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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소왈명(見小曰明)
작은 것까지 볼 수 있는 힘을 밝음이라 한다는 뜻으로, 사소한 것을 보고도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 낼 수 있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일컫는 말이다.
見 : 볼 견(見0/)
小 : 작을 소(小/0)
曰 : 가로 왈(曰/0)
明 : 밝을 명(日/4)
출전 : 노자(老子) 52章
노자(老子)가 쓴 도덕경(道德經) 52장에 유래하는 말이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음’이라 하고 부드러운 것을 지키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見小曰明, 守柔曰强).”
이말은 주변의 미묘한 낌새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세심하게 관찰하며, 다가올 일을 미리 알고 대비하는 자세를 말한다. 이처럼 작은 기미를 보고 장차 드러날 일을 안다는 뜻으로 견미지저(見微知著), 이상지빙(履霜知氷)등의 성어가 있다.
행복은 주어짐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다. 안분자족(安分自足). 자기의 분수에 맞게 만족하며 사는 데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과도한 물욕을 끊고 담박(淡泊)해 스스로 만족하는 생활이다. 자꾸 욕심만 부리면 일이 많아져 몸이 번거로워지고 마음만 고달프게 된다. 행복 실종이다.
욕심 많은 양주에게 맹자가 물었다. “사람 사는 데 불편하지 않으면 되었지 무엇 때문에 명예를 원하십니까?”
“명예를 얻으면 부유해지지요.”
“이제 그만하면 부자이지 않습니까?”
“귀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맹자는 양주의 욕심이 어디까지 진행될지 궁금해 계속 질문했다. “이미 귀한 몸이 되지 않았습니까?”
“죽음 때문이지요.”
“죽은 뒤에는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자손을 염려해서입니다.”
양주의 욕심에 끝이 없자 맹자는 묻기를 포기하고 만다. ‘양주’로 상징되는 인물은 권력, 재물, 명예를 찾는 보편적 인간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그렇다. 욕심은 끝이 없다. 이웃과 비교해서 자신이 작게 가진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만사 불만의 원인이다.
우리는 행복을 주변 사람과의 비교에서 찾다가 일상 속 작은 행복을 놓치게 된다. 등산할 때 정상만 바라보고 걸으면 주변의 꽃과 숲,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노자는 “작은 것의 의미를 볼 줄 알면 밝아진다(見小曰明)”며 “질박하고 욕심 없는 맑은 삶은 자아를 중심으로 삼을 때 가능하다(朴外虛中宗自我)”고 했다. 스스로 만족하는 소박함에서 찾는 행복이다.
훗날 장자(莊子) 또한 인생에 대해 “천하로 하여금 소박함을 잃지 않게 하고 바람을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라(使天下無失其朴 放風而動)”고 가르친 바 있다.
일상의 사소함이 주는 행복을 다산 정약용은 청복(淸福)이라고 표현했다. 세속적 성공을 뜻하는 열복(熱福)에 못지않다.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이고, 가까이에 있다.
⏹ 견소왈명(見小曰明)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음이라한다는 뜻으로, 사소한 변화를 감지하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성어는 노자(老子) 52장의 후반부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음이라 하고 부드러운 것을 지키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 그 빛을 써서 그 밝음으로 돌아가면 몸의 재앙을 남기지 않는다. 이것을 일러 항상 익힘이라 한다.
見小曰明, 守柔曰強.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為襲常.
작은 것을 보는(見小) 것은 어떻게 소모를 줄일 것인지를 말하며, 밝음이라 한다(曰明)는 것은 잘 보양해서 서서히 큰 빛으로 변함을 말한다.
견소왈명(見小曰明), 이 말의 의미를 한비는 법가적으로 이렇게 재해석했다.
옛날 주왕(紂王)이 상아 젓가락을 만들자 기자(箕子;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의 숙부. 太師 벼슬을 지냈으며 箕땅을 하사받아 기자라고 불렸다)가 염려해 이렇게 말했다.
상아 젓가락은 흙으로 만든 그릇에는 사용할 수 없을 것이고 무소뿔이나 옥으로 만든 그릇에만 사용될 것이다. 상아 젓가락에 옥으로 만든 그릇을 쓰게 되면 채소보다는 소나 코끼리나 표범 고기를 먹게 될 것이다.
소나 코끼리나 표범 고기를 먹게 되면 베로 만든 짧은 옷을 입거나 초가집 밑에서는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비단 옷을 입고 구중궁궐이나 넓은 집, 높은 누대가 있는 집에서 살려고 할 것이다. 나는 그 최후가 두렵기 때문에 상아 젓가락을 처음부터 걱정한 것이다.
(한비자 유로편)
주왕은 기자를 감옥에 가두었다.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기자를 가둔 지 5년이 지났을 무렵에는 포락(포烙)이란 형벌을 만들었다.
