 햄버거 가게를 냈습니다. 그런데 전 주인이 브리핑을 해 주면서 평일보다 주말, 특히 주일에 장사가 잘 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민이 됐지만 기왕에 나선 것 주일새벽기도회 참석하고 가게를 열기로 했습니다. 출석하는 교회에서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많이 팔아주라고 광고해 주었습니다. 본인도 열심히 하느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어떻게 됐을까요? 쫄딱 망했습니다. 빚만 남았습니다. 하늘 문이 닫히면 인간이 아무리 기를 써도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당시 영국의 육상 선수 에릭 리델의 이야기입니다.(후일 「불의 전차」라는 영화로 제작됨) 그는 100m 달리기 금메달 유망주였습니다. 그런데 스케줄을 보니까 주일에 경기가 열립니다. 잠시 고민했지만, 불참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자 영국민들의 비난이 폭발합니다. 옹졸한 크리스천이라느니, 매국노라느니 난리였습니다. 그러는 그는 묵묵히 감수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400m 달리기 종목에 출전하게 됩니다. 주종목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우승을 꿈도 못 꾸는 겁니다. 그런데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하게 됩니다. 나중에 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처음 200m는 내가 최선을 다해 빨리 달렸다.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심으로 더 빨리 달렸다.” 인간적으로 최악의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 문이 열리니까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진 겁니다. 하늘 문이 열리면 안 될 것 같은데 됩니다.
여러분! 복을 받기를 소원하십니까? 승리하는 인생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법칙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늘 문이 이미 우리를 향하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그 문이 언제 누구에게 열리느냐 이겁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에게 하늘 문을 열어 주십니다. 순종의 사람이 바로 하늘 문을 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순종으로 하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머리
신 28:13-14 / 장경동 목사
명령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복을 주십니다.(신28:1)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합니다.
오늘의 신명기 말씀은 순종할 때 좋은 것이, 불순종할 때 나쁜 것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십니다.(12절) 우리의 손이 복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님은 산울로 둘러 지키십니다. 그러니 머리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1. 머리는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습니다. 내 평생에 꾸어는 줘도, 꾸는 삶은 살지 않으리라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어쩔수 없는 경우는 예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대부분, 습관의 문제입니다. 꾸면 꾸는 대로, 안 꾸면 안 꾸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살아야합니다. 인생은 자세의 문제, 습관의 문제입니다. 내가 머리라는 사실은 꾸지 않을 때 증명이 됩니다. 외상 하지 맙시다. 제가 지하상가에 심방 갔을때, 어떤 불신자가 “교인중에 어떤 분 있죠? 외상값좀 갚으라고 하세요” 라고 말하는 것을 봤습니다.여러분! 삶을 깔끔하게 삽시다. 중요하지도 않은 일 가지고 머리됨을 포기하지 맙시다.결혼한 후에는 부모를 떠나 독립해서,정신적 경제적으로 독립하시기 바랍니다. 장가갔으면, 시집갔으면 그것으로 끝내 십시요.
2. 머리는 머리가 되어야지 꼬리가 되서는 안됩니다. 머리가 검소하면 훌륭해 보입니다. 꼬리가 검소하면 어려워 보입니다. 제가 어떤 청년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렸습니다. 저는 초라했지만 어떤 분이 저를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것은 수백만원씩 쓰면서 콩나물 값 깍지 맙시다. 택시를 타고서 교회 자랑할려면 잔돈을 받지 마세요. 삶을 수준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똑같이 살아도 똑같은 일을 해도 머리가 되야 훌륭합니다. 머리가 안되면 비참합니다.딱한가지를 해도 뿅가는 노래,뽕가는 반찬, 뿅가는 설교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노래에는 감정이 실려야합니다. 찬양은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다시 강조하지만, 인생을 가치있게 살아야 합니다. 물건은 누가 들고 다니냐에 따라 명품이냐 아니냐가 결정됩니다. 똑같은 말도 누가 말하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머리가 말하면 정책이 되고,꼬리가 말하면 의견일 뿐입니다.경찰 청에 설교하러 갔습니다.“국민이 좋아하는 경찰을 넘어서서, 존경받는 경찰이 되십시다.” 청장이 은혜받으니까 초청이 쇄도합니다.
3. 머리는 위에만 있지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밑에 있으면 서럽습니다. 우리가 일본을 미워하는 이유는 우리를 괴롭힌 질이 다른 나라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죄에도 질이 있습니다.악질의 죄를 지으면 안됩니다. 도둑이 여자를 건드리면 그 결과가 너무 참담합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열등감입니다. 한국은 일본에 비하면 좀 못삽니다. 일본보다 더 잘되어야 열등감이 사라집니다. 다른 목사님에게 제 설교 테입갔다 주지 마세요. 제가 미움 받습니다.
교회에서는 교인들은 늘 오고 갑니다.이럴 때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머리인 사람은 “하나가 가니까 하나님이 채워줬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교인하나 나가면 못견디는 사람은 꼬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욕 얻어먹는 사람은 대통령입니다. 그래도 따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머리입니다.
제가 입을 와이샤쓰가 없을때, 먹을게 없을때, 제가 지금 잘나가니까 견딜수있지, 제가 먹고 노는 사람이라면 열등감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똑같이 심방을 안가도 머리는 “바쁘시니까”라고 말하지만, 꼬리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신경도 안쓰셔”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머리가 되야 합니다. 한편,어려울때 일수록 더 잘해 주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머리가 될까요? 말씀대로 순종해서 살면 됩니다.그러면, 죄 안짓고 삽니다. 게으르지 않게 살게 됩니다. 말씀대로 살면 일을 안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의 내용은 무궁 무진합니다. 말씀대로 살면 진짜 잘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 잘하는 것을 인정합시다. 부자를 인정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 못됩니다. 상관을 욕하고서는 진급 못합니다. 좋은 것을 좋게 봐주십시다.
현실을 인정하고 더욱 노력합시다. 어제 축구하는데 “끝까지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해도 다 머리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노력은 해야합니다. 노력을 했는데도 안 되면 그것을 만족해하며 삽시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은 최선이었던가? ”생각해보고 후회없는 최선을 다합시다. 노력도 안 해보고 사는 사람에게 세상은 너무 비참합니다. 원하기는, 머리됨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순종하는 자의 복
신 28:9-12 / 이규왕 목사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며 그 행복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모두가 다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단막극처럼 짧은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만일 그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인간들에게 종교는 필요 없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옛날에 비하면 오늘에 서민들이 왕보다 더 잘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학이 발달하고 경제가 성장하고 사람들이 잘먹고, 잘살고, 생활이 편리해졌는데도 이상한 것은 여전히 사람들이 재물을 탐하고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틈새를 비집고 수많은 무속인들이 일간지에 그렇게 많은 광고비를 들여가면서 매일 신문에 도배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잘먹고 잘산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인간은 행복하지 못하며 어떤 절대자를 의지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행복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며, 누가 가져다 줄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1. 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
어린아이의 행복은 그 아이 자신이 아니라 그 부모의 능력에 따라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립의 능력이 없는 청소년이 부모의 슬하에서 사는 것을 부자유하게 여기고 가출을 해버린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며,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자초하는 것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왜 불신앙과 불순종이 불행을 자초하는 일인가 하는 것은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를 보십시오. 어린아이가 스스로 자급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오늘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습니까?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단 한 순간도 호흡을 중단할 수 없고 매끼니 땅과 바다에서 나는 식물을 먹어야 하고 오염되지 않은 물을 마셔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공기와 물과 대지는 인간의 노력의 산물인가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이 공급해주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복은 인간 자신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그것을 관리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삼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복의 근원이신 그 하나님과 복을 필요로 하는 나와의 관계를 이어주는 전선과 수도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잘것없는 행위가 아니라 바로 이 믿음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바로 지식이나 소유의 많고 적음이나 지위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행복은 오직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공급되어진다는 것을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시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이 무엇을 하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해 놓으셨으며,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시는지를 깨닫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의 명령에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일인 것입니다.
만일 정말 내가 믿는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만드신 창조주이시며, 나를 예수님을 믿어 그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셨다는 사실이 믿어진다면 그것은 나의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잊지 말고 어떤 환경에서도 원망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그 상황은 항상 변할 수 있지만 그 상황에 처한 나의 영적 신분은 여전히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고한 믿음 때문에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행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믿음의 사람의 신앙 고백을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그 대표적인 사람이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로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왕이 된 다윗입니다.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신약에서 그 대표적인 사람은 바울이며, 그는 예수님의 사도가 된 이후 부귀영화대신에 수많은 시련과 핍박을 경험하면서도 그의 내면에는 참 행복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고후 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를 믿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과 행복은 물질의 많고 적음이나 지위의 상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 신앙의 내면화에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원한다면 그것은 물질이나 지위를 탐하지 말고 먼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절대로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고 흔들림이 확고하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시 34: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 34: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불행을 가져다주는 근본 원인인 불신앙
세상의 모든 일은 마치 거미줄과 같아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의 어떤 결과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러한 결과를 가져다 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좋은 결과는 누군가 지난 날 좋은 원인을 만들었기 때문에 일어난 당연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그 결과를 거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어떤 원인을 계속해서 씨뿌리고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인간들이 안고 있는 죄와 고통과 죽음의 원인은 무엇 때문일까요?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 원인을 전생이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 전생의 원인은 또 무엇일까요?
그렇게 논리를 전개하게 되면 끝이 없는 말장난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문제에 대해서 오늘의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인류의 조상인 아담으로부터 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 아담이 지은 죄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일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아담의 자손인 인류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는 죄인들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고, 남을 사랑하는 대신 자신만을 사랑하고, 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악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잘못된 결과를 계속해서 대물림하고 있는 인간에게 아무리 교육이나 도덕이나 양심이나 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남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고 가르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한낱 이론에 불과할 뿐 실제의 삶에서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인간들이 안고 있는 불행은 돈이 없기 때문이고, 나이가 많아지기 때문이고, 몸이 쇠약해지기 때문이니 돈만 벌고 불노초와 같은 신물질을 발견하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으며 그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리 돈이 많고 과학이 발달하고 경제가 성장하고 인간이 백수를 누리며 장수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세상은 악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결과를 물리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노력보다는 그러한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 잘못된 원인을 먼저 바르게 고치는 일이 최우선의 방법인 것입니다.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인간이 자신도 잘못된 결과인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된 죄를 바르게 고쳐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을 불행에서 건져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입장입니다. 그것은 타종교에 대한 배타심에서 나오는 독설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정직한 현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인간의 선행이나 교육이나 종교적인 노력으로 그 잘못된 원인을 제거하고 인간이 원하는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가르친다면 그것이 바로 거짓된 사기극임을 알고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인간에게 오늘의 불행을 가져다 준 잘못된 원인을 바로 고쳐 우리가 그렇게도 원하는 행복을 매일 매일의 삶에서 거두며 살아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3, 복 받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 복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범한 아담 때문이었다면 이제 그 불행을 제거하는 방법은 또 다른 아담이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하여 죄를 대속 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인간과 똑같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대신 순종의 십자가를 지시고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지 못한 모든 죄악을 대신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롬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구태여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마땅히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아니한 인류의 죄를 인간의 육신으로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오늘의 불행의 원인인 인류의 조상 아담이 뿌려 놓은 잘못된 원인인 불순종을 순종으로 바꾸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은 받았지만 좀더 행복해지려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복종하셨던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본 보여주시기 위해서 지상에서 삼십 삼 년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는 축복은 값없이 받았지만 이제부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책임이 주어졌으며 그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할 때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순종의 삶까지 본받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우리 인간들이 순종해야 할 두 가지 명령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 무엇을 하라는 긍정적인 말씀과 또 하나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명령들을 하시는 까닭은 하나님 당신 자신을 위해서 내리시는 이기적인 명령이 아니라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공동체의 평화와 질서를 위해서 하시는 명령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은 갈수록 자기 중심의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공동체보다 자기 유익이나 기분만을 앞세우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우러나오지 않으면 잘 따르려고 하지 않는 개인주의가 갈수록 만연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그렇게 할수록 사회는 무질서해지고 정치나 경제의 안정과 회복은 더욱 어려워져만 가는 근본 원인 중에 하나가 바로 가정이나 학교나 사회나 국가라는 공동체의 유익보다는 오로지 개인의 이익에만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현상이 바로 모든 사람들이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세상 풍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문화에 익숙해져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나이가 젊으면 젊을수록 점차 개인주의가 강하게 채색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삶의 중심 축이 하나님, 교회, 성경이 아닌 자기 중심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이해되지 않고 자기 기분에 맞지 아니하면 순종하려고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우리가 그러한 유혹을 뿌리치고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성경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개인의 주권이나 이익을 무시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희생물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개개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영적인 법과 질서를 제정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 28: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신 28:10)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왜 예수를 믿으면서도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믿지만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 론
우리는 지난 한 달 동안 매주일 2002년 우리 교회가 어느 곳을 향해 가야만 하는지에 대한 신앙의 목표를 설정하고 구체적으로 한 가지씩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 각자가 실천하고 이행해야만 하는 과제들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매 주일 교회에 나와 그 말씀들을 귀기울여 듣고 마음에 공감대를 이루는 일이 가장 우선적인 과제이지만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 듣고 믿은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실천하는 순종이 동반될 때 비로소 행복의 꽃과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행복으로 가득한 2002년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읽고 듣고 깨달은 것처럼
1)가정에 문제는 다 나름대로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가족들간에 서로 관심과 신뢰와 나눔을 실천에 옮기는 삶을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가정에서 그것을 실천할 때 사랑이 가득한 가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2) 생명력을 가진 셀은 반드시 성장하게 되며, 그 후에 성숙해져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정말 살아있는 믿음을 가졌다면 금년에는 꼭 한 사람의 불신자를 교회로 인도하고 한 사람의 새신자를 사랑으로 양육하여 섬기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 꼭 한 사람 전도, 한 사람 양육을 실천해야 합니다.
3)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시간적으로 주일을 드리고, 물질적으로는 십일조와 감사를 온전히 드리는 교회가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교회가 갑절로 부흥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4)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그 무슨 일보다 중요한 것은 치밀한 조직이나 과감한 추진력이나 포기할 줄 모르는 신념도 필요하지만 그 보다 더 최우선되어져야 할 것은 기도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자들이 모인 가정과 교회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삼상 15:22)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말씀을 듣고 삶에 적용하여 실천하므로 정말 우리 성도들의 가정 가정이 사랑이 가득하며 구역마다 새신자 전도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나며, 모이는 시간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가 드려지며, 온전한 주일성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며, 모여서 뜨겁게 기도하는 운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이 아니라 먼저 나부터 먼저 실천에 옮기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여러 곳에 약속하신 축복은 믿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오늘 내가 순종자가 되어 그 복을 자손 대대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 28: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치우치지 않아야 복을 받습니다
신 28:7-14 / 김삼환 목사
금번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께서 돌아가시고 미국 정부는 국장으로 치르게 되었습니다. 전 국민이 애 도할 뿐만 아니라 온 미국의 국민들이 깊은 애도와 슬픔 속에 있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를 끝까지 이렇게 존경하고 귀히 여기는 민족이 참 부럽습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이틀 동안 전깃불도 끄면서 레이건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대통령 무덤의 묘비는 간단하게 적혀있습니다. 레이 건 대통령의 평생의 신조가 되는 ‘옳은 일은 승리 한다’ 이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좋은 신앙인 의 고백입니까! 옳은 일을 행해야 승리합니다. 옳은 일을 행하다가 안 되는 일도 많고, 고난도 많고, 시험도 많지만 그러나 반드시 옳은 일은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의가 이깁니다. 잠시 보면 어두움 이 이기고, 잠시 보면 죄악이 이기고 온갖 불의를 행하는 사람도 행복하게 살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 니다. 옳은 자 가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믿음의 생활을 할 때 그런 일에 당황하고 낙심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가? 계시다면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고 정직하게 사는 데 내가 왜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느냐? 그러나 멋대로 살고 온갖 죄악을 즐기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온갖 불의한 사람은 왜 저렇게 잘되느냐? 하는 거예요. 이것은 여러분의 고민만은 아닙니다. 성경의 많은 선지자들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박국 1장 13절에 보면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 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 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 왜 그렇게 잠잠하십니까? 하나님이 계시 면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 12장 1절에도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 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 은 무슨 연고니이까” 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내가 믿습니다. 나는 압니다. 그 러나 악한 자가 잘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욥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또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합니까? 씨가 그들의 앞에서 그들과 함께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 위에 임하지 아니하 며 그 수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그 암소는 새끼를 낳고 낙태하지 않는구나. 그들은 아이들 을 내어 보냄이 양떼 같고 그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그들이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 며 그 날을 형통하게 지냅니다.
