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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18년 7월 1일 주일오전
성경봉독 : 삼하7:1-17; 고후4:1-15
본문 : 시48:1-14
제목 : “안전의 실체이신 여호와”
주일오전찬송
경배찬송 - 시122편 1,2,3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104편 1,5,7,9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63편 2,3
설교 후 찬송 - 시48편 1,3,4
성찬식 찬송 - 시84편 2,3
폐회찬송 - 시108편 1,2,4
안전의 실체이신 여호와
신앙을 실재로 느끼고 살아가는 것, 그것은 한편으로는 어려운 일이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신앙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우리의 상상할 수 있는 영역 바깥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믿는다기보다는, 육체를 입은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땅에 사는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믿곤 합니다. 이런 믿음은 사실 정확히 말하면 신앙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밥이 필요할 때 밥을 주시는 하나님, 곤란을 만났을 때 그 곤란을 해결해주시는 하나님, 필요를 구하면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이런 종류의 하나님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적금통장이나 보험이지, 신이 아닙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가 땅에서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만을 채워주는 종류의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살아가는 삶을 벗어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종류의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땅에서 살아가면서 하늘의 것을 붙잡는 것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배가 고플 때 밥을 먹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배가 고플 때 “아 나는 지금 육신의 배가 고프지만 나에게는 영혼의 배고픔도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은 저기 먼 곳에 있고, 이 땅에 살면서 세속적인 생각이 강한 사람일수록 저 하늘의 것을 바라보는 것은 어려워집니다. 오히려....... 세속적 생각이 강한 사람은 하늘의 것을 바꾸어 땅의 것으로 변모시킵니다. 하나님을 “돈의 신”으로 만들거나, “행복자판기”로 만들기 일쑤인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신앙을 가지고 저기 하늘의 것을 사모하면서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참으로 가진 사람은 이 땅에서 눈앞의 어떤 문제를 바라볼 때, 그 문제 뒤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손을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세력만 바라보지만, 신앙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눈을 들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기쁨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심방을 다니면서, 삶의 고단함을 많이 만납니다. 우리 성도들을 제가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삶이 고단한 성도들을 만날 때 저 역시 많이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고단한 삶을 이기는 진정한 비결은 “고단한 삶을 삭제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 성도들께서 다 잘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단한 삶을 이기는 진정한 비결은, 이 고단한 삶도 능히 이기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시편 48편에서 두 주제를 다루고 싶습니다. 첫째 주제는 세상을 능히 이기시는 하나님을 제시하는 이 시편을 통해서 우리가 땅에 살아가면서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주제는 이 하늘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능히 이기신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만 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삶에도 영향력 있게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을 통해 주께서 주시는 위로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안전의 실체이신 여호와
시온산
시편 48편의 앞부분을 읽으면 시인이 “시온산”을 찬양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2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시인은 시온산이 “터가 높고 아름답다”, 그래서 “온 세계가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산의 아름다움을 칭송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산을 칭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2절에서 시온산이 칭송받고 있는 것은 3절에 나오듯이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절에서도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을” 찬송하라고 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찬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48편 앞부분의 “시온”이라는 장소는 장소 자체를 보여주기보다는 상징적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라는 뜻이지요.
결국 시인은 시온산을 도구로 하여 “하나님이 계신 곳”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시온산이 “높고, 아름다워서” 온 세상이 즐거워할 만하다는 것입니다. 1절의 표현대로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입니다.
어떤 점에서 찬송 받으실만한가?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찬송 받으실만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계신 시온산은 무슨 이유로 높고 아름다우며, 온 세계가 칭송할만하다고 평가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찬송 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3절 말씀에 핵심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 하나님이 칭송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여러 궁중들 중에서”, “자신을 피난처로”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궁중”이라는 말은 보통 영어로는 palace, 즉 궁전을 말합니다. 그리고 3절에서 궁전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대로 “여러 궁전”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여러 궁전들 가운데” 알려지셨습니다.
궁전이라는 것은 통상적으로 왕들이 있는 곳이지요. 그렇다면 궁전들 중에 하나님께서 알려지셨다는 것은 여러 왕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알려지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3절의 “여러 궁전들 가운데”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계신 궁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신 궁전을 말하려면 단수로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복수이고, 궁전은 왕들이 거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 말은 “세상의 여러 왕들에게 하나님께서 알려지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열왕들에게 하나님께서 알려지신 것입니다.
여러 왕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점에서 알려지셨습니까? 어떻게 알려지셨기 때문에 찬송 받으실만한 것입니까?