포락은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는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에 달군 뒤 그 위를 맨발로 걸어가게 하고 미끄러지게 되면 불에 타죽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술과 여인에 빠졌던 주왕의 향락은 극에 달해 그가 남긴 술지게미가 언덕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기자의 통찰력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일의 조짐은 사소한 데서 시작된다. 따라서 주변의 미묘한 상황을 읽어내기 위한 세심한 관찰력이 필요하다.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는 결국 큰 위기가 닥칠 가능성을 미리 아는가 모르는가에 달려 있다.
⏹ 노자 - 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노자(老子) 52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통행본(通行本) 52장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천하에는 시작이 있으니, 그것을 천하의 어미로 삼는다.
旣得其母, 以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
이미 어미를 얻고 그를 통해 자식을 알며, 다시 그 어미를 지킨다면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塞其閱, 閉其門, 終身不勤.
啓其閱, 濟其事, 終身不救.
그 입을 막고 그 귀를 닫으면, 죽을 때까지 수고스럽지 않다. 그 입을 열고 그 일을 이루게 한다면, 죽을 때까지 구제할 수 없다.
見小曰明, 守柔曰强.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눈이 밝다고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用其光, 復歸其明, 毋遺身殃, 是謂襲常.
빛을 사용하되 그 밝음으로 되돌아가,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감추고 또 감춘다고 한다.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천하에는 시작이 있으니, 그것을 천하의 어미로 삼는다.
이 문장에서는 '시작'이나 '어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관건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엇비슷한 주해가 여럿 있다.
가령 하상공 범응원은 '시작'이나 '어미'는 모두 도를 가리키고, 다음 글의 '자식'이란 '하나(一)'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것은 "도는 하나를 낳는다(42장)"는 말을 염두에 두고 우주 발생론으로 이 문장을 이해한 것이다.
또 육희성은 '시작'은 무명(無名)을, '어미'는 유명(有名)을, '자식'은 '하나'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것은 통행본 1장과 42장을 이 문장에 연결시킨 것이다.
소철은 '시작'은 무명(도), '어미'는 유명, '자식'은 만물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것도 통행본 1장을 이 문장에 연결시킨 것이다. 이 두 사람 역시 발생론으로 이 문장을 이해하고 있다.
여씨춘추에는 "천지에는 시작이 있다. 하늘은 가벼운 것으로 이루어지고 땅은 무거운 것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천지가 서로 화합하는 것이 태어남의 큰 법칙(大經)이다(유시람 유시)"라는 말이 있는데, 노자의 이 문장과 비교될 수 있으며 역시 발생론이다. 노자에 이미 도의 형이상학이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을 이렇게 이해해도 큰 문제는 없다.
그러면 이 문장은 "홀로 서서 변하지 않으니 천지의 어미가 될 만하다(25)"는 도에 대한 묘사와 비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장이 반드시 도나 '무명', '하나(一)'와 연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왕필은 '어미'는 근본을 가리키며 '자식'은 말단을 가리킨다고 했는데, 이렇게 광범위하게 이해해도 좋다.
또 현종어주본에서는 '시작'이 충화(沖和)의 묘기(妙氣)를 가리킨다고 했는데, 일부 연구에 따르면 이 정의야말로 현종어주본의 특색을 잘 드러낸다고 한다.
곧 현종은 이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노자 해석을 둘러싼 그리고 정치적 이해 관계에 얽힌 신하들의 갈등 관계를 조화롭게 해결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동사정은 기(氣)를 '어미'로, 신(神)을 '자식'으로 본다.
이처럼 이 문장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근원적인 것과 함께함으로써 안식을 얻고자 하는 소망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다양한 해석의 공통점일 것이다.
塞其閱, 閉其門, 終身不勤.
啓其閱, 濟其事, 終身不救.
그 입을 막고 그 귀를 닫으면 죽을 때까지 수고스럽지 않다. 그 입을 열고 그 일을 이루게 한다면 죽을 때까지 구제할 수 없다.
정리조에 따르면 본문의 '태(閱)'는 원래 발음이 '열'이지만 이렇게 읽어야 한다. 통행본에는 모두 '태(兌)'인데, 단옥재에 따르면 '태(閱)'는 옛날에 '혈(穴)'의 통가자(通假字)로 쓰였으며, '태(兌)'는 '태(閱)'의 생략된 글자다. 을본에는 '태(土+兌)', 초간문에는 '태(辶+兌)'로 되어 있는데 모두 통하는 글자다.
이 글자의 의미에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구멍으로 보는 견해이고, 또 하나는 입(口)으로 보는 견해, 다른 하나는 기쁨(說)으로 보는 견해다.