하나님, 왜 그렇습니까? 악한 자의 아이들은 집에서도 춤추며 양떼와 같이 생육하고 번성합니다. 동물도 새끼를 잘 낳고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짐승이 새끼를 낳아도 쌍둥 이를 낳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하나님, 왜 그렇습니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렇지 않습니다. 악인이 잘 됩니다. 그러나 의인이 잘 됩니다. 악한 자가 이깁니다. 그러나 의인이 이깁 니다. 어두움이 이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입니다. 빛이 이기는 것입니다. 진리가 이기는 것입니 다. 정의가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 다. 악인의 이김은 잠깐이라고 했습니다. 악인의 웃음은 잠깐이라고 했습니다. 악인의 영광은 잠깐입 니다. 시편 129편 6절에 보면 ‘지붕 위의 풀과 같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께서 그저께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영화를 보셨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만 명 정도 오셔서 극장 에서 가져다 준 영화를 보셨습니다. 얼마나 많이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셨는지요? 예수님이 잠깐 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졌습니다. 가룟 유다가 이겼습니다. 빌라도가 이겼습니다. 헤롯이 이기 고 제사장들이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긴 것이 아닙니다. 잠깐 허용한 것입니다. 잠깐 무성한 것입니다. 그것을 이겼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의가 이깁니다. 진리가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 님의 말씀이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당황해서 는 안 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고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잠깐 이겼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이겼습니다. 헤롯 왕이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입니다. 모세가 이긴 것입니다. 하만 이 이겼습니다. 그러나 참 승리는 모르드개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아들이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해서 제가 졸업식에 참석했습니다. 그 졸업식이 너무나 세계적이라고 해서 가 보았더 니 정말 졸업식이 참 엄숙하고 수많은 군중이 참여하고 세계적이었습니다. 저는 많은 대학에 이사장 으로 있지만 우리나라 대학은 졸업식이 난장판이고 아예 졸업식장에는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졸업식 장에 입추의 여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한 집에 아예 티켓을 몇 장 밖에 안 줍니다.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총장께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참 감동적인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무슨 내용이냐? 하면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내용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는 붉은 용이 등장합니다. 이 붉 은 용은 사탄입니다. 붉은 용은 머리가 일곱이라고 했습니다. 머리는 무엇을 말합니까? 권력을 말합 니다. 뿔이 몇이라고 했습니까? 뿔이 열 개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뿔과 머리를 가진 이 큰 용이 한 자그마한 여자가 낳은 어린아이를 삼키려고 합니다. 물을 강같이 토하고 어떻게 하더라도 이 아이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 아이가 누구입니까? 이 여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여자가 낳은 하나님 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오늘 교회를 말합니다. 또 유대인을 말합니다. 때에 따라 바벨론 이, 애굽이, 블레셋이, 앗수르가, 로마가 어마어마한 세력으로 이 열 뿔을 가지고 붉은 용이 일곱 머리 를 가지고 모든 힘을 다 동원해서 넘어뜨리려 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살아났 습니다. 정말 이긴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때에 따라 우리 성도들이 진리를 지키고 말씀을 따 라 가고 의를 행할 때, 연약해지고 코너에 몰리고 큰 힘 앞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를 때가 많이 있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자가 낳은 아이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총장님의 졸업하는 학생 들, 전 세계에서 지도자가 될 학생들을 향해서 박사, 석사 모든 출신들을 향하여 주는 말씀이 이것이 었습니다. 여러분, 용이 이깁니다. 열 뿔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걸 믿으라는 거예요. 여러분의 가는 길에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여러분은 용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최후 승리를 얻기 바란다고 하는 이 메시지는 정말 살아 있는 메시지 였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물질이 아니고, 취직이 아니고, 출세가 아니고, 진리 를 따라 살아가고 참 승리, 참 가치 있는 길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고 일생을 살아가는 이런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붉은 용의 길을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불평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시편 37편 1절에는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여호와 앞에서 참아 기다리라 그 리하면 여호와께서 너를 때가 되면 높이시고 존귀하게 하리라.” 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왜 우리는 행 악자를 봅니까? 저도 어려서부터 많이 보았습니다. 밤낮으로 화투만 치고 싸움하는데도 잘 살고 여자 를 다섯, 여섯 거느리고 야! 희한하다, 이상하다, 온갖 거짓말하고 깡패 짓 하고도 잘 사는 사람이 있 어요. 술집을 하고, 온갖 불의한 일, 고리대금을 해서 남을 어렵게 하는데도 잘 살고 애들 좋은 옷 입 고 날마다 고기 뜯어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잠깐입니다. 지붕 위의 풀과 같습니다. 앞만 보면 안 됩니다. 지금만 보면 안 됩니다. 물질만 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멀리 바라보아야 합니다. 교 회에 왜 나옵니까? 멀리 보려고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에 왜 나오십니까? 진리를 따라 살려고 나오는 것이지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은 능력의 손입니 다. 하나님의 손이 큰 손입니다. 어떤 인간의 지식과 인간의 능력과 힘으로도 따를 수 없는 큰 축복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고 진리 안에 거하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고 오늘 하나님께서 하늘 보고를 열어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카네기가 어렸 을 때 시장에 갔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따라 갔는데 그 많은 것 가운데 얘가 앵두 파는 곳 앞에 가서 는 그만 앵두가 먹고 싶어서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엄마가 가자고 해도 안 가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 니는 어떻게 또 그것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지 끝까지 안 사주는 거예요. 그런데도 얘는 안 가 고 엄마가 다른데 가서 시장보고 오는데도 거기 앉아서 침을 삼키는 거예요. 계속. 그래서 할아버지 가 너무 아이가 앵두를 좋아하니까 야, 너 그렇게 먹고 싶냐? 한 줌 집어 가라. 그래도 얘가 그냥 계 속 서 있는 거예요. 안 가고 계속 거기 서 있는 거예요. 어머니가 얘, 집어라 할아버지가 가져가라고 하지 않니? 해도 얘가 그대로 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자꾸 권해도 안 하니까 할아버지가 야 받아라. 하고 한 줌 가져다가 얘 옷에다가 탁 싸 주었어요. 그래서 얘는 어머니 가방에 넣어 가지고 오면서 앵 두를 먹는 거예요. 그래서 집에 와서 엄마가 물었어요. 야, 한 줌 집으라고 하는데 왜 안 집었냐? 그러 니까 얘가 엄마, 내 손이 작잖아. 할아버지 손이 크다는 거예요. 내가 집어봐야 다섯 개 밖에 더 집겠 나? 기다리는 거예요. 할아버지가 줄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여러분, 조급하게 살면 항상 내 손이 가는 거예요. 참고 기다리면 큰 손이 오는 날이 와요. 크게 성공하는 사람은 다 오래참고 기다린 사람 이지 먹을 것 있다고, 기회 왔다고 다 삼키고 다 달려들고 다 달려들면 절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모 든 성공은 한 길로 꾸준하게 끊임없이 낙심하지 않고 가는 자가 성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손 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카네기는 우리 재혁이 같이 지혜로워요. 우리 외손자 재혁이는 얼마나 지혜로 운지 몰라요. 총명해요. 나를 갖고 놀 때가 많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살 아가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 1장 7절에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 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고 했습니 다. 히브리서 10장 38절, 39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 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 을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이 세상에 성공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다. 잘 살기만 하면 되 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고 말씀대로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치우 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공은 잠깐인 것입니다. 축복은 잠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만이 영원 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 때 얼마나 어려움이 왔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욥은 고난을 엄청나게 당해도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치우치지 않 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나의 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우 리의 영광은 잠깐인 것입니다. 저도 많은 분들을 만났어요. 출세를 위하여 성공을 위하여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사람, 후회합니다. 지나고 보면 그것 때문에 행복한 것도 아니고, 죽고 사는 것도 아니 고, 가정이 잘 되고 안 되는 것도 아닌데 그것 하나, 변하는 것 때문에 왔다 갔다 하는 것 때문에 그 이 미지는 너무나 낮아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억만 금을 주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내 자리를 지킬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믿어 주 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귀가 가벼워서 이 말 저 말 다 듣는 사람, 항상 변하는 사람, 친구를 사귀어 도 변하고, 일을 해도 변하고, 무엇을 하든지 잘 변하는 사람은 그 이미지 하나로 인해 자기가 어떤 영 광의 옷을 갈아입어도 그 삶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치우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한 길로 가시기를 주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27장에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 님이 제일 미워하는 게 무엇입니까? 꼬불꼬불한 삶이에요. 용이, 뱀이 어떻게 가지요? 꼬불꼬불하지 않습니까? 한 길로 가지 않습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삶입니다. 저 는 미국의 대통령 가운데 한 분을 존경합니다. 같이 식사도 하고 이 분을 만나서 같이 여러 시간을 이 야기를 했습니다. 작년에는 이 분이 저에게 그 가족하고 우리 가족하고 한 주간 같이 휴가를 갔으면 좋겠다고 초청을 했어요. 가고 싶은데 내가 영어를 잘 못해 가지고 한 주일 동안 어떻게 고생을 하겠 나? 그래서 바쁘다고 하고 안 갔어요. 이 분은 정말 한 길로 잘 가는 분이에요. 내가 왜 이 분을 존경 하느냐? 대통령 하신 분이어서 존경하는 게 아니에요. 한 길로 가는 거예요. 대통령 유세 때도, 대통 령 유세를 하면 일요일이 제일 관중 동원을 많이 하고, 유세가 제일 좋은데 이 분은 집사이니까 주일 을 꼭 지키는 거예요. 교회에 가서 교사하고 지키는 거예요. 여러분, 성공을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 는 삶은 좋지 않습니다. 그 다음 대통령이 누가 한 분이 되었는데 이 분은 첫 번째 우리가 보면 알잖아 요. 무엇을 발표하느냐? 동성연애자를 군에 입대시키고 해제시키는 거예요. 동성연애자의 손을 들어 주는 거예요. 미국이, 청교도 정신을 가진 기독교 국가가 그게 말이 됩니까? 동성연애자가 미국에 유 권자만 8백만이라고 합니다. 그 8백만을 얻으려고 그런 길을 가서 되겠습니까? 나는 이 분이 누구라 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안타까웠어요. 그런데 대통령 되시고 나서 계속 스캔들에 성적인 문제에 한 번 도 옷을 못 벗더라고요. 얼마나 부끄러움을 당하고, 가장 도덕성이 있어야 하는데 모두가 다 민주주 의 시민들로서 의식이 높은데 아, 수단 방법 안 가리는구나! 무엇이든 정치든 사업이든 행복이든 아 니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데, 사람 팔아서 성공하는 일 없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사람이 되어야지요. 진리를 따라가고 치우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선한 길로 가고, 양심 을 속이지 말고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물려받은 이 신앙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잘 살려고 하면 한 사람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잘 되는데 맞추면 안 됩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말 씀이냐? 뜻이냐? 하나님의 계명이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늘 조용히 자신을 하 나님 앞에 나를 비추어보고 반성하는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면 롱런 합니다. 참 좋습니다. 이 세상은 내 위에 아무도 없지만 교회에 오면 나보다 높은 분이 계시니까 그 앞에서 나를 비추어 보기도 하고 바라보기도 하니까 참 좋은 것입니다. 어른 밑에 있으니까 겸손해져서 좋고, 조심 하니까 좋고, 긴장하며 살아가니까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 제가 교도소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감옥 에 있는 분들이 나오면 백발백중 재범을 하고 끊임없이 범죄를 반복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 까? 딱 하나입니다. 이 분들이 감옥에서 칠 년, 팔 년, 십 년, 이십 년 있다가 나오면 어떤 생각을 하느 냐? 아 빨리 자동차를 타야지, 빨리 성공해야지, 내가 저 곳에서 한 번도 먹지 못한 것 빨리 먹어야 지, 저 옷 빨리 입어야지, 나도 저 사람들처럼 빨리 예쁜 색시 거느리고 살아야지, 이 마음을 갖는 거 예요. 거기서 하나도 못했으니까 그래서 빨리 성공하는 길이 한 탕 하는 길 밖에 어디 있어요? 주먹 을 휘두르는 길로 가든지 큰 문제로 항상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냥 정직하게 진실하게 살아야 되 겠다는 이런 마음을 가지면 다 성공하는데 행복해야지 성공해야지 출세해야지 차 사야지 아파트 사야 지 예쁜 아가씨하고 살아야지 여기에 맞추면 백발백중 실패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 까? 빨리 성공해야지? 여러분, 꼬불꼬불하게 살 수 밖에 없지요. 모든 것을 버리고 살 수 밖에 없는 거 예요. 양심도 없고 진실도 없는 것이지요. 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 나님은 신실하게 그의 약속을 믿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나아가는 자를 돌보아 주십니 다. 유명한 아프리카 개척의 선교사로서 가장 존경받는 리빙스턴이 16년 만에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대 대적인 환영을 하고 많은 기자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16년을 어떻게 지냈습니까? 제가 작년에 아프리카에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리빙스턴이 선교했던 바로 그 자리에 갔었습니다. 빅토리 아 폭포, 바로 리빙스턴이 발견한 곳입니다. 리빙스턴의 박물관에도 갔습니다. 다리를 사자가 물어서 뼈가 망가진 것이 그대로 뼈가 거기 있습니다. 사자의 위험, 전염병의 위험, 흑인들의 위험, 불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끊임없이 리빙스턴을 죽이려고 했지만, 16년을 어떻게 그 정글에서 참을 수 있었느냐? 하는 거예요. 하나입니다. 내가 참았던 것은, 모든 것을 이겼던 것은 마태복음 28장 20 절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을 믿었다는 거예요. 믿어 야 합니다. 주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치우치지 않습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목회를 40년 동 안 오늘날 별의별 유혹이 있어도 다른 길로 안 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잘 하는 사람은 치우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가 아무리 잘 되는 길이 있어도 말씀을 떠난 길 은 안 갈 것입니다. 개척하고 그런 유혹도 많이 받았어요. 우리는 성장에 맞추지 않습니다. 그랬을 것 같으면 저희 교회가 아마 이보다 열 배나 더 큰 교회를 지을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 님의 뜻대로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아갈 것입니다. 좋은 날이 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다들 공부하는데 뭐 내가 공부한다고 되냐? 아닙니다. 공부를 성실히 하 는 사람 좋은 날이 옵니다. 기도 안 하는 사람도 잘 되는데 뭐 기도한다고 되냐? 안 하는 사람도 잘 되 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더 잘 됩니다. 안 하는 사람은 잠깐 영광이 오고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영광이 옵니다. 주일을 지키나 안 지키나 똑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지키는 자가 잘 됩니다. 악을 행하는 자가 잘 됩니다. 온갖 죄를 짓는 사람, 정치인들하고 줄을 더 잘 타고요, 높은 사람 더 많이 알 고요, 잘 되는 것 확실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 무덤에 세울 수 있는 것, 의를 따라 믿음을 따라 옳은 길 가는 사람이 잘 되는 것이지 그 사람 잘 되는 것 아닙니다. 마지막에 야구 9 회 마지막에는 역전이 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들, 진리를 따라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 기를 바랍니다. 치우치지 말고 말씀대로 살아가세요. 오늘 본문의 말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말씀이에요. 같이 한 번 보겠습니다. 신명기 28장 을 함께 보겠습니다. 14절입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 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이와 같은 이 위의 모든 축복이 누구 에게 오느냐? 치우치지 않는 자에게 오는 것입니다. 이 축복이 어디에서 옵니까? 다섯 가지입니다. 7 절 첫째 복은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 들이 한 길로 너를 치려 들어 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치우치지 아니하는 사람 내가 보호해 주겠다는 겁니다. 안전하게 해 주겠다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의 삶의 대적이 많습니다. 수많 은 대적이 잘 될수록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이런 악한 세력이 너무 많습니다. 누가 다 막아 줄 것입니 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줄 것입니다. 두 번째는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 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손으로 하는 일에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모든 하는 일들이, 행하는 일들 이 잘 될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면 손을 내어 밀어 악수하고 일을 할 때는 손으로 일을 하고 공부할 때 는 손으로 글을 쓰듯이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손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손이 복을 받아 손이 닿 는 곳마다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내와 손을 잡으면 사랑의 손이 되고 행복한 손이 되고 자녀에게 손을 대면 양육의 손이 되고 사업을 하면 번영의 손이 되고 여러분의 손이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손잡 는 사람마다 인간관계가 잘 되어서 사랑과 신뢰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복이 무엇입 니까? 11절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리라” 그랬습니다. 자손의 복과 그리고 토지 물질의 복 을 말합니다. 육축의 새끼 토지 소산이라는 말은 물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축복을 주 십니다. 확실한 것은 오늘 지상에 있는 인류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 하고 말씀을 지켜 행하는 민족 가난한 민족이 없고 다 발전하고 복을 받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땅 에도 이런 축복이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계속 이어질 줄로 믿습니다. 네 번째 축복은 12절입니다. “여 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을 하 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이지 아니하며”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복의 근원이 되어 남 에게 줄지언정 꾸러 다니지 아니하는, 남에게 좋은 것을 나누어주고 유익을 주는 이런 삶이 되시기 바 랍니다. 가난한 민족은 온 세계에 그 나라의 수상도 대통령도 얻으러 다니고 축복 받은 나라는 가만 히 있어도 온 세계가 와서 달라고 하는 것처럼 가난한 집은 밤늦도록 남의 집 집 다니면서 돈 빌리는 것처럼 여러분의 가정은 남에게 빌리러 다니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치우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어야 이 축복이 오는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 째, 13절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 섯 번 째 복이 뭐냐? 머리의 복입니다. 사람을 높은 자리에 올리겠다 그 말이에요. 여러분이 이런 명 예와 지위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마시고 누가 뭐라 해도 한 길로 가고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 쉬운 일 아닙니다. 양심대로 사는 것, 거짓되지 않게 살아가는 것, 사기하지 않고 적당하게 살지 않 는 것 쉬운 일이 아닌 것 확실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살아야 잘 됩니다. 그렇게 살아야 가치가 있습니다. 훌륭한 삶, 바로 치우치지 않는 삶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성전에 나와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 분 한 분에게 복을 주시되 우리의 남은 생애 치우치지 않게 하여 주시고 말씀 따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한 평생 살아가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신 28:1-6 / 문기태 목사
모든 사람들이 복받기를 원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의 개념을 다섯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는 장수하는 것, 두번째는 부자로 사는 것, 세번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것, 네번째는 평생 사는 동안 근심없이 마음의 평강을 누리는 것, 마지막으로 죽을 때 편안하게 죽는 것, 이것을 오복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복 받고 잘 사는 것에 촛점을 맞춘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복 받고 잘 사는 것을 말하면 무조건 기복신앙으로 몰아 유치하게 생각하는 것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 살고 복 받는 것을 유치하게 생각하며 신앙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적인 복을 죄악시하는 영지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성경은 복에 대하여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복에 대해 반복하여 약속해 줍니다. 1절에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겠다'하시며 높아짐의 복을 말씀합니다. 2절에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할 것'이라며 만복을 약속합니다. 3절에는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라며 형통의 복을 약속하십니다. 4절에는 '네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가축의 새끼까지 복을 받을 것'이라며 소유의 복을 말씀하십니다. 5절에는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라며 잘먹고 잘사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6절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며 평강의 복을 말씀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오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자에게 이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말씀에 귀를 기울여 잘 듣고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은혜받은 말씀에 즉각 순종하여 큰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하면 우리가 이렇게 온갖 좋은 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며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좋은 복을 풍성하게 부어주실까요?