3절이 쓰고 있는 대로 하나님은 “피난처로” 알려지셨습니다. 이 “피난처”라는 단어는 약간은 독특한 뉘앙스를 갖고 있기 때문에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피난처”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높은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매우 높이 있기 때문에 어떤 위험도 도달할 수가 없어서 안전하다.”라는 뜻이지요. 까치가 굉장히 높은 나무 위에 둥지를 트는데, 이유가 포식자가 접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기 “피난처”가 그런 의미입니다. 아주 높은 곳에 있어서 매우 안전하다는 뜻입니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안식처! 여기 “피난처”는 그런 의미입니다. 도달할 수 없을 정도의 안전! 굉장히 놀라운 안전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손을 뻗어서 해하려고 해도, 아예 해할 수가 없는 곳! 이런 의미로 이 피난처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알려지신 것은 이렇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나라들과 국민들, 왕들과 세력들이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크게 알려지셨습니다. 어떻게 알려지셨습니까? “피난처로”, 매우 높이 있고, 그래서 아름다우며, 따라서 몹시 안전한! 그런 피난처로, 요새로, 범접할 수 없는 곳으로, 그렇게 알려지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피난처가 주변의 사람들에게서는 발견될 수 없는 놀라운 안전이기 때문에, 이것은 칭송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칭송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4절 이하
자, 그러면 하나님이 피난처로 알려지신 것은 어떤 정황이 있을까요? 어떤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열국의 왕들에게 “저기 예루살렘 성, 시온산은, 마치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안식처와 같아! 저기는 범접할 수 없는 요새야!” 이렇게 알려지게 된 것입니까? 그 사건이 4절 이하에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 48편은 세 부분으로 연을 나눌 수 있는데 1절부터 3절까지가 첫째 연이고, 4절부터 8절까지가 둘째 연인데, 둘째 연의 첫 구절이 사실은 첫째 연의 마지막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3절 끝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여러 궁전들, 즉 세상의 여러 왕들에게 피난처로, 요새로 알리셨는데, 둘째 연은 그 사실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을 피난처로 알리셨는지를 한 번 보도록 합시다.
4절에 보면 “열왕이 모여 함께 지났다”라고 합니다. 열왕들이 왜 모였겠습니까? 이것은 예루살렘을 치러 온 열방의 세력들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전쟁 상황입니다. 우리가 46편을 배울 때도 전쟁에 대해 들었는데, 여기 또 다시 전쟁이 나옵니다. 그것도 한 나라가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여러 왕들이 모여서 함께” 쳐들어온 상황입니다. 연합국들로부터 침범을 받은 상황! 이것이 4절이 말하는 정황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5절과 6절을 보면, 이렇게 예루살렘을 치기 위하여 몰려들어온 열왕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 “빨리 갔다” ....... 아닙니다. 빨리 갔다는 게 아니고 “줄행랑을 쳤다”, 도망을 쳤다는 뜻입니다.1) 놀랍게도! 한 나라가 아니라 여러 나라가 연합해서 시온산을 치러 왔는데, 이들이 모두 부리나케 도망을 쳐 버리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한 도시를, 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몰려오는 군사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사기”입니다. 사기가 떨어지면 이길 수 있는 전쟁도 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이 왕들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때 두려워하며 왔을 리가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아마 기세등등하여 왔을 것입니다. 왕들은 군사들에게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저 성을 으깨버리자!” 하면서 호탕하게 소리를 치면서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들이 한 군대도 아니고 왕들이 모여서, 여러 군대가 함께 왔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 앞에 서니까 마치 꼬리를 가랑이 사이에 집어넣고 도망치는 개 마냥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5절은 네 개의 동사가 차례대로 쭉 나와 있는데요. “보다”, “놀라다”, “두려워하다”, “도망치다”입니다. “보다”가 처음에 나오고, 나머지 세 동사들은 접속사가 나온 후에(영어로 치자면 then) 나옵니다. 그러니까, 열왕이 모여 함께 왔다가, 보고는, “놀라고”, “두려움에 빠져”, “도망친”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단어들은 모두 굉장히 크게 과장된 단어입니다. “놀라다”도 살짝 놀라는데 쓰는 단어가 아닙니다. 단어사전에 보면 우리말로는 “대경실색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려워하다”는 것도 약간 무서운 정도가 아닙니다. “아주 커다란 공포”입니다. 의기양양해서 들어온 열왕의 군대는 시온산 앞에서 그야말로 대경실색하여, 커다란 공포에 사로잡혀, 꽁지 빠진 닭처럼 혼비백산하여 도망친 것입니다.
6절을 보면 그들의 공포가 좀 더 설명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떨림이 저희를 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조금 더 리얼하게 제가 번역해 보겠습니다. “거기서 전율이 그들을 움켜쥐어, 고통이 마치 해산하는 여인과 같았다!”