구멍으로 보는 견해는 단옥재의 설명과 일치하고, 입과 기쁨으로 보는 견해는 각각 주역 태괘 단전과 설괘전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뜻은 서로 통한다. 입은 구멍이고, 그 구멍은 음식을 달게 먹음으로써 기쁨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해동은 이 중에서도 입이 가장 기본적인 뜻이라고 하였다. 입이라는 의미가 확대되어 구멍이 있는 것을 모두 '태'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문'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명이 있지만 '태'를 입으로 볼 경우 가장 적절한 것은 그것을 귀로 보는 견해일 것이다(소철).
왕필은 '태'는 사욕(事欲)이 나오는 곳이고, '문'은 사욕이 통과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 입을 막고 그 귀를 닫아라"는 것은 절욕 또는 과욕의 권유가 된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장자의 혼돈 설화나 천운의 "구멍을 막고 정신을 지킨다"는 구절과 비교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순한 수양론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기술을 다루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노자 자체와 회남자에 있다.
일단 회남자 도응훈이 노자의 이 문장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자.
제나라의 왕후가 죽었다. 왕은 다음 왕후를 두고 싶었으나 아직 결정을 하지 못하여 뭇 신하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설공(薛公)이 왕의 뜻에 들어맞고자 하여 열 개의 옥조각을 헌상하면서 그 중의 하나만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 옥조각이 있는 곳을 물어서 왕에게 권유하여 왕후로 삼게 하였다. 제왕이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설공을 존중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주의 의욕(意欲)이 밖으로 드러나게 되면 신하에게 제압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가 말하기를, "그 입을 막고 그 귀를 닫으면 죽을 때까지 수고스럽지 않다."고 하였다.
이 고사는 한비자 외저설우상 등에도 나온다. 그를 참고하여 약간 보충하자면 원래 제 위왕(威王)에게는 총애하는 열 명의 첩이 있었고, 신하들은 그 중에 누구를 정비로 삼을지 알 수 없었다.
설공은 열 개의 옥조각을 만들면서 그 중의 하나만을 특별히 아름답게 만들어 제왕에게 바쳤고, 제왕은 당연히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첩에게 그것을 주었다.
결국 설공이 귀하게 된 것은 왕의 속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남자는 이것을 인주의 의욕이 밖으로 드러나서 신하에게 제압당하는 사례로 들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 입을 막고 그 귀를 닫는다."는 것은 군주가 자신의 속뜻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바로 무위의 통치술과 통하는 기술이다.
회남자에는 지금 노자의 문장을 정치적 기술로 이해하게 하는 대목이 또 있다. 거기에서 무왕(武王)은 반란에 성공하여 천하를 가지게 된 이후 측근인 태공(太公)에게 어떻게 하면 반란을 예방하고 권력을 안정시킬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에 대한 태공의 대답은 이랬다. "왕께서 만약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싶으시다면 백성의 입을 막고(塞民於兌), 그들을 이끌어 쓸데없는 일과 번거로운 가르침에 몰두하도록 하십시오. 저들이 그 소업을 즐거워하고 그 실정을 편안히 여겨 밝게 분변하던 것이 어리숙하게 되거든…" (도응훈).
이것은 일종의 우민 정책이다. 비록 태공은 궁극적으로 백성들이 예의를 알고 부유하도록 해야 한다고 권유하여 이 정책이 방편적인 것임을 밝히지만 일단 천하의 안정을 위해 우민화의 노선을 채택하라고 한 것은 사실이다.
무왕의 정권 찬탈로 민감해진 여론을 잠재우고, 경쟁자가 권력에 대한 야망을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노선이 유효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충고는 진의 엄격한 통치와 초·한 전쟁을 겪은 중국이 한초에 황노학을 받아들였다가 무제 집권을 계기로 유교적 예제를 수립하는 실제의 역사적 과정을 그대로 닮았다.
그러므로 지금 노자 문장의 '기(其)'가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면 이 문장은 우민화의 정치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노자에는 여기 외에도 "그 입을 막고 그 귀를 닫는다."는 말이 한 번 더 나온다. 그곳에서 이 말은 유명한 "그 빛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함께한다."는 말과 함께 '현묘한 어울림(玄同)'의 구체적 내용으로 소개되는데, 노자의 설명에 따르면 현묘한 어울림이란 가까이할 수도 없고 또 멀리할 수도 없으며, 이롭게 할 수도 없고 해롭게 할 수도 없고, 귀하게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56).
말하자면 철저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그렇다고 영광에 노출되지도 않는 그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현묘한 어울림이다.
이런 정치술은 제 위왕과 설공의 고사에서 나타난 그런 정치술이며, 무위의 정치술이다. 따라서 지금 노자의 문장은 개인적 수양론 이상의 전략이다.
통치술(처세술)을 노자의 핵심으로 파악한다면 더욱 그렇게 보아야 한다. 물론 노자에서 정치적 전술은 언제나 수양론이기도 하다. 국가 대신 몸을 설정해 놓으면 그렇게 된다.