1. 말씀을 청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2절).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어요. 설교를 제대로 들으면 한편의 설교 때문이라도 여러분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편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 삶이 변화되고 운명이 달라졌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설교들을 때마다 그런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설교를 어떻게 들으면 그런 역사가 일어날까요?
설교를 듣기 위해 준비가 필요합니다. 준비한 만큼 은혜를 받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이 설교를 들을 때 준비 되었다면 하나님은 한편의 설교를 가지고도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주십니다.
여러분 설교로 은혜 받고 성공하기 원하신다면 설교를 듣는데 있어서 장애물이 되는 요소들을 다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의심하는 불신앙의 태도를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준비는 무엇입니까? 열린 마음으로 기대하는 것이지요. 간절히 기대하고 사모하는 거예요. 우리 가운데에서 역사하시고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신다고 하셨어요. 정말 하나님께서 주의 종의 말씀을 통해서 나의 가장 깊은 고민을 해결 해 주실 것이다. 나를 만나주실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앞길을 인도 해 주실 것이다. 내 가정에 사업에 내가 사는 삶의 모든 세세한 문제를 우리 하나님께 거기에 대한 해답을 오늘 반드시 나에게 보여 주실 것이다. 이렇게 여러분이 기대하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기적이 일어 날줄 믿습니다.
오랄 로고스 목사님이 쓴 책 중에 '익스펙트 미라클'이란 베스트셀러가 있어요. 한 마디로 '기적을 기대하라. 기적은 기대하는 자에게 나타난다'. 오늘 여러분이 설교 들을 때 정말 이 설교 한편으로 '내 삶이 완전히 달라진다.' 하고 믿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아 주실 것이다.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다. 내 고민이 해결될 것이다. 나의 모든 질병이 치료될 것이다. 나의 앞길의 어두움이 걷힐것이다. 나의 꿈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 이렇게 여러분이 기대한 만큼 하나님께서는 복을 허락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준비가 다 됐다면 실제로 말씀을 듣는 그 자리에서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꼭 은혜 받겠다고 결심하면 졸리지 않습니다. 이왕 설교들을 때 그 시간만은 집중을 해야 됩니다. 경청의 자세를 가지고 들을 때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 하세요.
설교의 황제라는 스펄전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했어요. 나는 세계 여러 나라의 형편없는 설교를 들었다. 그러나 유익을 가지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한 유익 되지 않는 설교는 없었다. 형편없는 설교에서도 그 설교를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고 경청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거죠.
신학교 갓나온 병아리 전도사가 처음 설교를 하는데 도대체 앞뒤가 안 맞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모두가 모르고 심지어 설교하는 그 분도 무슨 말인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설교에서 경청하는 자세로 들으면 희안하게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거예요. 너는 저렇게 설교하지 말지어다 이런 음성이 들리는 거예요.
경청하기 시작하면 희안 하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메세지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고 하나님의 얼굴은 보여지고 하나님의 숨결은 느껴질 줄로 믿습니다.
그러려면 설교자의 얼굴을 쳐다봐야 돼요. 눈을 맞춰야 돼요. 그리고 아멘으로 화답해야 돼요. 겉으로 안되면 속으로 아멘 그렇습니다. 그렇게 됩니다. 맞장구를 쳐주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계속 좋은 말씀으로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꽉 입을 닫고 마음을 닫고 있으면은 아무리 좋은 말씀도 튕겨 나가는 거예요. 팍팍 꽃혀야 하는데 튕겨 나가요.
좋은 교회는 말씀을 스폰지로 빨아들이듯이 빨아들이는 교회예요. 그런 교회는 목회자가 부족하고 준비가 안됐어도 거기서 성령께서 도와주셔서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 하는 임재 체험이 예배 때마다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잘 들으면 복을 받습니다.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 잘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청종하면 모든 복을 다 받습니다.
2.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1절)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복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내 안에 모셔서 말씀하시는 것을 귀기울여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삶 전체에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장래에 기업으로 받을 땅에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께 순종하므로 나아갔습니다. 순종하여 큰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으로 인해 큰 복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갔습니다.
복있는 사람이 되면 나 때문에 다른 사람도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복없는 사람이 되면 다른 사람도 복이 없습니다. 복있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면 온 가족이 복을 받습니다. 복없는 사람과 동업하면 함께 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있는 사람과 같이 다녀야 됩니다.
복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감옥에 가면 감옥이 천국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복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복을 부활시켯습니다. 처음 사람 아담은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복을 다 상실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복을 주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순종은 축복을 부르는 나팔입니다. 순종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달아 순종하여 믿으면 하나님이 복주십니다. 땅에서 부요하고, 지도자가 되고, 그리고 존경받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 순종은 신앙고백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하고 싶어집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하여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믿음이 잇으면 순종하여 예배하고 싶어집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하여 헌신하고 싶어집니다.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께 마음껏 표현하고 하나님께 인정받아 큰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19세기 아프리카에서 선교했던 Henry Richards선교사의 간증이 감동적입니다. 그는 토인들에게 누가복음을 가르쳤습니다. 매일 10절씩 토인들이 사용하는 본토어로 번역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6장 30절이 되었습니다.『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헨리 선교사는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번역하여 가르치지 않고 뛰어넘어갔습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가르치면 무심한 토인들이 자기의 소유를 다 가져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마침내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번역하여 가르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토인들은 즉시 선교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물품들을 달라고 하기에 기꺼이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 토인들은 선교사의 순수한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 다시 모든 물건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아 선교가 쉬워졌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도 순종을 취사선택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절대신앙이 필요합니다.
순종에는 세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첫째, 무서워서 순종하는 노예 순종입니다. 벌을 받을까 해서 억지로 하는 순종입니다. 둘째, 보상 때문에 하는 순종입니다. 이것은 대가를 기대하고 보상을 받기 위해서 하는 순종입니다. 셋째, 자원적 순종입니다. 이것은 기쁜 마음이나,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서 하는 순종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의 순종은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성 프랜체스코가 농사 일을 하고 있는데 젊은 청년 두 명이 수도사가 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마침 프랜체스코가 배추를 심고 있었기 때문에 두 청년에게 모종을 주면서 "이 배추를 심되 거꾸로 심어라. 뿌리를 하늘로 하고 줄기를 땅으로 하여 심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지망생은 "선생님이 말씀한 것이니 그렇게 해야지" 하고는 거꾸로 심었습니다. 그러나 한 지망생은 한참 심다가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구나!' 하고 자기 생각대로 심었습니다. 프랜체스코가 저녁에 나와서 보고는 거꾸로 심은 사람은 수도사로 뽑고 합리적으로 하겠다는 사람은 돌려보냈습니다.
상식에 맞느냐 안맞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말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순종한 청년은 프랜체스코의 인격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종한 청년은 프랜체스코의 인격을 무시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면 교제가 단절됩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종하라' 자존심이 상하십니까? 남편에게 순종하되 주께 하듯 하면 아내는 천사가 됩니다. 남편의 아내에서 주님을 섬기는 천사로 바뀝니다. 그리고 순종할 때 남편이 아내를 우러러 보게 됩니다. '내 아내는 내 아내가 아니야 하늘이 보낸 천사지'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심정으로 일할 때 그는 하늘이 파송한 천사가 됩니다. 그래서 상전이 우러러 보게 됩니다. '저 사람은 내 종이 아니야 하나님의 사람이지'
자식이 부모에게 최선을 다해서 순종할 때 부모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압니까? '저 자식은 내가 낳은 자식 같지가 않아' 그럽니다. 하늘이 보낸 자식이 됩니다. 그 말을 들을 수 있을 때까지 순종하십시오.
옛날 중국의 순 임금이 신하들을 모아 놓고 항아리에 물을 부으라고 명령을 했답니다. 그런데 밑바진 독이라 신하들은 마지 못해서 얼마간 물을 길어 붓는 척 하다가 손을 놓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유독 한 신하만은 묵묵히 물을 길어 밑빠진 독에 물을 부었습니다. 우물의 바닥이 드러날 정도였지만, 그 신하는 계속 물을 길어서 부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두레박을 우물 속으로 던져넣었을때,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상히 여겨 그 물건을 꺼내었는데, 그것은 바로 금덩어리였습니다. 신하는 그 금덩어리를 임금에게 가져갔고, 임금은 자신의 말에 순종한 이를 위해 넣어둔 상이라며 그 충성스런 신하에게 금덩어리를 주었다고 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을 레안 리라는 젊은 목사가 꼭 한번 만나려고 애를 썼답니다. 너무 바쁘니까 계속 거절당하다가 어느 날 딱 1분만 만나게 약속을 받았어요. 한달 동안 이분이 1분 만나는 걸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복을 받아야 되겠다 그 위대한 종의 기름부음을 자기도 받아야 되겠다고 해서 금식하고 그냥 묵상하고 연습도 하고 리허설도 했어요. 한달 동안 준비하고 딱 만났는데 딱 만나자마자 입이 얼어붙은 거예요. 시간은 흘러가서 30초가 지나가는데 이제 1분 약속했는데 부들부들 떨면서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어떻게 세계 최대의 교회를 이루셨습니까?" 조용기 목사님이 보니까 젊은 청년이 마치 물 속에서 빠져나온 생쥐 같은 모습이어서 웃으면서 이렇게만 대답했대요. I pray and I obey 그리고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레안 리 목사님 가슴속에 나는 기도합니다. 나는 순종합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꽉 박힌 거예요. 그 때부터 기도목회와 순종목회로 돌입했더니 텍사스 락와이드에서 세계적인 교회를 이루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세계 모든 민족위에
신 28:1-6 / 김남수 목사
2004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첫 시간을 하나님 앞에 몸과, 마음과 시간과 정성을 드려 주님께 바칩니다. 우리는 세계적인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미국은 세계적인 나라입니다. 또 우리는 세계적인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뉴욕은 세계민족이 함께 살면서, 정치, 경제, 사회 여러면에서 세계에 영향을 주는 수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역사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계의 움직임과 역사적인 사건들을 보면서 역사적인 한 정점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대적인 사명을 수행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축복하신 세계적인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2004년을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으며 어떤 축복을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시며, 2004년은 우리에게 어떤 영광, 우리에게 어떠한 역사가 이루어질 것인가 기대하면서 새해를 출발합니다.
한해를 시작하면서 조용히 생각해 볼 때에 이 한해를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하실 일을 생각해 볼 때에 가슴에 벅찬 감격과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이 성전은 지난 8월에 봉헌했습니다. 원래 젊은이들의 예배실로 만들어서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전에 우리가 임시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금년에 건축위원들의 타임 스케쥴을 보니 금년 5월 6월이면 예루살렘 성전의 골조와 지붕이 얹어지게 되고, 7월 8월에 내부공사가 마치게 되고, 9월 10월에 카펫깔고 의자놓고, 11월에 음향, 조명, 영상 마치면 감사절에 입당하고 성탄절에 헌당하는 그래서 크리스마스 칸타타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갖게 되는 것이 금년 스케쥴인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고, 고대하고, 소원하던 성전건축이 금년에 완성되는 해라는 것입니다. 기쁘지 않으십니까? 참 좋습니다. 생각만 해도 기쁩니다. 베들레헴 성전도 이렇게 좋은데,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우리가 들어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타워건물도 금년에 유리창 갈고, 옥상서부터 시작해서 지하실까지 식당 개조해서 새 식당 만들고 현관입구, 복도, 전체 건물을 새 건물처럼 단장하고 본 성전과 교육관과 베들레헴 성전과 그리고 밖의 조경과 파킹장과 울타리와 전체를 금년에 마치는 2004년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에게 기쁨이고 감격이고 축복인줄 믿습니다.
성경 학개서 1장, 2장에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찍어다가 성전을 지으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고, 마셔도 목마르고, 입어도 추웠지만 이제부터는 너희가 보호를 받게 될 터인데 많은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2004년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총력을 기울여서 건축하고 기도하면서 구석구석까지 다 완성하고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과 은혜 받는 새 시대가 열리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 한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축복을 주시는 베들레헴 성전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 완성시켜 드리는 한해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사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성전에 들어올 때 울었습니다. 저도 눈물겹게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성전을 이제 하나님 앞에 봉헌하니 얼마나 기쁘고 감격했습니까? 27년 28년만에 처음 성전을 짓고 들어가는 그 감격은 우리가 참으로 잊을 수 없는 감격이었습니다. 이제 두 번째 하나님께서 금년에 맨하탄 성전도 준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순복음뉴욕교회는 맨하탄 33가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맨하탄에서는 성전을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고, 남의 집만 계속해서 전전해 다녔습니다. 이제쯤은 하나님께서 맨하탄에도 성전을 주실 뿐 아니라 세계적인 성전을 맨하탄에 주셔서 세계의 도시라고 하는 뉴욕중에서도 뉴욕, 뉴욕 ZIP CODE 100??로 나가는 중심가에 세계적인 하나님의 교회를 축복해 주실줄 믿습니다. 그동안 기도하고 준비하는 일들이 금년에는 대부분 다 종결을 짓게 될 것입니다. 세계적인 뮤지컬 PROMISE라는 예수님의 생애를 연극하는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릴뿐만 아니라 그런 세계적인 뮤지컬이 있는 곳에 순복음뉴욕교회가 세계적인 교회로서 맨하탄에 우뚝서게 될 줄 믿습니다.
세계를 바라보고 하나님이 이 시대에 위대한 일을 이루어 주실줄 믿습니다. 진행되는 과정과 SPEED를 보니 맨하탄에도 성전이 완성되어서 금년에는 성가대가 퀸즈의 새 성전에서뿐 아니라 맨하탄 세계적인 도시 브로드웨이에서도 찬양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잠잠하고 기도해도 답답하고 응답이 없던 그 일이 어떻게 2004년 한해에 다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이고, 하나님의 섭리이고, 하나님의 역사인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우리는 케냐에 학교를 세웠고, 에콰도르에 학교와 여러 교육기관을 세웠고, 혼두라스에 학교를 세웠고, 볼리비아에 학생들이 수백명이 공부를 하고, 고아 2300명이라는 전 세계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해 왔습니다. 이제 금년에는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볼리비아, 케냐, 도미니카 공화국, 혼두라스, 니카라과, 에콰도르, 코스타리카, 베네수엘라, 멕시코, 브라질, 페루, 칠레 등 여러 나라에 학교들이 계속 세워져서 10개만 세워져도 아마 1만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새 역사가 금년에 반드시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 5천명 1만명의 교인이 중요하다면, 밖의 선교지에 있는 우리 교인들도 중요하고 또 선교지에서의 교인들이 1천배로 많아지게 될 줄 믿습니다. 이런 세계적인, 역사적인 사명을 위해서 우리가 지금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2004년 새해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가슴 설레인 첫 출발을 했습니다. 한쪽에서는 금식기도 하시고, 한쪽에서는 또 큰 잔치로 에클레시아에서 눈물바다와 은혜를 받았습니다.
금년 뉴욕 코넬병원에서는 뉴욕에 첫 번째로 태어난 아이로 이슬양이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심보현, 어머니는 앤, 할아버지는 강용구 안수집사님, 2004년 뉴욕에서 첫 번째 출생한 수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첫 번째 아이가 우리교회 안수집사님 손녀라는데 우리는 너무 기쁜 것입니다. 이름은 임마뉴엘, 한국이름으로는 이슬입니다. 성경에 보니 하나님이 축복하심은 아침마다 이슬이 내려서 뿌리를 적시고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좋은 이름, 신앙적인 이름을 가지고 2004년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순복음뉴욕교회도 그 가정도 축복해 주신줄 믿습니다.