이 문장에서 주어는 “전율”입니다. 두려워서 덜덜 떨리는 그 전율이,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마치 거인의 손아귀에 꽉 잡힌 것처럼 덜덜 떨리는 전율이 그들을 완전히 움켜잡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보십시오. 이들의 이 고통을 6절 말씀은 “산고의 고통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통상 고통 중에 최고로 치는 것이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의 고통입니다. 누가 때린 것도 아닌데, 두려움이! 떨림이! 이 산고와 같이, 해산하는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의 고통처럼 그들을 덮쳐왔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렇다면 이 전쟁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제아무리 그들이 의기양양하게 왔던들 이런 공포에 사로잡혀서 어떻게 전쟁을 치를 수 있었겠습니까? 7절을 보면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렸다”고 합니다. 당시의 “다시스의 배”는 지중해 전역의 무역을 관장하던 페니키아 사람들의 배입니다. 가장 화려하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견고했던 배입니다. 하지만 주께서 동풍으로 이 배들을 깨뜨려버리셨습니다. 열왕들이 예루살렘을 치기 위해 몰려들었으나 공포에 사로잡혀 박살이 나는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리해 보자면 어떻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칭송을 받으셔야 합니까? 3절에서 보았듯이 “여러 궁전”, “여러 왕들에게” 하나님께서 “피난처, 요새”로 드러나셨기 때문입니다. 왕들이 보니까 시온산은 마치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까치 둥지” 같았습니다. 너무나 높이 있어서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안전함! 어떤 면에서 안전합니까? 다시스의 배처럼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군대가 쳐들어올지라도, 예루살렘, 시온산, 근처에 왔을 뿐인데도 하나님께서 그 성중에 계시고, 여호와께서 그 시온산을 지키신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드러나는 순간,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차마 접근할 수조차 없는 강력함! 이보다 더 안전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근처에 가서 흘깃 보았을 뿐인데, 해산의 고통과 같은 강한 전율이 자기를 움켜잡아 짓눌러서, 혼비백산하여 도망칠 수밖에 없는 것, 이보다 더한 안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지키시고 계신 도성 예루살렘과 시온산의 안전함이었습니다.
왜 여호와께서 칭송을 받으셔야 합니까? 여호와만큼 안전한 곳이 아무데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열왕들 중에서 자신이 피난처이심을” 큰 소리로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보고 들은 대로 경험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설교의 서두에서 신앙의 성격에 대해 말했습니다. 신앙이란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육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하늘의 것입니다. 죽을 운명의 인간이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 바깥의 세상을 내 속에 가져오심으로 비로소 알게 되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은 “성육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저기 멀리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육체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저기 높이 계셔, 그렇게 높이 계셔서, 나도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도 나에게 관심이 없으셔”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땅의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동시에 신앙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신비”입니다. “신”이 “육”이 되신 것, 왜 신이 육신이 되셨습니까? 한 교부의 말처럼(아타나시우스) “육”인 우리를 “신”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이것이 없이, 그냥 하나님께서 저기 멀리 계시다고만 말한다면, 그 하나님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여러분! 시편 48편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하나님께서 왜 열왕들에게 칭송을 받으셨는지”를 들었습니다. 열왕들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칠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에 큰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하나님이 “저기 멀리에서 그렇게 참 대단한 분이다”라고 한다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온 우주에서 가장 뛰어난 신이시라 한들, 그분이 나에게 아무런 호감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기 멀리에서 뛰어난 분이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방금 성육신에 대해 들었듯이, 하나님은 저기 멀리에서 혼자 뛰어나신 분이 아니라, “우리들 사이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행적이 저기 어딘가에서 울려퍼지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중에 오셔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8절 말씀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영히 견고케 하시리로다.” 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는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1)
시인은 먼저 “우리가 들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과거입니다. 시인은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굉장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과거에 우리나라에 위대한 장수가 있었대! 칼을 휘두르면 수십만 명이 쓰러지는 대단한 분이었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무엇을 들었습니까? 우리가 앞서 들었던 4절부터 7절까지의 이야기입니다. 8절에서 “우리가 들었다”는 것은 이 앞의 사건들을 받고 있습니다. 열왕들이 몰려왔다, 하지만 시온산에 접근하기도 전에, 하나님을 보고 너무나 크게 놀라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다! 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상들에게, 부모님에게, 친척과 친지들에게, 마을의 장로에게, 옆집 아주머니에게.......이들은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혁혁한 무공, 이스라엘을 돌보신 그 위대한 과거! 그것을 들었습니다.