본문의 '계(啓)'는 한 경제(景帝)의 이름이다. 모든 통행본에서 '개(開)'를 쓰고 있는 것은 경제의 이름을 휘해서 교정한 판본이 전해 내려왔기 때문이다.
見小曰明, 守柔曰强.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눈이 밝다고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하상공은 뒤의 '왈(曰)'을 '일(日)'로 보아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눈이 밝다고 하니 부드러움을 지키면 나날이 강해진다"고 하였다.
두 개의 '왈'을 모두 '일'로 보아 "작은 것을 보면 나날이 밝아지고, 부드러움을 지키면 나날이 강해진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성현영·오징). 하지만 백서는 '왈'로 되어 있다.
유로에는 이 둘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옛날에 은의 주왕(紂王)이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보고 기자(箕子)는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상아로 만든 젓가락은 질그릇과 어울리지 않으므로 서옥(犀玉)으로 만든 그릇이 필요할 테고, 그런 그릇에는 표태(豹胎) 같은 진미를 담아야 할 테고, 진미는 비단옷이나 고대광실과 어울릴 테고, 결국에는 옳게 마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자는 일의 기미를 보고 그 결과를 미리 짐작하여 두려워 하였다. 유로에 따르면 이런 것이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눈이 밝다고 한다"는 말의 의미다.
또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에게 패한 뒤 오나라의 신하로 구구히 연명하며 의장용 무기나 들고 말이나 닦으면서 오왕의 시종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고소성에서 부차를 죽이고 오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문왕도 은왕(殷王)의 궁문에서 꾸지람을 들었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의 아들 무왕은 목야에서 은왕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남의 신하가 되고 꾸지람을 참을 수 있는 힘이 결국에는 승리를 가져다준 것이다. 유로는 이런 것이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는 말의 의미라고 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눈이 밝다고 한다."는 말을 공자의 일화에 빗대는 회남자 도응훈의 해설이다.
도응훈에 따르면 노나라에는 노나라 사람으로 다른 제후에게 신(臣: 남복), 첩(妾: 여복)이 된 사람이 있을 경우 제삼자가 그들을 속천해 주어 노나라로 돌아가게 해주면 노나라 정부에서 속천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갚아주는 법이 있었다고 한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그런 일을 하여 노나라에서 그 비용을 갚아주려고 하였는데, 자공은 사양하고 돈을 받지 않았다.
그것을 들은 공자는 "이제부터 노나라 사람은 다시는 제후에게서 남을 속천해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공을 책망했다.
자공의 행위는 자신만 깨끗이 하려는 것이지 풍속을 교화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자를 성인이 되게 한 이른바 '이풍역속(移風易俗)'의 의지다.
그러므로 "공자도 또한 예를 알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노자가 말하기를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눈이 밝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 일화는 도응훈 외에 여씨춘추 선식람 찰미라든가 공자가어 치사, 설원 정리 등에도 나오며, 또 같은 회남자의 제속훈에도 나온다.
이렇게 광범위하게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잘 알려져 있던 고사다. 이 중에 도응훈과 설원은 고사를 다 소개한 뒤에 노자의 지금 문장을 마감말로 인용한다.
도응훈이 설원보다 앞선 작품이므로 이 고사에 처음으로 노자를 결합시킨 것은 도응훈이다.
반면 여씨춘추와 제속훈에는 노자 대신 총평이 붙어 있다. "공자는 세밀한 데에서 그것을 본 것이며, 멀리까지 변화를 내다보았다." (찰미)
"공자의 밝음(明)은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알았으며, 가까운 것으로 먼 것을 알았으니 변론(論)에 통한 사람이다." (제속훈)
총평의 내용은 지금 노자의 문장과 별 차이가 없다. 도응훈이 공자의 고사에 노자의 말을 갖다붙일 근거가 없지는 않다.
도응훈은 글 전편이 이런 식이다. 앞으로도 나는 도응훈을 자주 인용할 것이므로 천천히 확인해보기 바란다.
그것의 목적은 '역사적' 고사를 통해 노자를 입증하려는 데 있다. 인용하고 있는 고사는 주로 여씨춘추에서 가져왔고, 때로는 장자나 한비자 등도 이용한다. 도응훈에서만 볼 수 있는 고사는 거의 없다.
그러니까 도응훈은 일종의 노자 해설서다. 단지 지금처럼 글자 뜻을 풀이하거나 사상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노자의 경구가 그에 상응하는 실제의 사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해설이다.
유로도 마찬가지다. 유로도 기본적으로 도응훈처럼 노자의 역사 사례집이다. 이것이 가장 이른 노자 해설서의 면모다.
나는 이 점이 중요한 시사를 던진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한초에는 노자를 이렇게 이해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실제 삶의 교훈으로, 경세의 방법론으로 노자를 이해하는 것이 한초의 방식이었다.