또 금년에 순복음뉴욕교회 담임목사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수여받는 동백장 훈장을 받게 됩니다. 1월 6일 영사관에서 시상식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수고하신 것입니다. 원래 목사는 그동안 가르쳐드리고 살아온 것처럼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것이 목사이고 신앙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상을 받는다든지 이름이 난다는 것은 목사하고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에 힘 들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면 여러분들이 수고를 하셨고, 여러분들이 그동안 수없는 시간과 물질을 쏫아서 세계선교와, 고아사업과, 지역사회 봉사와 수없는 일들을 여러분들이 하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위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신 받고 저는 괴로움을 겪고 여러분은 영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영광이고, 축복이고, 감사이지만, 신앙자체가 땅에서 상을 받고 위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착하다, 잘했다, 충성되다, 수고했다” 그 말씀을 듣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고 달려가는 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더 열심히 하라고 위로를 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내와 눈물을 보시고 우리교회를 축복하시고 새해 새 역사를 감당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사실 왜 축복하시는지 Why? 라고 자신에게 물어보고 깊이 생각해 본다면 대답이 유일하게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 드리려는 개인, 그것을 이루어 드리려는 성도, 그것을 이루어 드리려는 종,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축복하시고 그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격려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도 고난과 역경과 눈물과 고통을 통해서 고난받는 자들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받기 보다는 받은 것을 나누고, 하나님 앞에 구하기 보다는 오히려 구하여 받은 것을 나누어서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는 어린이들과 고아들을 더 잘 돌보고 더 많이 일하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줄 믿습니다. 세계 민족위에 뛰어난 축복을 주시겠다는 약속, 참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가 새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나는 이 시대적인, 세계적인 역사에서 어느 위치에 있으며 나는 무엇을 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를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마음속에 새겨두시면 유익이 될 것입니다.
지난 12월 마지막 주일에 결산하자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일년 365일 결산없이 살다가 갑자기 연말에 결산하자고 하니 얼마나 당황하셨습니까? 제가 지도자로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평소에 성도들을 잘 교육하고 그래서 한주간, 한달을 잘 살아 드릴 수 있도록 교육하고 연말에 가서는 산 일을 되돌아 보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될 터인데 일년내내 아무 소리 하지 않다가 결산하자고 말하면 도대체 교우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해 보니 제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첫시간부터 하루하루 결산하기로 하자는 것입니다. 한주간 한주간 결산하고 마지막 총 결산, 1년결산에 '주님 최선을 다했습니다'하고 내 놓을 수 있는 그런 준비를 한주한주 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우선 성경읽기표를 나누어 드렸습니다. 매일매일 결산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날 그날 해야 될 것을 확인하고, 일주일, 한달, 일년을 체크해야 되겠습니다. 금년에 꼭 이 성경읽기표를 잘 간직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멀리가면 죄가 가까이 오고, 성경을 가까이 하면 죄가 멀리 가는 줄 믿습니다.
우선 성경읽기표를 나누어 드렸습니다. 매일매일 결산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날 그날 것을 확인하고, 일주일, 한달, 일년을 체크해야 되겠습니다. 금년에 꼭 이 성경읽기표를 잘 간직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멀리가면 죄가 가까이 오고, 성경을 가까이 하면 죄가 멀리 가는 줄 믿습니다.
한달에 한번, 두달에 한번, 일주일에 한번씩 성경읽기표를 체크하고 책임감있게 일년에 3번 4번씩 읽으시고 그냥 넘어가실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쁘다고 미루면 심령이 메말라지고 지적 발달만 이루어지고 영성이 개발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메마르고 신경질나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도 빠지지 말고 10분, 30분, 1시간 기도하고 매일같이 하나님의 이슬같은 은혜를 받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세월을 아끼고, 하나님앞에 시간을 아낍시다. 그 말은 기회를 사라는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의 꿈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 바로 지금을 최대한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시간을 멈출 수 없고, 훗날을 위해 보관해 둘 수도 없고, 원하는 만큼 늘리거나 줄일수도 없는 것이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시간을 충실하게 지키십시오. 오늘 2004년 새해의 첫 주일입니다. 첫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려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난 축복을 주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 말씀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에 하지 말라는 것이 수천가지이고, 하지 말라는 것이 수만 가지가 되기 때문에 무슨 수로 다 계산하고 따집니까? 우리가 몇 가지만 기본적인 것을 잘 하시면 다른 것이 잘 되도록 기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하나님 앞에 주일을 잘 지키고 예배하는 일에 힘쓰고 그것에 우선순위를 두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committment 가 확실해야 됩니다. 시간에 committment 가 확실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몇 가지만 잘 해 나가면 다른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절로 다 잘 해 나갈 수 있고 그렇게 할 때에 세계의 모든 민족위에 뛰어난 축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 위에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면 낮출 자가 없고, 축복해서 문을 여시면 닫을 자가 없고, 세계 모든 민족이 두려워 떨고 높여서 나누어주고, 꾸어줄지라도 꾸이지 아니하고, 머리가 되고, 아래에 있지 않고 위에 있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결과가 없다면 쭉정이가 되는 것입니다.
중앙아프리카를 자동차로 횡단한 분이 다니다 보니 수 마일을 가는데마다 종교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표지가 줄을 지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예수의 진흙상이 새겨진 것과 꽃으로 치장된 갈대로 만들어진 십자가나 성전 표시들이 가는데 마다 있었습니다. 이곳이 다 교회이냐고 물어보았더니 교회가 아니고 그곳은 버스정류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버스가 2-3일에 한대씩 오기 때문에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예배하고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숫한 시간을 기다리면서 의미 없이 보낸 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간도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주님 기뻐하시는 대로 쓸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일도 하나님 앞에 결산하고, 십일조도 하나님 앞에 결산하시기를 바랍니다.
최근에 우리가 어떻게 신실하고 정직하게 특별히 금년에 세계선교와 성전건축을 봉헌하는데 나의 책임과 위대한 역사에 참여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다가 이렇게 한해를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말씀 순종하고 즐겨내는 자를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줄이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 하나님이 그 축복하신 것을 치우시고 이슬을 그치게 하시면 사람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 역사와 위대한 축복의 자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계적인 역사와 시대적인 축복을 주실 때 나는 그 축복의 한 부분이 되어서 적어도 내가 할 주일성수와 십일조와 말씀보는 것과 기도하는 것과 내가 해야될 작은 일이라도 내가 반드시 감당할 때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그 일에 상급이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은 세계적인 인물이십니다. 그대는 역사적인 인물이십니다. 큰 일을 하실 분입니다. 큰 일을 하실 분이 작은 일 때문에 실수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축복이 왔을때 너는 상관이 없다, 투자, 희생, 헌신하지 않고 구경했으니 구경만 하라는 자리에 들어가지 않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육신은 썩으면 흙이 됩니다. 물질로 지나가면 종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이 신앙과 헌신은 영원히 영원히 주님께 상급이 될 줄 믿습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주님 축복의 한해를 가슴 벅차게 맞습니다. 52주의 첫주를 축복속에 시작하고 하나님 이 해에 보여주실 영광과 축복이 얼마나 큰가를 배웠습니다. 주님! 이 영광스러운 사명과 사역에 나의 시간과 나의 물질과 나의 committment를 주님께 바치므로 주님 위대한 일이 이루어질때 영광스러운 축복이 있을때 함께 영광을 받게 하옵소서! 상급받게 하옵소서! 이제 모두모두 알곡되어서 천국창고에 같이 들어가 영원히 상을 누리게 하옵소서! 금년 한해 성전 짓고, 세계 선교하는 위대한 한해로 이 축복이 교회뿐 아니라 가정과 산업과 자녀들에게도 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늘에 속한 복을 받으라
신 28:1-6, 엡 1:3-6 / 이성희 목사
싱가폴에는 세계적인 새 공원이 있습니다. 이 곳에 있는 새 가운데 연분홍색의 아름다운 빛깔을 띠고 있는 홍학이 있습니다. 이 곳의 홍학은 세계에서 가장 예쁜 색깔을 가지고 있는 홍학이라고 합니다. 홍학들이 무리를 지어 있는데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그런데 홍학 우리 뒷 쪽에 홍학의 먹이가 있는 큰 먹이통이 있습니다. 먹이통이라기 보다 작은 연못입니다. 홍학들의 발이 잠길만한 얕은 연못입니다. 그 속에 홍학의 먹이인 작은 물고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연못의 물이 홍학의 색깔과 같은 연분홍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예쁜 홍학들은 자기 몸의 색깔과 같은 물을 보고 삽니다. 자기 몸의 색깔과 같은 물 속에 있는 고기를 먹고 삽니다. 자기 몸의 색깔과 같은 색의 물을 마시고 삽니다. 이것이 그 곳의 홍학이 세계에서 가장 예쁜 색깔을 띤 이유입니다. 늘 그 속에서 먹고 보고 살아야 그 색깔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홍학이 그냥 예뻐지는게 아닙니다. 그 속에서 살고, 그 색깔의 먹이를 먹으니까 예뻐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먹고 사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땅에서 먹고 자라면 땅의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아름다운 삶을 삽니다. 하늘에서 먹고 자라면 하늘의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아름다운 삶을 삽니다. 요한복음 15:19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여러분은 어디에 속한 자입니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고 하십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나라는 하늘의 복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이 세상의 복을 추구하면 갓쓰고, 양복 입은 꼴이 됩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하늘에 어울리게 살아야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 안에서 외에는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축복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입니다. 브루스 윌킨슨은 ‘야베스의 기도’에서 “복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다”고 하였습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신령한 복을 받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늘에 속한 복은 신령한 복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복을 받느라고 하면서 화를 자초하는 경우도 흔히 봅니다. 복을 제대로 받아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아야 합니다. 신령한 복은 영적인 복입니다. 요한이 말씀 한 것을 보세요.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요삼 2). 영혼이 잘됨이 최우선입니다. 범사가 잘 되는 것은 차선입니다. 강건한 것은 차차선입니다. 인간의 실패는 이 우선순위의 혼돈에서 옵니다. 범사가 잘 되는 것이 최우선이고, 강건한 것이 차선이고,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차차선인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혹은 강건한 것이 최우선이고, 범사가 잘 되는 것이 차선이고,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차차선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우선순위의 혼돈은 복이 아니라 화를 가져옵니다. “신령한”이란 말은 헬라어로 “프뉴마티케”입니다. “영적인”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복이 물질적이며 임시적인데 비해 신약의 복은 영적입니다. 세상의 복은 물질적인데 비해 하늘의 복은 신령합니다. 세상의 복이 임시적인데 비해 하늘의 복은 영원합니다. 오늘의 본문 구약의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미치리니”라고 전제합니다. 그런데 그 복이 무엇입니까? 3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을 봅시다. “성읍이 복을 받고 들이 복을 받습니다. 몸의 소생이 복을 받고, 토지의 소산이 복을 받습니다. 짐승의 새끼가 복을 받고,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습니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 이 말씀의 복은 다분히 현실적 복입니다. 어떤이는 이 장을 제일 좋아한답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 복은 신령한 복의 부수적 은총에 불과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사모하고 순종하는 이것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복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순종할 수 있는 것은 복을 받은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대가로 육신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무당종교라고 하는 샤마니즘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현실성, 기복성, 의존성입니다. 샤마니즘은 내세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입니다. 샤마니즘은 그 자체가 복을 갈구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의존적입니다. 무당종교는 무당이 없으면 종교행위 자체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중간 매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 중간 매개가 무당입니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는 이런 세 가지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기복적이란 말은 샤마니즘적인 용어입니다. 기독교는 기복적 종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기복은 해야 합니다. 복은 구하고 복은 받아야 합니다. 단지 복 때문에 믿는 것은 아닙니다. 세속적 복의 기준은 전통적으로 부귀다남(富貴多男)이라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귀한 자리를 얻고, 아들을 많이 가지는 것은 다 현실적 복입니다. 세속적 복은 눈에 보이는 것 이며 현실적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현실적인 것이 아닌 것이 신령한 복입니다. 현실적인 것만 보이고, 이런 신령한 것이 보이지 않으면 참 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복은 선물입니다. 하늘이 주어야 받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을 보세요. 하나같이 신령한 복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입니다. 위로를 받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배부를 것입니다.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상이 클 것입니다. 이 복 가운데 현재적으로 받아 좋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현실적으로 좋아보입니다. 땅 부자가 된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나 이 말도 현제적으로 얻는 것은 없는 말입니다. 땅을 후대에 주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내게는 빈손입니다. 영어에서 헤어질 때 하는 인사는 “굿바이”(Good bye)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God be with ye)의 준말입니다. 스패인어의 “아디오스”(adios)는 “하나님께 향하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이상의 축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기를 비는 것,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목자가 본 시편 23편’의 저자 필립 켈러는 ‘나는 한 때 목동이었습니다’라는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언젠가 내 친구 두사람이 부활절 행사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우리 집에 들러 며칠 동안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내게도 함께 가자고 권해서 같이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길을 가던 도중에 친구 중 한 사람이 모자를 잃어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자를 우리 집에 놓고 왔다고 생각하여 나에게 집으로 편지를 해서 아내에게 좀 부쳐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때 아내에게서 받은 편지를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가운데 한 구절이 나에게 특히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집을 지붕 꼭대기에서부터 아궁이까지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모자는 보지 못했고, 제가 발견한 것은 그분들이 남기고 간 축복 보따리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신령한 나라입니다. 평안과 사랑입니다. 돈 될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두고 다니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쁨과 평안입니까? 나를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들을 남기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다녀간 후에 “저 사람 다녀가면 재수 없어”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전달하고 남깁시다. 이 복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하늘의 복입니다.
둘째, 하늘에 속한 복은 창세 전에 예정한 것입니다.
하늘의 복은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연히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가 우연히 택정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우연히 자녀가 되고, 우연히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미리 예정하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브루스 윌킨슨, ‘야베스의 기도’에서 “정말로 하나님은 당신이 요청하지 않아서 주지 못하는 그래서 당신이 요청하기만을 기다리는 엄청난 복을 소유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엄청난 복을 주시려고 쌓아두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복은 창세 전에 이미 예비하신 복입니다. 우리가 요청하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편 31:19에는 시편의 기자가 하나님의 쌓아두신 은혜가 있다고 합니다. 베푸시는 은혜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복은 쌓여 있습니다. 쌓아놓고 바닥이 나지 않는 은혜입니다. 하늘의 복은 다함이 없는 복입니다. 이미 예정하신 복입니다. 그런데 그 복을 받을 사람이 요청하지 않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일조 하나만 해도 창고가 넘치고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말씀을 다 순종하면 감당 못할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시기적으로 창세 전에 삼위의 영화로운 교제가 있을 때 예정된 것입니다. 창세 전에 속죄의 언약도 이루어집니다. 속죄의 언약이란 언약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창세 이전에 인간 구원을 위한 속죄의 언약을 삼위 간에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만드신 다음 “이것을 먹는 날에는 영원히 죽으리라”는 행위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 것을 먹고 죽게 되자 다시 은혜로 구원받게 하는 은혜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창세 전에 미리 언약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1:15에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라고 합니다. 택정하셨다는 말은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저도 어릴 때는 목사의 아들이 싫었습니다. 목사의 아들이라는 것이 어려울 때도 많고, 귀찮을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며 하늘의 복입니다. 철들고 보니 목사의 아들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더구나 목사의 아들로서 목사가 되고보니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쩌다 우리의 부모를 만나고, 실수로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창세 전에 예정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된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실수가 없으십니다. 토저라는 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만 이미 약속된 길을 걸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모든 것이 예정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미리 계획된 하나님의 뜻을 움직여 되어지는 것뿐입니다.
셋째, 하늘에 속한 복은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양자가 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만 해도 이게 어디에요? 로마서 8:15에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합니다. 양자의 영만 받아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가집니다. 바울은 당시의 로마법에 의하여 이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자는 증인을 통하여 가족이 되고 아들과 같은 권리와 의무 가집니다. 누가 증인입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랬습니다. 그리스도가 증인입니다. 증인이 확실해야 하는데 그리스도는 확실한 증인입니다. 증인은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을 선서”합니다. 선서할 때 손을 들 듯이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손을 들고 하나님께 진실을 말할 것을 선서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아들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교통 사고를 당했습니다. 목사님은 피해자였습니다. 어느 날 법정에서 목사님을 법정에 나오게 하였습니다. 법정에 나가보니 가해자가 증인을 한 사람 데리고 나와서 목사님이 가해자라고 우겼습니다. 목사님은 혼자 나갔는데 미국 사람이 증인 한 사람을 만들어 나온 것입니다. 물론 그 자리에는 그 증인이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할 말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나는 미국의 양심을 믿습니다. 미국은 개인의 양심이 살아야 미국이 산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미국의 돈에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신뢰한다’고 씌어져 있는데 이대로 살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가짜 증인은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였고 목사님은 그 후에 보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증인도 믿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증인은 든든한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좋은 증인을 만나서 아무 염려 없이 양자가 되었습니다. 부모의 자녀가 된 것은 자녀의 복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누구에게나 복입니다. 자녀의 보모가 된 것은 부모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창세 전의 예정에 의하여 부모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이 땅에 두시는 도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자녀의 권리는 상속권입니다. 당당한 권리입니다. 어떤 상속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훗날에 기업으로 받는 권리입니다. “너는 내 아들 아니다”라고 하지만 그런다고 아들이 아닙니까? 한번 아들은 영원한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한번으로 영원한 자녀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편 2:7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낳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는 내 아들, 내 장자이다”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에게 “아들 삼겠다”고 하시고 양자를 삼으십니다. 하나님께는 양자가 얼마나 귀한지 양자를 위해 친자를 죽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갈라디아서 4:7에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한대로 가장 신령한 복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유업을 잇는 것입니다. 이런 복은 하늘에 속한 복입니다. 우리 가락의 복음 성가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 많이 있으리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특권이지만 좋은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이 가득 쌓여 있습니다.