2)
하지만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시인이, 동시에 “우리가 보았다”라고 함께 말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현재입니다. “들은” 것이 과거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면, 여기 “보았다”는 시인의 체험입니다.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요,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들었던 이야기를 체험했습니다. 과거의 위대한 이야기를 내가 경험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위대한 분이심을 들었지만, 그것을 “나의 경험이 아니라, 저기 멀리 있는 이야기로만” 여길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 역시 이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하신 분이심을, 그래서 가장 높은 꼭대기에 계신 안전한 피난처이심을, 그래서 열왕들이 몰려오더라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분이심을, 과거에 있었던 일로서 들었는데, 이제 자기도 그것을 본 것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신자의 경험”입니다. 우리는 “경험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런 경험, 이상한 혀가 꼬이는 경험을 하고, 병이 낫는 그런 경험 말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고 붙드셔서,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말하려고 해도 절대 부인할 수 없는 그런 강력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지금 내 삶에서도 계속해서 행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계속해서 경험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이 “언약 신앙”이라고 배웠습니다. 언약 신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관계” 아닙니까? 관계라는 것은 하나님과 내가 얼굴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그분이 내게 체험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자로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생생하게 대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들었던”의 신앙! 그러니까 성경공부에서만 발견되는 그런 하나님 말고! 그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도 역사하고 계심을 날마다 경험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언약 신앙입니다.
3)
그리고 이 구절에는 미래도 있습니다. 실제 히브리어 본문을 보아도 앞의 두 동사는 완료형이고, 뒤의 이 동사만 미완료형입니다. 8절 뒷부분에 “하나님이 이를 영영히 견고케 하시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 자주 듣고 배운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장차 발생할 어떤 문제에 대해 확신을 가지려면 그것은 무엇에서 기인해야 하는가?”라는 문제 말입니다.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만날 것인데, 거기에서 “이렇게 될 거야”라고 말하려면, 그것도 “확신 있게 말하려면”, 그건 무슨 조건이 구비되어 있어야 합니까?
네 맞습니다.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되더라, 오늘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되더라, 그러니까 내일 그 일이 일어나도 그렇게 될 거야! 이것 아닙니까? 미래의 확신은 어디에서 기초합니까? 과거와 현재가 튼튼할 때, 미래가 분명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긋맞게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다고 해서 내일도 또 그러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
맞습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제왕들의 몰락을 많이 봅니다. 어제까지 성군이었다고 해서 내일 여전히 성군이리라는 보장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 사람이 어제까지 나와 약속을 지켰다고 해서 내일 그 약속을 다시 지키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크게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에 신실한 후에 신용을 쌓아서, 미래에 크게 한 탕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보장이 된다고 해서 미래도 그러리라.......그런 일은 사실 확실히 이런 분들의 의심처럼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우리가 성경의 용어로 “불신실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신실하다”가 무슨 뜻입니까?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은 약속을 지켰지만, 내일은 지키지 않을 수도 있어, 이것을 뭐라고 한다구요? “불신실하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또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아보면 오히려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현명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천지가 변하더라도 하나님은 변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 그러했듯이, 이 안전이 내일도 확실하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4)
우리는 말합니다. “과거”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말합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듣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서, 후에도 나를 지키실 것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들에게 넘쳐나도록 합시다.
이제, 찬양하라
그리고 이제 시편 48편의 마지막 부분은 마치 경찰이 사건 현장을 면밀하게 살펴보듯이, 그렇게 이 현장에 와서 사건을 살펴보는 것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12절 이하의 내용은 아마도 신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신년 축제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예배자들이 순례의 행진을 합니다. 신년 축제 때 제사장이 앞서고 모든 성도들이 뒤따르면서 예루살렘 성을 한 바퀴 도는 의식을 합니다. 이 때 이들이 하는 행동들이 12절 이하에 나와 있습니다.
- 이들은 “시온성을 돌면서 둘러 봅니다.” 그 무서운 전쟁 중에서도 이 성에 아무런 상처가 없었음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 그리고 이들은 “망대들을 계수해 보라”는 말을 듣습니다. 망대들을 세어 보라는 것입니다. 망루라고도 하지요. 멀리서 적들이 오는지를 살펴보는 높은 탑입니다. 이 망대들의 개수를 세 보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망대가 이렇게 많으니 이 성이 이만큼이나 튼튼하다.”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적들이 쳐들어왔으면 망대가 다 무너졌을터인데 여전히 그대로 있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 13절에는 “성벽”과 “궁전”을 “자세히 살펴보라”고 합니다. 성이 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서 “성벽”이란 보통 “흉벽”이라고도 하는데, 성의 바깥벽을 의미합니다. 적들이 쳐들어오면 침략을 받는 곳입니다. 여기를 가서 자세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이 시편의 마지막은 일종의 “검증”입니다. 검증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확실히 그들을 지켜주셨음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이것은 이 일을 경험하지 못한 자녀들에게 전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설교의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신앙이라는 것은 땅의 것을 보는 대신 하늘의 것을 볼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때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몰아칠 때도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나풀대는 파도들 뒤에, 모든 파도의 끈을 쥐고 계시는 거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혹 어려움이 오더라도 내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설교의 제목대로 하나님을 “안전의 실체”로 깨닫는 우리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아멘!