과거에는 이런 식의 노자 이해가 정통이 아니라는 편견이 있었다. 가령 유로(해로도 포함해서)는 법가 사상가인 한비의 저작이기 때문에 노자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하지만 도응훈도 유로와 마찬가지다. 도응훈은 단적으로 노자를 선전하기 위해서 쓴 글이고, 한초 도가의 글이다. 도응훈과 유로 등을 묶어서 생각하면 그것이 한초의 일반적인 노자 이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노자가 논어와 다른 책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노자는 노자의 논어이다. 도의 형이상학과 신비주의, 명상술, 정기 양생론 같은 시각에서 노자를 읽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내가 노자를 통치술(처세술)의 관점에서 일관되게 해석하려는 것도 그것이 노자의 본래 면목이기 때문이다.
用其光, 復歸其明, 毋遺身殃.
빛을 사용하되 그 밝음으로 되돌아가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않을 것이니
"빛을 사용한다"는 말은 언뜻 "빛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함께한다(4·56)"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 밝음으로 되돌아간다"는 것, 곧 밖으로 찬란히 빛나는 빛을 거두어 들이고 그 빛의 근원인 밝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빛을 누그러 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긴 노자가 정말 빛의 사용 자체를 혐오했는가는 의심해볼 수 있다. 만약 노자를 형명(形名)의 통치술과 연결시켜 독해하려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훌륭한 통치자는 그 덕과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백성의 자정 능력을 최대화시켜 선한 사회를 구축하는 사람이고, 자기가 나서기보다는 배후에서 늘 신하의 유위(有爲)를 감상하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신하가 그 직분(명)에 합당하지 않은 행동(형)을 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다.
패악한 신하를 내치는 것은 빛을 사용하는 것이지만 그 일이 임금의 사사로운 뜻이 아니라 순리(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면 누구도 그런 일을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하지 않는다.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가히 그 밝음으로 되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노자는 빛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빛은 있지만 번쩍이지 않을(58)" 뿐이다.
是謂襲常.
이것을 감추고 또 감춘다고 한다.
습상(襲常)은 종래 대부분 "항상된 이치(불변하는 도, 자연)를 익힌다"든지 "항상된 이치를 따른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이것은 노자에서 '상(常)'이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라는 선입견이 작용된 해석이다.
이런 선입견은 통행본 노자가 '상'이라는 글자를 대단히 애용한다는 사실 그리고 통행본에 나오는 상도(常道: 1장)나 상명(常名: 1장), 상덕(常德: 28장), 상심(常心: 49장)과 같은 개념, 또 "명(命)으로 돌아가는 것을 항상됨(常)이라고 한다(16)", "조화를 아는 것을 항상됨(常)이라고 한다(55)"는 말로 인해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이미 언급한 대로 원래 노자의 '상(常)'은 대부분 '항(恒)'이며, 그렇게 고치고 나면 노자에는 '상'이라는 글자가 별로 없다.
가령 왕필본의 경우 모두 30회에 걸쳐서 '상'이라는 글자가 나오는데, 그 중 백서에서도 '상'을 쓰는 경우는 통행본 16장과 55장에 나오는 6자뿐이다. 이런 확인을 통해서 선입견을 버린다면 이 구절도 달리 해석할 수 있다.
송 섭몽득(葉夢得)본에는 여기에서 '상(常)'이 '상(裳)'으로 되어 있다. 이 두 글자는 서로 통한다.
설문에 따르면 '상(常)'은 아랫도리를 가리는 남자의 치마이며, 수건(巾)으로 가리든 옷(衣)으로 가리든 매한가지이기 때문에 '상(裳)'과 같다(주겸지). 곧 두 글자에는 모두 가린다는 뜻이 있다.
'습(襲)'에도 역시 가린다는 뜻이 있다. 옥편에 따르면 '습'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도포를 입는 것, 곧 웃옷을 하나 더 걸치는 것을 의미하며, 그만큼 몸을 가리는 것이다.
이쯤에서 노자가 빛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환기해 보자. 빛은 있되 그 빛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누그러뜨리고(4·58) 그 빛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52)이 노자의 태도다.
이외에도 노자에는 "총명함을 가린다(襲明: 27장)"는 말도 있다. 모두 빛이 드러나지 않도록 그 빛을 안으로 수렴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빛은 언제나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초굉은 여기의 '습상'이 '습명'과 같은 말이며, "꼭 간직하여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탁월한 해석이라고 하겠다.