결 론
이탈수업이란게 있습니다. 낮은데서 높은데로, 세상에서 하늘로 벗어나고 승화되는 일입니다. 성경은 “아비나 어미를 나 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참 신앙은 사랑을 위해 사랑을 버리는 일입니다. 에로스 사랑과 아가페 사랑의 대결에서 아가페 사랑이 이겨야 합니다. 낮은 데 매였던 사랑이 높은 데 옮겨야 하고 승화되어야 합니다. 땅엣 것에서 멀리 몸을 떼면 뗄수록 하늘의 것에 가까와질 것입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땅에 것에서 이탈이 가능합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말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때때로 지체하시는가? 하나님은 지체하실 때마다 우리에게 갑절의 축복을 준비하고 계신다.” 당장 주시지 왜 하늘에서 주십니까? 갑절 이상 계산할 수 없는 복을 주시려고 이 땅에서 주시지 않고 하늘에 속한 복을 훗날에 주시니다.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현실적 복보다 신령한 복을 사모하며 삽시다. 하늘의 복인 평안을 소유하고, 천국을 소유한 자답게 큰 가슴을 활짝 열고 위풍당당하게 한 주간의 삶을 하늘의 복 가운데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복 받는 생활의 비결
신 28:1-6 / 서화평 목사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사람은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복 받는 일이라면 별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요즘에는 무당, 점쟁이들이 기승을 부립니다. 찾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복을 받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이 점쟁이들을 줄지어 찾아갑니다. 대학생들은 앞날이 막막하여 무엇인가를 뚜렷하게 찾고 싶어 찾아간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앞날이 불안하니 점쟁이를 찾아가서 의지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줄지어 다닙니다. 얼마 전에 요즘 점쟁이들을 찾는 사람들에 대하여 방영된 것이 있었습니다. TV 방송 인터뷰에 의하면 점쟁이는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먹고삽니다"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했더니, 자기들을 찾는 사람들 중에 반절 이상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은 복 받기를 원하면서도 복 받을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복 받는 생활의 비결을 찾게 됩니다. 바로 배우고, 바로 행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을 누리는 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온 우주를 운행하십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우리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며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통촉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면 오늘날에도 분명히 기적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속에 놀라운 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먼저 앞세우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 믿는 것이 즐겁습니다.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을 받으며 사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앞세우며 사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먼저 하나님을 앞세우며 사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책임져주시는 생활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하셨습니다.
첫째, 시간을 하나님께 드려보십시오.
제일 귀중한 시간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일주일의 하루를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시작을 하십시오. 예배를 드린 성도의 엿새동안의 삶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십니다. 주일을 거룩한 날, 성일로 지켜보십시오. 주일 성수는 하나님을 앞세우며 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또한 복 받는 비결입니다.
창 2:3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했습니다. 이 날은 먼저 하나님께 구별해 드려야 합니다. 이 날은 돈버는 날이 아닙니다. 이 날은 놀러 가는 날이 아닙니다. 이 날은 오락과 운동하느라 예배를 잊고 살아서도 안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주일을 못 지키게 한 나라는 다 망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치고 비참해지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주일을 잘 지키다 200만원 벌 것을 100만원 벌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을 앞세우지 않고, 건강하거나 천만원씩 버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잠깐 잘 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결코 속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끝까지 잘되어야 합니다. 나중까지 잘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이 있어야 끝까지 잘 되는 것입니다. 가장 귀중한 시간을 드려 하나님을 앞세우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물질을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무슨 돈이나 어떤 수입이 생겼을 때 제일먼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십시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욕심 때문에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의 계산법은 사람의 수학적 계산을 뛰어넘습니다. 이런 계산을 하다가 하나님의 기적과 복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복을 받았다고 간증하는 사람들의 확신에 찬 소리를 들어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한결같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했으며, 하나님을 앞세우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분명한 확신이 있기에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를 의지하는 자에게 손해를 끼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반드시 일으켜 주십니다. 복의 복을 주십니다. 계산하지 말고 온전히 드리십시오. 십일조는 하나님을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받는 것입니다.
지금 복을 누리고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하나님의 마음을 산다면 더욱 큰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물론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분명히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를 믿는 사람은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2. 복 받는 비결은 마지막 것까지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은 처음 것입니다.(First) 가장 좋은 것(Best One)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잠언 3장 9절-10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일먼저 하나님께 드리고(First) 제일 좋은 것(Best)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입니다. 이는 내 생명과 같은 제일 마지막 남은 것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밀러(George maller)는 일생동안 5만번 이상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기에게 있는 마지막까지 드리는 헌신을 통해서 이런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도 흉년 속에서 마지막 끼니를 말씀에 순종하여 드렸습니다. 이때 없어진 것이 아니라 흉년 내내 기름과 가루가 떨어지지 않는 기적과 복을 체험했습니다. 또한 선지생도의 아내가 빚 때문에 자식까지 종으로 팔 수밖에 없을 때 마지막 기름병으로 기적을 허락하셨습니다. 믿음조상 아브라함은 100세에 난 아들, 이삭을 드릴 때, "네가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하시며, 여호와이레로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큰 복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것(First)과 제일 좋은 것(Best One)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 복 받는 생활을 합니다. 마지막까지 헌신할 때 하늘 문이 열립니다.
3. 사랑으로 맡겨 보십시오. 풍성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는 손해본다는 느낌을 갖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드리는 것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욥은 하루 아침에 재산을 다 잃고 열 자녀가 다 죽었어도 원망하거나 억울해 하지 않았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더 나아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나는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믿고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맡겨 드릴 때 풍성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6:5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복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사랑으로 맡겨 드리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욕심이 순복하지 못하게 합니다. 지나친 탐심이 복을 가로막습니다. 내 생각과 욕심이 죽어야 기적과 복이 나타납니다.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길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부도나거나 불황이란 것이 없습니다. 고전 2장9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참다운 복은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물질을 땅에 많이 쌓아 두었다고 해서 그것이 복이 아닙니다.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고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생활이 바로 복입니다. 하나님은 순복하는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넘치는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을 앞세우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처음 것, 가장 좋은 것, 마지막까지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으로 온전히 맡기는 생활을 하여 더욱 풍성한 복을 누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꾸어줄지라도 꾸지 아니하며
신명기 28:1-14 / 정필도 목사
일본을 관광하고 돌아온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니꼬]라는 유명한 관광지에 있는 어느 사찰에는 네 개의 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물을 마시면 복을 받는다고 전해지고 있답니다. 각각의 우물에는 수(壽), 부(富), 권(權), 애(愛)라는 글자가 쓰여 있고, 그 우물마다 물을 마시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수(壽)라고 쓰여진 우물 앞에는 주로 60세가 넘은 노인들이 오래 살고 싶어하는 소원을 가지고 서 있고, 부(富)라고 쓰여진 우물 앞에는 주로 삼사십대 젊은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어보겠다는 일념으로 서 있으며, 권(權)이라고 쓰여진 우물 앞에는 국회의원 후보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한 자리하고 싶은 갈망으로 서 있고, 애(愛)라고 쓰여진 우물 앞에는 이십대의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연인을 소망하며 이 물을 마시려고 서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되든지 안되든지 간에 그 우물을 그냥 지나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관광갔던 이 분도 네 군데 우물물을 모두 다 마셔보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복(福)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저 복 받는다고 하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동양인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서양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미국인들도 “God bless you!"- “하나님이 당신에게 축복하십니다.” 라고 축복해주고, 심지어 재채기하는 사람에게까지 이 말로 축복을 빌어줍니다.
축복 받을 수 있는 삶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축복은 행함으로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도 축복을 받으려고 하면 반드시 축복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어떻게 하면 복을 받는지 [복 받는 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좬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좭 그리하여 어디를 가든지 또 무엇을 하든지 그 사람이 복을 받고 더 나아가 가정과 민족이 복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면, 우선 하나님 앞에 열심히 나와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롬 10:17).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더욱 더 믿음이 좋아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듣고 말씀 가운데 은혜를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 복은?쥱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복입니다. 쥲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복입니다.쥳 만사가 형통하여 풍성한 복을 누리며 사는 복입니다.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영생을 얻은 우리 성도들은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복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이 동행하시면 만사형통하게 되고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칠팔 십 년 사는 동안 잘 사는 것도 큰복이지만,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 듣고 생명의 면류관을 쓰고 영원히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되는 복이 더 큰복인줄 믿습니다. 이 복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달게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롬 8:17-18). 사도 바울은 일찌기 이런 비밀을 깨달아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오직 주님과 복음을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살았습니다.
우리도 이 비밀을 깨달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 가운데 좬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얼마든지 남에게 꾸어주기는 해도 결코 꾸지 않는 복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5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받게 될 저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44절에서 좬그는 네게 꾸일지라도 너는 그에게 뀌지 못하리니좭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앞서 말씀드린 12절의 말씀과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밤낮 남에게 꾸러다니고 남에게 꿔주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 받는 저주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장로님 중 한 분은 집에 돈이 떨어지거나 먹을 것이 없으면 무조건 금식기도하며 회개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금식하는 가운데 회개하며 기도하면, 은혜를 주시고 문제가 해결되는 놀라운 체험을 하기 때문에 어려우면 언제나 금식기도의 사인으로 알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 장로님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평생 빚을 모르는 정갈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성경에서 밤낮 남에게 꾸러다니는 것을 저주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솔직히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빚 얻는 것을 겁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IMF가 오기 전까지 흥청망청 살았습니다. 아마 그렇게 잘 살아본 때가 역사이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남의 나라 돈을 빌려서 분에 넘치게 쓰고 산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라에 빚이 많아지게 되었고, 이자는 눈덩이처럼 늘어났으며, 그 이자를 갚을 갚기 위해 고리대금을 얻어 쓰게 되었고, 마침내 나라가 부도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할수 없이 IMF에 손을 내밀게 되었는데, IMF에서 돈을 빌리면 그 나라 경제도 자연히 IMF의 통제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몇 년 전 IMF가 왔다고 온 나라가 벌집쑤셔놓은 듯이 난리가 났을 때의 일입니다. 국가적으로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교회안에도 돈문제가 큰 시험이 되고 있습니다. 빚은 사람을 노예로 만듭니다.
옛날에는 빚을 갚지 못하면 아들과 딸을 팔아 빚을 갚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중국 사람들은 노름을 하다가 빚을 지게 되면 가장들이 자기 아내를 팔기도 했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인에게 빚을 얻어오라고 억지를 부리는 못난 남정네들이 이 땅에 많았습니다. 빚을 얻으려면 자신이 직접 나서서 얻을 일이지 왜 부인에게까지 못할 일을 시킵니까? 과연 그런 남자들이 평소에 건실한 삶을 살고 있을까요? 이는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들의 잘못된 의식구조때문입니다. 빚을 내서라도 우선 먹고 보자는 못된 심보를 가져서 그렇습니다. 이런 일이 기독교인들에게는 좀처럼 없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돈 문제로 큰 시험을 당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돈 거래 무엇이 문제입니까? 1. 꾸게 되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저주받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선언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도대체 내가 여지껏 어떻게 살아왔기에 저주받은 인간이 되었습니까? 이를 보통 일로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같은 팀을 이루어 봉사하고 어울리다가 그 중에 돈 있는 사람이 있다 싶으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꿔달라고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냥 친해지기만 하면 여기저기서 돈을 꿔달라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교회 나가기가 싫다는 사람까지 생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남에게 꾸어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빚을 꼭 얻어야 할 형편에 처했을 때 먼저 해야 할 일은? 쥱 일단 빚을 얻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쥲 금식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 봐야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우리 집안이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쥳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것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았는지 아니면 불순종하며살았는지. 과연 내가 수입이 많았을 때에 온전한 십일조를 해본 적이 있는지. 소위 세상에서 잘 나갈 때 성전건축헌금 한번이라도 제대로 드려 보았는지. 얼마나 물질로 범한 죄가 많은지 곰곰히 생각해가며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쥵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역사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계속해서 회개하고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은혜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실 줄 믿습니다. 2.꾸고 갚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남에게 꾸는 것도 문제지만 꾸고도 갚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작은 교회일수록 누군가 열심을 내고 봉사하다보면 금방 표시가 나고 곧 유명해집니다. 양심이 잘못된 사람은 일단 교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나면 돈 있는 집이 누군지 알아 본 다음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날을 잡고 서울서 몇 시에 돈이 들어오게 되어있는데 넉넉잡고 두 시간만 빌려주세요. 세시간 만 빌려주세요. 몇 백만 빌려주세요. 잠깐이면 된다고 그럴싸하게 거짓말을 늘어놓고서는 미리 봐두었던 교인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돈을 챙긴 후에 곧바로 도주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수치스러운 일들이 한국 교회안에서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안수집사님이나 권사님들도 꿔갈 때는 “언제 갚겠다. 이자는 얼마 주겠다”라고 철썩 같이 약속해놓고서는 깜깜 무소식입니다. 쓸데가 있어서 달라고 하면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칩니다. “안수집사라서 권사라서 그리고 봉사도 잘하고 기도도 잘 하기에 믿음이 좋은 줄 알고 믿고 꿔줬는데, 설마 안 갚을 줄이야.” 이런 일로 상심한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돈 잃고 사람 잃고 겨우 있던 믿음까지 흔들흔들하게 됩니다. 그 사람 꼴도 보기 싫어 교회 안나오고 있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사기끼가 농후한 사람들이 어찌 은혜받은 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무슨 낯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뵈려고 그런 짓을 밥먹듯이 하는지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서 13:8절을 보면 좬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좭고 했습니다. 내가 받은 사랑은 많고 보답을 다 못하다 보니 사랑의 빚을 많이 지고 사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아무 빚을 지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딴에는 신용을 잃지 않으려고 남의 돈을 빌려서라도 정직하게 이자를 꼬박꼬박 갚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빚에 빚이 늘어 갚을 돈이 삽시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빚을 얻을 데도 없고 갚을 길도 없게 되면 자연히 부도가 나게 됩니다. 이런 경우 한 사람의 판단 착오로 많은 사람들이 덩달아 같이 망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여러분! 내 힘으로 이자를 갚으면 모르되 도저히 이자를 갚을 길이 없어 빚을 얻어 이자를 갚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빚을 얻어 빚으로 이자를 갚으려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남 못할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부도처리 하는 것이 훨씬 났습니다. 이 길만이 여러 사람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현명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빚을 내어 이자를 갚아나가는 악순환의 고리를 과감히 끊어버리고 새출발하시기 바랍니다. 돈 거래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은? 쥱 함부로 남에게 꾸어주지 마세요.남에게 꾸어줄 때는 깊이 생각해보고 꾸어주세요. 그런데 손을 내민 사람이 미안해 할까봐서 냉정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그 당시 조금 섭섭한 것이 났습니다. 이럴 때 오히려 욕을 하고 삐지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과는 깊은 교제를 하지 마십시오. 돈 잃고 사람 잃고 신앙까지 시험 들기 쉽상입니다. 쥲 꾸어줄 때는 못 받을 각오를 하고 꾸어주세요.