천지에는 시작이 있다
하늘은 가벼운 것으로 이루어지고
땅은 무거운 것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천지가 서로 화합하는 것이 태어남의 큰 법칙이다
(여씨춘추 유시람 유시)
▶️ 見(볼 견, 뵈올 현)은 ❶회의문자로 见(견)은 간자(簡字)이다. 안석궤(几; 책상)部는 사람을, 目(목)은 눈을 뜻한다. 見(견)은 눈의 기능으로, 보는 일을 말하는데, 이쪽으로 부터 보는 것을 視(시), 저쪽으로 부터 나타나 보이는 것을 見(견)으로 나누어 썼다. ❷회의문자로 見자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見자는 目(눈 목)자와 儿(어진사람 인)자가 결합한 것이다. 見자의 갑골문을 보면 人(사람 인)자에 큰 눈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물을 보는 눈을 강조해 그린 것으로 ‘보다’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다만 한자에서는 目자가 주로 ‘눈’과 관련된 뜻으로 쓰이고 있다면 見자는 ‘보다’와 같이 보는 행위에 주로 쓰이고 있으니 차이점을 알아두는 것도 좋다. 또 예전에는 見자가 現(나타날 현)자 대신 쓰인 적이 있기에 ‘나타나다’나 ‘보이다’와 같은 의미도 있다. 이때는 ‘현’으로 발음한다. 다만 見자의 기본 의미는 ‘보다’이기 때문에 부수로 쓰일 때는 ‘보는 것’이나 ‘보이는 것’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그래서 見(견, 현)은 ①보다 ②보이다 ③당하다 ④견해 그리고 ⓐ뵙다(현) ⓑ나타나다(현) ⓒ드러나다(현) ⓓ보이다(현) ⓔ소개하다(현) ⓕ만나다(현) ⓖ현재(현) ⓗ지금(현) 등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타날 현(現), 볼 시(視), 뵐 근(覲), 볼 관(觀), 뵐 알(謁), 나타날 현(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숨을 은(隱)이다. 용례로는 보고서 깨달아 앎을 견해(見解), 듣거나 보거나 하여 깨달아 얻은 지식을 견문(見聞), 남에게 거절을 당함을 견각(見却), 실지로 보고 학식을 넓힘을 견학(見學), 남의 일을 보고 배워서 실지로 연습하는 것을 견습(見習), 사물을 관찰하는 입장을 견지(見地), 남에게 미움을 받음을 견오(見忤), 얼른 스쳐 봄을 별견(瞥見), 분실이나 유실을 당함을 견실(見失), 책망을 당함을 견책(見責), 마음에 생각하는 점을 의견(意見), 미처 찾아내지 못하였거나 알려지지 아니한 것을 찾아냄을 발견(發見),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편견(偏見), 서로 다른 의견을 이견(異見), 남의 일에 간섭함을 참견(參見), 사물을 식별하고 관찰하는 능력을 식견(識見), 무슨 일이 있기 전에 미리 짐작함을 예견(豫見), 보고 헤아리는 생각이나 올바로 인식하거나 올바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소견(所見), 신분이 높은 사람이 공식적으로 손님을 만남을 접견(接見), 지체 높은 사람을 찾아 뵙는 일을 알현(謁見), 임금께 나아가 뵈옴을 진현(進見),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뜻에서 지나친 욕심을 절제함 또는 대의를 위해서 부귀영화를 돌보지 않는다는 의미의 견금여석(見金如石), 눈앞에 이익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에 합당한 지를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 모기를 보고 칼을 뺀다는 뜻으로 보잘것없는 작은 일에 지나치게 큰 대책을 세운다는 견문발검(見蚊拔劍),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 항상 잊지 않음을 이르는 견요어장(見堯於墻),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견물생심(見物生心), 나라의 위급함을 보고 몸을 바친다는 견위치명(見危致命) 등에 쓰인다.
▶️ 小(작을 소)는 ❶회의문자로 한 가운데의 갈고리 궐(亅; 갈고리)部와 나눔을 나타내는 八(팔)을 합(合)하여 물건을 작게 나누다의 뜻을 가진다. 小(소)는 작다와 적다의 두 가지 뜻을 나타냈으나, 나중에 小(소; 작다)와 少(소; 적다)를 구별하여 쓴다. ❷상형문자로 小자는 '작다'나 '어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小자는 작은 파편이 튀는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작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고대에는 小자나 少(적을 소)자의 구분이 없었다. 少자도 작은 파편이 튀는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小자는 '작다'로 少자는 '적다'로 뜻이 분리되었다. 그래서 小자가 부수로 쓰일 때도 작은 것과 관련된 뜻을 전달하지만 때로는 모양자 역할만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小(소)는 크기에 따라 대(大), 중(中), 소(小)로 나눌 경우의 제일(第一) 작은 것의 뜻으로 ①작다 ②적다 ③협소하다, 좁다 ④적다고 여기다, 가볍게 여기다 ⑤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주의하다 ⑥어리다, 젊다 ⑦시간상으로 짧다 ⑧지위가 낮다 ⑨소인(小人) ⑩첩(妾) ⑪작은 달, 음력(陰曆)에서 그 달이 날수가 30일이 못 되는 달 ⑫겸양(謙讓)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어 ⑬조금, 적게 ⑭작은, 조그마한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작을 미(微), 가늘 세(細), 가늘 섬(纖),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클 대(大), 클 거(巨)이다. 용례로는 적게 오는 눈을 소설(小雪), 일의 범위가 매우 작음을 소규모(小規模), 작은 수나 얼마 되지 않는 수를 소수(小數), 나이 어린 사람을 소인(小人), 어린 아이를 소아(小兒), 같은 종류의 사물 중에서 작은 규격이나 규모를 소형(小型), 자그마하게 포장한 물건을 소포(小包), 줄여서 작아짐 또는 작게 함을 축소(縮小), 가장 작음을 최소(最小), 공간이 어떤 일을 하기에 좁고 작음을 협소(狹小), 키나 체구가 보통의 경우보다 작음을 왜소(矮小), 아주 매우 작음을 극소(極小), 약하고 작음을 약소(弱小), 너무 작음을 과소(過小), 매우 가볍고 작음을 경소(輕小), 보잘것없이 작음을 비소(卑小), 마음을 조심스럽게 가지어 언행을 삼감을 일컫는 말을 소심근신(小心謹愼), 작은 것을 탐하다가 오히려 큰 것을 잃음을 일컫는 말을 소탐대실(小貪大失), 혈기에서 오는 소인의 용기를 일컫는 말을 소인지용(小人之勇),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이라는 뜻으로 노자가 그린 이상 사회 이상 국가를 이르는 말을 소국과민(小國寡民), 큰 차이 없이 거의 같음을 일컫는 말을 소이대동(小異大同), 어진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면 소인들은 겉모양만이라도 고쳐 불의한 것을 함부로 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소인혁면(小人革面), 마음을 조심스럽게 가지어 언행을 삼감을 일컫는 말을 소심근신(小心謹愼), 세심하고 조심성이 많다는 뜻으로 마음이 작고 약하여 작은 일에도 겁을 내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소심익익(小心翼翼), 조그마한 틈으로 물이 새어들어 배가 가라앉는다는 뜻으로 작은 일을 게을리하면 큰 재앙이 닥치게 됨을 비유하는 말을 소극침주(小隙沈舟), 얼마 안 되는 작은 물 속에 사는 물고기라는 뜻으로 죽음이 눈앞에 닥쳤음을 이르는 말을 소수지어(小水之魚) 등에 쓰인다.
▶️ 曰(가로 왈)은 ❶추상적인 뜻을 점이나 선으로 표시하는 지사문자이나 상형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口(구; 입)와 입에서 나오는 말을 나타내는 기호(記號) 一로 이루어졌다. 입을 벌리고 말함을 나타낸다. 상형문자로 보면 입과 날숨을 본떠 목소리를 내어 말하다를 뜻한다. ❷지사문자로 曰자는 ‘가로되’나 ‘말하기를’, ‘일컫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曰자는 口(입 구)자 위에 획을 하나 그은 것으로 ‘말하다’라는 뜻을 위해 만든 지사문자(指事文字)이다. 曰자는 ‘말하다’와 관련된 다른 어떤 글자들보다도 가장 먼저 등장한 글자로 단독으로 쓰일 때는 ‘말하다’나 ‘말씀하시다’와 같은 뜻을 전달하고 있다. 曰자는 ‘~曰(~께서 말씀하시다)’와 같이 고전이나 고문서에서의 한문투로 사용되는 편이다. 그러니 曰자는 비교적 고어(古語)의 어감을 가진 글자라 할 수 있다. 曰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단순히 ‘말’과 관련되거나 아무 의미 없이 모양자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曰(왈)은 한문투의 말에서 말하기를(가로되 또는 가라사대)의 뜻으로 ①가로되, 말하기를 ②이에 ③일컫다, 부르다 ④이르다, 말하다 ⑤~라 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화류계 가운데에서 말과 행동이 좀 거친 창기를 이르는 말을 왈자(曰者), 말과 행동이 단정하지 못하고 수선스러운 사람의 별명을 왈패(曰牌), 어떤 이가 말하는 바 또는 혹은 이르기를의 말을 혹왈(或曰), 내게 말하기를의 말을 여왈(予曰), 또 말하기를 또는 다시 이르되의 말을 우왈(又曰), 모든 사람이 말하되의 말을 개왈(皆曰), 소위 또는 이른바의 말을 소왈(所曰), 한 편으로 일러 말하기를의 말을 일왈(一曰), 좋으니 나쁘니 하고 떠들어 댄다는 말을 왈가왈부(曰可曰否), 어떠한 일에 대하여 옳으니 그르니 하고 말함을 또는 시비를 가리는 말을 왈시왈비(曰是曰非), 서로 형이니 아우니 하며 친하게 지낸다는 말을 왈형왈제(曰兄曰弟), 임금을 대하는 데는 엄숙함과 공경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왈엄여경(曰嚴與敬), 말로는 백만을 일컬으나 실상은 얼마 안 된다는 말을 호왈백만(號曰百萬), 어찌 꼭 이익만을 말하는가는 뜻으로 오직 인의에 입각해서 일을 하면 이익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이익이 돌아온다는 말을 하필왈이(何必曰利), 주견이 없이 남의 말을 좇아 이리저리 함을 이르는 말을 녹비왈자(鹿皮曰字), 누구도 불가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다는 말을 수왈불가(誰曰不可) 등에 쓰인다.