여기에는 직분과 상관이 없습니다. 열심 있는 안수 집사님 권사님들 중에도 꾸어만 가고 갚지 않는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너무나 많습니다. 제 생각으로 그렇습니다. 사실 돈이 거짓말시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래 거짓말 할 사람이 아니지만, 꿔갈 때보다 나중 형편이 더 안 좋아졌으니 어떻게 갚겠어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럴 일이 생길 수 있음을 유념하시고 누구라도 직분보고 돈 빌려주지 마세요. 더구나 돈을 꿔줄 때는 못 받을 각오를 하고 꾸어주세요. 제가 잘 아는 장로님이 돈이 참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댁에는 밤낮 돈을 꾸러오는 사람들이 줄을 섭니다.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은 물론이고 목사님들도 많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교회 핑계 대고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면서 6개월만 빌려달라고 꿔가는데, 꿔간 사람 치고 갚은 사람이 거의 없답니다. 이처럼 계속 속다 보니 누가와도 이제는 안 받을 생각하고 꿔줄 만큼만 꿔준다고 그래요. 때때로 지나치게 돈을 많이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냉정히 거절하게 되는데, 이때 “돈 많은 장로가 쌓아두고 어쩌려고 그러냐”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증권투자 붐이 대단했지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증권으로 돈 번 사람보다 패가망신 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 새로운 사업투자다 벤처다 섣불리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서두르지 말고 기도 많이 하고 시작하세요.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면 기도 많이 하는 하나님의 종에게 물어보세요. 그런데 문제는 가진 돈도 없으면서 빚을 얻어 투자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투자한다고 어디 당장 이익이 나옵니까? 제 돈으로도 이년 정도는 걸려야 이익이 날 수 있는데, 남의 돈을 빚내어 언제 투자한 원금을 회수할 수 있겠습니까? 또 투자할 때는 반드시 잊어버릴 각오를 하고 투자해야 합니다. 성공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3. 남의 돈까지 끌어다가 꾸어주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 형제의 돈까지 끌어들이고, 심지어 친정 부모 돈까지 끌어들였다가 못 받게 되는 경우, 자신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온 집안이 다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의 돈을 빌려서 꾸어주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꿔주고 못 받아서 마음에 상처가 있으신 분은? 쥱 꾸어주는 자가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쥲 꾸어준 것을 못 받았으면서도 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쥳 가능하다면 꿔주고도 아직 받지 못한 것을 안 받기로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본래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포기하세요. 쥵 원망불평하는 마음이나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시고 용서하는마음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형편이 어렵기에 못 갚겠습니까? 빚을 져본 사람이 아니면 그 심정을 아무도 모릅니다. 쥶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축복하며 중보기도 해보세요. “저 집사님이 얼마나 어렵기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을까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들도 일어나게 해주세요. 축복해주세요.”라고 기도해보세요. 그러면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은혜주시고, 보상해주실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복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불순종하면 복을 받은 것 같은데 결코 복이 되지 않습니다. 저주가 됩니다. 말씀대로 사셔서 꾸어줄지언정 꾸지 않는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 순종의 축복
신 28:1-14 / 박덕기 목사
새해 첫 주일 아침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 여러분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2005년 한 해 동안 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맞이하는 성일이지만 이 아침 예배드리는 여러분의 마음은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진지하고 간절한 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지하고 간절한 것이 한 해 동안 여러분의 복리에 관한 것뿐이라면, 새 해 첫 예배부터 대단히 잘못된 엉터리 예배, 하나님께 향기롭지도 못하고 어쩌면 가인의 제사처럼 물리쳐 버리는 예배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배’라는 말은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예배는 모두 사람 중심으로 하나, 우리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점에서 크게 다릅니다. 이교도의 예배는 자신이 복을 받고 자신의 소원 성취를 위한 예배로서, 그 중심이 어디까지나 사람을 중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성경적 예배는 항상 ‘주를 찬송하라’ ‘주께 노래하라’ ‘주를 송축하라’는 의미의 예배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진정한 예배란 사람이 생명과 모든 선한 은사가 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 앞에 공경과 감사로 몸과 마음과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배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광이지 사람의 유익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한국 교회의 예배의식을 보면 인간의 소원성취만을 위한 서낭당식 예배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 교회 대다수 신자들의 잘못된 예배관, 이것부터 고쳐야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새 해 첫 주일 첫 예배부터 올바로 드리시고, 금년에 드리는 여러분의 모든 예배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시편 20편에 보면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진리를 시사해 주는 구절이 있는데,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 그런 다음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너의 예배를 받으시고, 그런 다음 네 마음의 소원, 네 마음의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는 축복인 것입니다. 참된 성경적 예배란 사람이 생명과 모든 선한 은사가 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께 찬송과 숭경과 감사로 몸과 마음과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여러분은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 인도하심, 공급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2005년 새 해를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예배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류 시인 김남조의 시에 이러한 시가 있습니다. 새 해 첫 새벽의/우리 하나님/두 손에 황송한/한 장의 백지를/고루 나눠주시는/설날의 하나님
3년을 기다려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땅만 버린 못된 나무와 같은 우리, 해고당해야 마땅한 불의하고 불충한 청지기와 같은 우리, 그러한 우리에게 또 다시 하얀 백지와 같은 한 해를 모두에게 똑 같이 골고루 나눠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새 해를 맞이할 때마다 새로운 결심을 하고, 새로운 삶을 설계해 봅니다. 이러한 심정은 마치 그림을 그리는 어린 학생의 심정과도 같을 것입니다.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다가 잘못되어 지우고, 다시 그리고 또 지우고, 그러는 사이 헌 종이를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그 종이를 구겨 휴지통에 던져버리고 새 종이를 펴 놓으며 이번에는 틀림없이 멋진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새 해를 맞이한 우리의 마음이 바로 이 학생과 같을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살고자 노력하였지만, 막상 한 해를 뒤돌아보면 지난날들의 생활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시 우리 앞에 펼쳐진 새 해라는 새 도화지 위에 금년에는 보다 아름답고 충성스런 신앙생활을 그리면서 새로운 각오를 해 보는 것입니다.
새 해 첫 주일에 무슨 설교를 할 것인가 고심하다가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본문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송구영신 예배 후 성도들의 인사를 보면 모두 ‘새 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걸려오는 전화 인사도 모두 한결 같이 새 해 복 많이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우리 한국 사람은 복 받기를 좋아하고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 역시 복 받기를 무척 사모하는 것 같습니다.
복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복이란 히브리어로는 ‘아쉬레’라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때 그것이 복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이 복이란 헬라어로는 ‘마카리오스’라고 하는데, 물질적이요 형태적인 것으로 생기는 기쁨이 아니라, 영적이요 무형적인 것으로 일어나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복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복은 영적이요 무형적이요 근원적인 것이라면, 세상적인 복 특히 동양적인 복은 물질적이요 형태적이요 현상적인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이라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종합해서 볼 때, 인생의 참된 복은 성부 성자 성령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고, 그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 까지만 말씀드리면 아직 성도 여러분의양이 차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벌써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복을 택하신 백성에게 주시려고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그 준비의 역사가 무엇이냐 하면 먼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이루고, 그 민족을 통하여 구속의 계획을 펼쳐나가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신학적으로는 계시의 점진성, 혹은 구원사적 축복의 점진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령한 축복을 가르칠 때 물질적이고 지상적인 시청각적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성도들이 죽은 후에 가게 되는 천국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가나안 땅으로 상징한 것입니다.
오늘 신명기 28장의 말씀도 하나님께서 교육적인 차원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령한 축복을 눈에 보이는 상징적인 방법으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을 총괄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고 선포되었고, 불순종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선포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온갖 축복의 원천이요, 하나님의 진노는 온갖 저주의 근원이 되는데, 하나님의 은총과 진노 곧 축복과 저주는 인간의 순종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신 28장은 68절이나 되는데, 1-14은 축복에 대해서, 15-68까지는 저주에 관한 말씀으로, 축복에 관한 말씀보다 저주에 관한 말씀이 다섯 배나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이 곧고 마음이 강퍅하고 완악한 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순종을 경계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 저주의 내용들을 보면 불순종할 때 각종 질병과 가뭄과 태풍의 재앙, 전쟁과 기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점점 더 낮아지고 비천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들은 기대하는 일들이 도무지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이 잘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과실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만사가 불통하여 실망스런 일들만 생길 것이요, 오히려 저주가 따라다니는 것 같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그 저주를 다 받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극심한 기근 때는 유순하고 연약한 여인들이 자기 자식을 잡아먹기도 하고, 결국에는 세계 각국으로 흩어버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환난과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당한 환난과 고통 중에 미리 경고하거나 예언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보면 47절에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풍족한 중에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지금 내게 재물이 있다고, 건강하다고 자만할 것이 조금도 못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어떤 축복이 약속 되었는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여호와의 성민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9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민이 되는 것처럼 복된 일도 없습니다. 사실 신 28장에 언급되고 있는 다른 복들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백성이 되는 복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고 부수적인 것들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훌륭한 통치자를 모신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통치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그 무엇보다 복된 일인 것입니다. 그 행복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을 향하여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했습니다.
2. 여호와의 복민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2-8, 12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복을 주실 것이며........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복은 그림자와 같습니다. 내가 복 받을 사람이 되지 않고서 복을 따라가면 복은 도망쳐 버립니다. 그러나 복 받을 사람이 되면 복이 그림자처럼 따라 오게 되는 것입니다.
3. 세계의 우등민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12-13절에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찌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나라가 복을 받는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약속입니다. 19세기에 영국에 복음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을 때 영국은 세계의 초강대국이 되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청교도 정신의 기반 위에 건설된 미국은 건국된 지 불과 200여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야스퍼스 (Karl Jaspers)는 ‘독일의 과학성과 예술성은 독일의 신앙의 토양에서 생긴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스위스는 영토가 작은 산악의 땅입니다. 그런데도 세계에서 제일 G. N. P가 많습니다. 칼빈에 의해 일찍이 개신교를 전파해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덴마크는 모래땅입니다. 그런데 ‘그룬트비’라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이웃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땅을 사랑합시다.’하면서 성경대로 가르쳤는데 이제 세계 제일의 복지국가가 되었습니다. 세계지도를 펴서 살펴보십시오. 잘사는 나라 선진국 문명국은 기독교를 기반으로 해서 세운 나라이지만, 못사는 나라 굶어죽고 헐벗은 나라 미개국 후진국은 우상숭배 하고 주일 성수 안하는 나라들입니다.
우리나라는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참으로 울밑에 선 봉선화처럼 처량한 나라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못살던 나라 중의 하나였으며,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동방의 약소국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온 이후 1세기를 지나면서 유구한 세월 동안 한결같이 민족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여겨졌던 가난을 벗어났으며,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백성은 역사의 우등생이 되고,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백성은 역사의 열등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사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명령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곧 ‘하라!’는 말씀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 하면 먼저 물질적인 것을 생각하는데, 물질적인 축복을 받으려면 그에 따르는 구체적인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1)주일을 성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주시기 위하여 성별하신 날을 외면하면서, 복 받기를 기대하는 신자가 있다고 하면, 그는 마치 산에 가서 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성수주일을 잘 하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는 꼭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을 주님의 거룩한 날이라 하여, 존귀히 여기고 성수하는 신자를 존귀히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을 함부로 범하고, 경홀히 여기며, 멸시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멸시해 버리실 것입니다. 영화 ‘불의 전차’로 잘 알려진 에릭 리델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나중에 중국 선교사로 일생을 헌신했던 그는 원래 영국의 육상 선수였으며,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 100미터 단거리로 출전하기로 선발되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워낙 달리기를 잘하였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그가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무난히 획득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100미터 예선 때 경기가 주일에 있는 것을 알고는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올림픽 대회에 자신은 출전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온 영국 민들과 왕실까지 그에게 엄청난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주일에 시합이 있다고 해서 달리지 않겠다고 하자 온 영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영국은 그를 200미터 선수로 내보냈는데, 주 종목이 100미터인 선수가 200미터에서 우승한다는 것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20미터 경기에 임하려고 할 때 관중석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느 사람이 하나님께서 전해 주시라는 전갈이라며 조그만 쪽지 하나를 전해주었습니다. 그 쪽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 삼상 2:30의 말씀입니다. 이 쪽지를 받은 리델은 마치 하늘을 날듯 달음박질을 하였고 우승을 하여 금메달을 영국에 선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리델의 이 일화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그 명령을 준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반드시 복을 주시고 그를 높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신자들이 십일조를 드린다는 사실은,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됩니다. 대나무에 비하면, 십일조 생활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매듭과도 같습니다. 대나무에 있어서 매듭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1)성장하지 못하고, 2)매듭이 약하면 부러지기 쉽습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십일조를 하겠다는 결단이 서게 되면, 그것은 마치 제 2의 회심과도 같습니다. 루터-모든 인간에게는 두 가지 회심이 필요하다. 첫째는 심령의 회심이고, 둘째 는 그의 돈지갑의 회심이다. 웨슬레-한 인간 중 회심해야 할 마지막 부분은 그의 돈지갑이다. 십일조 헌금은 여러분의 신앙 성장에 있어서 필수적이며, 그 어느 것도, 이를테면 봉사로, 또는 기도로 결코 대신할 수 없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일조 생활 철저히 해서 축복받은 사람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가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의 부자였던 록펠러입니다. 록펠러가 얼마나 부자였느냐 하면 뉴욕의 한 불럭에 있는 건물이 다 록펠러의 건물이었습니다. 수십 동의 커다란 건물이 다 록펠러의 것이었고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도 록펠러의 것이었습니다. 록펠러가 얼마나 부자였고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지 자기 십일조 계산하는 직원이 4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록펠러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가난할 때 첫 번째 월급이 1달러 50센트였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부어 주고 부어 주고 나중에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부어 주셔서 십일조 계산하는 직원을 40명 두어야 할 정도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워주기 위해서, 또는 교회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러한 설교를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니 저는 이 시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분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을 권면합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부터, 모든 성도들이 온전하고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지 않고 살며, 꾸러 가지 않고 꾸어 주며 살고, 경제적인 불황 가운데서도 구제하며, 선교하면서 사는 복을 다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새 해 첫 주일에 신명기 28장을 읽고 경고 받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송정중앙교회 성도들이 모두 말씀에 순종하여 더 큰 축복을 받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모든 복이 네게 임하리라
신 28:1-10 / 김동호 목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참 살기가 만만치 않은 세상입니다. 우선 힘듭니다. 힘이 들어서도 힘이 들지만, 정말 힘든 것은 힘을 쓰고 정성을 쏟아도 일이 뜻대로 잘 안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힘이 좀 들어도 일만 뜻대로 좀 된다면 좋겠는데 힘을 썼는데도 일이 안 될 때 정말 힘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아픔이 많습니다. 마음 아픈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죄와 실수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과 아픔은 그래도 이해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아프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나의 죄와 실수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이 당하는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너무 많습니다. 많은 아픔과 슬픔 그리고 고통이 있지만, 제가 볼 때 가장 큰 아픔 중에 하나는 사랑하는 자식이 불치나 난치의 병이 걸려 혹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고생하는 것을 보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아픔이 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불안함이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일이 언제 누구에게 일어날는지 누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고들이 장애물처럼 세상에 널려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전혀 예측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장애물이 있는 방을 눈을 가리고 통과하는 것과 같은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고장 난 세상입니다. 우리가 고칠 수 없는 세상입니다. 고장이 났다는 것은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떨 때는 세상이 쉽게 잘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보일 때가 있습니다. 통제가 되고 작동이 제법 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지나 놓고 보면 아닙니다. 작동이 되기는 된 것 같은데 지나 놓고 보면 잘못 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과 평안이 없습니다.
1982년 처음 자동차를 운전했습니다. 영락교회에서 부목사에게 자동차를 한대씩 지급해 주었습니다. 저는 막내였기 때문에 새 차를 받지 못하고 그 동안 교회에서 쓰고 있던 낡은 차를 받았습니다. 차량번호가 7540이었던 1200cc 포니 원 자동차였습니다. 차가 낡아 비가 새는 것은 물론 이었고, 시도 때도 없이 시동이 꺼지는 그런 자동차였습니다. 시동이 꺼지지 않아도 승차감은 물론이고 운전할 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운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영락교회에는 포니 박사라는 별명을 가진 집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당회장의 차를 운전하시는 기사셨는데 그 분이 차를 만져주면 차가 딴 차가 되곤 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집사님이 제 차를 손 봐 주셨는데, 액셀을 밟고 운전하는 기분이 마치 새털같이 가벼웠습니다. 벤츠와 같은 고급차를 운전해 본 경험이 없었지만 그때 제가 벤츠 하나 안 부럽다며 좋아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합니다. 제게 인생과 세상은 가는 것 만큼이나 잘 서던 그리고 비까지 새던 고물 7540 포니 자동차와 같습니다. 한번은 종로 2가 사거리 한 복판에 시동이 꺼져 서버렸는데 사방에서 빵빵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땀 뻘뻘 흘리며 차를 옮겼습니다. 그 때 속상함과 창피함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게 하나님은 포니박사와 같으신 분입니다. 그 분이 제 인생과 세상을 손봐주시면 고물 자동차가 정말 벤츠 같아집니다. 드라이브를 하는 느낌이 마치 새털을 밟는 것과 같아집니다. 하나님이 포니박사와 다른 점은 포니박사가 손 봐 준 자동차는 며칠 안가서 또 고장이 나고 속을 썩였는데 우리 하나님이 손 봐 주신 제 인생과 세상이라는 자동차는 고장이 나지 않고 ‘항상 새털 같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락교회에서 7540을 운전하고 다닐 때 저는 늘 당회장님이 부러웠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가 부러웠지만 그 중에 하나는 당회장님 옆에는 언제나 포니박사가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당회장님의 차는 제 차와 같지 않아서 고장도 잘 나지 않는 좋은 새 차 였기 때문에 포니박사가 사실 별로 필요 없으셨습니다. 저와 같이 고장이 잘 나는 고물 차를 가진 목사님들이 꽤 여러 명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포니박사는 좀처럼 제 차례가 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저는 언제 설지 모르고 골골거리는 자동차를 끌고 불안하게 운전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포니박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늘 우리 곁에 계셔서 시도 때도 없이 고장이 나는 우리의 인생과 세상을 고쳐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고쳐 주실 뿐만 아니라 고장이 나지 않는 좋은 인생과 세상을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의 인생과 세상은 고장이 나지 않습니다. 고장이 나지 않을 뿐 아니라 고장이 나도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과 세상은 마치 새 털 같아 질 겁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와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의 인생과 세상에 복을 주시면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오늘 하나님은 본문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치는 대적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이 다 복을 받게 될 터인데 우리에게 속한 자녀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고 우리에게 속한 땅과 재산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친히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세상과 인생은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명기 28장 15절 이하에서 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나가도 저주를 받고 들어와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몸의 소생과 토지와 토지의 소산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로 더 받을 것도 없습니다. 이미 세상은 그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실제로 그와 같은 저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힘이 든 것이고, 그래서 세상에는 슬픔과 아픔과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세상에서 아무런 힘과 능력과 지혜가 없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축복과 도우심이 없이 산다는 것 자체가 저주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땅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3장 17절 이하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를 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 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 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 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세상과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고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저주를 받은 세상에서 그 저주의 사슬을 끊고 축복의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모든 복이 네게 임하리라’는 제목을 잡았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와 같은 축복을 약속할 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단 하나의 조건과 전제가 있는 것을 오늘 본문 속에서 보게 됩니다. 그것은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이라는 말씀입니다. 1절 상반 절에 나오는 이 한 말씀에 그 다음에 말씀하시는 ‘모든 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듯,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명령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공부를 잘하여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 중에 보면 자기가 공부를 잘해서 당연히 장학금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여 장학금을 주는 교회나 사람에게 별로 감사할 줄 모르는 학생들이 더러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더러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공부를 잘 한다’라고 하여도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겠다는 귀한 뜻을 가지고 장학금을 수여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는 절대로 장학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장학생이 장학금을 받게 되는 이유는 자기가 공부를 잘 해서라기보다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겠다고 자신의 재산을 내어 놓은 분이 있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하면 우리는 그와 같은 복을 받게 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행위 때문에 구원을 얻고 복을 받는다.’라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착각입니다. 구원과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으시면 그 뿐입니다. 우리의 행위 자체가 복과 구원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구원과 복은 전적으로 우리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축복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룰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는 오늘 본문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오늘 본문에 약속하신 모든 하나님의 축복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불교에 보면 부처님께 3천 번을 절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이 쉬워서 3천 번이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손을 벌리는 절을 3천 번이나 한다는 것은 극기 중의 극기입니다. 또 전에 보니 어느 스님이 삼보일배라는 것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 걸음을 걷고 한번 씩 엎드려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와 같은 것을 별로 좋게 보지 않습니다. 특히 ‘삼보일배’와 같은 것이 저는 싫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고집이고 폭력입니다. 그런 면에서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무기한 금식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며칠 정도 날짜를 정해 놓고 하는 금식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금식을 한다는 것에는 저는 쉽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가 좀 다른 곳으로 흘렀습니다.
우리 기독교에는 3천 배 같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도리어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외형적인 행위나 제사보다 순종을 좋아하십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순종이 제사이고, 순종이 기도입니다.(삼상 15:22)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게을리 하고 제사만 열심히 올리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이사야 1장 11절 이하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네게 무엇이 유익 하뇨. 나는 수양의 번 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 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 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 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와 기도는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보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보다, 철야하며 기도하는 것보다 능력 있는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기도의 상당부분이 없어집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이 대화로서의 기도는 없어지지 않고 더 깊어 질 것이나 무엇을 바라고 구하고 두드리는 면에서의 기도는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식하는 것보다, 철야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3천 번 절을 하는 것 보다 힘들고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초기의 우리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우리 한국교회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가르치는 것을 등한히 하였습니다. 대신에 그냥 열심히 교회 출석하는 것과 봉사하는 것 그리고 새벽에 기도하고 철야하며 기도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들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철저히 순종하는 삶이 빠진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심각하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 한국기독교는 마치 부처 앞에 3천 배 절하는 불교와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형식은 강하지고 풍성해 졌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실력이 너무 약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교회는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한 집 건너 교회가 세워지기는 하였으나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력한 교회가 되고 말았으며 세상에 손가락질을 받고 지탄을 받는 미신적이고 미개한 교회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기독교는 누가 뭐래도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축복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팔이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후 그 팔은 전과 같이 정상적으로 사용하려면 뼈가 부러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격으면서도 재활운동을 하여야만 합니다. 그 아픔이 두려워 운동을 포기하면 뼈가 다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불구로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고장 나고 왜곡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뼈가 꺽이고 부러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힘들고 아프다고 회피하면 우리는 평생 불구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죽을 것 같고 뼈가 부러지는 것과 같은 아픔이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재활훈련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조금씩, 조금씩 그 아픔이 없어지게 됩니다. 나중에는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도 아프지 않고 어렵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인 불구와 장애로 살아가는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삶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삶입니다. 우리 기독교에는 부적이 없습니다. 말씀을 듣지도 않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발버둥질도 없는데 그냥 주일날 슬쩍 교회에 왔다 갔다고 그것이 부적의 효과를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모든 복을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저와 제 자손들이 그리고 후손들이 모두 다 오늘 본문의 복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복의 유일한 전제조건으로 내 거신 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과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 도전하겠습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고, 넘어지면 또 다시 일어나 도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겠습니다. 때려서라도 가르치겠습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축복을 쟁취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이 말씀에 도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입으로 예수 믿지 마시고, 부적으로 예수 믿지 마시고, 순종 없는 역겨운 제사로 하나님 괴롭히는 사람 되시지 마시고, 순종의 제사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복이 여러분들에게 임하시는 그런 삶을 사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그 땅을 복 받게 하는 사람들
신 28:1-6, 예레미야 5:1, 31 / 김홍도 목사
과테말라에 알모롱가 라는 작은 도시가 있는데, 우상숭배와 알코올 중독자들과 마약중독자들과 조직폭력배들만이 득실거리던 죄악의 도시, 소망 없던 도시가, 리스카흐체 마리아노(54세)라는 목사가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전도를 시작했는데, 온갖 핍박과 협박을 받으며 생명의 위협을 수없이 받는 중에, 어떤 때는 권총을 입에다 넣고 쏘았는데도 총알이 비켜나가서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그리하여 무서운 죄악이 사라지고 98%가 예수님을 믿고, 거룩한 도시가 되어 교도소가 필요 없게 되어 결혼식장이 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었고, 농사가 풍년이 들어서 채소농사나 나무 열매가 보통농사보다 몇 배가 크게 되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고 있고, 많은 목사님들이 그곳에 가서 영성훈련을 받고 변화되어 나온다고 합니다. 마리아노 한사람 때문에 알모롱가 도시 전체가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인구는 8,000명이었으나 24,000명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도, 그 땅 자체가 복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복 받을 사람이 되면, 따라서 그 땅이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28장 2~6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땅이나 어떤 장소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사는 사람이 복 받을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과테말라의 알모롱가는 죄악이 관영한 저주의 땅이었으나, 마리아노라는 젊은 목사가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변화되니까 저주의 땅이 축복의 땅이 된 것입니다. 엘리사는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고 적군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선지자였는데, 그가 죽음에 이르자 요아스 왕이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열왕기하 13장 14절에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엘리사는 활 한번 쏴본 일이 없고, 병거를 타본 일이 없었으나, 진정으로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었기에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며 요아스 왕이 슬피 울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나라와 땅이 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고 의롭고 정직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고 구원하신다고 해서, 죄와 불의 자체를 기뻐하시는 분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라고 하시며, 그 많은 예루살렘 사람 중에, 정의와 공의를 찾고 진실을 찾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거짓 맹세하고 거짓말만 하기 때문에 그 성읍을 벌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죄인을 사랑한다고 해서 불의와 거짓과 죄를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시편 89편 14절에 “의(righteousness)와 공평(justice)이 주의 보좌의 기초(foundation of his throne)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좌의 기초가 “의와 공평”이라고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죄인들을 무조건 용서하시지 않고,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죄 없는 피를 쏟아 우리의 죗값을 치르고야 구원하셨겠습니까? 다윗 왕을 그렇게 사랑하셨지만,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부하 장수를 죽게 했을 때 무섭게 징계하신 것을 봅니다. 죄악의 씨를 심으면, 그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 공로로 값없이 구원을 받지만, 거듭난 신자가 범죄하면 구원을 잃지는 않지만, 반드시 고통의 채찍으로 징계 하시는 것입니다(히브리서 12장 5절~). 소돔과 고모라성이 불 심판을 받아 멸망한 것은 의인 열 명이 아니라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인이 많으면 심판에 임하고 의인이 많으면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잠언 14장 34절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2 참된 교회 성도가 많아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한사람이 다수다”(One with God is a majority)라고 했습니다. 형식적인 신자들이나 타락한 교회는 그 나라 그 땅을 복되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성도, 하나님이 함께하는 살아 있는 교회가 많아야 그 나라 그 땅이 안전합니다. 예레미야 7장 23절에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라고 하셨지만, 그들이 완악한 마음으로 불순종하고 등을 돌리고, 얼굴을 하나님께 향하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스스로 낮추고 하나님을 찾으면, 죄를 용서하고 그 땅을 고쳐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22장 30절에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라고 하시며, 하나님이 분노를 쏟아 보응 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와 공의가 무너져 내려서 하나님의 심판이 쏟아져 내리려고 하는데, 그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진노를 멈추어 달라고 애원하며 부르짖고 기도하는 사람도 없어서, 진노를 쏟아 부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나라 그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그 백성을 버립니다. 북한에는 남한보다 더 많은 교회가 있었으나, 무신론과 유물론 사상의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주님의 교회들을 다 파괴해 버렸고, 목사와 성도들을 무참히 살해하였습니다. 수십 년 동안 경제몰락과 흉년으로 말미암아 해마다 수십만 명씩 굶어 죽고 있습니다. 그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그 땅과 그 백성을 버립니다. 구라파(Europe)도 바울(Paul)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여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선교할 때, 선진국이 되고 많은 복을 받았으나, “신은 죽었다”는 등, 자유주의의 신학이 팽배해 지면서 하나님의 복음도 안 믿고 부활도 안 믿게 되면서, 물론 천국도 지옥의 실재도 안 믿으니까 예수님은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강조하면서 점점 더 하나님과 멀어지자 서구문명도 몰락하게 된 것입니다. 시날 평야에 바벨탑을 쌓으면서 하나님을 대항해보려고 한 것처럼 유럽연합국이 생기고, 유럽의 공동화폐, 유로(Euro)화가 생기면서, 하나님 없이 우리끼리 연합해서 잘 살아 보자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 가증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리스, 스페인을 비롯해서 줄줄이 경제몰락에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도 청교도 신앙이 기초가 되어 건전한 신앙의 토대 위에 서서 온 나라가 하나님을 잘 경외할 때는,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최고로 부강한 나라가 되어 세계를 지키는 인터폴 역할도 해왔고, 달러(dollar)는 세계의 화폐가 되어 왔으나, 혼합종교의 나라가 되어가면서 토네이도를 비롯한 각종 재난이 끊이지 않고 경제도 몰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그 나라와 그 땅을 버리는 것입니다.
일본은 손재주가 좋아서 돈을 많이 벌어서 경제 대국이 되었다고 자만하고 있지만, 그 나라는 800만 가지 귀신을 섬기는 귀신의 나라이며, 천황폐하, 사람을 신으로 섬기고 기독교 인구는 지극히 적고, 전도하면 “인권침해”라고 불법으로 다스립니다. 지옥 갈 영혼을 구원하는 길을 막아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차 대전 때 원자탄세례를 받았고, 쓰나미와 원전사고로 큰 재앙을 만나고 있습니다.
3 그 땅을 복 받게 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려면
①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믿고 바로 전해야 합니다.
죄의 심판을 받고 지옥 갈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 가게 하려면, 창조주가 동정녀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예수님의 보혈을 바로 전하고 바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는 사망”, “피는 생명”이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참으로 구원받은 백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도 없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내용 7가지, 성령잉태, 대속의 죽음, 부활, 재림, 천년왕국, 심판, 천국지옥을 믿어야 참된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홉 가지 재앙을 내려도 출애굽하지 못했지만, 마지막으로, 양과 염소의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에 바른 후에야, 장자가 죽는 재앙에서 구원받고,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유월절에 예수님도 속죄의 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넘어가리라”하신 말씀처럼, 십자가의 보혈이 심령에 발리워 있는 성도가 많을수록 이 나라 이 땅은 하나님이 지켜주시리라고 믿습니다.
② 주일 성수와 십일조 생활하는 성도가 많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다”(하기오쉬네(헬), 코데쉬(히))는 말은 “구별하다”(set apart)라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1절 “…나 여호와가 안식일(주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날을 구별되게 지키는 성도가 많을 때, 하나님은 그 나라, 그 백성을 구별하여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또 레위기 27장 30절에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聖物)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일(聖日)과 성물(聖物)을 잘 구별해 바칠 때, 하나님은 그 나라 그 백성을 구별해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청교도신앙이 기초가 되어 세워진 미국이 이 말씀대로 살아서 세계 최대의 부강한 나라가 되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성일과 성물을 구별해 바치지 않을 때,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나라 성도들도 가난할 때는 주일 성수 잘하다가 잘살게 되니까 주일날 오락을 찾아다니고, 어려울 때는 십일조를 잘 구별해 바치더니, 수입이 많으니까 많다고 못 바치고, 성물을 떼어먹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잘 구별해 바치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도 우리나라를 공산화되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전쟁 후 가난에 찌들었던 한국이 수출이 1조 억 불을 달성하고,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그 축복은 교회가 많이 세워지고, 주일 성수와 십일조 드리는 성도가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 신앙을 철저히 지켜나갈 때, 이 나라를 공산화되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계속해서 말세에 선교하는 민족이 될 줄 믿습니다.
③ 기도하는 성도가 많아야 안전합니다
무기 아래 있는 나라는 망해도 무릎 위에 있는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월남은 엄청난 무기를 미국이 공급해 주었으나, 교회가 별로 없고, 기도하는 성도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공산화되고 말았습니다.
바사(Persian) 나라에 있는 교만한사람 하만 때문에, 전국 유대인들이 하루아침에 몰살당하게 되었을 때에, 에스더와 온 유대민족이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로 금식하며, 부르짖고, 기도한 다음에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께 들어가 하소연해서, 결국 모르드개를 목매달아 죽이려던 50규빗 장대에 하만이 달려 죽었고, 온 유대인이 죽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이 나라가 공산화되면, 이 나라의 온 교회들은 파괴되고 군경가족보다 먼저 성도들과 목사들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역대하 20장에 보면 유대나라 여호사밧 왕 때에 모압과 암몬과 마온 사람들이 연합하여, 유대나라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려고 큰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그때에 여호사밧 왕은 보고를 듣고, 도저히 그 많은 연합군을 칠 능력이 없어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20:6)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20:7~9) 하나님께 나아가 울부짖으며 기도하기를, 20장 12절에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며 기도하고, 20장 13절에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데모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20장 15절에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하시고, 17절에는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하리라” 하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시키시는 대로 하여 그 연합군이 대패하였고, 그들이 서로 쳐 죽였습니다. 자중지란이 일어나,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시체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북한도 하나님이 손보시면, 자기들끼리 권력 다툼하다가 다 무너질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 김정은과 그의 고모부 장성택 간에 권력다툼이 보이지 않게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손보시면 하루아침에 붕괴되어 2,000만 동포의 영혼도 구원하고, 육신의 생명도 구원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열왕기하 19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 때에 강대국 앗수르 나라가 큰 군대를 이끌고 와서, 군대장관 랍사게가 온갖 악한 말로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항복하라고 위협했습니다. 심지어 대변을 먹게 하고 소변을 마시게 하겠다고(왕하 18:27)까지 욕을 했습니다. 그때 선지자 이사야가 와서 말하기를, 열왕기하 19장 6~7절에“…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 군대의 장군 랍사게의 편지를 들고, 성전에 들어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열왕기하 19장 15~19절에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라고 기도드렸더니, 그날 밤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다 죽여 송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는 힘이 이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왕 산헤립은 그의 신당에 들어가 경배할 때 그의 신하들의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하신 것처럼 기도의 능력도 무한합니다.