▶️ 明(밝을 명)은 ❶회의문자로 날 일(日; 해)部와 月(월; 달)의 합해져서 밝다는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明자는 ‘밝다’나 ‘나타나다’, ‘명료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明자는 日(날 일)자와 月(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낮을 밝히는 태양(日)과 밤을 밝히는 달(月)을 함께 그린 것이니 글자생성의 의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밝은 빛이 있는 곳에서는 사물의 실체가 잘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明자는 ‘밝다’라는 뜻 외에도 ‘명료하게 드러나다’나 ‘하얗다’, ‘똑똑하다’와 같은 뜻까지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明(명)은 (1)번뇌(煩惱)의 어둠을 없앤다는 뜻에서 지혜 (2)진언(眞言)의 딴 이름 (3)사물의 이치를 판별하는 지력(智力)으로 이치가 분명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 것 (4)성(姓)의 하나 (5)중국 원(元)나라에 뒤이어 세워진 왕조(王朝)로 태조(太祖)는 주원장(朱元璋) 등의 뜻으로 ①밝다 ②밝히다 ③날새다 ④나타나다, 명료하게 드러나다 ⑤똑똑하다 ⑥깨끗하다, 결백하다 ⑦희다, 하얗다 ⑧질서가 서다 ⑨갖추어지다 ⑩높이다, 숭상하다, 존중하다 ⑪맹세하다 ⑫밝게, 환하게, 확실하게 ⑬이승, 현세(現世) ⑭나라의 이름 ⑮왕조(王朝)의 이름 ⑯낮, 주간(晝間) ⑰빛, 광채(光彩) ⑱밝은 곳, 양지(陽地) ⑲밝고 환한 모양 ⑳성(盛)한 모양 ㉑밝음 ㉒새벽 ㉓해, 달, 별 ㉔신령(神靈) ㉕시력(視力) ㉖밖, 겉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밝을 금(昑), 밝을 돈(旽), 밝을 방(昉), 밝을 오(旿), 밝을 소(昭), 밝을 앙(昻), 밝을 성(晟), 밝을 준(晙), 밝을 호(晧), 밝을 석(晳), 밝을 탁(晫), 밝을 장(暲), 밝을 료(瞭), 밝힐 천(闡),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꺼질 멸(滅), 어두울 혼(昏), 어두울 암(暗)이다. 용례로는 명백하고 확실함을 명확(明確), 밝고 맑고 낙천적인 성미 또는 모습을 명랑(明朗), 분명히 드러내 보이거나 가리킴을 명시(明示), 분명하고 자세한 내용을 명세(明細), 밝고 말끔함을 명쾌(明快), 밝음과 어두움을 명암(明暗), 명백하게 되어 있는 문구 또는 조문을 명문(明文), 밝은 달을 명월(明月), 분명하고 똑똑함을 명석(明晳), 세태나 사리에 밝음을 명철(明哲), 똑똑히 밝히어 적음을 명기(明記), 일정한 내용을 상대편이 잘 알 수 있도록 풀어 밝힘 또는 그 말을 설명(說明), 자세히 캐고 따져 사실을 밝힘을 규명(糾明), 사실이나 의사를 분명하게 드러내서 밝힘을 천명(闡明), 날씨가 맑고 밝음을 청명(淸明), 흐리지 않고 속까지 환히 트여 밝음을 투명(透明), 틀림없이 또는 확실하게를 분명(分明), 마음이 어질고 영리하여 사리에 밝음을 현명(賢明), 어떤 잘못에 대하여 구실을 그 까닭을 밝힘을 변명(辨明), 의심나는 곳을 잘 설명하여 분명히 함을 해명(解明), 의심할 것 없이 아주 뚜렷하고 환함을 명백(明白), 어떤 사실이나 문제에서 취하는 입장과 태도 등을 여러 사람에게 밝혀서 말함을 성명(聲明), 불을 보는 것 같이 밝게 보인다는 뜻으로 더 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는 말을 명약관화(明若觀火),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이라는 뜻으로 사념이 전혀 없는 깨끗한 마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명경지수(明鏡止水), 새를 잡는 데 구슬을 쓴다는 뜻으로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을 손해 보게 됨을 이르는 말을 명주탄작(明珠彈雀), 아주 명백함이나 아주 똑똑하게 나타나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말을 명명백백(明明白白), 맑은 눈동자와 흰 이라는 말을 명모호치(明眸皓齒)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