한국은 좌파정권이 들어서서 이 나라가 공산화의 위기에 처해 있으나, 6만 교회 1,200만 성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금란교회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지켜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복을 넘어 하나님을
신 28:1-14, 엡 1:3-6, 마 5:3-12 / 인명진 목사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복을 좋아합니다. 복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복 복자마저 좋아합니다. 그래서 숟가락에도 복 복자를 새겨놓어 복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연상했습니다. 요에도 복 복자를 깔아놓았고 복 위에 잠을 자고, 심지어 베개잎에도 복자를 새겨 복을 고이곻 자도록 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정월 대보름이 되면 복조리를 가정마다 돌리고, 입춘이 되면 대문 입구에 입춘대길이라 한자를 크게 써 붙여 놓고 복이 자기 집 문으로 들어오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만큼 복 받기를 원했고, 지금도 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만 복을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만 중국 사람들은 우리보다 복을 더 좋아했습니다. 중국 선교 차 갔다가 식당에 들렀는데, 난생 처음 본 광경이었습니다. 복 복자를 입체적으로 새겨서 천장에서 식탁 위로 거꾸로 달아놓았습니다. 복이 어디서 오는 줄도 모르고 무조건 자기 앞에 쏟아지라는 의미이지요. 여러분,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복을 받고 싶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묻는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겠습니까? 아마 한 사람도 아니오 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너무 복을 찾으면 천박한 사람처럼 보일까봐 염려하여 “지금 이 정도로도 충분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욕심이 없는 사람임을 드러내고자 하지만, 복을 받고 싶어 하는 내심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로 복을 빌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복은 하늘과 관련된 것으로 알았습니다. 요즘도 복은 근원을 말하는 종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자신들이 믿는 절대자의 이름을 빌어 복을 구했습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도 복을 빌 때에는 종교의 형식을 빌려옵니다. 그래서 천지신명 일월성신을 숭배하면서 복을 구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복에 대한 태도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교회마저 잘못된 복을 부도수표 발행하듯 남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 옛날 루터와 칼빈이 종교개혁을 앞둔 전야에 면죄부를 발행했던 것과 같이 교회가 복을 함부로 팔고 있지 않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 대학입시수능이 40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절에도 수능입시를 위한 특별기도회를 하고, 무당들도 입시생을 위해 기도해 주고 무적까지 준다고 합니다.또한 교회에서도 수능입시를 위한 특별기도회를 합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간절합니다. 복을 구하는 마음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복을 구하는 방법과 복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복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에 대한 태도가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달라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더욱이 시대정신이 가르치는 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 앞에 계약 공동체로 살아가려는 갈릴리 성도들에게는 반드시 넘어야 할 영적인 숙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을 구하는 방법을 그대로 따라 갈 것인가? 아니면 복 받기를 거부하고 내 힘으로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이 사이에서 우리는 갈등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복을 구하자니 말씀에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천박해 보이기도 합니다. 복을 외면하자니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하기도 성경에 말씀하는 복을 구하라는 것과 충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복에 대한 제 3의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복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한 마디로 말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복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겠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복을 구하는 것도 죄가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복을 거부하는 것도 죄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복을 이야기할 때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말씀입니다. 무려 열 번 이상 복이란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복이란 무엇일까요? “복”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베라카”는 “바라크”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는데, 그 뜻은 “무릎을 꿇다”입니다. 복이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서 얻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성경 말씀하는 복에 대한 기본 정의는 하늘에서 어느 날 갑자기 요행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때에 얻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어서 얻는 것이기에 교만한 사람은 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교만한 사람은 무릎을 꿇느니보다 자신이 노력하여 복을 쟁취하려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여 쟁취하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복은 얻는 것이라기보다는 누리는 것입니다. 얻는 것은 자신이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애를 써서 억지로 해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셔서 순리대로 즐기는 것입니다. 또한 복은 비인격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기에 인격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이외의 존재에게 복을 구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존재란 우리 자신일수도 있고, 다른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또 사람이 만든 조각상일수도 있고, 해와 달과 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복의 근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시편 시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복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때에 누리는 것이라는 전제 아래 복을 받는 방법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1절은 그 대전제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선 첫째는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는 것”입니다. “삼가 듣고”는 “경청하다”라는 뜻을 가진 “샤마”가 반복된 것으로서, 직역하면 “듣고 또 듣다”가 됩니다. 결국 이것은 “귀 기울여 정성껏 경청하다”는 표현이 됩니다. 또 둘째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은 그 앞에 나오는 “삼가 듣고”와 연결되어 “삼가 듣는 목적”은 “지켜 행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이 부분의 핵심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잘 듣고 순종하여 지켜 행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2절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청종”이란 듣고 순종하여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들어도 깊은 의미를 듣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본래 듣기보다 말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서 1장 19절은 이런 태도를 경계하여 말씀하기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라고 합니다. 듣는 것은 속히 하고, 말하는 것은 더디 해야 합니다.
또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 한권뿐인 성경을 평생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며, 듣고 또 듣습니다. 같은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수도 없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때론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다 아는 듯해도 반복해서 읽고 들으면 지금까지 몰랐던 깊은 뜻을 알게 됩니다. 말씀이란 들었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서 체험될 때에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 말씀이 성육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다고 생각한 부분들도 자꾸 반복함으로써 진리에 대해 더 분명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해 겸손을 훈련합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으십시오. 설교를 듣고 또 들으십시오. 그리고 반복적으로 삶에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잘 들었으면 이제 지켜 행할 차례입니다. 앞에서 복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무릎을 꿇다”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했습니다만, 무릎을 꿇고 듣는 것은 종이 주인 앞에서 가지는 태도입니다. 종은 주인에 대하여 무한 순종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순종해야 합니다.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22-25절을 보면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는 어떤 복이 언급되어 있습니까? 4절과 5절에는 “자녀의 복”과 “생업의 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11-12절은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이들에게 뒤지지 않는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13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적들과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말씀했습니다.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고 했지요?
그리고 이런 복들이 어디서나 주어진다고 말씀합니다. 3절은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라고 말씀함으로써 장소와 관계없이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6절은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함으로써 들어가는 상황에서도, 나가는 상황에서도 복을 얻을 것을 말씀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지켜 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다양한 복을 받아 누리길 기원합니다. 자, 그런데 여기 매우 중요하고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그것은 오늘 읽은 말씀을 어떤 입장에서 접근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1절과 2절의 말씀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체결된 계약서처럼 이해합니다. 그래서 “만약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네게 이렇게 해 주겠다”는 조건부 계약서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조건을 잘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복을 얻는 것을 “물건을 가지고 싶으냐? 그러면 돈을 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이 정말 그런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복을 파는 가게 주인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복을 얻기 위해 복채를 내듯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별로 원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를 지키면 하나님의 복 하나를 얻는다고 생각하여 억지로 합니다. 기쁨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쩌다 인생의 일이 꼬이면 하나님께 복채를 많이 내지 않아서 생긴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가 나면, 지난 주일에 예배를 빼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부터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가 드리는 예배는 복채에 불과합니다. 그 예배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때도 기쁨이 없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이게 바로 많은 교인들이 앓고 있는 “율법주의적 신앙”입니다. 기쁘지도 않으면서 계속 복을 얻기 위해 억지로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기복주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계산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을 지키게 됩니다. 복을 넘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가 웃는다면 얼마든지 힘든 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차원이 다른 신앙생활입니다. 설령이 하나님 때문에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을 얻기 위해 예배하고, 복을 얻기 위해 봉사하고, 복을 얻기 위해 헌금을 드리고, 복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차원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인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하고, 섬기고, 드려야 합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놀라운 변화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복 받기 위해 예수 믿었는데, 나중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 붙들고 삽니다. 전에는 복이 목적이었는데, 하나님이 목적이 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에는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때는 하나님은 복을 공급해주는 공급원일 뿐입니다. 얻고 싶은 복을 얻고 나면 미련 없이 돌아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 복 때문에 그분을 믿는 게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 좋아서 그 분을 믿습니다. 이게 진짜 신앙입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들으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여인에게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님이 있는데, 그가 멀리 올 수 없는 곳에 있다고 해 보십시오. 그녀에게는 편지만 종종 도착한다고 해 보십시오. 그녀에게 편지는 얼마나 소중할까요? 여인은 그 편지를 마치 남편이나 되는 것처럼 볼에 부비고, 가슴에 품을 것입니다. 편지의 내용 모두를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겠지요. 그녀에게는 편지는 결코 종이에 쓰인 글 정도가 아닙니다. 편지는 그녀가 사랑하는 님의 화신인 것입니다. 편지가 곧 님인 것처럼 여겨져 소중히 보관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귀로 듣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나를 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사귀는 비결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귀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접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것이며,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저차원적 단계에서 벗어나 복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그 분을 사랑하게 되는 고차원적 단계로 나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하여 복 때문에 하나님께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 오라고 합니다. 그 분을 사랑하여 그 분께 왔더니, 복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다음으로 복에 대한 절정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쳐 주신 팔복입니다. 팔복에서 말하는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의 영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하나님이 내 마음을 운행하시면 최고의 복입니다. 이런 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부스러기 복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우리 마음에 복이 부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저 옛날 다윗이 고백했듯이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서에서 말씀하는 신령한 복을 누리는 상태, 샬롬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충만한 상태를 최고의 복, 신령한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복이란 결코 목적이 아닙니다. 목적은 하나님이십니다. 복은 그 부산물일 뿐입니다. 이렇게 될 때 복을 적게 주셔도 감사하고, 늦게 주셔도 감사하고, 거두어 가셔도 감사하게 됩니다. 이쯤 되면 “복도 못 받으면서 하나님을 왜 믿느냐”고 비아냥대는 사탄의 말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의연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사랑하는 전천후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이 이 땅에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정한 복을 주시기를 원할 때 우리 갈릴리 성도들이 하나님 눈에 가장 먼저 띄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복을 넘어 하나님을 더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복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는데 그 누구보다 많은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길 기원합니다. 복을 뛰어넘어 하나님께로 달려 나가길 기원합니다.
우리나라가 복 받는 나라가 되는 길..
신 28:1-6, 행 10:34-35 / 아성희 목사
사람은 누구나 복(福) 받기를 좋아합니다. 중국에서는 음력 새해인 춘절이 되면 ‘복’자를 거꾸로 문 앞에 붙여 놓습니다. 그래야 복을 많이 받는다는 습속 때문입니다. 한자에 보면 ‘복’자 세 개를 합친 자도 있습니다. 이것도 복을 많이 받겠다는 마음에서 생겨난 글자입니다. 사람은 복을 추구하고 복을 원합니다.
‘복’의 사전적 의미는 아주 좋은 운수 혹은 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중국 ‘상서’에 보면 수(壽), 부(富), 귀(貴), 강령(康寧) 그리고 다남자(多男子)가 복이라고 합니다. 중국 고대 ‘통속편’에 보면 장수(壽), 부(富), 강령(康寧), 심성의 후덕함(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 복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속설에는 아내를 잘 얻는 것도 복이라고 하고, 치아가 튼튼한 것도 복이라고 합니다. 특히 치아는 오복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복에 대한 낱말도 많습니다. 복이 있다, 복을 받는다, 복이 찾아온다, 복이 달아난다 등의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한자어로 복은 복지(福祉), 복덕(福德), 복락(福樂) 등 그 외에도 ‘복’자는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과 저주의 하나님이십니다. 왜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동시에 주시는 분이시십니까? 하나님은 복만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저주만 주시는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인간에게 얼마든지 선택의 자유를 주셨지만 선택에 대한 책임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헬라어의 복이란 ‘마카리오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즐거움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신성한 즐거움을 복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이란 좀 더 신성하고 거룩한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복은 세상이 흔히 말하는 세속적인 복과는 다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복이란 말은 사람의 힘으로 얻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은혜를 뜻합니다.
복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축복과 은혜와 구원과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다행증’(euphoria)이란 것이 있습니다. 근거가 없는 병적인 행복감을 말합니다.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행복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감은 복의 근원에서 오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없으면 인간의 행복, 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행복과 성경이 말하는 복은 다릅니다. 행복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의 느낌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조건이 좋아도 느끼지 못하면 불행입니다. 그런 복이란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안 느끼고 할 문제가 아닙니다.
역대상 17:27에는 “이제 주께서 종의 왕조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두시기를 기뻐하시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복을 주셨사오니 이 복을 영원히 누리리이다 하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왕조란 이스라엘 국가를 의미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민족과 국가에 복을 주셔서 주님 앞에 영원히 있게 하시기를 원합니다”라는 말입니다.
명심보감에는 “복이 있다고 다 누리지 말라. 복이 다하면 몸이 빈궁에 처하게 된다. 권세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다 부리지 말라. 권세가 다하면 원수를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복을 마음껏 누리라고 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복을 넘치도록 주신다고 합니다. 부어 주신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6:38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십니다. 넘치도록 주시니까 우리가 복을 마음껏 부릴 수가 있습니다. 명심보감과 성경의 다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누리지 말라는 것과 누리라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계약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축복과 저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상급과 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28장에는 복과 저주를 설명합니다. 이 귀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나라가 주 안에서 복을 받는 비결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고 우리나라가 복을 받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명령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신명기 28:1에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복을 나열하십니다. 그리고 복을 나열하기 이전에 복을 받을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조건에 비하여 과분한 축복을 하나님은 예비하시고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보세요. 복을 받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담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는 먹지 말고 다른 모든 것은 먹으라고 하셨는데 아담은 다른 모든 과일보다 선악과가 더 맛있어 보였습니다. “선악과를 먹었다고 죽기야 하겠어?”하는 마음으로 선악과를 먹고 죽었습니다. 축복 대신 저주를 받았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외쳤지만 사람들은 노아를 “미쳤다”고 하며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롯의 사위는 롯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예고했을 때에 “농담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이 모두가 말씀에 대한 진지한 마음이 없어 축복 대신 저주를 받은 예입니다.
말씀에 대한 진지함과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 이것이 저주를 받은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안 받으면 이것이 곧 저주입니다. 세상의 일은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적은 대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적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가를 받습니다. 넘치는 복을 받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라는 말씀은 우리가 복을 받는 비결을 가르칩니다.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합니다. 듣는 것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의미합니다. 신명기 6장은 흔히 ‘쉐마’장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변화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변화에 너무 황홀하여 산꼭대기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초막을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말 잘 듣는 사람을 하나님도 축복하십니다.
잠언 8:34에는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문 앞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미리 와서 문 앞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이미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왜 복인지 아십니까? 듣는 것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합니다. 듣는 것이 구원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나니”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이 복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1:27에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라고 합니다.
산상보훈에 있는 팔복을 보세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왜 복이 있습니까? 사실은 겸손하고 낮은 자세를 가진 사람이 말씀을 잘 듣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을 잘 들어 손해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말을 잘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얘기를 잘 들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성공 법칙입니다.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은 말을 잘 하는 사람보다 잘 듣는 사람을 사랑한다”. 세상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복음’이란 말을 보세요. 문자 그대로 복된 말씀이며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복을 주는 말씀입니다. 복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복된 소식이며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시편 1:2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말씀을 사모합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그 자체가 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닿고 꿀보다 더 단것이 복입니다. 시편 119편에는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단 것이 복입니다.
들을 수 있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은혜입니다. 듣지 못하면 알지 못합니다. 듣지 못하면 말하지 못합니다. 듣지 못하면 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굳건하게 서서 하나님 말씀대로 준행하여 복 받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말씀을 청종하면 모든 복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2절에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여 네게 이르리니”라고 합니다. 모든 복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모든 복이 몇 개나 되는지 아십니까? 스펄전은 성경에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이 32,500개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살면 복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나 복이 있고 무엇을 하든 복이 따라다닙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습니다. 들에서도 복을 받습니다. 들어와도 복을 받습니다.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 우리 옛 속담에 “안에서 새는 박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밖에서도 복입니다. 어디나 가는 곳에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복을 따라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복이 나를 따라다니게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1:3에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라고 합니다. 말씀을 청종하는 자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세상의 복이 영원한 복입니까? 신령한 복입니까?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은 ‘전복위화’(轉福爲禍)일 때가 많습니다. 복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것이 화가 될 때가 많습니다. 괜히 높은 자리에 올랐다가 명예롭지 못하게 추락하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일이 ‘새옹지마’(塞翁之馬)입니다.
‘복권’을 보세요. ‘복(福)자를 씁니다. 그런데 이 복권이 어떤 이에게는 저주권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2002년 성탄절에 미국 역사상 최대의 복권이 당첨되었습니다. 무려 당첨액이 3억1400만 달러였습니다. 세금을 제한 1억 1,300만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약 1,300억원을 수령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웨스트버지니아에 사는 잭 휘태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2년 만에 그는 완전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2년 만에 인생이 파탄이 난 것입니다. 이게 복권입니까? 저주권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말씀을 청종하는 자는 하늘의 복을 받습니다. 세상의 복과는 다른 복입니다. 빼앗을 수 없는 복입니다. 변하지 않는 복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을 보세요. 시편 1:3에는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합니다. 모든 일이 항상 형통합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내용적으로, 모든 일이 다 잘 됩니다. 이게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얍복강가에서 야곱은 형님을 만나러 가기 전에 천사와 씨름하였습니다. 천사는 얼마나 급했던지 야곱의 허벅지를 잡고 골반뼈를 탈골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강점을 약점으로 바꾸셨습니다. 허벅지 근육은 몸에서 가장 강한 부분입니다. 그날 이후 야곱은 절룩거리며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고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한다면 기꺼이 평생 절룩거리며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지만 불순종 하여 다시스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청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복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영적 자살 행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벗어나려고 하였습니다. 피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막으려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굴러온 복을 차 버리는 격입니다. 복을 받는 사람은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절룩거리고, 때로는 막히고, 때로는 고립되는 아픔을 겪어야 합니다. 이래야 모든 복이 찾아옵니다.
우리 옛말에 보면 “지장이 덕장을 못 이기고, 덕장이 복장을 못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마태복음 6:33에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더 하시는 것은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복을 받는 비결은 말씀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사람마다, 나라마다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복이 현재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복을 받은 사람은 모든 일이 형통하고 잘 됩니다.
결론
‘복부인’이란 말이 있습니다. 복 있는 부인이 아니라 복덕방에 기웃거리는 부인입니다. ‘복덕방’이란 것이 있습니다. 복과 덕을 주는 곳이 아니라 부동산을 소개하는 곳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복’은 땅입니다. 성경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팔복 중의 하나가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우리가 복부인입니다. 우리교회가 복덕방입니다. 복을 전하는 집입니다. 우리나라가 땅을 차지하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 가운데 온유한 자가 되어 땅을 기업으로 받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역대상 4:10에는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라는 야베스의 기도가 있습니다. 복의 첫째가 지역을 넓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지역이 넓어져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첫째 복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다른 나라 땅을 힘으로 점령하는 시대가 아니라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세계 방방곡곡으로 진출하는 것이 땅을 차지하는 방법입니다.
낚시터에 가서 고기가 입질하다가 잡히면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그 보다 더 좋은 것은 옆 사람이 대어를 낚아 끌어올리다가 놓쳤을 때랍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잡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에 복이 있습니다. 남이 말씀을 놓치면 더 좋습니까?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입니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이제는 함께, 모든 교회, 모든 나라가 복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일치와 공동창조의 시대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으뜸가는 나라, 복 받는 나라, 모든 나라들이 말씀으로 복을 받게 하는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